죄를 치유하시는 그리스도(사 53:1~5)
사람이 장염에 걸리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먹지 못합니다. 병이 심각하면 할수록 그 병이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이 죄라는 병으로 고통을 당한다고 합니다.
육신의 병이 심하면 육신이 죽음에 이르듯이 죄의 병이 심하면 영적으로 죽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신의 병 뿐만 아니라 죄의 병을 치유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5절 하반절에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고 하십니다.
성경을 읽다가 보면 하나님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살게한 에덴동산에는 죄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죄가 없는 에덴동산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거기에 시기, 질투, 미움이 없습니다. 거기에 싸움도 다툼도 전쟁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사랑만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 쫓겨난 인간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시대만 바뀌었지 죄는 여전히 인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믿음의 사람일지라도 죄에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되면 사람에 대한 비판을 멈추게 됩니다. 인간이 불쌍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생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 9:36절에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고 하십니다.
옆 사람 보세요. 불쌍히 보이는 것입니다. 산다고 고생이 많으십니다. 서로 위로합니다.
죄가 무서운 것이 자각 증세가 없습니다. 간은 자각 증세가 없다고 합니다. 간에는 신경이 없어서 거의 다 망가지기 전까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다 망가져야지 그 때에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간의 모습입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자각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징계를 하셔야 그 때에야 비로소 죄를 알게 됩니다.
그런 우리가 죄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죄를 보게 되면 편합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병을 모르고 있다가 알게 되면 또 다시 힘든 것입니다. 병은 진단도 함께 치유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도 진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치유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에 다윗은 자신의 죄를 보고 탄식을 합니다. 시 51:3절에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노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말입니다. 다윗은 죄가 자신을 떠나지 않고 항상 자신 앞에서 자신을 끌고 가는 것을 본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무서운 것은, 죄가 우리의 인생을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다고 하십니다.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죄가 인간을 비참하고 타락하게 만드는 것을 예수님은 그냥 두실 수 없었습니다. 죄가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마저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죄가 가정을 파괴합니다. 죄가 교회를 파괴합니다. 죄가 세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죄의 파괴력은 엄청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인데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죄의 영향력과 파괴력을 우리에게 상기시키십니다. 고린도전서 5:6절에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십니다. 죄를 누룩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무교절에는 빵을 구울 때에 누룩이 없이 빵을 구워서 먹도록 하십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들어서서 빵을 만드는 데, 순식간에 퍼져서 빵을 부드럽고 부풀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데, “죄 때문에 망한다”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죄라는 병에서 나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도 치유하십니다. 병든 믿음을 가지고는 신앙이 자라질 못합니다.
혹 믿음 보다 걱정과 염려가 더 많습니까? 혹 소망보다 절망과 낙심이 더 충만하십니까? 혹 사랑이 식어져서 가슴이 냉냉하십니까? 혹 하나님 앞에 기도가 되질 않으십니까? 아무리 식어진 믿음일지라도 주님께서 치유하십니다.
마가복음 9장 14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귀신들린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와서 고쳐달라고 합니다. 귀신이 아이를 괴롭혀 불과 물에 던진다는 것입니다. 참 나쁜 귀신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착한 귀신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귀신한테 도와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것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이렇게 간구합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불쌍히 여겨 도와 주옵소서”라는 이 간구를 보면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이라는 말은 하실 수 없는 것도 있다는 말입니다. 즉 이 아버지는 예수님께 하실 수 있는 만큼만 고쳐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아버지의 간구를 듣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의 간구를 “할 수 있거든”이라는 의심의 간구라고 하십니다. 의심을 가지고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얼마나 믿어야 할까요? 최소한 그 믿음이 의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아니 예수님을 완전히 믿다가 안 고쳐지면 오히려 상처를 받잖아요. 그러니까 적당한 선에서 믿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합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에는 적당한 선이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아버지의 고백입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말입니다. 이 고백은 한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의 고백인 것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 없는 우리의 병을 치유하시는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