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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욕망의 세계사
“사랑과 욕망은 인생과 역사를 움직이는 톱니바퀴며 축이다.”
참으로 그럴듯하고 공감이 가는 말이다. 책 서문에서 저자 ‘호리에 히로키’가 한 말이다. 그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와세다대학교 프랑스 문학과를 졸업하고 세계의 근·현대사를 망라한 역사의 재미를 현대적 관점에서 경쾌한 필치로 그려내는 대중적 인기작가다.
‘여자의 성욕을 연료 삼아 예술혼을 불태운 발칙한 천재 화가 피카소 이야기,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랑한 스웨덴 출신의 페르센 백작 이야기, 천재 중의 천재 아인슈타인의 뇌가 200조각으로 잘려져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조리돌림 당한 사연’등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세계사가 펼쳐진다고 하는데, 다만 그것을 역사라고 보느냐? 재미로 보느냐는 순전히 읽는 사람의 몫일 것이다.
모두 28가지 사건을 다루었다고 하는데 그것들을 다 읽어보기는 할지 몰라도 여기에 모두 옮기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는데 역사가 흘러가듯이 재미로 읽고 지나갈지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첫 번째(1) 이야기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랑한 스웨덴의 페르센 백작의 이야기이다. 그는 그녀와 동갑네기로 그녀를 사랑한 나머지 프랑스 왕실 마부로 위장취업 해 왕궁에 들어갔고 프랑스 혁명 후에 그녀와 루이 16세 왕을 같이 국외로 탈출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왕과 왕비의 터무니 없는 과도한 욕심으로 탈출이 늦어지면서 왕과 왕비는 프랑스 혁명군에게 붙잡혀 단두대의 이슬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둘의 과도한 욕심이란 급히 왕궁을 빠져나가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왕과 왕비는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했고 또 금은보화 등 많은 물건을 마차에 실어야 한다고 한 것이었는데 18세기 비포장도로의 충격을 막을 장치가 없는 마차에 짐까지 가득 싣자 마차는 제대로 달릴 수 없었고 비만으로 뚱뚱한 왕이 여러 차례 마차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바람에 쉬다가 가는 우여골절 끝에 하루면 닿을 수 있는 국경까지를 사흘이나 걸린 것이 체포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두 번째(2)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두 번째 부인 마리 루이즈에 관한 이야기로 나폴레옹은 첫 번째 부인 조세핀과는 이혼했다.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마리 루이즈는 명문가 합스부르크 가문 프란츠 황제의 딸로 결혼 당시 나폴레옹보다 26살이나 어린 19살이었다. 이듬해 그토록 바라던 아들이 태어났지만, 3년 뒤인 1814년 나폴레옹은 황제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몽텐블로궁에 유폐되었다. 절망에 빠진 나폴레옹은 독약을 마시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그가 마신 독은 유통기간이 지난 것으로 효능이 약해 죽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폴레옹은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엘바섬에서 아내와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던 나폴레옹을 찾아온 사람은 그가 한때 바람피워 만났던 폴란드 연인 마리아였다. 그녀도 아들을 데리고 찾아왔으나 나폴레옹은 이들을 돌려보냈다. 부인 루이즈가 아들과 같이 올 것을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이즈는 엘바섬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미 나이페르크 백작과 눈이 맞아 사랑놀음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즈는 몰랐지만 아버지 프란츠 황제의 비밀지령을 받은 나이페르크 백작은 루이즈가 엘바섬으로 가는 것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1815년 2월 26일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해 황제 자리를 되찾을 음모를 꾸몄지만, 유배 생활로 몸과 마음이 피폐한데다 운명이 걸린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면서 그의 부활 시도는 95일 만에 좌절되고 말았다. 그해 10월 나폴레옹은 대서양의 영국령 세인트 헬레나섬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는 갑자기 늙어버렸는데 위암으로 배가 불룩 튀어나오고 머리는 하얗게 세고, 얼굴은 퉁퉁 부었다. 1825년 5월 5일 나폴레옹은 기다려도 오지 않는 루이즈와 아들을 기다리다 지쳐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프랑스 군대…, 선두…, 조세핀…”그는 자신이 죽으면 심장을 루이즈에게 보내 달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루이즈는 이를 거부했다.
세 번째(3) 이야기는 금지된 사랑 이야기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난세의 이상적 군주로 자신과 동시대 인물 체사르 보르자를 꼽았는데 체사르는 고대 로마의 카이사르를 이탈리아식으로 부른 이름이다. 이름은 아버지이자 교황인 알렉산드르 6세가 지어준 것이었다. 물론 체사르가 태어날 때는 아버지가 교황이 아니라 추기경이었다.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일어나기 전 로마교회가 얼마나 속세적이고 부패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추기경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거기다 모든 실권을 세습시키고 심지어 아버지와 딸, 오빠와 여동생이 근친상간하는 일까지 있었다 한다.
체사르의 아버지 로드리고 보르자는 품행이 좋지 않아 교황에게 여러 차례 질책을 받기도 했으나, 1492년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알렉산드르 6세 교황으로 즉위했다. 뇌물을 주고받으며 적을 제거하기 위해 살인 등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 악인으로 평가받는 인물이 알렉산드르 6세고 타락할 대로 타락한 로마교회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체사르는 장군이 되어 로마냐 지방을 공격해 손에 넣고 막강한 권력과 권위를 인정받아 흩어진 이탈리아를 하나로 통합하려고 했다.
그러나 1503년 알렉산드르 6세와 체사르는 코르네트 추기경의 집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해 정적이었던 코르네트 추시경을 독살하려고 가져간 보르자 집안의 독약 칸타렐라를 실수로 자신들이 마시고 죽었다. 체사르도 독약을 마셨지만 아버지처럼 곧바로 죽지는 않았다. 다만 야성적 용모는 온데 간데 없고 머리까락도 수염도 빠져 흉측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통일 야망은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교황이라는 강력한 조력자를 잃은 데다 몸 상태마저 말이 아니어서 정적에게 체포되어 스페인으로 추방되었다가 라모타 요새로 이감되었다. 극적으로 탈출해 나바라 왕국의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재기를 노렸으나, 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 상처를 입고 전사했다.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의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를 충격과 공포에 떨게 하고 때로 분노하게 했던 그들의 시대는 그렇게 지나갔다.
네 번째(4)는 가정제(嘉靖帝) 이야기로 1368년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를 몰아내고 한족이 세운 나라가 명(明)나라이고 그 11대 황제가 가정제다. 지금의 베이징 자금성은 명나라 시대에 세운 것이다. 이때 여기서 벌어진 일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든다. 명나라 때 이시진이 지은 『본초강목』에 따르면 미약(媚藥-성욕을 일으키는 약)은 오줌, 사람의 젖과 피, 정액, 음모, 사람의 간, 탯줄, 미라, 여성의 생리혈 등으로 만든다고 했는데 그 중에서 젊고 아리따운 처녀의 생리혈을 가장 귀하게 여겼다. 생리혈과 수은을 섞은 것을 주성분으로 해서 만든 홍연환(紅鉛丸)이 최고의 미약이었다는 것이다.
이 괴이한 약을 만든 것은 궁정의 의사가 아니라, 가정제가 심취했던 도교의 도사들이었다. 도사들이 만든 홍연환을 무섭게 먹어 치우면서도 ‘더 먹고 싶다. 빨리 만들어라’고 채근했다고 하는데, 황제의 명으로 중국 전역에서 선발된 열서너 살 미소녀 300∼400명이 강제로 연행되었고 이들로 인해 자금성 안은 ‘생리혈 목장’이었다. 그러나 그 소녀들에게 주어지는 식사는 뽕나무 잎뿐이었다. 물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생리일을 기다려야 했는데 당시 소녀들의 수는 정확하지 않지만, 홍연환을 만드는 법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생리혈과 수은을 섞어 뜨겁게 가열하고 여기에 매실을 끓여 만든 매실수와 우물물을 부어 골고루 섞어 반죽을 만든 다음 햇볕에 널어 말린다. 그런 다음 젖을 말려 만든 가루우유와 수은과 유황 화합물인 진사(辰砂) 유황을 섞어 다시 끓이고 식히기를 반복하여 둥들게 빚어 만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홍연환은 약효가 있었을까? 부작용은 없었을까? 실제로 가정제는 매일 밤 후궁과 궁녀를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침대에서 뒹굴었다고 하는데 하룻밤에 열 명 이상과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는데, 정신착란을 일으켜 성관계를 맺는 동안 상대방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고 한다. 보다 못한 중신 하나가 홍연환의 복용을 당장 멈춰야 한다고 진언하다 격노한 가정제에게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542년 10월 21일 깊은 밤, 자금성 안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가정제의 후궁을 시중들던 궁녀들이었다. 그들은 행위를 끝내고 곤히 잠든 가정제를 습격했다. 비록 연약한 여자들이었지만 미리 준비한 끈으로 목을 조이자 황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버둥거리다 이내 조용해졌다. 궁녀들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죽은 줄로 알았던 가정제가 숨을 내쉬기 시작하더니 벌떡 일어나 궁녀들을 공격했다. 당황한 궁녀들이 비녀 등의 머리 장식을 뽑아 공격했지만 소용없었다. 황제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흡사 괴물처럼 미쳐 날뛰었다. 이에 궁녀 하나가 동료들을 배신하고 황후에게 달려가 사실을 고했다. 황후와 관리들이 달려와 궁녀들을 체포했고 배신한 궁녀까지를 포함해 모두 처형되었다.
궁녀들의 중언으로 주범으로 지목된 후궁 왕씨는 신체 일부를 차례로 자르는 형을 받아 괴로움에 몸부림치다가 죽어갔고 일족도 모두 형벌을 받았다. 이 사건은 나중에 ‘임인궁변’으로 불리며 중국 후궁사에 크다란 파장을 남겼다. 가정제는 재위 45년을 맞은 1567년 돌연 사망했는데, 아마도 수은 성분이 쌓인 몸이 해독 기능을 상실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음(5)은 ‘여자의 성욕을 연료 삼아 예술혼을 불태운 뒤틀린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에 대해서다. 피카소는 지금까지 누구도 그린 적 없는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야심찬 각오로 작업에 몰두했다. 그의 그림은 ‘큐비즘(입체주의)’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탄생시켰다. 그의 그림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고 전 유럽에서 비싼 가격에 팔려나갔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산 사람은 미술애호가라기보다는 투자가 쪽이 훨씬 많았다. 젊은 나이에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은 피카소는 러시아 혁명을 피해 망명한 귀족 출신의 발레리나 올가 코클로바와 1918년 결혼했다. 둘은 사랑했고 피카소의 그림에 많은 안정감을 주었다. 그러나 피카소에게는 ‘야수의 피’가 샘처럼 솟구쳐 흐르고 있었는데 “그녀는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원했습니다”라고 말하고 둘은 파국을 맞았다.
중년 나이가 된 피카소는 1927년 열일곱 살 소녀 마리 테레즈를 파리의 지하철 입구에서 만나 “당신의 얼굴이 아주 흥미롭군요. 당신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습니다”라며 접근해 이듬해 결혼 허용 연령이 된 18살 생일날 둘은 결혼했다. 그러나 테레즈는 피카소의 예술을 깊이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피카소는 여자와 몸을 섞어야만 비로소 그림을 그린다.”는 흥미로운 말을 남겼다. 테레즈가 아이를 낳자 피카소는 그녀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1936년 어느 카페에서 만난 스물아홉 살의 도라 마르와 사랑에 빠졌다. 피카소 그림에서 주로 ‘우는 여자’로 묘사된 여자가 도라 마르다.
예순두 살 황혼에 접어든 피카소는 스물두 살의 젊은 여인 프랑수아즈 질로를 만나 한눈에 반했고 유혹했다. 이미 전 세계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던 피카소에게 어느 날 프랑수아즈가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 찾아왔다. 피카소의 유혹에 한동안 망설이다가 애인이 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그녀는 피카소에게 여자란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와의 사이에서 난 두 명의 아이를 데리고 그의 곁을 떠났다. 이에 피카소는 “감히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고 호언장담하며 프랑수아즈가 돌아올 것으로 믿으며 애써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지만 프랑수아즈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프랑수아즈가 피카소에게 시련과 패배를 안겨준 셈이었으나 피카소를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그의 곁에는 여전히 그를 존경하고 사모하는 젊은 여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피카소는 발로리스의 도예마을에서 스물여섯 살 자클린 로크를 유혹했다. 6년 후에 둘은 결혼했다. 이때 피카소의 나이 여든 살, 자클린은 서른네 살로 46년의 차이가 났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피카소가 세상을 떠난 1973년까지 이어졌다. 14헥타르에 이르는 고성 노트르담드비에서 피카소는 죽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성공한 예술가로 꼽히는 그는 프랑스에 세 개의 성을 소유하고 있었고, 아흔두 살 고령에다 심지어 죽음이 코앞에 다가와 있는 최후의 순간까지 창작 의욕을 드러낸 뼛속까지 예술가였다.
여섯(6)번째 이야기는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와 아내 콘스탄체에 관한 것이다. 178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정적이고 천재적인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스물여섯 나이에 스무 살의 아내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슈테판 대성당에서 있었는데, 이 자리에 아버지 레오폴트는 참석하지 않았는데 아들의 결혼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부는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신랑에 비해 부족해 보였으나 어쨌든 둘은 서로 뜨겁게 사랑했다.
결혼식 후에 모차르트는 고향 찰츠부르크로 아내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갔다. 모차르트는 결혼을 반대한 아버지와 가족들 앞에서 당시의 대표곡 〈대미사 C단조〉를 연주했고 이 곡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소프라노 독창을 아내가 맡아 어느 정도 아버지의 마음을 돌렸다. 이후 모차르트는 도박을 매우 좋아했는데, 그의 수입은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당장 필요한 도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잃을 때마다 친구나 지인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편지를 수없이 보냈고 이때 자주 사용한 핑계거리가 아내의 병 치료를 위한 요양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모차르트에게 아내가 질려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1791년 모차르트는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의뢰를 받아 적지 않은 돈 100두카트(1,800만원) 라는 고액을 받고 〈레퀘엠 D단조〉작곡을 의뢰받는다. 그러나 그는 몸이 쇠약해져 자신에게 작곡을 의뢰한 사람이 저승사자라는 망상에 빠지기도 했고, 실제 11월 말 무렵에 ‘세균감염증’에 걸려 증세가 심해졌다. 온몸이 펄펄 끓듯 하고 손발은 무섭게 부풀어 올라 움직이기 조차 힘들어졌다. 12월 4일 모차르트는 “혀에서 죽음의 맛이 난다”고 말한 뒤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서른다섯 살 나이에 죽고 말았다. 콘스탄체는 남편의 임종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 훗날 재혼 상대에게 “남편 모차르트의 병을 자신에게 옮기려고 남편이 평소에 주로 사용하던 침대에 몸을 던졌어요”라고 슬픈 표정을 지어며 말했다고 하나 여기에는 고개를 끄덕일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모차르트의 장례식은 슈테판 대성당 별관에서 검소하게 치러졌고, 공동묘지 최하등급에 매장되었다. 최하등급이란 다른 사람이 한번 매장했던 장소를 말한다.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은 콘스탄체는 남편이 남긴 유작으로 꽤 큰 돈을 받았다. 그리고 남편의 열렬한 팬이었던 게오르그 니콜라우스 폰 니센과 사귀다가 동거했고, 마흔일곱 살에 정식으로 재혼했다. 니센은 모차르트 전기를 맨 처음 쓴 작가이자 덴마크 귀족이며 외교관이었다. 후에 니센이 출세하자 콘스탄체는 ‘궁정고문관 부인’이라는 그럴 듯한 직함도 얻었다. 3등급 공동묘지에 묻힌 남편에 비하여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의 고향 찰츠부르크에 훌륭한 자기 묘에 묻혔다.
일곱 번째(7) 이야기는 고흐는 정말로 자신의 귀를 스스로 잘랐는가다. 빈센트 반 고흐만큼 사후에 진가를 인정받는 예술가도 더문데 생전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그의 대표작 〈해바라기〉는 그가 탄생한 지 100년이 지난 뒤에는 무려 580억 원(우리 돈)이라는 엄청난 가격에 팔렸다. 그런데 무엇보다 고흐는 스스로 귀를 자른 것이 사실인가 하는 의문이다. 그도 그의 측근 누구도 이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니 진실을 알기는 어렵다. 다만 ‘귀절단 사건’이후 담당의사 펠릭스 레이는 왼쪽 귀가 대부분 잘린 상태로 경동맥까지 치명적 상처를 입히며 잘려 나갔다고 했다. 아무리 정신이 온전하지 않았다 해도 마취도 없이 자기 힘과 의지로 그렇게 무참히 귀를 잘라내는 게 가능할까?
사건을 계기로 고흐는 자신의 광기를 인정하고 프랑스 북부 아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생레미의 생 폴 요양원에 입원했다. 화가로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랐던 고흐의 심신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 타버리기 직전이었다. 귀 절단 사건 2년 후 그를 치료한 의사 가세는 “마음의 병이 재발하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라고 장담했지만, 고흐는 밀밭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이 두려워 머리나 심장을 쏘지 않고 하복부를 쏘아 36시간이나 괴로워하다가 사망했다. 나이 서른일곱이었다. 생각해 보면 고흐가 왼쪽 귀 대부분을 잘라버리는 일이 과연 스스로 가능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고, 권총 자살은 오히려 광기 어린 발작 때문이라고 하기 쉬울지라도 만년에 이를수록 점점 더 개성이 넘쳤으며 명작이라 할 만한 위대한 작품이 계속 나왔다는 것을 보면 그는 미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 누가 그의 귀를 자른 것일까? 그와 동거하면서도 그를 미워했던 고갱이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고흐는 자살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장례를 치를 수 없었다. 자살을 죄악시하는 기독교리 때문이다.그를 동정했던 동네 사람들이 쓸쓸히 공동묘지에 묻어주었다.
‘코코샤넬’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것은 유명한 디자이너 혹은 브랜드로 지금까지도 패션계에서 아름답게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8) 이야기는 카브리엘 샤넬(1883∼1971)에 관해서다. 그녀는 명성 못지 않게 많은 일화와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단점은 하나의 매력이 될 수 있는데도 모두 감추려고만 한다. 단점을 지혜롭게 활용하면 된다.”는등이 그것이다. ‘독립적이고 자주성 강한 여자’란 이미지를 구축한 그녀지만 그녀의 인생을 통털어 남자에게 도움과 보호를 받지 않은 시기는 거의 없다. 그녀는 말년에 “연인에게는 반지 정도 무게의 부담감도 주지 않았다.”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자립한 여자라는 이미지가 실추되지 않는 것은 그녀가 오히려 결혼만을 목적으로 남자들과 사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자 자유를 찾아 유럽으로 넘어 온 러시아 귀족들이 많았다. 디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의 연인이 된 샤넬은 자연스럽게 귀족들 속에 스며들었다. 그 속에서 슬쩍 향수를 뿌려놓고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보면서 즐거워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후 샤넬 향수는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며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 독일장교와 연인 관계를 맺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감옥에 갔으며 프랑스의 중요 정보를 나치에게 넘긴 스파이가 아니냐는 싸늘한 시선도 있었다. 그러나 이때 그녀를 도와준 이는 역시 옛 연인인 웨스트민스터 공작이었고, 공작이 처칠 수상을 움직여 무사히 석방될 수 있었다. “스무 살의 얼굴은 자연의 선물이고 쉰 살의 얼굴에서는 당신의 가치가 묻어 나온다.”는 이 말도 샤넬이 한 말이다. 이때 그녀는 육십을 목전에 둔 때였다.
1955년 샤넬은 ‘트위드’라는 신소재를 사용한 정장을 개발했다. 이로써 디자이너 샤넬의 전성기가 다시 찾아왔고 그녀는 “일요일이 두렵다. 왜냐하면 아무도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얼마나 일이 즐겁고 명성을 날렸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싶지만, 1971년 1월 10일 그녀가 죽음을 맞은 날도 일요일이었다. 죽음을 앞둔 그녀를 걱정스레 옆에서 바라보는 가정부에게 사넬은 이렇게 말했다.
“잘 봐 …, 이렇게 사람은 죽는 거야!”
여든일곱 파란만장한 그녀는 고국 프랑스가 아닌 스위스 로잔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치스 중요 인사들과의 논란으로 프랑스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존경했던 왕비의 이야기다(9) 그녀의 이름은 외제니, 스페인 귀족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를 사랑해 왕비가 되었던 인물이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조카이기도 한 나폴레옹 3세와 그녀가 스물일곱 살일 때 결혼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바람둥이였던 그와는 잘 맞지 않았다. 1860년 어느 날 밤에 외제니가 서재 문을 열고 들어섰다가 남편과 젊은 여자가 벌거벗고 뒹구는 모습을 목격했다. 외제니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스코틀랜드로 떠나 한 달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고독한 외제니에게 오래전에 죽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환영이 다가왔다. 오스트리아에서 프랑스 왕가로 시집와 왕자와 공주를 나았음에도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외로웠던 여인, 타국에서 온 몸이다 보니 자신의 편이 되어 줄 사람이 없고 오랫동안 불행한 결혼생활 끝에 민중혁명의 희생양이 된 왕비! 외제니는 자신의 모습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을 보았다. 앙투아네트가 남긴 온갖 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마치 죽은 왕비의 유령에 홀리기라도 한 듯 광기 어린 것이었다. “불행한 처지가 되면 사람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비로소 알게 된다”고 한 앙투아네트의 말이 뼛속 깊이 느껴진 적도 없었다. 외제니는 절망적인 상황에도 남편과 아들이 멋지게 재기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1873년 루이 나폴레옹 3세는 예순네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결혼한 지 20년, 제2의 프랑스 제정이 붕괴한 지 2년 반이 지나서다. 유일하게 남은 아들 나폴레옹 외젠 루이도 영국의 식민지이던 남아프리카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다 줄루 전쟁 와중에 전사했으므로 외제니의 삶은 절망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녀는 절망하지 않고 사회활동에 팔을 걷어붙였다. 여자라고 노골적인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품고 여성 참정권 운동을 죽을 때까지 펼쳐 여성도 수학할 수 있는 자격과 의사가 되는 길도 열었다. 고국인 스페인으로 가던 도중에 아흔네 살에 죽었다.
4장으로 넘어가면 “어떤 불세출의 영웅, 천하의 천재도 뛰어넘지 못한 장애물은 무엇일까?”라고 물으면서 불로불사에 집착한 진시황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는 왜 영원히 살고자 했을까? 하고 의문을 가지거나 ‘미친놈’이라고 욕할 필요는 없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 권력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져보고 싶은 욕망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되기에 그렇다. 고대에는 나이 사십에 접어들면 초로로 불리기 적합한 나이다. 그 나이가 되면 ‘이제 남은 건 죽음뿐’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진시황의 욕망과 열정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집요했다. 그는 방사(方士-도사)를 수도 없이 고용했는데, 그중에도 서복(徐福)은 신선 사상가로 이미 불로불사를 실현했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믿게 했고 시황제의 신뢰와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서복은 진시황을 알현하고 동쪽 바다 선인의 섬에 가면 영약을 얻을 수 있다고 부추겼다. 그리고 3,000명의 양가집 소년·소녀를 데리고 선인의 섬으로 떠났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내용이다. 서복은 결국 시황제를 호구로 삼은 것이다. 시황제는 그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흔아홉에 죽음을 맞았다. 기원전 210년 9월 10일의 일이다. 진시황 토용갱에서 나온 황금마차와 같은 것을 타고 수도 함양을 떠나 허베이성에 이르렀을 때 멀쩡하던 황제가 갑자기 쓰러져 죽은 것이다. 그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많았지만, 이때는 암수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역사학자들은 단약이 죽음의 결정적 요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수은을 계속 복용하면 누구나 손발 떨림, 언어장애, 현기증, 난청, 보행곤란 등 나열하기도 끝이 없는 심각한 증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사기』에는 시황제를 태운 마차와 신하들이 시황제가 살아 있는 것처럼 꾸며서 함양으로 돌아온다. 정적을 가차 없이 처단하던 시황제의 죽음이 알려질 경우 반란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걱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돌아오면서 시신의 부패가 일어나 대량의 생선으로 시신이 섞는 냄새를 덮으려 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일까? 시황제 시대부터 수은을 기본으로 단약을 만드는 연단술이 기록된 『주례』등 고서를 보면 수은을 유황에 섞어서 400도로 가열하면 화학반응을 일으켜 새빨간 액체가 만들어진다. 이것을 단(丹)이라고 하는데, 불로불사를 목적으로 먹는 것이기에 이것을 먹은 경우라면 시신은 부패하지 않는다. 시황제도 젊음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이것을 계속 먹었을 것이다. 1972년 전한(前漢, 기원전 206∼기원후 8년) 시대 무덤인 마왕퇴한묘가 후난성에서 발견되었는데 매장된 귀족 여성은 오십대로 관 안에서 거의 아무런 손상도 없이 마치 잠자고 있는듯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154.4㎝ 키에 머리카락은 반짝반짝 빛나고 피부는 여전히 탄력이 있었다. 시신의 피부로 방부제를 주사하자 혈관 속으로 액체가 흘러 들어갔다. 탐사대는 귀부인이 살아생전에 단약 애호가임을 단박에 알았다.
그런데 왜 『사기』는 시황제의 시신이 부패했다고 했을까? 사마천은 진나라 다음의 한나라 때 사람으로 시황제가 죽어서도 시신이 부패하지 않았다는 권위를 덮기 위해 다른 사람들처럼 부패한 것이라고 한 것이 아닐까. 곡학아세와는 거리가 먼 인물로 알려진 사마천이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압도적인 당시 인식과 통념을 뛰어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튼 2020년 1월 멀리서나마 바라보았던 진시황릉은 2만 제곱미터 크기에 높이가 47m나 된다. 그 안에 있을 진시황 시신은 어떨까 싶은데, 『사기』「진시황본기」에는 “수은으로 수많은 냇물과 강과 바다를 만들라”고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시황제의 관 주변에는 대량의 수은이 스며들었을 것으로 아마 시황제는 여전히 잠자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 않을까?
‘목욕’이라는 문화는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열한 번째(11) 이야기는 유럽의 목욕문화다. 고대와 중세의 유적을 보면 목욕시설이 꽤 괜찮게 만들어져 있다. 물론 귀족들이나 즐기던 것이다. 그런데 중세에 페스트가 유행하면서 목욕을 하면 페스트에 걸리기 쉽다는 가짜 뉴스가 넘쳐나면서 목욕문화는 사라졌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던 1837년까지도 버킹엄궁에는 제대로 된 욕조 시설이 없었다. 이때 목욕은 ‘냉수사워’를 의미했다. 날마다 목욕한다고 한 인물은 나폴레옹을 워털루 전투에서 격파한 웰링턴 공작뿐이었데, 그는 건강이나 미용이 아닌 신체 단련의 일환으로 욕조에 몸을 담그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따뜻한 물을 욕조에 받아 입욕하는 방식의 목욕은 바로 그 기분 좋음을 이유로 퇴폐적이다 못해 음탕한 행위로 여겼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목욕문화는 점점 확산되었지만, 서민의 경우 1840년 이후에 차츰 국민목욕탕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는 것이 아니라 수영장에 가까운 형태로 수영장에 들어가기만 해도 건강증진에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1845년 개장한 빅토리아파크의 연못은 수영과 노동자들의 목욕을 위해 설계되었는데, 새벽 4시부터 8시까지는 특별히 목욕용으로 개방되었다고 한다. 영국은 물론 유럽 전역에서 오늘날과 같은 입욕 문화가 자리 잡는 데는 시행착오와 혼란이 있었다. 오스트리아제국의 엘리자베트 황후는 매일 아침 입욕 목욕을 했는데 수온이 고작 7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1851년 취임한 미국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은 백악관에 욕실을 만들 계획을 발표했다가 거센 비판을 받았는데 소박함을 추락시키는 영국의 음모에 의한 어리석은 시도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미국과 유럽 사회는 욕조에 몸을 담그는 방식의 목욕은 심신 건강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식이 남아 있어서인지 욕조없이 사워기만 둔 고급호텔이 오늘날도 여전하다.
열두 번째(12) 이야기는 찰스 다윈에 대해서다.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다윈에게 생전에 행복했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스물두 살 때 운 좋게도 해군 측량선 비글호를 얻어타고 5년여 동안 세계를 돌며 무려 5,436종의 동·식물 표본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다행히 집안이 넉넉했기에 일하지 않고도 ‘다운하우스’라고 불리는 대저택에 머물며 연구에 몰두할 수는 있었다. 은둔생활은 서른일곱 살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진화론이라는 매력적이고 위험한 비밀을 가슴에 품은 다윈은 자칫 자신이 그것을 말해버림으로써 감당할 수 없는 사태를 맞을까 두려워 점점 대인기피 증세가 심해졌고 은둔생활에 빠지게 된다. 심지어 신경성 발작을 일으키기도 하고 구토로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하지만 1859년 그의 나이 쉰 살 때 오랜 침묵을 깨고 『종의 기원』이라는 불후의 걸작을 발표했다. 그리고 12년 후에는 “인간의 선조는 원숭이다”고 하는 더 대담한 이론을 발표했다. 예상대로 보수적인 사람들은 다윈의 이론에 격노했다. 그는 다시 터널과도 같은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학회 등에도 나가지 않고 편지로만 소통했다. 가장 능동적인 은둔생활로 2천여 명과 소통했지만, 날이 갈수록 건강이 악화되었고, 일흔세 살에 죽었다. 지독히 메모광이었던 다윈은 세상을 떠날 때도 뭔가를 기록했는데, “나는 방금 내 생애 400만 번째 구토를 했다”라고 적었다.
20세기 위대한 물리학자, 인류가 낳은 최고의 천재로 꼽히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독일에서 태어났으나 나치스의 폭압이 싫어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1955년 4월 18일 지명인 대동맥 파열로 죽었다. 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13). 죽을 때 유언을 남겼는데 “자신을 화장해 재를 뉴저지주 어딘가에 부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유언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지켜지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의 시신은 관계대로 부검을 받았다. 프리스턴 병원 토마스 하비라는 병리의사였다. 그는 시신을 해부함으로써 천재성에 대한 비밀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유족의 동의를 얻지 않은 채 사채의 여러 기관을 분리했다. 특히 그가 알고 싶은 것은 아인슈타인의 뇌의 무게였다.
왜 뇌의 무게에 집착했을까? ‘당시 뇌의 무게가 사람의 지적 능력을 보여준다’라고 일반적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으로 하비는 틀림없이 다른 사람의 뇌보다 무거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뇌는 성인 남성의 뇌보다 약간 가벼운 1.2㎏에 불과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더 궁금해진 하비는 아인슈타인의 뇌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욕구를 억제하지 못하고 뇌를 포르말린 병에 넣어 표본으로 만들었다. 유족은 이것을 모르고 시신을 화장해 유언대로 재를 뿌렸다. 하지만 하비는 천재의 뇌를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만 알고 있을 수가 없었다. 동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소문이 퍼지자 프리스턴 병원은 그를 해고했다. 하지만 하비는 다른 직장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펜실베니아 대학이었다.
하비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아인슈타인의 뇌를 200조각 넘게 잘랐는데 뇌는 부위별로 기능이 다르다는 것을 실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뇌는 자기 손에 있지만 그것을 분석할 만한 기술이나 마땅한 수단이 없었으므로 연구를 진척시킬 수 없자 고민 끝에 그것을 전 세계의 유명한 과학자들에게 뇌조각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신으로부터 빼내어, 심지어 조각조각 나버린 아인슈타인의 뇌는 지금까지 대서특필될 만큼 의미 있는 사실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저 하두정 소엽이라는 뇌영역이 보통 사람에 비해 15% 정도 크다는 특징이 밝혀진 것이 전부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많다. 그중에서 튤립꽃에 관한 이야기다.(14) 애초에는 야생이었고 ‘사랑의 꽃’으로 알려진 튤립은 16세기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신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는데, 무슬림의 남성 머리에 감는 터번에 튤립이 중요한 상징물로 사용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터키에서 유럽으로 전파된 튤립은 1576년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합스부르크 루돌프 2세 황제가 클루시우스라는 궁정 식물학자가 개신교도라는 이유로 해고했다. 클루시우스는 대량의 튤립 구근을 가지고 네덜란드로 갔다. 네덜란드는 튤립의 나라이면서 개신교 국가다. 그는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 교수가 되었고, 1593년 튤립의 품종개량에 몰두했고, 그의 열정으로 잇따라 새로운 품종이 개발되었다.
날로 커져간 튤립의 인기에 비례해 구근은 암시장에서 거래되었으며, 구근이 돈이 되는 투자의 대상이었다. 한동안 네덜란드에서 구근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고 떨어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1636년 무렵 에는 구근으로 돈을 벌고 싶은 욕망은 더 강해 연일 최고가를 갱신했다. 급기야 가장 희귀한 품종인 ‘셈페르 아우구스투스’(영원한 황제)는 구근 하나에 5만 제곱미터 택지와 맞바꾸자고 제안하는 투자자까지 나타났다. 실제로 구근 한 개가 마차 1대와 말 2필과 거래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오늘날의 돈으로 환산하면 구근 하나가 10억 원을 호가한 셈이다. 심지어 결혼지참금으로 튤립이 이용되기도 하였고 다이야몬드와 비슷한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조금은 황당한 이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튜립 가격은 폭락했는데 왜였을까? 1637년 무렵 한 신문에서 구근값이 떨어졌다는 보도가 있고 사람들은 구근을 내다 팔아 현금화하려고 했으며 어떤 상인은 도매업자에게 구근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비용을 내는 것도 거절했다. 팔 수 없어진 상품에 애초 약정 가격을 지불하지 않으면 파산이 일어난다. 이런 식으로 네덜란드는 날마다 많은 파산자와 법법자가 생겨났다. 튤립 버블 붕괴로 상처를 입은 것은 개인 투자자뿐만이 아니었다. 네덜란드 정부가 받은 상처도 만만치 않았다. 17세기 네덜란드는 그림과 음악, 예술 전반에 커다란 치명타를 입었다. 그후 유전학이 발달하여 튤립의 색깔이나 형태변화도 그전보다 신비하지 않게 되면서 구근 가격은 안정되었다.
근세 인물로 우리에게도 낯익은 스탈린은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갖고 있는데 왜일까? 15번째 이야기는 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 이야기다. “한 인간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수백만 인간의 죽음은 통계상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고 실제 2,000만 명 이상을 무자비하게 목숨을 빼앗은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정치가로 그가 추구했던 정책이 이 말에 오롯이 담겨 있다. 1879년 그루지아(현 조지아)의 가난한 구두공 가정에서 태어난 스탈린은 성실한 신학생이었다. 그가 원칙적으로 종교를 거부하는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었다는 것은 어쩌면 운명의 장난과 같은 일이었다. 도서관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저서를 탐독하면서 그의 사상과 신념, 생활 태도는 송두리째 변해버렸다. 이후 혁명운동에 몰두하면서 신학 공부는 등한시했다.
1917년 제정 러시아가 와르르 무너졌다. 1922년 4월 3일 건강이 좋지 않던 레닌에게 권력을 넘겨받은 스탈린은 최고권력 수장인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했다. 그의 나이 마흔세 살, 이후 31년간은 스탈린의 시대였다. 소비에트 연방정부는 단호하고 폭압적이었다. 반대하는 자는 가차 없이 처벌해 2년여 동안 문제를 일으킨 39만 명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고, 그중 21,000명은 총살당했다. “러시아의 공업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해야 하며 국민은 인내하고 또 인내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겉포장은 그럴듯하나 국민은 강요된 삶을 살아야 했다.
주치의도 믿지 못한 스탈린에게도 마침내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왔다. 1953년 3월 예기치 않게 쓰러지듯 쓰러졌다. 소비에트 연방정부 발표는 “모스크바 교외 별장에서 지내던 스탈린 서기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러나 발견이 늦어져 미쳐 손을 쓸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어 치열한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니키타 후르쇼프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2월 28일 아침까지 지속된 파티 후 기분이 좋아진 스탈린은 침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다. 3월 1일 밤이 되어 잠을 자려고 할 때 갑자기 동료들에게서 스탈린 서기장이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그의 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서기장이 이미 서거한 뒤였다.”
증언 등을 종합하면 “스탈린은 토요일인 2월 28일 낮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별장에서 회의를 주재했으며, 이때 기분이 안 좋은 스탈린은 후루쇼프를 비롯한 중역들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다음날 3월 1일 정오가 되어도 스탈린은 일어나지 않았다. 별장의 경호원들은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경호원들이 말을 걸거나 깨우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저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저녁 6시반쯤 별장의 서재에 불이 켜졌다. 하지만 그 후에도 스탈린에게서 아무런 호출이 없었다. 이후 밤 11시경 경호원이 단단히 마음먹고 방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스탈린이 쓰러져 있었다. 스탈린은 말을 못하고 왼손을 들어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스탈린은 끝내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채 사망했다. 1953년 3월 5일의 일이다. 누군가 그의 방에 6시반쯤에 들어갔으나 그를 그대로 방치했다는 말이다. 스탈린 사후 심복이었던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관료회의 의장으로 스탈린을 계승했고, 넘버2라고 추켜세우던 베리야는 제1부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베리야는 영국과 내통했다는 죄를 덮어쓴 채 처벌되고 말렌코프도 실각되었다. 이후 1961년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자 소비에트 정부는 완전 방부처리 되어 있던 스탈린의 시체를 꺼내 마치 핵이나 독극물을 폐기하듯 처리해 버렸다. 자국민 2천만 명 이상을 학살한 최악의 독재자이자 북한 김일성을 부추겨 6.25를 일으킨 사이코 정치가는 그렇게 사라졌다.
이제 거의 마지막으로 살펴볼 이야기로 『노인과 바다』로 유명한 헤밍웨이의 죽음에 관해서(16)다. 어네스트 헤밍웨이(1899∼1961)는 신문기자 혹은 적십자 일원으로 전쟁터에 나가 취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독창적 스타일의 소설을 쓰며 문단에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다. 헤밍웨이 문학을 관통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남자다움’이다. 아버지에게서 권투, 낚시, 사냥 등 남성미 넘치는 취미를 배웠는데, 아버지 클레런스는 의사였으나 우울증으로 고통받다 권총으로 자살했다. 우울증이 자식들에게도 유전되었는데, 우울증이 유전이 되는지, 유전과 예술적 재능이 연관성이 있는지는 증명되지 않았으나 에피소드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
작가로서 이미 명성을 얻은 헤밍웨이는 두 번째 아내 폴린의 숙부가 억만장자라는데 힘입어 멕시코만에서 낚시를 즐기고 아프리카의 사바나에서 거칠게 지프를 몰며 사냥을 하기도 했는데, 그런 그에게 찾아온 비극은 두 번의 비행기 사고였다. 우간다 북부에서 조종 실수로 경비행기가 추락해 일행이 강에 빠졌으나 다행히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고, 이듬해에는 비행기에서 화재로 발생해 추락하는 바람에 척추부상과 왼쪽 눈을 실명까지 했지만,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다. 그러나 사실을 잘못 안 기자들이 그가 사망했다고 기사를 써 미국에서 친구들이 달려오자 병상에 누운 체 자신의 사망 기사와 추도문을 읽으며 술을 마시고 즐거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친구들은 몇 개월 사이에 헤밍웨이의 변화된 모습에 놀라워했다고 하는데, 하얗게 새어버린 수염과 머리카락 185㎝, 95㎏ 근육질인 거구는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건강 때문에 노벨문학상 수상식에 참가할 수 없었다. 그는 FBI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느끼며 노이로제 증상을 나타냈고 수시로 자살을 입밖에 내뱉으면서도 정신과 치료를 받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문제는 ‘남자다움’이었다. 그는 병을 병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1961년 1월 20일 존 F 케네디가 35대 미합중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케네디에게 축하 헌증 책을 보내기로 했지만 단 한 줄의 헌정 메시지도 쓸 수 없었다. 당시는 전기 충격을 주어 쇼크를 주는 방법 외 우울증 치료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헤밍웨이에게 악영향을 주었다. 작은 방 침실에서 혼자 자겠다며 방을 나간 뒤 현관에서 사망했다. 검시결과 엽총으로 자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아버지의 죽음과 꼭 닮았다.
미국 케첨 묘지에 묻힌 장례식장에서 헤밍웨이의 대표작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 인용된 성서의 한 구절이 읽혔다. “저녁이 되면 석양이 물든 지평선으로 태양이 지지만 아침이 되면 다시 떠오른다. 태양은 결코 이 세상을 어둠이 지배하도록 놔주지 않는다.”
끝으로,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히틀러의 최후를 보자. “독일을 위해 온종일 싸우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사생활 같은 것은 없다.”고 한 것은 죽을 때까지 독신을 고수한 히틀러에 대한 나치스의 공식 입장이었으며 카리스마를 배가시키기 위한 연출이었다. 그러나 히틀러에게는 ‘에바 브라운’이라는 애인이 있었다. 사진관에서 일하던 에바에게 단골손님이던 히틀러는 일부러 가명으로 말을 걸었다. 하지만 에바는 단박에 그의 정체를 알아챘다. 둘에게 사랑이 싹텄지만 이성보다는 부녀 관계에 가까웠다. 둘의 나이 차이가 23살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집요한 에바의 청에 의해 두 사람 사이에는 전화기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에바는 권총으로 자신을 쐈다. 1932년의 일이다. 그것은 히틀러의 관심을 끌기 위한 자작극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에도 에바는 자살미수 사건을 일으켰다.
1945년 4월 22일 아침 10시 불면증으로 괴로워하던 히틀러는 “누가 일부러 이런 짓을 해서 잠을 방해 하는가?”하며 기분 나쁘게 눈을 떴다. 그러나 소련군은 베를린 시내까지 진격해 공격을 퍼부었고 공격은 계속됐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히들러는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미 16m 지하 벙크로 관저를 옮긴 히틀러는 간부들과 그 가족들, 고용인들과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에바도 그곳에 있었다. 그날 저녁 히틀러는 그곳에서 “지금 내가 할 일은 단 하나, 베를린에 머물면서 여기에서 죽는 것이다.”였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4월 29일로 넘어가는 한밤중에 시작되었다. 신랑 히틀러는 밀랍 같은 얼굴색에 쭈글쭈글한 나치스 제복에 훈장을 잔뜩 달고 있었고 에바는 파란색으로 물들인 면 드레스에 모피 케이프를 걸친 채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10분도 채 안된 간소한 결혼식이었다. 축하연은 결혼식보다도 더 짧아서 고작 몇 분 내에 끝났다. 홍차와 샴페인이 나왔으나 히틀러가 유언을 작성하기 위해 자리를 떴기 때문이었다. 4월 30일 오후 1시, 히틀러는 에바 일행과 최후의 점심을 먹었다. 정리를 끝낸 두 사람은 침실로 들어가 에바는 화합물이 든 캡슐을 삼켰고, 히틀러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두 사람이 결혼하고 36시간 만이다. 두 사람의 시체는 지하 방커 밖으로 옮겨져 가솔린이 부어진 뒤 세 시간 넘게 태워져 재가 되었다. 이로써 자신의 아름다운 결혼 사진을 세상에 선보이고 싶어 했던 에바 브라운의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