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곤 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까. 왜 나는 이렇게 아파야 합니까. 도대체 원인이 뭘까요. 죄를 지었기 때문인가요. 부모가 지은 죄가 나에게 유전된 것인가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은 궁금했다. 주위 사람들도 궁금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의 죄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것일까.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9:2)”
원인을 찾고 싶다. 죄가 원인이라 지레짐작한다. 예수께선 제자들이 예상 못 한 대답을 하신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죄 때문에 병에 걸리고, 죄를 지어 장애를 입는 게 아니다. 부모가 잘못해 자식이 잘못되는 게 아니다. 팔자가 사나워서도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
인생은 고생이다. 고난을 선택하든 고통을 당하든, 고생을 피할 수 없다. 고생의 원인을 찾으려 애쓰기보다 고생스러운 자리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대한다. 예수께선 그 일을 “우리가 하여야”한다고 이어 말씀하신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9:4~5)」 흑암의 원인을 묻는 이들에게 빛이 되겠다고 말씀하신다. 흑암은 빛의 재료다. 흑암이 있어 빛이 드러난다. 흑암은 절망스런 결과가 아니라, 빛이 나타나는 시작이다.
예수께선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인과율에 매이지 않고, 일하신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요9:6-7)」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오는 절차를 생략하고 예수께서 검지와 엄지로 맹인의 눈꺼풀을 벌려 눈을 뜨게 하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맹인에게 “첫째 날”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3-5)」
창조는 137억 년 전에 완료된 사건이 아니다. 창조의 시제는 과거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고통이나 고난의 원인을 묻기보다 고통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고 믿는 이들에게 “첫째 날”이 시작된다. 창조는 현재 진행형이다.
엘 그레코는 예수께서 빛을 창조하는 순간에 여전히 못 보는 사람을 그린다. 그림 우측에 수군대는 사람들, 그림 좌측에 따지는 사람들, 가운데 멀리 추행하는 사람. 날마다 창조가 일어나지만, 흑암 속에 빛이 들지만, 사람들은 수군수군대고 오해하고 딴짓하다가 빛을 못 본다. 눈이 있어도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보지 못하면서도 보고 있다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림 복판 바닥에 떨어진 보따리를 탐하는 개와 무엇이 다른가. 예수를 인정할 수 없는 고매한 지식인, 어리석은 질문에 사로잡힌 제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추행에 빠진 사람을 엘 그레코는 개 같은 사람들이라 고발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창1:2). 사람 사는 땅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가득하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서 창조가 일어난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작이다.
글/ 민들레교회 목사 김영준
*〔목회와신학 23년7월호 그림묵상〕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