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이기게 하시는 그리스도(사 53:1~9)
누가 예수님을 찾을까요? 사순절 기간에 누가 예수님을 묵상할까요? 파스칼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네가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나를 찾지 않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에 예수님을 만났기에 우리는 그분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예수님을 만나보셨습니까? 성경의 말씀으로 보자면 “나는 예수님의 탄생까지 만났어.” 라고 하신 다면 그분은 아기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마리아가 앉고 있는 아기 예수 말입니다.
“나는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만났어.”라고 하신다면 그분은 병을 고치고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나는 귀신을 쫒아내시는 예수님을 만났어.”라고 하신다면 그분은 귀신을 쫒아내시는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이 가르치는 말씀 가운데 예수님을 만났어”라고 하신다면 그분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53장에서는 우리가 믿는 못하는 예수님을 말씀하십니다.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 이십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야 부활의 승리까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죄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죄가 무서운 것은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와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자녀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히 11: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까? 아벨은 믿음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가인은 믿음이 없이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예배드립니다.
그런데 가인의 마음에 분노가 이는 것입니다. 안색이 변할 정도로 분노하였습니다. 이 분노 가운데 있는 가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창 4:7절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하십니다.
가인은 죄를 짓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유혹이 시작됩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것은 죄가 유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스터만은 ‘죄가 엎드려 기다리는 자’로 있다고 해석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죄가 가인을 원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죄에 너 자신을 빼앗기지 말고 죄를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가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인이 죄를 다스렸습니까? 죄를 다스리지 못하는 가인은 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요한 일서 3장 12에 보면 이 사건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라고 하십니다. 가인이 죄를 지은 것은 악한 자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의 배후에는 악한 자가 있습니다. 이 악한 자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다스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일 3:10절에는 마귀의 자녀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데도 마귀는 공격합니다. 예수 믿고 착하고 살고 싶은 데.. 마귀가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사랑하며 살고 싶은 데.. 마귀는 오히려 더 강한 미움을 우리 안에 붓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여러분을 다스리려고 할 때에는 죄 가운데 자신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때에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말도, 생각도 하지 마세요.
죄가 우리를 다스리면 죄가 우리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죄 된 생각으로, 죄 된 말로 끌로 갑니다. 죄가 우리를 다스리려고 할 때에, 주여! 주여! 라고 고백해 보세요. 내 입에 죄가 나오지 않게, 내 생각 속에 죄가 다스리지 않도록 주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가 우리의 인생을 망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죄에서 벗어나는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7절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십니다. 어린 양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죽음 앞에서 잠잠하다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번제의 제물이 되어 죽게 되었을 때,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순종한 것처럼 예수님도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대신 할 번제물(숫양/ 창 22:13)을 예비해 놓으셨지만 예수님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대신 할 번제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질 다른 번제물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십자가에 죽어도 그 죽음이 죄를 사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믿는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을 본문 8절 하반절에 “...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서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고후 5:14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마귀가 더 이상 우리에게 죄 값을 묻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마귀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요 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데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마귀의 자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십자가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옆 사람을 축복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마귀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모세처럼 선지자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처럼 왕의 신분으로 나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아론처럼 제사장으로 나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자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된 것입니다. 즉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자녀로 살게 됩니다. 요일 3:9절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가인의 후예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씨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씨는 씨앗입니다. 우리는 종자가 다릅니다. 그 시작과 근본이 하나님입니다.
예수 믿고도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을 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씨(생명, 영)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어느 순간 내 안에 있는 미움이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시기와 질투가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내 안에 분노가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죄가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