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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령의 《가위바위보 文明論》
왜 진작 이 책을 알지 못했는가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지금이라도 접할 수 있다는데 위안을 가진다. 책은 2015년 출간되었으나, 실제론 2005년에 일본어로 먼저 출간되었던 것을 일본어 전문번역가 허숙 선생이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저자인 이어령 선생은 지난 2월 타개했으므로 이제 그를 만날 수는 없다. 그러나 책을 통해 그의 숨결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 대해서 (1). 손의 이야기다. (2). 공작(工作)의 이야기다. (3). 아시아 3국의 이야기다라고 했다. 한마디로 “무엇을 결정할 때 서양 아이들은 동전을 던지지만, 아시아 아이들은 가위바위보를 한다. 앞이냐 뒤냐, 단면만으로 결정하는 동전은 ‘실체’고 ‘독백’이다. 하지만 상대의 손과 만났을 때 의미가 생기는 가위바위보는 ‘관계’며 ‘대화’다”라고 했다.
책에서는 많은 실증적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여기에 다 옮겨 올 수는 없을 것 같고 의미심장한 것들만 옮겨볼 생각이다. 가위바위보의 기원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원형은 중국의 도교 사상에서 비롯되었다는데, 그것이 일본에 수입되면서 주먹으로 하는 놀이라는 뜻으로 권(拳)이라 하였다. 권은 에도시대 이후 많은 인기를 끌었으나 권문화를 한국말로 번역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가위바위보 게임의 기원에서 서구 문명과 한중일의 공유 가치를 밝히는 일은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학자들도 놀이를 문명·문화의 구조로 분석한 논문이나 저서로 발표한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가위바위보의 탄생과 구조
기차만큼 20세기 문명을 대표하는 것은 없다. 수백 명 인간을 짐짝처럼 싣고서 굉음을 내며 달려간다. 차에 실린 사람은 똑같은 속력으로 달려 정거장에 정차하고 똑같은 혜택을 누려야 한다. 기차는 타는 것이 아니라 실리는 것이다. 기차를 타고 간다고 하지만, 그것은 운반되는 것이다. 기차만큼 개성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없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이미 정해진 철길에 맞춰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학생들을 실어나른다. 오히려 교육 과정은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일관되게 움직이는 공장이다. 품질관리 같은 시험이 치르지고 그것을 통과한 학생만이 공장 제품의 합격품 딱지처럼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 현대에 교육받은 젊은이들은 선을 볼 때도 한꺼번에 4명이 늘어서지 않으면 상대를 고르지 못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사지선다형 시험문제가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들어 복잡한 동서 문명을 읽고 한중일 미래를 논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왜 동서문명이라고 하는가? 서동이면 안 되는가, 왜 한중일인가, 중일한이면 안 되는가, 공동 개최를 두고 한일월드컵이냐, 일한월드컵이냐로 양국이 분쟁한 바 있다. 천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을 문제다. 유일한 해결책은 가위바위보를 하는 것이다. 한국은 ‘가위바위보’, 중국은 ‘차이차이차이’, 그리고 일본은 ‘장켄폰’이라고 외친다. 말은 달라고 동시에 손을 내밀 수 있다. 절대 승자도, 절대 패자도 없는 가위바위보에서 우리는 ‘기러기 편대비행’을 이룰 수 있다.
한때 일본은 기러기 비행(雁行)이라는 경제발전을 제창하기도 했다. 일본이 선두에서 날아가면 그 뒤를 이어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네 마리의 용이 쫓아가고 또 다른 쪽에서는 아시아 제국의 여러 나라들이 줄지어 일본의 뒤를 쫓아간다는 것이다. 언제나 일본이 선두에 선다. 하지만 기러기들은 그런 비행 방법으로 날지 않는다. 조류학자들에 따르면‘최초 한 마리가 날아올라 두 번째를 위해 길을 열고, 두 번째는 세 번째에게 안내하고, 세 번째의 에너지를 받아 네 번째가 비상하고, 네 번째는 다섯 번째를 끌어당기고, 다섯 번째의 기세를 타고 여섯 번째가 날개치고, 여섯 번째는 일곱 번째에게 힘을 주며 날아간다. 선두에 선 기러기가 지치면 스스로 무리의 맨 뒤로 물러나 다른 기러기에게 선두를 양보한다. 다음 기러기는 하늘에 그려진 역V자의 정점으로 날아 모든 기러기가 차례차례 무리의 선두와 후미를 맡게 된다.’기러기들은 선두에 있다고 우월감을 갖거나 맨 뒤에 있다고 열등감을 갖지 않는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던, 어떤 종교를 믿든, 가위바위보만큼 전 세계에 폭넓게 퍼져있는 문화는 없을 것이다. ‘장켄폰’, ‘차이차이차이’, ‘카이트 타쉬 마카스’(터키), ‘락 페어퍼 시저스’(영국), ‘로샹보’(미국), ‘슈니크 슈나크 슈누크’(독일)처럼 풍부하고 다채로운 손의 울림은 여전히 사이버 공간에서 떠들썩하다. 가위바위보 사전에는 문명의 충돌이라는 말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은 손이다’라고 했으며, 임마누엘 칸트는 ‘손은 밖으로 노출된 뇌’라고 했다. ‘데가와루이(手か惡じ-악마의 손, 손이 나쁘다는 뜻)’는 마음씨 나쁜 사람을 말하는데, 일본인에게 ‘손은 밖으로 노출된 심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가위바위보 게임은 아이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술 먹기 게임을 할 때어른들도 이 게임을 한다. 오다 노부나가는 술을 못 마시는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억지로 술을 마시게 하며 즐거워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미쓰히데가 모반을 일으킨 원인이라는 설도 있다. 권주(勸酒)의 규칙은 술을 마시든, 못 마시든 안심하고 가위바위보 게임을 술안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술을 못 마시는 원인은 알코올로 만들어지는 아세트알데히드를 분해하지 못하는 유전자다형 때문인데, 한국인·일본인·중국인·대만인 등 아시아인들은 거의 절반이 이 유전자를 갖고 있어 술을 마시지 못한다. 하지만, 백인들은 거의 모두 갖고 있지 않다. 일본에서는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게코(下戶)’,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을 ‘조고(上戶)’라고 하는데, 옛날 서민들이 결혼할 때 집안이 부유함에 따라 ‘조코 여덟 병, 게코 두 병’이라 하여 술을 많이 마실 수 있는 사람과 못 마시는 사람을 구별해 왔다고 한다.
인간은 원시시대부터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어왔다. 과학의 여왕이라고 일컬어지는 수학을 탄생시킨 것은 인간의 손가락이었다. 양손으로 수를 셈으로써 숫자가 지배하는 엄밀하고 객관적이며 냉정한 세계를 구축했다. 특히, 밭을 경작하고 가축을 사육하기 시작한 신석기 시대는 물건을 비축하면서 숫자 의식이 강해졌다. 세계 어디든 아이들이 벽에 그린 낙서를 보면 모두 허수아비처럼 양팔을 벌린 모습에 다섯 손가락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손가락 모양이 아니라 손가락 수를 그린 것이다. 얼마나 수의 관념이 인간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사(士)는 중국과 한국은 선비를 의미하지만, 일본에서는 사무라이(侍)를 의미한다. 11월을 사무라이 달이라고 하는 것은 十과 一을 합친 士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람을 더하면 ‘섬길 仕’가 되는데, 이 仕가 한국과 중국에서 사용하는 것과 다른 의미로 상업과 제조업의 일본문화를 만들어낸 ‘숨은 문자’다. 시타테(仕立て-만드는 일, 교육), 시아게(仕上げ-마무리, 완성) 등이 그것이다. 배우(俳優)라고 할 때 배는 희극, 우는 비극을 연기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배는 비속한 것, 코믹한 것, 우는 성실하고 우아한 것을 말하므로 둘은 대립되는 성격을 갖는다. 와카(和歌)와 렌카(連歌)는 우아한 귀족적 시가를 말하지만, 와이카이(俳諧)는 개구리, 변(糞) 같은 속어를 소재로 삼는다.
이솝 우화 중에 ‘개미와 베짱이’이야기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 누구나 교훈이었을 것인데, 한여름에 노래나 부르고 놀았던 베짱이는 결국 겨울에 얼어 죽고 여름에 놀지 않고 열심히 일한 개미는 양식을 저장해 겨울에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나라 버전이고, 일본 버전은 다르다. 개미는 여름에 일만 한 탓에 겨울이 왔을 때 먹을 것을 잔뜩 쌓아놓고 과로사하였고, 구걸하러 온 베짱이가 그것을 배불리 먹었다는 것이다. 또 미국 버전은 문전박대 당한 베짱이가 죽음을 앞두고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마지막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했는데 따분하게 겨울을 보내느라 우울하게 지내던 개미들이 베짱이 선율에 감동해 주변으로 모여들자 베짱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티켓 플리즈(입장권 사라)’를 외쳐 부자가 되었다고 하고, 구 소련 버전은 개미가 문을 열고서 베짱이와 먹을 것을 나누어 먹었다는 것인데 그래서 겨울이 끝날 무렵 쌓아둔 식량이 바닥나 개미와 베짱이 모두 굶어 죽었다고 한다.
서구의 우화들은 모두 동전 던지기 바이너리(이진법) 코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가위바위보 코드라면 개미와 베짱이는 하나로 이어져 ‘개짱이’가 된다. 일과 놀이는 대립이 아니라, 순환하는 원형으로 바뀐다. 에도시대 속담 중에 ‘돈 버는 사람의 나막신은 앞굽이 닳고, 노는 사람의 나막신은 뒷굽이 닳는다’는 말이 있다. 문화는 앞뒤 2개의 굽이 달린 나막신을 신고 세상을 균형 있게 걷는 것이다. 이렇게 발전한 코드가 도요타 자동차를 만들고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사랑받는 에니메이션 포켓몬스터를 안겨준 것이다.
가위바위보 문명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을 자세히 보면 그림 속의 예수가 오른손은 쥐고, 왼손은 펴고 있다. 이것은 ‘쥐고 있는 쪽은 주장하고, 펼친 쪽은 이미 몸을 내던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프랑스 미술사가 ‘르네 위그’가 주장했다. 비탄하듯 눈을 감은 성스러운 얼굴이 그림의 정점이라면 양손의 형태는 배반을 예고하는 것이 되는데, 쥐고 있는 오른손이 유다의 배신에 대한 거부의 자세고, 손바닥을 펴 보인 왼손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모든 죄를 포용하는 것이라는 애기다. 개-폐, 표-리의 이항 대립 체계로 예수의 양손은 가위바위보의 바위와 보의 관계와 닮아있다.
불상의 손도 비슷하다. 일상에서 주먹과 손바닥은 공격과 포용, 강함과 부드러움, 응축과 확산 등 다양한 레벨에서 대극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로마시대 수사학 교과서는 손바닥이 그려져 있고, 논리학 교과서는 주먹이 그려져 있다는데 이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인간은 미움을 품은 상대방에게는 주먹을 쥐고, 친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는 악수하듯이 손을 펼친다. 한자 ‘아버지 父’는 양손에 도끼 같은 무기나 형구를 들고 있는 상형문자다. 도끼 부(斧)에도 父가 들어 있다. 쥐고 있는 주먹은 도끼이자 아버지로 힘과 지배의 상징이다. 이에 비해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母)의 손은 항상 부드럽게 열려있다. 쥐고 있는 주먹이 부성(父性)이라면 펼쳐진 손바닥은 모성(母性)인 것이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것은 고전화된 이야기로써 그런 사례는 수없이 많다. 가위바위보의 보자기가 바위를 상징하는 주먹을 이기는 것은 특별히 이상주의도, 종교적 원리주의도 아니다. 여왕벌은 독침이 없지만 꿀벌 무리의 리더다. 《삼국지》《수호전》《서유기》는 중국 3대 기서로 삼국지에서 유비도 그렇지만, 양산박에 모인 108명의 도적들이 펼치는 활약상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수호전》에서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송강도 《삼국지》의 현덕과 마찬가지로 힘과 지혜 어느 것도 특별히 눈에 띄는 인물이 아니다. 또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각각 자신만의 힘과 용기를 갖고 81명의 요괴와 괴물들을 퇴치하지만, 삼장법사는 특별히 이렇다 할 힘이나 재주가 없으면서도 머리띠인 금고아를 조임으로써 손오공을 제압하고 충고한다. 실제 동아시아에서는 문이 무를 제압하는 문승지효(文勝之效)를 이상으로 삼았다. 과거제도가 없었던 일본에서도 주자학을 정치이념으로 삼은 에도시대를 연 도쿠가와(德川)에서 보듯 덕치를 중시했다.
아인슈타인도 카프리도, 서양 고전 물리학의 페러다임을 바꿨다는 닐스 보어도 서양의 이항 대립 시스템에서 음과 양을 상보적으로 본 획기적인 연구가 시작되는데, 닐스 보어는 1937년 중국을 방문한 뒤 과학적 업적을 인정받아 귀족 작위를 받았다. 작위를 받을 때 그의 예복 문장 무늬가 음양론을 도식화한 태극도였다고 한다. 자신이 주장해온 대립자(對立者)의 상보성 개념이 2500년 전 중국의 음양 사상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주먹과 손바닥만으로는 가위바위보가 되지 않는다. ‘가위’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상대적인 것이 되며 강하고 한편으론 약한 양면성을 갖게 되어 상보적인 것이 된다.
가위바위보의 손바닥은 우리나라에서는 ‘보’(보자기)지만, 일본에서는 ‘파’(종이), 중국에서는 ‘뿌’(옷감, 천)라고 한다. 우리는 주먹을 바위, 일본은 ‘구’(돌), 상하이에서는 더욱 공격적인 ‘추안토우’(망치)라고 부른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주먹과 손바닥은 대립하는 기호로 작용하고 있으나, 그 대립은 양극화하는 것은 아니다. 양단불락(兩端不落)의 가위가 개입함으로써 원형적 순환성을 갖는다. 이항 대립 코드가 지배적인 서양 문명사회에서 가장 당혹스럽고 이해하기 힘든 것이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이었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둘러싼 논의와 항쟁으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고 상대를 이단자라고 배척하며 엄청난 박해와 살상이 저지르졌다. 그러나 일본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내용과 교리가 전부 뿔뿔이 흩어지고 마리아상이 마리아 관음으로 바뀌는 상황에서도 삼위일체 교리만은 순수한 형태로 지켜져 왔다. 가위바위보 코드가 익숙했던 일본인들은 이것을 삼위일체설보다 잘 이해하고 터득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설 :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은 삼위(3 Persons, 세 위격, 세 신격, 세 분(三位)으로 존재하지만, 본질(essence)은 한 분의 하느님이라는 교리
지난달에 타개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며느리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녀의 죽음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 돌아보면 그녀의 죽음은 글로벌리즘의 대명사다. ‘그녀는 이집트 남자 친구와 함께 독일제 벤츠를 타고 프랑스 파리의 한 터널 속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사고원인은 스카치위스키를 마시고 운전한 벨기에 운전사가 일제 혼다 오토바이를 타고 이들을 쫓아오던 이탈리아 파파로치를 피하려고 과속을 했기 때문이다. 사고 이후에 미국인 의사가 브라질산 의약품으로 응급수술을 했으나 결국 사망했다. 그러자 IBM 호환 컴퓨터에 탑재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에서 이 뉴스를 대만산 마우스를 클릭해 한국산 모니터를 통해 본 네티즌들은 네덜란드산 조화(弔花)를 인터넷 상점에서 주문해 영국의 장례식에 보냈다.’
왕세자비 한 사람의 죽음이 전 세계 사람들과 물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런 농담은 재미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굳이 로얄패밀리가 아니어도 지구상에서 지인 6명의 인간관계만 따라가 보면 반드시 모두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관계 6단계 법칙’이 있다고 한다. 이것을 적용해 우리나라에서는 친인척 관계를 연결해 국민 전체를 페밀리로 만든 ‘싸이월드’가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지만, 이런 가위바위보 코드가 2인칭의 상극관계로 나타나면 알카에다 같은 글로벌한 테러조직이 될 수도 있다. 이제 전쟁은 지금까지처럼 국가와 국가가 싸우는 군대조직으로는 결판을 내기 힘든 비대칭 전쟁이 되어버렸다. 가위바위보 코드이자 삼자 견제는 인터넷이나 국제 테러, 글로벌리즘 문명이라는 환경 속에서 싹을 피우고 있다.
새로운 아시아 문명
문명과 문화는 복수인가? 단수인가? 동북아시아인가, 북동아시아인가?로 시작하는 이 장에서는 원래 아시아에는 아시아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아세아는 16세기 선교사‘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와서 한자로 음역한 지명으로 유럽 다음이라는 ‘亞’와 가늘고 세세하다는 ‘細’자로 대명제국의 중국과는 어울리지 않는 지명이다. 지구상에는 3천 가지의 문화를 가진 200여 개 국가가 있고, 이 가운데 한국과 일본처럼 문화적 동질성을 갖고 있는 나라는 극히 드물어 세계적으로 15,16개국에 불과하다고 한다. 문화가 달랐던 구소련은 1991년 해체된 후 12개 국가로 나뉘었고, 같은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유럽은 25개국이 EU로 하나의 초국가로 통합하고 있으나 삐걱대기도 한다. 지금도 세계는 매일 22억 달러가 죽음을 양산하는 데 소비하고 있다고 하는데, 9일분 군사비용만을 식량과 의료, 교육시설이 부족한 나라 어린이들에게 주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문화’라는 말에 104개의 뜻이 포함되어 있고, 무지개색은 ‘빨주노초파남보’라는 7가지 색이라고 알고 있지만, 무지개색은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달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네 가지색이고 했고, 현대의 유럽에서는 여섯 가지 혹은 일곱 가지로 알려져 있다. 단오절에 아이들의 무병과 출세를 기원하며 하늘에 잉어 모양의 깃발을 날리는 일본의 고이노보리(鯉幟-리치)라는 놀이에 오방색을 넣는 것처럼 동아시아에서는 오행사상의 영향으로 5분절로 나뉜다. 서양음악이 7음계 아시아 음악이 5음계인 것도 이런 분절 차이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게 보면 무지개색은 몇 가지 색이 맞는 것일까? 뉴튼이 프리즘을 통해 스펙트림을 7가지로 분류했다고 하여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는 7가지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이 맞다고는 할 수가 없다.
동북아시아든, 북동아시아든 중·일·한 3국의 지리적 특성은 중국은 유라시아로 이어진 대륙이고, 일본은 6,800여 개 섬으로 이루어진 해양 섬이며, 한국은 대륙과 이어지지만 바다와도 접한 반도로,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가 없는 질서와 법칙이다. 옆에 아무리 사이가 나쁜 나라가 있어도 이사 갈 수는 없다. 대륙-반도-섬이라는 자연적 특성은 지구상에서 또는 인류 역사에서 유일하다 싶을 정도로 좋은 것이다. 이런 지리적 조건은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한 가위바위보 형태와도 닮았다. 대륙의 형태는 보, 섬은 바위, 반도는 가위로 말이다.
동아시아의 대륙-반도-바다라는 자연적이고 지리적 조건은 중국은 보, 일본은 바위, 그리고 한국은 가위라는 가위바위보 코드를 초래한다. 우연이라고 하나 가위바위보를 부르는 방법도 일본·중국은 바위, 가위, 보의 순서인 반면, 한국은 가위바위보로 가위가 가장 먼저 나온다. 지금처럼 핵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 중국이 바위가 되고, 평화 헌법에 의한 일본이 보로 바뀌는 일이 생기더라도 한국은 언제나 가위다. 가위가 정성적으로 움직이면 이항대립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원형적인 순환과 생성의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대립하는 물과 불 사이에 가마솥이 있다면 맛있는 음식이 만들어지는 것과 같다. 한국이 가마솥 역할을 하던 시기에는 동아시아에 평화가 찾아오고 문화가 꽃피었다.
그러나 원나라가 일본을 침략하려 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을 공격하려 했을 때는 반도가 힘을 잃고, 특성이 파괴되어 존립의 의미를 잃고 말았다. 대륙과 해양이 충돌할 때는 언제나 반도인 한국이 힘이 약해졌을 때였다. 야마카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조선반도를 일본의 생명선이라 불렀지만, 그것이 동아시아 전체의 생명선이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비극으로 한일합방이 생겼고 이후 동아시아에서 반도는 사실상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이제 한국은 경제력이나 정치력은 물론 IT나 문화면에서도 세계 10위권 안에 들 만큼 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렇지만 잃어버린 반도성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전후 일본의 패전으로 식민지에서 해방되기는 했으나 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냉전이 끝난 지금도 이념과 체제가 다른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남아 있다.
여담일지 모르지만, 일본문화의 원류이며 야마토의 역사를 아스카(飛鳥)라고 하는데, 한자로 飛鳥(나는 새)라고 쓰고는 왜 ‘아스카’라고 읽는 것일까? 또 그것을 한자 ‘明日香’이라고도 표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飛鳥 또는 明日香(아스카)이라는 지명은 마쿠라고토바(枕詞-특정한 말 앞에서 그것을 꾸며주거나 성조를 맞추는 역할을 하는 수식어)로 해석해 왔지만, 한중일 삼국 문화의 빛으로 비춰보면 어둠이 바로 걷힌다. 날다(飛ぶ)라는 말에는 하루를 나타내는 일日이 한국에서는 모두 ‘날’로써 같다. 하늘을 나는 새, 날이 새는 明 모두 ‘날’이다. 결국 한국에서는 ‘나는 새’도 ‘날이 새다’도 모두 같은 소리인 ‘날새’가 된다. 이것이 飛鳥와 明日의 ‘동음이의어’로 본 것이다. 그것을 증명해 주는 〈만요슈(万葉集)〉에 나오는 노래가 있다.
飛鳥川 高川避かし越え来しを
まこと今夜は明けずも行かぬか
‘아스카 사내는 사랑하는 아스카 여인을 만나러 땅거미가 질 무렵, 물이 불어난 아스카 강을 가까스로 건너가 그 뜻을 이루네, 오늘 밤은 정말 날이 새지 않았으면 좋겠네’라는 노래다. ‘나는 새’를 ‘날이 새다’에 연결해 이중적 의미를 갖도록 한 것인데, 문자는 중국어, 말은 일본어, 그리고 의미는 한국어에 의해 구축된 것이 아스카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일본, 한국의 말과 문자가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 ‘비조마을’을 구축한 것이 다름 아닌 야마토(大和) 시대의 모습인 것이다.
한류(韓流)는 이미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키워드가 된 지 오래다. 이는 중국의 젊은이들이 한국 TV드라마와 대중가요 붐에 대한 경고의 뜻으로 1999년 〈베이징 청년바오(北京靑年報)〉가 처음 사용한 신조어다. 그러나 한류는 똑같은 발음 한류(寒流)라는 의미도 숨은 그림자처럼 숨겨져 있다. 韓流가 寒流처럼 될 우려는 얼마든지 있다. 한국은 이미 2004년 일본의 대중문화를 전면 개방했으며, 일본에서도 〈겨울연가〉가 공전의 히트를 하면서 맹렬히 일본 거실에 침투하기도 했다. 일본인은 오랫동안 서양에 대해서는 열등의식을 품으면서도 아시아 주변인에 대해서는 우월의식으로 차별을 해 왔다. 〈겨울연가〉는 이 두 콤플렉스 안개를 보기 좋게 날려버렸다. 또한 중국은 15세기에 이미 350년 뒤 실제로 일어난 산업혁명에 필요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풀무 용광로로 700년간 최대 철을 생산했던 나라이고, 화약, 대포, 나침반, 종이와 활자, 바퀴 달린 운송 수단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을 능가했다. 2만 8천 명의 대선단을 꾸려 탐험대를 아프리카에 보낸 적도 있었다. 콜럼버스의 4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모든 면에서 영국보다 앞서 있던 중국이 왜 산업혁명을 일으키지 못한 것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법률과 체제 시스템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기술을 발전시키는 특허법 등을 제도화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황제의 칙령으로 원양선 건조와 항해를 금지시켰다. 삼권분립을 탄생시키고 오랫동안 적대관계이던 나라들이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제도로 바꿔 EU를 만든 것과는 크게 달랐다. 자식은 부모에게 孝를 다하고 부모는 자식에게 慈로 대하며, 신하는 임금에게 忠을, 임금은 신하에게 仁을 베푼다고는 하였으나, 이것이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면 인과 자는 사라지고 충과 효만 남아 일방적인 적대 논리로 변해버린다. 경직된 관료주의에 의한 사상과 유연한 상상력은 지하문화로 숨어 겨우 명맥만 유지해 왔다.
A가 B를 이기고, B가 C를 이기고, 또 C가 A를 이기는 승패의 순환과 점점 어두워지면 밝아지는 하루, 점점 추워지면 따뜻해지는 사계절이라는 순환처럼 ‘3자관계나 4자관계’의 직선적인 인과율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명암과 한난(寒暖)의 바이오리듬으로 움직이고 있는 세계에서는 확률과 정보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가공의 시뮬레이션으로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 상상력과 직관력이 무게를 갖는다. 가위바위보를 하는 사람은 더 이상 동전 던지기를 할 때의 개인이 아니다. 상대가 무엇을 낼지 슈퍼컴퓨터도 예측할 수 없는 승부지만, 결코 상대를 묵인하지 않고 또 자신을 우연과 부조리의 어둠 속으로 내던지지도 않는다. 아시아인뿐만 아니라 세계인 모두가 갇힌 채로 계속해서 위로 향해 한없이 속도를 올리는 엘리베이터에서는 현기증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야 한다. 그리고 문명의 현기증과 구역질을 치유해줄 새로운 여행을 떠나야 한다. 길은 시작과 끝이 없다. 끝나는 곳이 시작하는 곳이다.
“한국 아이들은 ‘가위바위보’를, 중국 아이들은 ‘차이차이차이’를, 일본 아이들은 ‘장켄폰’을 외칠 것이다. 서로 주먹을 휘두르는 격렬한 싸움처럼 보이지만 승부를 경쟁하며 즐겁게 할 수 있는 놀이, 공장에서, 전쟁터에서, 시장에서 들려오는 땀투성이, 피투성이의 외침이 아니다. T.S. 엘리엇의 트릭처럼 ‘기억 속의 희미한 말소리’가 들릴 것이다. 한 번도 간 적 없는 길,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문을 향해 다가가는 발소리가 들릴 것이다. 하나가 된 반도가 보이고 아시아가 보이고, 세계가 보일지 모른다.”책을 마무리하면서 저자가 한 말이다. 이어령 그가 그립다.
“도구(동전)에서 ‘신체’(손)로, ‘소유’에서 ‘접속’으로, ‘실체’에서 ‘관계’로, ‘물건’에서 ‘마음’으로 시대의 가치 축은 완만하게, 그러나 확실히 옮겨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탁월한 문명비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이 책이 「문화론」이 아닌 「가위바위보 문명론」이라고 명명되는 이유다.”일본 미술사학자이자 미술평론가인 다카시나 슈지(高階秀爾)가 책 후기에서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