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시편 126편 1-6절
설교제목 : 울며 씨를 뿌리는 자
코로나를 지나며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코로나 이후 두 번째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합니다. 오늘 입동입니다. 벌써 겨울의 입구에 서 있습니다. 코로나 19는 어쩌면 하나님께서 문명의 수레바퀴가 굴리는 질주를 향한 일종의 가두기이자 적색등처럼 멈춤의 신호를 보낸 것일 수 있습니다. 위드코로나가 선언되면서 경기장과 식당이 다시 활기를 찾은 모습을 보도되었습니다. 좌석수의 50%가 대면 예배로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국면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나는 이 시간을 통하여 무엇을 경험하고 배웠을까 질문을 던져보면 그냥 버티었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럼에도 고단한 시간 속에서 건강하게 지금까지 일상을 유지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것 같습니다.
지난 주 남한산성 등산을 했습니다. 작년 2월부터 허리가 아프고 처음 시도한 등반이었습니다. 집에서 걸어서 남한산성 문 입구까지 걸어갔습니다. 예전과 같은 속도로는 도저히 산을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안쓰던 근육들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이 들고, 마스크를 쓴 채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길은 숨을 헐떡이게 했습니다. 그런데 힘들었지만, 자연의 소리가 들리고, 하늘에서 낙엽이 비처럼 떨어지는 광경을 보며, 숨 고르기 할 수 있었습니다. 정상에서 잠시 쉬고 내려오는 길을 계단 길을 택해서 내려왔습니다. 다리 근육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하룻밤을 자고나니 종아리 근육이 아파서 걷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두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이 종아리 아픔은 설악산 대청봉에서 20대 후반에 등반 후 느끼는 등산의 훈장같은 느낌이 들었고, 등산할 정도로 허리가 좋아진 것에 대해 감사를 느꼈습니다. 코로나가 발발하면서 허리 통증이 제 기능을 되찾을 수 있게 된 것이 좋은 신호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무엇이 감사할까에 돌아보니 가장 큰 감사였습니다.
어떤 형태로 우리의 삶이 회복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잘 견디고, 건강하게 얼굴을 마주할 수 있어서 감사드린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포로됨
오늘 본문의 시편은 표제가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라고 붙여져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간다는 말은 ‘계단들’을 뜻하는 말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순례자들이 성전에서 예배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면서 불렀던 노래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내용상으로 “유배에서 돌아오며 부르는 노래(예루살렘 성서)”로도 볼 수 있습니다. 1절은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시온에서 잡혀간 포로를 시온으로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을 꾸는 사람들 같았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다가 해방되어 다시 돌아오는 길이 꿈결같다고 노래합니다. 성서는 한결같이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되게 한 분도, 그들이 포로에서 풀려난 것도 그 주체를 주님, 야훼라고 선언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되게 하셨을까요?
포로됨은 일종의 선택된 백성들에 대한 야훼의 진노이자 심판이었습니다. 계약을 맺고, 선택된 자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와 계약을 맺은 집단과 개인이 자기와 온전하게 연결되지 않으면 엄중한 책임이 따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포로기간은 심판임과 동시에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불의 시간,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사로잡힘은 응고라 할 수 있습니다. 폰 프란츠은 이런 사로잡힘에 대하여 말합니다.
사로잡힘은 투르바Turba에서 중요한 개념이며, 변환의 목적으로 휘발성 있는 정신 또는 영혼의 “고정화(응고화)”를 상징한다. “영혼은 노예처럼 빨리 붙잡혀지고, 그래서 달아날 수 없고, 병들고, 녹슬고 썩는다. 하지만 도망치지 못하기 때문에 영혼은 자유케 되고, 그녀의 배우자를 얻는다.” 고정화는 그리스 연금술에서 ‘카토케κατοχη’(감옥에 가둠)라고 불려진다... ‘카토케’란 용어는 동시대의 종교적 문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는데 그것은 “신성함(그리고 광포함조차)에 의해 붙잡힘”이나 “초심자(풋내기)의 자발적 격리”을 의미했다.[Von Franz Marie-Louise(2000) : Aurora Consurgens, pp269-270.]
새로운 변환을 위하여 휘발성 있고, 불안정한, 그리고 변덕스런 정신 또는 영혼을 의도적으로 가둡니다. 이런 의미에서 포로됨은 이스라엘의 불안전하고 제멋대로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변환의 용광로인 셈입니다. 지금 전체 문명이 경험하는 코로나 19의 상황도 제멋대로인 인간의 욕망을 가두었던 시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갖 종류의 노예, 감금, 갇힘, 쇠사슬 그리고 통제의 일부인 이런 포로의 이미지와 경험은 개성화 과정의 한 단계입니다. 자아가 더 이상 그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고, 따라서 자기에 의해 감옥을 경험하는 상황입니다[에드워드 에딘저 지음, 심상영 옮김 : 융심리학과 시편, p197].
이런 붙잡힘, 포로됨의 다음 단계는 감옥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변환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2절의 노래처럼 입은 웃음으로, 혀는 찬양의 함성으로 가득 차는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되고, “주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셔서 큰 일을 하셨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자아가 태도의 변화를 겪고, 하나님이 부과한 제한을 기꺼이 수용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합니다. 거의 모든 심리적 고통은 특정한 경험에 대한 자아의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융은 말합니다.
사람들이 바로 그 신경증적 관점들 때문에 병들었는데도 말이다. 그로 인해서 신경증적 동인이 마치 먼 과거에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게 된다. 실제로는 신경증은 날마다 새롭게 제조된다. 그리고 그것도 잘못된 태도를 통해서 제조된다. 그 잘못된 태도란 신경증 환자가 그 잘못된 태도로 행하는 것과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면서 자신의 신경증 이론을 정당화시키는 데 있다.[융, 《융기본저작집 8권, 영웅과 어머니 원형》, p414]
문제는 과거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잘못된 태도, 의식적 일방성에 있습니다. 만약 나의 편향되고, 편협한 의식적 태도를 바꾼다면 고통은 훨씬 경감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괴로움을 주었던 한계들을 수용하면, 그 한계는 더 이상 감옥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오늘 시편기자의 노래처럼 바벨론의 포로됨의 땅에서 예루살렘의 자유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나를 괴롭게 하고, 붙잡고,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 포로됨을 통하여 나의 한계를 직시하고, 그 한계를 수용하여 삶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꿋꿋하게 내디디어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눈물 흘리며 씨뿌리기
네겝(말라 있는 남방시내)의 시내들에 다시 물이 흐르듯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돌려보내주시길 간청하며 노래합니다. ‘포로를 돌린다. 돌려보낸다’는 운명을 바꾼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전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싹 마른 시내가 물이 갑자기 가득 차서 생명력으로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품을 수 없었던 삶이 생명력으로 다시 활기를 되찾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눈물로(울며) 씨를 뿌린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 울면서 씨를 뿌린다는 것은 씨뿌리는 과정이 어떤 슬픔과 비탄, 비참함의 정서가 담겨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깊이 새겨보면 뿌려진 씨는 눈물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민간 전승에 보면 곡식을 뿌리면서 우는 일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땅에 묻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들(대부분은 여자들, 여성들이 농경을 주도했기에)은 곡식을 심으면서 풍요의 신의 죽음을 애통해 했습니다. 그들이 충분히 슬퍼했다면 그것이 봄에 그의 부활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Ad de Vries, Dictionary of Symbols and Imagery, p496, 위의 책, p199 재인용] 여기에 죽음과 재생의 사상이 깃들여 있습니다. 결국 이런 슬픔과 비탄은 창조적인 측면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이런 슬픔과 비탄의 눈물이 우리를 치료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래서 눈물은 해소이자 치료제가 되기도 합니다. 눈물을 흘리는 꿈은 그 자체로 어떤 해소와 치유를 경험하게 합니다. 슬픔, 비탄, 상실, 죽음과의 만남이 의식적으로 다루어질 때 인격은 상실보다 더 큰 수확을 거둘 수 있고, 그럼으로 우리의 인격은 확장되어 집니다. 슬픔의 눈물은 새로운 차원에서 삶을 증진시켜 주는 동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힘겹고 고통스런 삶, 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씨를 뿌린다는 것은 자신에게 부과된 생명력, 발아를 기다리며 자신의 잠재성을 뿌리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뿌리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힘들고 고단하고, 지치고 눈물이 나는 상황에서 뿌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슬픔 속에서 희망이 가물거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눈물 흘리며 발아를 기다리는 잠재력을 뿌려야 합니다. 언제 그것이 싹이 날지 열매 맺을지 계산하지 않고, 성실함과 곡진함으로 울며 뿌림을 시행할 수 있다면 반드시 기쁨의 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추수는 이런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요, 인격의 열매, 삶의 희망은 울며 뿌리는 자에게 주시는 몫입니다. 저는 이 진실을 경험적으로 믿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는 이 말씀을 굳게 붙들고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