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감긴 눈으로 예수를 본다. 늙은 시므온의 왼쪽 눈꺼풀은 거의 내려앉았다. 오른쪽 눈꺼풀을 반나마 들어 올리는 것도 버겁다. 아기 예수는 시므온을 맑은 눈으로 쳐다본다. 눈동자 또렷한 맑은 눈이 사랑스럽다. 사랑스럽던 아기 예수는 장성한 후에도 사랑이었다요일4:16.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원수마저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셨다. 사랑하시다가 예수께선 원수 같은 이웃들을 위해 죽음마저 감수하셨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던 사랑은 무력無力하기만 하다. 메시아를 기다리던 이들은 무력武力을 기대했겠으나, 예수께선 칼을 칼집에 넣으라 하시며, 끝까지 사랑하시다가 무력無力하게 죽으셨다요13:1.
바울도 사랑을 말했다. 믿음보다, 소망보다 사랑이 우월한 가치라 한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믿음보다 소망보다 우월한 사랑을 말하기 전, 하나님 보는 것을 기대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바울은 거울을 보며 희미한 하나님 얼굴을 본다. 거울에 비친 하나님은 바울 자신의 얼굴에 드러난 하나님 얼굴이다. 거울 속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며 희미하게나마 하나님 얼굴을 본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통해 희미하게 비치는 하나님 얼굴을 보지만, ‘그 때에는’ 하나님 얼굴을 마주 보게 될 것이라 바울은 기대한다. 지금은 자기 얼굴을 통해 하나님 얼굴을 보고 하나님 뜻을 헤아리는 것이라,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 뜻은 기껏 훌륭해도 전혀 완전치 않다. 사람들에게 하나님 뜻을 펴는 이는 그래서 온유와 겸손으로 말하는 게 마땅하다엡4:2.
도미니스Dominis, 1560-1624가 남긴 말이라고 한다. “본질엔 일치를, 비본질엔 자유를, 이 모든 것에 사랑을” 사람 사는 세상에서 반드시 일치시켜야 하는 본질이 있다.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평화를 유지하는 것에 이견은 없어야 한다. 아기 예수가 땅에 오셨을 때도 땅에 평화가 선포 되었다눅2:14. 평화를 돈으로 사야 할지, 적대 상황을 대화로 풀어야 할지, 적대 세력을 힘으로 억제해야 할지 다양한 이견을 표현하는 건 자유다. 일치를 강조하든, 자유를 허락하든 이 모든 것에 사랑을 더하라는 옛사람의 말이 아름답다.
숨은그림찾기 하듯 거울 속 내 얼굴에서 사랑을 찾는다. 사랑보다 분노가 앞서고, 사랑보다 비판이 크고, 사랑보다 체념이 짙어, 거울 속 내 얼굴에서 사랑을 찾기 어렵다. 분노와 비판과 체념으로 가득한 내 얼굴을 비추는 거울에서 하나님 얼굴을 찾기 어렵다. 바울은 희미하게나마 보았다는데, 내 거울 속엔 하나님 얼굴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시므온처럼 늙어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 없을 만큼 무력해지면, 희미하게나마 내 거울 속에서 아기 예수를 볼 수 있을까.
세월에 풍화되어야 겨우 무력해지는 사람은 평생 사랑이 서툴다. 아기 예수를 보는 시므온은 그 사랑을 품에 안는 게 여태 서툴러 손날을 세워 기도하듯 아기 예수를 받쳐 든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내 사랑은 서툴겠다. 마지막까지 서툴게, 그래서 기도하며 사랑하다가 마침내 아기가 되겠다. 늙어 무력한 아기가 되어 눈꺼풀을 더 이상 들어 올릴 수 없을 때, 비로소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면, ‘그 때’에야 맑은 눈으 하나님 얼굴을 보게 될까. 손날을 세워 기도한다. 지금 서서 거울을 볼 수 있을 때, 지금이 ‘그 때’가 되어 내 얼굴에서 아기 예수의 얼굴빛이 드러나게 하소서. 내 얼굴을 보는 이들이 언뜻, 하나님 얼굴을 일별하게 하소서. 아멘.
(목회와신학 23년 12월호)
글/ 민들레교회 목사 김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