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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동교회 개척의 길 개척이야기1
고린도전서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990.12.10일 32살에 용현동교회를 개척하여 35년째 사역하고 있다.
개척은 두가지 경우로 하게 되는 것같다.
한가지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하고 다른 한가지는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경우이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개척하는 교회는 대형교회에서 사역하는 중 그 교회에서 개척을 해주고 물질과 인력을 몇년간 보장해주는 경우이거나 개인적으로 탁월한 은사를 가지고 준비하여 개척하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의 개척은 어쩔 수 없이 개척하는 경우이다. 이경우는 부교역자로 청빙을 받지 못하거나 더이상 사역지에서 사역의 기회를 얻지 못하여 떠날 수 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일때 어쩔 수 없이 개척하는 경우이다.
이렇게 개척하던 저렇게 개척하던 개척교회는 일반적으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개척한 목회자는 교회세움율이 60%라면, 어쩔 수 없이 개척한 목회자는 교회세움이 약10%도 안되는 것 같다.
요즈음에 직장생활 하다가 나이가 되어 은퇴하고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신학공부하고 직장은퇴자금으로 남은 생애 전적으로 주님께 몸을 받쳐 보겠다고 상가를 얻어 열정적으로 개척을 해보지만 1-2년안에 보증금 다 까먹고 결국 마지막 은퇴자금도 살아지고 교회도 사라지는 것을 많이 보게되어 안타까움을 느낀다.
우리교회도 1990년도 개척할 당시 조그마한 동네인데 지역개발부흥의 발 맞추어 주변에 7개 교회가 개척하여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세대 30년이 지난 지금은 다 없어지고 또 다른교회가 수없이 들어왔지만 얼마나 견딜지 미지수이며 아직까지 쭉 한자리에 용현동 지역교회로서 34년동안 생존한 교회는 우리교회 하나만 남아 있다
생존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거부감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믿는 우리는 모두 교회의 지체로서 유기체적 공동체이기 때문에 생존이란 단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생각되어 사용한다.
장년목회경험도 없이 아무것도 준비 되지 못한 나로서는 개척의 종류 중 첫번째가 아니고 두번째 경우로 개척하여 아직까지 생존하고 있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생각한다.
어떻게 34년간 용현동교회가 생존하였으며 앞으로 계속해서 용현동교회가 생존 할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일까?
나의 개척을 두 번째 경우라고 말한 것은 서울에서 파트교육전도사로 사역하다가 개척하였기때문이다.
나는 경기도 고양군 중면 주엽리 815번지에서 3형제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3형제는 초등학교시절부터 당시 신동아 일보 신문을 학교수업 맞치고 집에 오면서 돌렸다. 동생이 1--2학년이고 나는 3-4학년 형님은 6학년-중1학년때 눈보라가 몰아치는 아주 추운 겨울에 길을 잃어 버릴때도 있었고, 손을 호호불어가며 신문을 돌렸다. 여름에는 50개든 아이스케키통을 책가방 담보로 한통에 25원짜리를 받아 50원으로 팔기 위해 일산극장앞에서 서성거리다가 다 팔지도 못하고 녹아버려 혼난적도 있다.
교회는 초등학교 4학때부터 앞집에 친척형님의 인도로 다니기 시작하였다.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교회를 다니지 않으시는 어머니가 일찍깨워주시어 새벽기도를 다니기 시작하였고, 중고등부수련회도 같이 참석하였는데 당시는 삼각산 기도원, 한얼산 기도원에 주로 다니었다.
넉넉치 않는 가정에서 고등학교를 들어갈수 없어 주경야독을 하겠다고 초등학교 동창따라 서울 청개천 4가에 있는 봉신전기라는 공장에 들어가서 월급7,000원 받으며 일을 하였다. 야간에 공부할 곳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1년이 그냥 지나갔다. 하고 싶은것이 안되어 얼마나 실망이 되었는지 세상살고 싶지 않아 농약을 먹고 자살을 하였다가 3일만에 적십자병원에서 깨어나 살아난것은 기적이다.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존경하는 담임목사님을 통하여 주경야독하는 고등성경학교를 소개받아 들어갔다. 낮에는 책을 팔러 다니거나 시계유리 각내는 공장, 꽃만드는 공장등에 다니며 일을 하고 밤에는 영성있는 목사님들을 통하여 성경공부를하였다. 허술한 기숙사에 있으면서 어떤 날은 새벽기도를 나가다가 연탄 깨스에 취하여 마당에 쓰러졌는데 사감님이 보시고 동지미국물을 마시게하여 깨어 일어나 새벽기도회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대학을 입학하여 1학년 2학기초에 군에입대하여 33개월 복무맞치고 재대하여 복학하였다가 휴학했다 복학했다가 하며 8년만에 대학을 맞치었다. 학부때 제일 중요한 경험은 학우가 예수님을 영접했냐고 하면서 4영리를 가지고 예수님을 소개하여주었다. 그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마음에 영접하였다. 거룩한 종교인에서 진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때에 느낌은 하늘이 청명하고 학교캠퍼스 운동장 가에 있는 모든 나무들이 나를 행해 춤을 추는 것 같고 뜬구름위에 떠다니는 기분으로 기쁨이 넘쳤다. 그때 아마 나같은 죄인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 감사하여 주를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생명을 받치겠다고 유서를 써서 가지고 다니며 사명의 헌신을 하게 되었다.
최초로 교회사역은 1985년도 학부 4학년때 서울 신월동이라는 지하교회에서 사례비 월1만원으로 유초등부 사역을 하다가 학부를 맞치고는 고향교회로 내려와 1년동안 주일학교를 섬기었다. 그리고 1987년도에 총신대학신대원 들어가서 4월부터 독산동에서 교회에 파트별 협력사역으로 월 3만원사례비로 중고등부 3명을 가지고 시작하여 매주토요일에 공원에서 전도하여 1년 6개월만에 30-40명정도로 성장 하였다. 그리고 신대원 2학년 학기초 결혼하니 사례비를 배나 올려주시어 6만원 받고 사역하다가 10월말에 사임하고 3개월 공백기간으로 여기 저기 대형교회탐방을 하며 지냈다.
새해가되어 삼양동에 있는 교회로 부임받아 20여명 모이는 중고등부 파트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 신대원을 졸업하고 강도사 고시를 보고 10월에 강도사 인허를 앞두고 중고등부는 부흥하여 출석 40-50여명이 넘는 상태인데 교회에서 계속 사역하라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사역지를 옮겨야 되는 상황이 되어 아는 사람도 없고 다른 교회에 부임 해 갈수도 없고 개척을 해야 되는데 준비는 안된 상태이기에 막막 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서울노회에서 강도사 인허 받는 날 1990.10.26일 형님이 갈데가 있다고하면서 1,600만원에 20만원 월세인 의정부 용현동(34평)에 개척장소를 탐방하고 계약하여 주셔서 주님의 뜻인지 2주간 청계산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하였다. 그리고 교육전도사 사역을 사임하고 의정부로 11월 17일(토)에 이사 와서 용현동교회를 1990.12.10(월) 개척예배로 시작하게 되었다
적어도 개척은 목회계획도 세우고 목회비전을 가지고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되는데 갈데도 없고 어쩔수 없이 무조건 개척하게 된 경우라서 전임사역도 부목사 사역도 해본적이 없이 중고등부 교육전도사로 사역하다가 바로 개척을 하니 교회운영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전혀 없이 전무상태에서 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파트타임교육전도사 사역때는 교회에서 사례비로 매월 15만원을 주어서 건축헌금 5만원과 함께 십일조, 감사헌금, 구제헌금, 선교헌금, 주일헌금을 꼬박꼬박 드렸는데 개척을 하고 나니 사례비는 0원이고 교회운영을 해야 하는데 월세 전기세등 공공요금과 두아이를 키우는데 우유값도 없는 당장 생활비가 문제가 되었다.
다행히 형님께서 월세 20만원을 매달마다 헌금하여 주셔서 월세는 걱정이 안되었지만 나머지 교회운영비와 가정생활비는 해결의 답이 없었다.
그래서 기도가운데 상가 34평 교회안에 사택을 1/3정도 막아 생활하고 있었는데 작은 공간이지만 1/3막은 사택에다가 놀이방을 개원했다.
왜냐하면 아내가 돐지난 큰아이와 돐도 안된 연연생 둘째를 데리고 전도활동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옆꾸리에 난소염으로 심한 통증을 앓고 있어 힘들어 하였기때문이다. 그래서 전도라는가 심방같은 외부활동 할 수 없었기에 놀이방을 개원해서 전도하기로 한것이다.
1991년 2월1일에 놀이방을 개원 하니 교인 자녀들이 몇명 안되지만 입학하고 하여 돌보아줄 선생님을 구했는데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는 김순안선생님이 오시고 나중에 김경순 선생님께서 오시어 돌보아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려울때 놀이방 시작하는데 있어서 큰 힘을 준 선생님들께 감사 할 따름이다. 아이들을 잘 돌보아주니 부모들이 우유등 간식을 많이 가져다 주며 우리 아이들에게도 먹이라고하여 자녀를 키우는데 매우 도움이 되었고, 교회도 원아 부모들이 한 두분씩 교회나오는 열매가 되었다. 이로인하여 다행히 월세외에 교회운영비는 놀이방 아이들이 내는 원비로 전기세등 공공요금을 내니 그런대로 교회가 운영되었다.
그렇지만 개척교회의 즐거움은 새로운 성도가 생기는 것인데 주변에 교회가 많이 있고 이미 자리를 잡은 교회들 많이 있어서 그런지 우리교회는 원아부모 한두사람외에 교회에 구경도 오지 않아 2년이 되어가도 가족외에 몇명 모이지 않는 상태로 계속 예배드리고 있었다. 교회를 어떻게 해야될찌 답답해 미칠지경이 되어 사생결단을 하고 40일 금식을 하기로 작정하게 되었다
1991년 10월 경기노회에서 목사 안수 받은후 교회세움을 위하여 1992년 5월 중순부터 6월말까지 40일금식기도를 하였는데 '더 이상 이대로는 목회를 못하겠다'고 하나님께 하소연 하며 '저를 금식기간동안 데려 가시던지 특별한 은사를 주셔서 교회를 세워 부흥을 시켜 주시던지 해달라'고 40일동안 매일 5번씩 예배하며 성경 읽으며 기도를 하였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생명을 데려가지 않으시고 연장시켜주어 40일 금식끝나는 시기에 요한일서4장8절 를 읽는 중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말씀과 함께 이사야 40:31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말씀을 가지고 목회를 “하나님사랑과 여호와 앙망”으로 할 것을 마음에 심어 주시었다
영혼사랑으로 목회하면 된다는 목회 자신감을 가지고 금식후 보식기간인데 몸은 돌보지 않고 성경공부를 가르친다고 몇명안되는 성도에게 교회 나오라고 하여 성경공부 준비하기위해 피아노의자를 옮겨 앉으려 하는데 허리가 이상이 생겨 걷지도 기지도 못하고 꼬박 일주일동안 누워만 있어야 했다.
심지어 화장실도 가지못해 소변통으로 소변을 받아내야 했다.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40일 금식후 나의 자신감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하라고 40일금식을 맞친 나에게 허리를 쓰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모든일은 오직 하나님만의지 하라는 뜻 같았다
이후 목회는 주님께서 이루신다는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교회상가 옆에 새로운 상가를 짓고 있었는데 현재 상가보다는 큰 상가였다. 하나님께 기도하길 아무것도 가진것은 없지만 새로운 상가로 이사가도록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상가로 3층 4층 전세 6,500만원으로 계약하고 허리가 아픈상태로 이사하게 되었다
전세 자금은 형님께서 일산신도시 되면서 보상 받은 것으로 부천에다 27평 아파트 하나 사주신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팔아주셔서 교회안에서 살다가 보광아파트로 이사가서 살고 있었다. 살고있던 보광아파트 전세금빼고 상가교회 보증금하고, 나머지는 형님께 빌려서 전세자금을 마련하여 이사를 하게 되었다
바로 옆이라 이사짐센타를 부르지 않고 성도들이 크고 작은 이사짐을 다 옮기었다. 당시는 남성 성도가 없는 상태라서 몇명 안되는 여성도들이 긴 의자 12개를 상가2층에서 내려 새로 이사하는 상가 3층 예배당으로 옮기었다. 지금도 그일을 생각하면 눈물겹도록 감사감사한 마음 뿐이다.
나는 허리가 아파서 물건하나 들지 못하고 지켜 보고만 있게 되어 도와주지 못해 매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사한 곳은 1992년 11월에 총74평으로 3층(37평)은 예배당, 4층(37평)은 놀이방에서 몬테소리선교원으로 변경하여 개원하였고 4층안에 살림집으로 꾸며서 사용했다.
이후 상가들이 모두 입주하여 2층은 한진가스 엔지니어가 들어오고 1층은 가구판매가게 들어오고 지하실은 공실 이었다.
이전예배를 드리고 열심히 전도도 하니 감사하게도 옆에 있던 월세 교회보다는 이사한 전세교회가 약간 부흥이되어 20여명이 모여 목회가 재미가 있어 비전이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이사하고 3년째인 1995년 가을 9월 17일 주일낮예배중에 뒷좌석에서 수근수근 거리며 사모님이 밖으로 나가고 한 두사람도 같이 나가며 예배분위가 흩어졌다.
그래서 예배를 조금 일찍 마무리하고 나가서 알아보니 건물주차장에서 초등학생 1학년이었던 큰아들과 유치원아이들 6-7명이 모여 한진도시가스 엔지니어에서 공사하고 버린 부탄가스통과 라카통을 스레기통에서 주어 몇개모아 세워놓고 폭죽놀이를 하다가 불이 뻥하면서 퍼진 것이다.
다른아들은 뻥소리와 함께 라카통이 터지며 불이 퍼지는것 보고 무서워서 다 도망갔는데 우리 큰아들 영광이는 상가건물옆에 세워지 LPG가스통이 있었는데 가스통에 불이 옮겨 상가교회가 폭발 될까바 퍼지고 있는 불을 맨손으로 끄다가 그만 입고 있는 옷에 불이 붙어 버린 것이다. 불붙은 옷은 나이롱 체육복이라 온몸에 달라붙어 새까맣게 오그라진 것을 보고 동내사람들 중에 특별히 지금은 장로님이 되신 김진환장로님께서 예배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알려주고 아이를 데리고 성모병원에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모병원으로 급히 달려가 가보니 얼굴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새까맣게 되어 차마 볼수 없는 상태로 되어 있었다.
의정부성모병원에서도 우리는 할 수 없으니 화상전문 병원으로 가라고 서울에 있는 한강성심병원을 소개하여 주어 화상입은 아들을 보호자인 사모님과 집사님한분과 함께 구급차에 태워 서울로 보냈다.
나는 저녁예배가 아직 남아 있어서 먼저 보내고 저녁예배를 맞치고 한강성심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에 달려가 응급실에서 의사를 만나보니 3도 화상이 약25-30%정도가 되어 어린아이로서는 현재 95%살아 날 가능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5%가능성은 나에게 직업이 무엇이냐 묻길래 목사라고하니 당신이 목사이니 목사이기에 5% 살 가능이 있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험한것은 현재 허파에 천공이 생겨 급하며 매우 위험하다 하면서 어떻게 할꺼냐고 싸인이 있어야 치료한다고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조건 살려야 된다고 생각하고 속히 치료해달라고 서류에 싸인을 하고 기도하며 의사에게 부탁을 드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많은 화상환자가 들어와서 매일같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아들보다 덜심한 아이도 들어 왔지만 일주일 지나면 결국 죽어 나가는 것을 보았다. 온몸 화상이 얼마나 무서운것인지 뼈저리게 경험을 하였다. 그리고 중간 중간 병원에서 계산하라고하여 계산할때마다 중환자실 화상센터에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 줄 몰랐다.
20여명 모이는 개척교회목사인데 중환자실에서 하루에 보통 50-70만원 치료비가 들어가니 걱정도 될만한데 한번도 돈걱정은 하지 않고 그냥 하나님께 오직 아들 살려달라고 울면서 기도했다.
'예배시간에 불장난 놀다가 다른 아이들은 다치지 않았는데 왜 목회자 자녀가 화상당하여 죽어야만 하냐면서 기도하고, 아이가 죽으면 앞으로 더이상 전도도 안될것이고 하나님 영광을 가리게 되어 목회를 할수 없으니 아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하였다. 아들이 중환자실에 45일 있는 동안 매일저녁마다 교회에서 특별기도회를 하고 끝나면 밤늦게 서울에 있는 한강성심병원으로 달려가서 같이 있었다. 어느날은 밤에 병원에 가다가 너무 피곤하여 졸다가 교통사고도 나서 배상도 해준적이 있었다. 밤중에 병원에 있다가 새벽에 새벽기도하러 다시 교회와서 새벽기도회를 하고 이렇게 45일동안 왔다 갔다 하였는데 놀랍게 아들이 생명에 지장이 없이 치료가 되어 중환자실에서 중증실로 옮겨졌다. 할렐루야!
놀라운 것은 수많은 분들이 기도하여주며 치료비를 마르지 않게 보내주었다. 신대원동문교회에서, 노회교회에서, 동네 교회및 동네 가게들까지도 동네 아파트 부녀회 심지어 학교에서 조차 모금하여 보내 주어서 수많은 치료비를 걱정하지 않고 병원비를 내었고 남아서 퇴원하여 나중에 4번이나 전신마취하여 얼굴과 손 성형수술을 하였다. 앞으로 더 많이 수술해야 하지만 너무 마취를 많이 하고 수술하면 어린나이에 뇌세포가 망가져 장래의 삶이 어려워질 수 있을 것같아 장성해서 수술해야 겠다고 생각하고 수술을 중지하였다.
그리고 아들을 살려주심에 감사하여 찬조들어온 재정으로 교회에서 잔치도하고 나머지는 자녀의 일생을 주님께 맡긴다고 기도하며 모든금액을 헌금으로 받쳤다.
그당시 물질적으로 기도하여 주신 동역자들과 동네분들 모든지인들에게 감사한 마음은 무덤에 들어갈때까지 잊지못 할 것이다
큰아들의 사고는 요셉이나 모세와 같이 큰 아픔과 고통의 광야의 긴시간이었지만 그후에 하나님이 위로의 선물로 좋은 일이 생겼다. 첫째는 사택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들이 화상으로 머리부터 발까지 온몸 전체가 화상으로 햇빛에 약하므로 화상옷을 입고 다녔기에 매우 힘들어 했고, 오래동안 병원침대에서 지냈기에 아이를 보호하려면 아이의 방이 필요했다. 그동안은 상가4층 몬테소리선교원안에서 살림을 같이 하였기에 아이들 방도 없고, 그냥 살았기에 신협에서 500만원 대출( 2년은 이자만 내고 3년후부터 3년동안 원금을을 갚는조건)로 반지하방 2개 짜리를 전세로 사택을 얻게 되었다. 할렐루야!
특별히 감사한 것은 영광이가 1학년 2학기 초에 사고로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2학년 1학기에 베트맨 같은 화상옷을 입고 학교에 들어갔는데 김부겸담임선생님이 아들에게 부반장을 시켜주어 당당하게 학교를 잘 다닌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대출하여 반지하를 얻어 살고 있던 사택이 한여름에 의정부지역에 집중폭우가 솟아져 하수구가 넘쳐 화장실 똥물이 역수되어 거실에 있던 책장 한 칸까지 침수되어 생명같은 책을 다 버려야 했다. 그후부터 방에는 계속 물이 세어 나와 매일 물을 퍼내야 했다.
그래서 길거리 버린 장판을 볼때마다 주어다가 깔았는데 3겹을 깔아도 방바닦의 축축한물기는 여전하여 돗자리를 주어다가 또 갈고 지냈다. 물론 물침대에서 우리부부는 산다고 서로 위로하며 감사하며 지냈다.
당시 감사한것은 지금은 소천하신 변재란장로님의 장모님 최점례권사님께서 매일 같이 오셔서 한시간씩 방에서 흐러나오는 물을 퍼주시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얼마 지난 후에 형님께서 나의 형편을 들으시고 은퇴후에 쓰라고 분양받아 전세주었던 현대2차 아파트 34평에 들어가서 살도록 살고 있던 사람의 전세금 내주고 우리가 들어가 살도록 이사를 허락해 주셨다. 할렐루야!
두번째 좋은 일은 상가교회를 분양받게 된것이다
큰아들 영광이 사고 다음해인 1996년 교회바로 옆에 두동의 세아2차 아파트가 건설하였는데 세아아파트상가가 가운데 3층으로 세워졌는데 3층 42평을 분양한다고 하여 어떻게 해서든 분양받자 기도하며 상가교회 3층 전세금3,000만원을 빼고 나머지는 빌려서105,386,000원으로 상가를 분양받아 들어 가게 되었다. 교회상가는 주인이 빠뀌어 4층에 있던 몬테소리선교원이 시대에 맞추어 2층으로 옮겨서 1997년부터 용현몬테소리어린이집으로 변경해서 시작하게 되었다.
이 두가지는 큰아들 사고이후 하나님이 주신 위로와 축복이었다.
1996년에는 재정이 없어서 빌려서 일단 상가분양을 받았기에 내부에 인테리어도 못하고 유아실 칸만 막아 사용하였다.
분양받은 상가교회내부를 인테리어를 못한상태라 물나는 반지하에서 아파트로 이사 갔어도 벽지하나 창문 창호지 하나 새롭게 하지 않고 방에 빵꾸난 창문에 신문을 붙여서 있는 그대로 살았다.
그래도 아이들은 물나는 반지하에서 아파트로 이사한것이 얼마나 좋은지 데리고 오지 않던 친구들도 집으로 초대를 하였다.
그리고 새천년 2,000년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개척 10주년에 임야 4,080평을 62,000,000원에 매입하였다.
어려운 가운데 임야를 매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7년동안을 열심히 다니며 교회를 섬겨 오던 온가족이 가슴아프고 아쉽게도 떠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사오기전 서울에서 대형교회다닐때 부친께서 돌아가셨는데 교회산에 매장을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전에 다니던서울교회에서 전화가 와서 교회를 다시 나오던지 그 대형교회에서 동네 가까운 곳에 개척한 교회를 나가던지 해야지 아니면 교적카드를 빼겠다고 연락왔다는 것이다. 교적카드를 빼면 모친께서 돌아가실 때 교회동산에 부친과 합장 매장되지 못하게 되니 옮긴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여전도회장도 하고 주일학교교사도 충실하게 일하던 일꾼이 갑자기 자녀까지 식구 5명이 하루 아침에 빠져나가니 마음 너무너무 아프고 속이 상했다.
그래서 재정이 없지만 큰 아들 화상사고로 모아졌던 치료비 나머지 전부받치면서 산을 매입하였는데 그돈이 종자돈이 되고 어린이집과 나머지 몇사람에게 빌려서 포천에 임야를 매입하게 되었다.
산을 계약하자마자 교회집사님 부친이 돌아가시어 등기도 나기전에 매장을 하였더니 장례식이후 소천하신 자녀중 한명이 교회를 나오게 되어 가슴아펐던 마음이 위로가 되었고 보람도 가졌다.
교회가 조금씩 부흥하기 시작하여 교회재정으로 3,500만원 들여서 그동안 못했던 상가분양교회에 에어컨 설치및 내부인테리어도 예쁘게 하게 되었다. 아주깔금하고 보기좋았다.
드디어 이제 교회 빗도 없고, 재정도 교회도 부흥이 되어 재미있고 좋은 안정적인 교회가 되었다.
교회내부 인테리어 끝나고 바로 성전건축을 위한 1,000일 작정을 시작하여 매일 새벽, 정오, 저녁 3번기도회를 열심히 들어갔다.
기도회 기간에 다른 지역에 있던 우리노회 중형교회가 부동산하는 중학교 동창생을 통하여 우리가 찜해놓고 매입하려고 분할해 놓은 3구지 땅을 포함하여 통째로 전체의 땅을 매입하여 건축 하고 들어왔다.
그때 앞이 캄캄하여 절망적 이었다. 다른 교단이라면 이해를 하겠는데 같은 노회 같은 시찰이 바로 코앞에 교회건축하여 들어오니 우리교회는 상가교회이니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심 가운데도 계속 천일작정을 하루 3번씩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다.
마침 우리나라에 부동산및 경제 경기가 좋지 않아 땅값이 뚝뚝 떨어지는 시기에 부동산인터넷에 찾아보니 우리 동네에 교회에서 가까운 곳에 대지190평 4억3천5백만원에 작은 땅이 나와 있었다.
긴급 제직회를 열고 매입하기로 결정하고 2003년 1월 2일 신정 다음날 형님께 4,000만원 계약금을 빌려달라고 해서 땅을 계약 했다. 그리고 중도금과 잔금을 한달씩 길게 잡았다. 왜냐하면 교회 재정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계약을 해서 중도금 낼돈도 없어서 일단 길게 잡았다.
길게 잡았지만 중도금을 낼 한달은 금방 날짜가 다가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라에서 경기부양정책인지 몰라도 대지 대출이 90%까지 하는 정책이 발표 되어 대책이 없었던 중도금 잔금을 모두 대출로 해결하게 되었다. 이때 감격은 무엇으로 표현하기 어려울정도로 감사한 마음이 생겨 잠을 몇일동안 설친것같다
그러나 종교부지는 땅을 살 때는 면세이지만 2년안에 건축하지 않으면 20%세금이 부여 된다고 하여 어쩔수 없이 형님께서 물이 나서 이사해서 살고있는 아파트로 5,000만원 대출하여 설계를 하고 시청에 건축 신청하고 건축업자를 공개입찰로 선정하기로 하였다.
7개의 건설회사가 입찰애 들어 왔는데 그중에 제일 가격이 저렴한 업체를 선정하고 조건은 계약금을 4회 분활하여 내고 잔금은 건축후에 대출해서 가져가는 조건이었다.
다행히 한 업체에서 건축후에 대금을 받는 것으로 계약을 해주겠다는 업체가 나왔지만 우리교회는 4억 5천만원 계약금조차 준비도 되지 않은 어려운 상태이라 계약을 바로 하지 못했다.
대지구입도 계약금을 빌려서 계약했고 나머지도 90% 대출하여 매입하여 등기한 상태라 어디서 건축 계약자금을 마련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수동기도원에 들어가 40일금식 기도로 '하나님 저를 대려가던지 건축을 해주시던지' 하나님께 목숨건 결단의 기도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수동기도원에 들어가는 날 마침 형님께서 일산에 오라고하여 형님께 가니 동생과 함께 은행가서 각각 1억을 1만원짜리로 찾아 쇼핑백에 가득 넣어 주시었다.
기도원 들어가기 전에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보니 무엇인가 이루어질것 같았다. 그래서 1억원을 은행에 넣어 놓고 기도원으로 행하였다. 이것이 건축의 종자돈이 되었다. 그렇지만 1차 계약금은 1억 5천만원이기에 5,000만원이 모자라서 계약을 못하고 기도원에 들어갔다. 기도원에 들어가 금식하며 매일기도가 ‘저를 데려가시던지 건축을 해주시던지’하며 40일작정 금식기도하는 가운데 5,000만원이 준비되었다고 20일째 되는 날에 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건축에 더욱 확신을 가지고 기도원으로 건축업자를 오라고하여 계약서를 작성 하고 먼저 공사를 하고 착공식은 금식 끝나고 8월 15일에 하기도 하였다.
2004년 5월말에 수동기도원을 들어갔었는데 40일 맞치고 8월 중순되어 기도원에서 내려와 교회로 와 보니 벌써 새성전 건축을 위하여 지하를 다파고 바닦 콩크리트 공사를 하고 있었다.
착공예배를 8월 15일에 교회에서 드리고 성도들과 공사현장을 둘러 보았다.
이루 말할수 없는 기쁨이 솟아 올랐다.
그것도 잠시뿐 시간이 금방 금방 지나 한달이 지났다.
한달마다 계약금을 분활하여 1억원씩 내기로 했는데 벌써 한달 지난 것이다. 지하실은 다되었는데 더 올라가기 시작해야 하는데 공사가 중지 되었다. 2차계약금을 내야 공사시작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일산형님께 달려가 돈을 빌려달라고 하였더니 농협에서 밭을 담보로 대출해서 1억 5천만원을 해주시어 2차대금 1억원을 지불했다.
그리고 3차대금 1억은 살고 있는 아파트를 아쉽지만 매매하여 형님께 1차때 빌려온돈과 합쳐서 지불하였다. 현대2차 아파트를 1억2천에 매매하고 주공a으로 임시로 이사가서 살다가 교회가 완공하면 교회로 들어가려 계획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반지하에서 이사와서 각자 방이 있어 좋아 했는데 금방 아파트를 팔았다고 얼마나 많은 심통이 났는지 특히 막내아들 해동이가 사춘기 때라 정신적으로 엄청 스트레스를 받아서 자기는 주공으로 이사를 안가겠다고 땡강을 부리었다.
건축을 맞치고 주공에서 교회로 이사와서 우리 부부는 에레베터 옆에 지하실에서 살고, 아이들은 4층 게스트룸에서 각각 잠을자고, 밥은 2층식당에서 모여서 먹었다. 그러다가 큰아이는 2학년부터 의정부고등학교 기숙사가 건축되어 선발되어 들어가게 되었고, 둘째아들이 형을따라 의고에 입학하였지만 스트레스가 해결이 안되어서인지 학교를 다니다가 1학년 1학기때 싸움을 하고 자퇴를 하여 1년 내내 게스트룸에서 나오지도 않고 컴퓨터께임만하였다.
아마도 이때에 목회중에 제일 힘들었던 것은 자녀교육의 위기가 와서 어떻게 해주어야 좋을지 몰라 부모로서 많은 고민을 하였을 때이다.
기도하며 거의 1년을 마음고생하다가 사모가 결단하여 어느날인가 둘째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로 너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아파트 팔고 이사한 일에 미안하다고 사죄를 하고 나니 그이후로 변화되어 검정고시학원을 다니다가 영어를 100점을 맞으며 고등검정고시를 합격을 하였다. 이때에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4차 마지막 건축 계약금 1억은 상가분양교회매매와 어린이집 2층 보증금을 받아 지불하였더니 건축이 계속되어 벌써 교회뼈대인 H빔으로 거의 다 완성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2005년 드디어 4월 20일에 1,000일작정 매일 3번씩 기도하는 끝나는 날에 준공허가 나와서 4월 30일에 새성전입당예배를 감격스럽게 드리게 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기도응답은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기도응답은 무일푼에서 무에서 유로 아픔과 고통도 있었지만 역사적인 교회건축으로 놀랍게 이루워진것이다.
1990년 12월에 월세로 개척하고 1996년에 상가분양을 받고, 재정이 없어서 바로 내부 인테리어를 못하고 그냥사용하다가 4년후 2000년에 교회설립 10주년 기념때에야 내부 인테리어를 어렵게 평당 75만원씩해서 35,000만원을 들여 아름답고 감격스럽게 맞쳤고, 바로 미래 교회건축위해 1,000일작정을 하고 매일 3번기도를 시작했는데 끝나는 마지막날에 대지구입하여 건축하고 입당예배를 드리는 날이 된것이다.
성도들에게 건축헌금 작정한적도 없었고, 성도들의 집담보로 대출한 한가정도 없이 2,009,130,843원의 건물 지하1층 지상4층 건평419평이 완공되어 입당한 것이다. 물론 건축대금 모두 대출및 빌려서 주로 했지만 그래도 감사한일이다.
교회를 건축하면서 형님이 우리에게 살라고한 현대2차아파트(34평)가 희생되어 건축관계로 매매하고, 주공A전세로 이사갔다가 교회건축완공 이후에 교회로 이전하여 우리부부는 로비 바로밑에 지하 1층에서 방을 꾸며 살면서 성도들이 교회로 들어오고 나가는 발자국소리를 들으며 ‘하나님 우리성도들에게 하나님을 깊이 알게하소서’ 기도하며 지냈다. 지하방이 한겨울에는 얼마나 추운지 옛날 사모님께서 시집올때 해온 두꺼운 솜이불을 덮고 잠을 자도 추울 지경이었다.
여름에는 지하실이라서 쾨쾨한 곰팡이 냄새가 너무지독하게 나서 숨이 막힐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때로는 교회 본당에서 기도하며 잠을 잤다.
두자녀들은 다행히 큰아이는 의정부고등학교 학교기숙사에서 지내게 되었고 작은아이는 4층 게스트룸에서 지냈다. 식사는 지하실에서 올라오고 4층에서 내려와 2층 식당에서 먹었다.
불편한 것은 식사때마다 2층까지 매일 내려왔다 올라갔다하며 식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일기도하길 옥상에다 가건물이라도 지어 옮겨지길 바랬다.
다행히 거의 2년정도 그렇게 살다가 드디어 기도 응답으로 옥상에 가건물을 지었는데 사용 용도를 서재실로 나무집으로 1,700만원들여서 예쁘게 옥탑방을 만들게 되었다. 책장을 권집사님이 벽면에 설치하여주시고 작은 화장실과 전기온수보일러를 놓아 사워도 할 수 있게하고 부엌도 만들어 요리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우리 부부는 이제 지하실에서 옥탑방인 서재실로 이사하고 온식구가 아늑한 서재실에서 앉아서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며 도란 도란 지내게 되었다.
우리식구는 비록 잠은 각기 다른 곳에서 자지만 온 식구가 식사를 같이하며 성도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라면이라도 삶아 먹게되어 매우 좋았다.
그런데 그 행복한 순간도 잠시이고 2년 정도 지났을까 시청과 소방서에서 직원이 나와 옥탑방은 무허가 건물이라고 자진 철거하라고 하였다. 자진철거 안하면 계속 벌금이 나오고, 그래도 철거를 안하면 강제철거를 할것이며 철거비까지 청구하겠다고 엄포를 주었다.
옥탑방설치비가 아깝지만 그동안 계산해보니 만약 집을 얻어 월세로 살았다면 시설비1,700만원이 2년간 월세로 계산하면 액수가 같아 미련없이 철거하였다.
그리고 우리부부방은 교회 2층 식당옆에 있는 부식실및 창고실로 쓰는 곳으로 이사준비하고 식사는 다시 2층식당에서 하기로 하고 창고에다 벽지를 사서 준비하고 도배를 했다.
그런데 김00권사님께서 이 사실을 알고 나와 의논도 없이 큰아들 이름으로 보광아파트에다 1,000만원에 45만원 월세로 계약해 놓으시고 월세는 임직자들이 내겠다고 하고 일주일 세미나 다녀오니 이사를 다 해 놓았다
김00권사님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감사한 마음이 더 들었다.
왜냐하면 이제 보광아파트에 온 가족이 다같이 다시 살게 되어 감사했다.
이사하고 나니 오랜만에 온가족 남북 상봉이 된 것 같아 기뻤다.
물론 직분자들이 월세금을 낸다고 약속을 했지만 다들 어려운 형편들이라 내지 못하고 나중에 교회에서 부담하게 되었다.
물론 큰아이는 학교기숙사에 있다가 일주일에 한번 오고 가고 하지만 작은아이는 고등학교 자퇴하고 거의 1년을 방콕생활하다가 마음에 안정감을 가지게 되어 검정고시를 보고 합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해동이는 검정고시 합격후에 형님이 이사장으로 있던 캄보디아에 은혜국제학교로 같이 떠나 영성이 회복되고 태국에서 프랑스국제대학인 에이백대학에서 공부하게된 계기가 되었다.
건축하기전 상가교회에 있을 때 기도응답이 또 하나 있다면 동네 그린세탁소사업하시는 어머니 김호순집사님이라고 보광A에서 사셨는데 위암말기로 백병원에서 수술을 하려고 복개를 했지만 위암이 배안전체에 퍼져 다시 덮고 두달정도살면 오래살 것이라고 집에 모시고 가라해서 집에서 요양을 하시며 계시었다. 너무 아퍼서 교회도 나올 수 없어 일주일에 한번씩 찾아가 천국에 편안하게 가시라고 기도하며, 그래도 교회를 한번이라도 나오시고 가셨으면 좋겠다고 기도 드렸다.
당시 김호순집사님의 소원은 교회에 가서 예배한번 드리고 싶은것이 죽어도 소원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몸은 점점 더 나빠져 얼굴이 황달에다가 배는 복수가 꽉차서 배가 남산만해 졌다.
얼마후에는 얼굴이 흑달이 되었고, 물 한 목음도 들어가지 않아 차마 얼굴을 뵐 수 없을 상태까지 되었다.
그래서 가족들은 장례준비를 미리 하였다. 장지는 교회산에 매장하기로 서로약속하고 수의를 준비하며 집사님의 소천만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일주일에 한번씩은 가서 기도를 하였는데 거의 6개월을 침대에 누워 계셨던 분이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억지로 기어 화장실 변기에 앉으셨다. 그런데 놀랍게 무엇인가 배안에 있는 것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포도송이같은 알맹이들이 한 바케스 정도 나온것이다.
그후 남산만한 배가 속 들어가고 목구멍에 물이 조금들어가기 시작하였고, 조금씩 미음을 드시다가 죽을 드시기 시작하여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고 원기가 회복되어 그렇게 그리워하던 교회에 걸어서 나와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당시 교회가 3층 상가라 걸어 올라기가기 너무힘들다고 늘 말씀하시며 예배를 드리셨다
제가 집사님에게 ‘'교회건축하면 에레베터 꼭 설치할께요 건강하게 오래사세요’ 했더니 소원대로 교회건축하고 10년을 더 사시며 에레베터 타고 올르내리시며 20주년 기념예배때 명예권사로 취임받고 몇년후에 소천하셨다.
의사가 포기한 위암환자가 죽음직전에 있었지만 하나님이 뜻이 있으면 살려 주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후 교회 나오지 않던 아들과 며느리가 교회를 나오게 되었고 학습받고 세례받아 서리집사까지 되었다.
2004년 교회는 건축당시 70여명 출석하고 있는 상태라 2005년 입당할때 교회본당 300석 자리가 너무 허전할것 같아 둥근 타원형 식탁을 제작하여 만들고 테이블 주변에 의자를 둘러 놓아 호텔 컨프런스 환경처럼 앉아 예배를 드렸다.
몇년 안되어 교회가 부흥되어 둥근 식탁을 치우게 되고, 개인의자 250개를 구입하여 배치하였다. 중층은 장의자를 놓아 50명이 앉게 하였다.
300석의 빈자리를 채워야하는 부담감과 교회부흥을 고민하던 중에 STP에서 설교훈련까지 받으며 영성을 키웠다.
그러던중 건강한교회 둘날개를 소개받아 부산에 가서 두날개인 대그룹과 소그룹의 세미나를 듣고 열심히 목숨걸고 교회훈련을하였더니 교회가 5년정도지나고나니 건축당시보다 출석 성도가 3배정도 부흥하게 되어 선교지도 확장하여 보내는 선교하는 교회의 역활을 감당하게 되었다.
15주년때는 임직자도 새로뽑아 장로도 세우고, 안수집사도 권사도 세워 조직교회로서 기둥들을 튼튼히 세우니 교회는 계속 성장하게 되였다.
그런데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교인들끼리 게모임을 가지고 돈의 문제가 생기게 되고, 관계의 문제가 생기면서 목사에게 화살이 날아 왔다. 기도하면서 생각해보니 외형적인 교회성장에 치우친 결과임을 깨닫게 되었고, 우리가정부터 내적인 가정교육이 중요함을 적실히 느끼게 되었다.
교회성장의 꿈을 가지고 거의 교회에서 지내다보니 가정에서 자녀들하고 같이 밥을 먹을 시간이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둘째아들이 군대 가고 큰아이는 회계사 시험준비한다고 서울에서 방을 얻어 시험공부중이라 주일에는 예배를 위하여 교회에 잠깐 왔다가 예배 끝나면 바로 공부하러 가버렸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러다가 자녀를 키워온 보람이 없을 것 같았다. 저렇게 공부해서 회계사합격하여 회사에 들어가면 회사일 바쁘다고 얼굴 보기도 어려울것이고, 그러다가 때가 되어 결혼하여 분가해 나가면 부모로서 과연 자녀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쳤다고 할까 고민이 생겼다.
그러던중에 신문에서 ‘자녀를 제자로 삼으라’라는 광고문구를 보게 되었다. 바로 현용수교수님이 운영하는 쉐마교육세미나이었다.
1차에서 3차까지 교육이 있는데 1,2차는 국내에서 교육하고 3차는 미국현장에 다녀오는 교육이었다. 1차교육에 참여하여 감동받고, 그 주 토요일에 큰아들에게 문자로 연락하여 오랜만에 집에서 같이 저녁밥을 먹자고 문자를 보냈더니 아들도 집밥을 먹은지 오래되서 그런지 약속된 시간 토요일에 집에 들어온 것이다.
정성것 준비한 밥을 맛있게 같이 먹은 다음에 일주일동안 세미나에 다녀온 이야기하며 토요일마다 식사하면서 쉐마가정예배를 드리자고 했더니 자기는 큰아들이라 순종 하겠지만 군에 간 해동이는 안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할것이냐하여 그것은 나중일이니 하나님께 맡기고 너만 잘하면 되다고 하니 그후부터 매주마다 쉐마가정예배를 토요일 저녁에 드리게 되었다.
쉐마가정예배는 여러 순서가 있지만 어머니축복노래로 아내 존중하는 노래로 시작하여, 일주일동안 있었던 일을 나누고, 말씀을 읽고 나누고, 기도제목을 나누고, 같이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아버지로서 자녀들에게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해주게 되어 아버지로서로서의 정체성이 살아나게 되어 가정예배는 일주일 중에 제일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으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둘째아들도 군에 있는 동안 휴가나와서 간간히 함께 예배드리고 제대하고는 본격적으로 우리가정은 쉐마 가정예배를 소중하게 여기고 예배를 드리면서 기도응답을 많이 받게 되었다.
가정예배드리며 제일 감사했던것은 일주일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솔직히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친구목사님이 교회이자도 낼려면 힘드니 다단계 교육받고 사업을 하면 교회에 재정에 도움이 많이 되고 노후도 준비된다고 소개하여 주어 가정예배때 다단계 교육받고 와서 성도들에게 소개하려고 한다고하니 두아들이 극구 말리며 아버지 노후를 우리가 책임질터이니 만약에 아버지가 다단계에 빠지면 돈목사가 되기에 교회도 안나가겠다고 엄포를 주어 결국 포기를 한적이 있었다. 친구의 의리를 끊기 힘들었지만 이것이 가정쉐마예배의 열매라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가정예배드리면서 기도로 축복하여 주었더니 자녀도 안정되어 무사히 큰아들이 1,2차 회계사합격을 바로 하게 되었고 둘째도 태국에서 국제대학인 에이백대학 공부하던 수업을 그만두고 형이 다니는 같은 경희대 호텔 조리학과에 편입하여 공부하다가 졸업하고, 미래를 위해 음식전문공부를 위해 호주에 있는 르꼬르동블루에 가서 유학공부 하게 되어 더 큰 꿈을 이루게 되었다.
자녀들은 이제 둘다 다 결혼하여 첫째는 회계사로서 3명의 자녀를 두었고, 둘째도 결혼하여 자녀를 1명 낳아 작은 사업이지만 대표로서 사업을 이끌어거고 있으니 감사할 일이다.
이자리를 비로서 아내에게 감사한것은 설교도 못하고, 목회를 나름대로 해볼려고 하지만 잘 못하는데 예배시간마다 설교할때 성도들중에 아멘을 제일 크게하여 힘이 되고, 예배 끝나고 목양실에 들어가면 수고하셨다고 안아주며 '존경하고 사랑합니다'라고 용기를 주는 것이다. 그러니 목회하면서 아이들 앞이나 성도들 앞에서 아내와 다툴일 없었던 것 같다. 아내는 아이들 앞에서 알게 모르게 남편에게 순종의 모습을 보여주여준 것이다.
사모는 사택이나 교회나 심지어 어린이집에서 까지 늘 걸래 들고 다니며 청소를 하여 어디를 가든지 항상 깨끗하게 정리정돈해놓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 감사하다. 장모님 모시면서 침해로 많이 힘들었지만 지극정성 모시는 모습은 너무나 귀감이 가서 감사할 따름이다.
뿐만 아니라 결혼전에 위장병으로 물 한목음 먹지못하여 황달에서 흑달까지 되었을때 여동생의 인도로 부흥회참석하여 고침받고 예수님을 믿고 헌신하여 주님을 위하여 일하겠다고 사모가 되었기에 밤 9시만 되면 매일 교회강단 밑에 앉아 기도하며 밤을 새우며 지내었기에 힘들었던 자신의 난소염도 치료받았고, 성도들중에 영적으로 어려움을 당한 분들 위하여 같이 집중으로 4주만 기도하면 거의 치료가되어 정상생활하게 되어 가장 기쁜 일이 되어 감사한 일이다.
목회자가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가정이 회복되고 행복한 가정이 되어 졌다고 생각하였기에 교회에도 적용하여 성도들의 온가정이 함께 우리와 같은 행복을 맛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한달에 한번은 온 부서예배를 정지하고 다같이 한자리에 모여 예배하며 부모가 자녀에게 축복기도를 행하였다.
이렇게 하길 1년 반정도 지나면서 가정회복이 얼마나 잘 되고 있나 점검을 해보았다
그런데 한달에 한번 모이는 날에 한두가정씩 교회를 안오고, 야외로 가족나들이를 간다거나 혼자 나오는 가정은 소외감을 느낀다고 예배에 안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경적인 온전한 가정을 세워보려고 꿈을 가지고 온 성도들에게 행한것인데 무엇이 잘못인지 하나의 이벤트에 불과해 성도들에게 상처만 주는 것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하나님께 다시 기도하며 온 성도의 가정이 회복할 수 있도록 주님의 지혜를 달라고 하였다
이때 쉐마교육을 받아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양주성목사님이 신앙명가 세미나를 동신기도원에서 연다고하여 첨석했다.
동신기도원에서 하나님이 만남의 복을 주셨다. 부산에서 두날개도 해보시고, 쉐마예배도하시고, 가정교회를 하시는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목사님의 교세는 부산에서 성도가 약 3,000명정도 모이는 장로교고려측교단의 은항교회 이한의 목사님에게 가정교회를 소개 받게 되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가정교회는 두날개의 문제점과 쉐마교육의 문제점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더욱 성경적교회관을 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신약교회 운동이었다.
그래서 소개받고 2016년 2월에 제일 먼저 세미나를 하는 인천 등대교회 목회자 세미나를 기다리다가 신청하고 참석하여 보니 깜짝 놀랄 정도로 성경대로 가정이나 교회리더들이 남성이라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감동이 되었다.
목회자세미나를 다녀온후 당회를 열어 가정교회를 소개하고 사택에서 원형가정교회 목장을 시작하겠다고 하고 금요일마다 사택에 모여 6개월간 저녁식사를 하며 모였다
매주마다 모여 식사하는 것이 처음에는 많이 부담스러워하다가 차츰 익숙해져 가고 부부까지 같이 모이기도 했다.
원래는 처음부터 부부가 모여 시작했어야 되었는데 한참 지난뒤에 부부가 함께 모였던것이 아쉬었다.
그래도 모두들 잘 따라주어 2016년 12월 연말에 교회설립기념부흥회로 한국교회의 가정교회 원조인 열린문교회 이재철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하고 다음 새해 2017년 첫달 부터 전교인을 가정교회로 전환한다고 발표하고 장년 12개 싱글 3개 청소년6개로 시작했다. 그리고 5년후에는 우리교회도 평신도세미나를 개최하는 모델교회로 만들어야겠다고 선포하고 다짐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생명의 삶도 안하고, 성도들이 평신도 세미나에 한사람도 가지 않고 전교인을 일방적 조직짜서 실시한 가정교회는 절대로 가정교회가 안되는 모델 케이스가 된 것이다.
그래도 약 8개월 정도는 그런대로 잘 되어가는 듯 보였다. 그런데 역시 가정교회는 정신이 중요한데 성도들이 가정교회 정신이 없이 시작하니 시간이 갈수록 하나 둘 목장들이 이런일 저런일 생겨서 모이지 않게 되자 더 이상 가정교회는 진전이 없는 무기력한 가정교회가 되었다.
이제 이런상황에서 성경적인 가정교회를 안한다고 할 수 없고, 다른 특별한 묘안도 없어 어떻게 손을 써야 될지 시간만 보내며 매우 낭감한가운데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지냈다.
그래도 무엇인가 해보려고 이것도 저것도 몸부림쳐 보았지만 되는 것이 없어서 목회를 잘해보겠다는 생각이 오히려 낙심이 되어 목회를 더이상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 내려 놓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 되었다.
이때 다시 묘안을 찾기위해 가정교회를 소개하여 주신 은항교회 이한의 목사님을 모시고 교회설립기념부흥회를 열었다.
부흥회 은혜도 잠시뿐 가정교회를 해야겠다는 성도들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지가 않았다.
계속 마음속으로 심한 갈등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국미래연구소에서 미국으로 세계관을 간다고하였다.
그동안 한번도 쉼이 없이 목회를 달려왔기에 하나님이 잠시만 쉬라고 하시나 하고 교회에 안식월을 내서 세계관을 맞치고 가정교회 원조인 휴스턴 서울교회에 연수 3주를 받게 되었다.
휴스턴서울교회에서의 연수는 감동 감동이었다. 사역자나 목자/목녀 성도들 하나같이 이민사회속에 바쁜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 헌신하며 섬기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3주 있으면서 여러 목장모임에 참관하며 목자/목녀와 면담을 하고 느낀것은 어떻게 이렇게 목장을 목자/목녀가 섬기고 있을까 부러움이 었다.
그리고 어떻게 저렇게 조건없이 헌신적으로 섬길까 의문을 가지고 돌아 왔다
돌아와서 휴스톤 연수보고서를 작성했다
[제목 : 섬김의 체질이된 목자들 (휴스턴서울교회 연수 보고서)
연수기간: 2018년5월16일(수)-6월7일(목) 용현동교회:박광필/김덕례
I. 연수 동기
용현동 교회를 개척한지 28년이 접어들어 그동안 이것저것 교회부흥에 도움되는 것들을 접목하여 목회하다가 사도행전 29장을 써내려가자는 목회비전과 맞는 신약교회를 세우고 신앙으로 다음세대 자녀교육을 바르게 세운다는 행복한 가정교회을 접하게되어 가정교회로 작년 2017년부터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1년을 지내면서 성도들이 잘 해보려고 하지만 넘지 못하는 장애물 앞에서 힘들어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며 앞으로도 갈수 없고 뒤로도 갈 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서 교회를 위하여 조기 은퇴를 할까? 재정적으로 어려우니 교회를 합병 시켜야하나 고민 끝에 안식월 40일을 내어서 지친 마음을 쉬면서 미국관광도하고 가정교회의 산실인 휴스턴 연수원에 와서 가정교회를 살펴보러 연수왔습니다.
II. 연수 내용
1,2,3부 연합예배 참관, 수요찬양예배 및 기도회참관, 토요새벽기도회참관, 청소년예배참관, 초등부예배참관, 유치부활동참관, 어린이목자모임 및 코칭참관, 목장(부부,싱글) 방문, 초원 방문, 집사회 참관, 교회협의회참관, 스탶 미팅 참관, 사무행정관람, 목자 목녀님들 면담, 사역부 안수집사 면담, 사무장님 교육, 사역원 총무님 교육, DVD 교육 (예배 설명, 세 축 네 기둥 DVD 교육), 예수영접모임 DVD 시청, 가정교회360탐방, 생명의 삶 참관, 말씀의 삶 참관, 새로운삶 참관 등등.....
III. 연수 소감
휴스턴교회는 모든 것에 투명성과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사무행정 허락하에 누구와서 서류를 관람할수 있고 진실한 목회를 돕는 400여명의 목자목녀들 영혼구원을 위한 목회를 목사님들처럼 사역하고 있어 흔들림이 없는 든든한 교회라는 것을 보게되었습니다.
신약교회 회복을 위하여 목자목녀님들의 열정은 오직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영혼구원과 제자 만들기 위하여 꿋꿋이 순종해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전도할 VIP를 위하여 공공칠 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작전을 짜서 시간과 물질을 아낌없이 희생하는 모습과 영혼구원에 대한 목자들의 고백은 VIP가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목자들의 영혼구원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이 더 중요하다는 말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음세대를 위하여 전문성있는 전문사역자를 두어 담임목사와 같은 사례를 준다면서 다음세대의 교육을 활력있게 활동하는 것을 보면서 소망이 넘치는 교회라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전임과 후임사이에 사역에 일관성으로 흔들림 없는 교회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 한국컨프런스 및 초원지기등 세미나 관계로 3주를 출타관계로 연수생으로서는 면담을 많이 하지 못했지만 가정교회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필요한 각종 교육을 DVD로 제작하여 보여 주신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배순서에 대한 설명과 예수영접 모임 DVD 교육은 영혼구원의 매우 중요성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3주가 있어도 지루하지 않고 언제든지 면담을 요청하면 서슴치않고 만나 섬겨주시는 목자와 사역자들의 모습은 섬김의 체질이된 목자라는 것을 느끼게 되어 감동이었습니다. 어떻게 가정교회를 해야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고 배우는 연수기간이었습니다.
IV. 연수중 배운 교훈들
1. 목장식구들의 문제는 목자 자신을 돌아보고 영적 성장의 기회로 생각 한다.
2. 목자와 동역하려면 그들을 끝까지 믿어주고 철저히 위임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3. 영혼구원 사역에 있어서는 목장에 어려움이 있는 것이 오히려 기회가 된다.
4. 영혼구원을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지치지 않기 위해서 목자가 지나친 열정보다는 지혜롭게 섬기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영혼을 끝까지 놓지는 않는다.
5. 목장 식구를 돌보는 방법으로는 조금 힘들지만 VIP 가정도 오픈하게하고 한식구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6. 목장 식구들을 돌볼 때 당근과 채찍을 사용하는 것은 시험을 들게 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하며, 사람과 환경마다 모두 다르므로 그 때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7. 신앙이 차세대로 전달되어야 하므로 자녀교육에 대해서 교회가 각별히 신경을 써야겠다.
8. 영혼구원이 되려면 담임목사가 설교를 준비할 때 반드시 VIP를 고려해서 적용할 수 있는 것을 반드시 넣어 설교준비해야 한다.
9. 목자와 목회자가 신뢰감을 얻으려면 치밀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행정력이 있어야 한다.
10. 목자 목녀들이 육체적으로 힘들어서 사역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역의 방향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정교회 사역의 핵심은 역시 4기둥 3축정신으로 한다.
11. 가정교회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단기간 효과를 얻을 비료를 치는 것 보다는, 땅의 체질을 변화시켜야 하므로 방향을 검토하고 문화를 바꾸는데 집중해야 한다.
12. 후임준비를 잘하여 후임이 들어와도 흔들림이 없는 교회로 세워야겠다.
V. 연수 후 실천 사항
1.휴스턴교회처럼 투명성있는 교회와 소통이 잘되는 교회가 되도록 주보함을 만들고 섬세하게 전달하여야겠다.
2. 매주일 설교를 통하여 가정교회정신을 심어주고 삶공부를 주중에 실시하여 신약교회의 비전을 심겠습니다.
3. 평신도세미나에 장로들부터 적극 보내어 성도들이 가정교회의 비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4. 장로방을 만들어 먼저 의제를 올리고 생각의 여유를 가진 다음에 매주 만나서 밥을 먹으면서 교회 의논 할 것을 의논하겠습니다.
5. 오후찬양예배는 3부예배로 바꾸어 청년들도 장년으로 대우해서 담임목사가 설교 하도록 하겠습니다.
6. 영혼구원하여 제자삼는 일에 생명 걸고 다른것들은 조금씩 내려놓고 2019년부터는 전신전력 하도록 하겠습니다.
7. 가정교회를 10년(2028)안에 잘 세워 평세와 목세를 개최하는 꿈을 내려놓치 않고 은혜받은 것을 갚을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끝까지 가겠습니다.
8. 열심히 가정교회 세우고 2년후에 다시와서 마지막주와 첫째주에 하는 침례식과 예수영접하는 것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VI. 감사의 말씀
공항에서부터 연수원에 오기까지 걱정없이 오도록 픽업하여 주신 이강배사무장님께 감사드리며, 오자마자 식사할 수 있도록 늦은 밤에 식사를 차려놓으시고 한국의 맛을 느낄수 있도록 김치 라면 과일을 냉장고에 채워주신 천사의 손길에 감사드리며, 아침마다 타코를 사주시고 호수공원에 산책을 할 수 있도록 안내하여주신 박점수목자에게 감사드리며, 3주 꼬박 연수원에 있는 것이 힘들다고 나사관광을 시켜주신 강희구목자에게 감사드리며, 그밖에 여러 가지 목장의 노하우를 위하여 면담하여 주신 목자 목녀들께 감사드리며, 모든 일정을 잘 마칠 수 있도록 시간을 조정하여주신 담당자 이재현 초원지기에게 감사드리며, 선택면담 요청에 서슴치 않고 달려와서 만나 좋은간증을 하여 주시고 휴스톤의 별미들을 맛보게 하여 주신 목자및 집사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강배사무장,이재현초원지기,박점수목자,정종대목자,박덕규목자/이경숙목녀,박민규목자/박명신,이수관목사,안명선집사장,윤은숙목자,이선근목자/이수경목녀,김태종목자,임순호목자/임선우목녀,나진찬목자/나숙자목녀,전창현목자/전명자목녀,신동일목사,백혜원전도사,백동진목사,김희준전도사,이용호목자/이경희목녀,이용교목자/이정숙목녀,이승기목자/이셋별목녀,윤석현목자,이재동전도사,박근우목자,백장현목자,김영철목자/김선자목녀,박천식목자/고은영목녀,성승현총무,임희숙목자,박치우목자,이범노목자/이남희목녀,김홍근목자,백성지목사/최유리목녀,강희구목자/강미자목녀 홍성제목자/홍수희목녀, 이영남목자, 사무행정 백연숙목녀 박지선목녀 등등 그밖에 모든분들게 감사드립니다.
그밖에 모르게 여러 성도님들이 연수관에 필요한 것을 채워주셨고, 또 목장과 초원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도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늘 복 많이 받으세요. 행복하고 뜻 깊은 연수생활이었습니다.]
돌아와서 목회가 힘들게 느꼈던 것을 깨닫는 것은
첫째는 지도자의 신뢰성을 잃어 버린 것이다.
사실 두날개 할때만해도 목회자가 목숨건다고 강조하며 따라오라해서 많은분들이 헌신을 해서 교회가 성장하였는데 다시 가정살리자고 쉐마교육을 한다고 하니 좋은 말이고 다 맞는 말이지만 교회위해 헌신하던 분들이 맨봉이 오게 되었고, 또 얼마 있다가 다시 이시대 유일한 교회와 가정대안이 가정교회라고 하며 하자고 하니 처음에는 따라 오는 듯 했지만 가정교회정신인 철저한 헌신없이는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이모든 것이 지도자의 신뢰성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둘째는 충분한 이해와 설득하는 교육이 부족했다.
적어도 가정교회의 가장기본적인 정신이 담아 있는 생명의 삶을 성도들에게 생명걸고 한 다음에 했어야 되는데 두날개를 통해 충분한 리더 교육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두날개정신과 가정교회정신이 다르기에 진전이 없어진 것이다
목자/목녀가 가정교회정신으로 무장하고 목회자와 목원들과 소통이 잘 되어도 하기 힘든데, 목장에서 여러 가지 일이 생기기 시작하니 섬기던 손을 놓게 되어 가정교회가 발전 없이 퇴보가 된것이었다
셋째는 만남의 교제가 적었다는 것이다
가정교회는 교제가 제일 우선으로 여기는데 목자/목녀들과 교제가 이루어 지지 않는 상태에서 돈키호테처럼 일방적 선포와 밀어 붙임이 결국 진전이 없게 되었다.
이민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한국사람끼리 교제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구조이기에 목장이 잘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가정교회를 휴스턴서울교회와 같이 잘하는 교회가 있다고하여 아산제자교회 연수를 신청해서 다녀왔다. 역시 휴스턴서울교회처럼은 아니겠지만 가정교회 정신 한국형 가정교회 원형의 모습을 발견했다.
< 아산제자교회연수보고서 2019.9.25-10.3>
1. 연수동기
2016년에 등대교회에서 목세를 받고 엄청난 감동을 받아 2017년부터 가정교회를 한다고 선포하고 조직을 개편하여 가정교회를 시작한지 2년 9개월 되었다. 그런데 무엇인가 시작때부터 모자란 것 같아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행복하지 않고 목회가 지치게 되었다. 지역목자께서 연수다녀오면 좋다고 하여 가정교회 원조인 휴스턴서울교회에 신청하여 안식월을 내서 2018년에 다녀왔다. 정말 감동이고 지구상에서 이런교회가 있나 우리교회도 이런교회를 만들고 싶다는 열정이 다시 일어났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교회를 만들 수 있는지 마음속으로 숙제를 안고 와서 계속 풀리지 않아 다시 목회가 지쳤다. 어떻게 해야하나 마음속으로 고민하는 가운데 교인의 자리는 하나 둘 자리가 비어가는 모습은 나의 가슴을 도려내는 것같이 아프고 이러다가 교회가 파산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생기었다. 자존감이 낮아지면서 목회를 그만두고 젊은 목사를 초빙하여 교회를 살려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교회를 떠나고 싶은 마음만 생겼다. 자꾸자꾸 교회의 자리는 비어가는데 어떤 대책도 찾지 못하고 가정교회를 이끌어갈 어떤 핵을 찾지 못하고 시간만 지냈다. 그저 죽고 싶고 떠나고 싶은 마음만 있는 상태에서 제자 교회연수를 오게 되었다.
2. 연수와서 보고 듣고 배우며 느낀 것
되는 교회와 안되는 교회를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모든 바나나는 노랑색이고 맛이 더하니 덜하니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제자교회는 가정교회를 노랑 바나나가 아니라 빨강 바나나라고 독특성을 강조 하였고 빨강바나나가 얼마나 귀한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마치 목포에 있는 식당중 다른 사람이 생각지 못한 게살비빕밥을 파는데 이것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먹어본 사람은 모두가 소문을 내듯이 제자교회는 모든성도들이 가정교회에 대한 자부와 긍지를 가지고 사역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제자교회의 심영춘목사님의 독특하고 세밀한 전략과 매뉴얼로 가이드를 하고 있었음을 보게된다. 오직 제자교회는 휴스턴서울교회처럼 그대로 만들겠다는 원칙을 가지고 하였기에 오늘과 같은 제자교회가 되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휴스턴서울교회처럼 될 수밖에 없는 교회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1) 주일연합예배
일반적으로 주일연합예배는 주일에 목장들이 연합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인식인데 그것이 아니고 목장들이 연합할뿐아니라 모든 세대들이 연합하여 한달에 한번이 아니라 매주일 드린다는 것에 어떻게 이렇게 될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것도 2시간30분이나 긴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더욱 놀란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가정교회의 3축 4기둥의 정신이 어린이부터 장년까지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의 생각은 교회안에 3축인 삶공부 목장 주일연합예배가 있으면 가정교회가 아닌가 했는데 가정교회가 안되는 이유가 여기서 발견을 하였다. 3축은 성도 개인 한사람 한사람이 3축이 되어야함을 알게되었다. 그러기에 어린이들도 삶공부 목장 연합예배, 청소년부도 삶공부 목장을 가지고 있기에 각기관도 당연히 개인도 당연히 주일연합예배에 드린다는 것으로 삶이 된 것이다. 그래서 되는 교회와 안되는 교회의 차이가 여기에 있었다.
2) 전략과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교회
심영춘목사님과 몇 번의 면담속에 휴스턴 서울교회처럼 제자교회를 똑같이 세우려는 열정은 누구도 따라 갈 수 없음을 느껴진다.
생명의 삶을 가르칠 때에 수강하는 성도들이 목사님의 강의에 빨려들어가는 모습을 보았고, 어려운 결단의 시간에 모두가 쉽게 수긍하는 모습을 보게되었다. 이렇게 인도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전략을 세우고 강의안을 준비하셨을까 생각이 들었다. 수강하는 성도들의 생각과 삶을 완전히 바꾸어 지는 시간이 삶공부의 시간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가르치기에 온맘을 다하여 준비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저는 그냥 성경공부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역시 되는 교회와 안되는 교회의 차이를 다시한번 발견하게 되었다.
목자를 세울 때도 치밀하게 원칙대로 메뉴얼을 만들어서 한사람 한사람 면담을 하여 세운다는 것 보았다. 목자를 어떻게 세워야 할는지도 모르고 가정교회 스피릿도 없는 사람에게 전에 리더로 잘하던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한번 해보라고 해놓고 가이드도 해주지 않고 돌봐주지도 않고 방치하여 두었으니 안될 수밖에 없었구나 하였다.
목자들 면담중에 모두가 심영춘목사님이 말하는 그대로 똑같은 가정교회 정신인 영혼구원제자삼는 원칙을 세우고 그대로 목회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목사는 목자/목녀를 목회하는 것이고 목자/목녀는 철저히 목원들을 목회하는 것이다. 어떤 목녀는 둘째아이가 유산되었는데도 둘째아이 유산된것보다 목장에 목원중 한사람이 떨어져 나갈때가 더욱 가슴이 아프다고 고백을 한다는 것이다. 영혼구원 제자 삼는 신약교회의 본질을 붙드는 가정교회 정신을 잡고가는 목자 목녀들을 보게되어 감동이 되었다.
특별히 총목자 모임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어린이아이도 있는 젊은 목자 목녀들이 무려 3시간씩 같이 앉아서 경청하며 서로를 격려해주는 모습은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같았다. 그런데 더중요하는 것은 이것은 주도적으로 이끌어가시는 심영춘목사님은 오후4시에 시작하니 몸도 지치고 힘들터인데 매우 행복하게 지켜보시며 인도하시는 것이었다.
목회자의 모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끼며 목회자가 얼굴관리를 잘해야 겠구나 생각하게되었다.
3. 연수를 하면서 결심한 것
사실 교회가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실시해야 될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가정교회를 한 것이 아니라 이름만 가정교회를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우리교회도 하나 하나 힘들어도 가정교회에 충실히 세워 나갈 것을 결심합니다. 먼저 목회자가 준비를 잘 할 때 잘 인도할 수 있는데 연수받으면서 확실히 어떻게 가야 할 방향을 잡았으니 이제 두려워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실시하면 될것같다는 마음을 가집니다. 나만 헤매는 줄 알았더니 오래동안하던 분들고 무엇인가 2%가 부족하여 갈등을 느끼고 있는 분들이 같이 마음을 가지고 하여 서로 서로 힘이 되었다.
4. 섬김
연수원 들어오기까지 기도로 준비하여 맞이하여 주신 박승신 목자님과 8박 9일동안 지나는 동안 불편함 없이 아침마다 먹을 거리를 챙겨 주신 이정란 사모님과 연수관 간식을 준비해주신 경미숙 목녀님과 면담하여 주신 차규성 목자님과 최병희목자님과 이상미목녀님 그리고 밤늦게까지 면담해주신 박은수 목자님과 조미경목녀님과 어린이부사역 담당인 고요찬 목사님과 박영희 목녀님 그리고 싱글목장의 대부인 최덕남목자님과 양명란목녀님 그리고 목장을 오픈하여주신 남아공목장의 장원제 목장님과 김은희목녀님과 목원들과 최상호목자님이 시간이 안되어 많은 시간을 가지지 못했지만 잠깐 만나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수요예배후 시간을 가져주신 놀라운 간증이 있는 장한수 목자님과 항상기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신 박선영목녀님에게 면담하여 주시고 안내해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또한 같이 함께 연수받은 목사님들 감사드립니다. 서로서로를 도와줄려고 애쓰시는 모습이 정말 행복했습니다.
5. 마치면서
내가 왜 힘들어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멋 모르고 준비도 없이 그냥 하다보니 지치고 힘들었다는 것을 알게되어 감사했다. 무식하면 용감하지만 어려운일을 당할 때 헤쳐 나갈수 없는 지혜가 없어 일어나기 어려운데 연수를 통해 힘도 얻고, 지혜도 얻고 또한 연수는 영원한 A/S 하여 주신다고 하니 든든해집니다. 옛날에 한얼산 기도원원장이신 이천석 목사님께서 여기서 방언을 받지 못하면 내려가다 개울에 코박고 죽으라고 하면서 기도를 시켰던 생각이 나면서 천안아산제자교회를 연수오면 누구나 가정교회를 잘 할 수 있도록 자신감이 생긴다. 안되면 코박고 죽어야지! >
그래서 아산제자교회 담임목사이신 심영춘목사님을 모시고 2019년도12/2(월)-4(수)에 29주년 교회설립기념감사 가정교회 부흥회를 하였다.
많이 참석은 안했지만 참석한 목자 목녀들이 많은 도전을 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한국교회의 가정교회 원조인 열린문교회에 다시 2019.12/13(금)-15(주)가정교회 연수에 참석하였다.
열린문교회연수간증문(2019/12/13-15)이다.
<제목: 헌신된 섬김의 교회>
가정교회가 신약교회 회복운동임을 연수를 통하여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오래되면 관습적인 신앙생활로 교인들에게 생동감을 찾기가 어려운데 가정교회에서는 흔히 보게 됩니다. 신앙생활이 오래되면 자발적인 움직임이 떨어지고 뒤로 빼는 성향과 달리 가정교회는 서로 헌신하고 자발적인 움직임이 있어 활력이 넘치게 되어 젊은 부부들이 점점 늘어나서 젊은 교회로 되는 특징이 가정교회의 추세입니다. 기존교회들은 권위나 직위를 따지고 시기와 질투속에 분쟁이 자주 일어나지만 가정교회에서는 서로 섬김과 헌신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져 직분과 상관없이 오히려 먼저된 직분자가 더욱 섬김의 본을 보여주어 존경을 받게 되고 오래 다닐수록 아름다운 영혼구원의 열매로 증명되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것을 봅니다.
요즈음 부부 모두가 직장을 나가는 시대라서 모이기 어려운데도 모이는 수는 날마다 더하여지고 가정에서 식사에 감동을 받아 존경하게 됨을 보게됩니다.
이번 열린문교회 연수는 가정교회 20여년 동안 점점 더 많은 젊은이 들이 모이고 매달마다 예수영접모임과 세례식이 일어나고 헌아식이 있다는 것은 불신자를 구원하여 제자삼고 목자로 헌신 되는 것을 볼 때 지금도 얼마든지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고 일하심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다른교회는 다 되어도 우리교회는 안 될까요?
우리교회도 이런 교회를 만들 수 없을까요?”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안되면 되게하라는 신조로 목회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혼자의 목회는 한계가 있습니다. 함께하지 않으면 혼자 아무리 잘한다해도 한순간에 무너질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정교회는 혼자하고 싶어도 안는 일이지요. 왜냐하면 전도하여도 가족이상의 섬김으로 반겨주는 곳이 없으면 한 두번은 나와도 교회에 붙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도 가족 이상의 가족이 되는 목장이 생기도록 기도합니다.
가정교회는 가족이상의 목장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번 참관한 열린문교회 목장에 이런일이 있었습니다.
대만목장인 이영수목자께서 목원의 아이가 설사 한 것을 보고 그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에 가서 씻겨주고 옷을 입혀주고 얼마 있다가 또 다시 설사를 하니 다시 아이를 들고 화장실에 가서 씻겨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녀도 아니고 아이의 엄마도 아닌 목자께서 섬기는 모습을 보왔던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되나 했더니 아기엄마가 말하길 자기 할아버지도 씻겨주지 않는데 목자님은 아기를 씻겨주고 자기집에서 잠도 재워 주기도한다고 하였습니다. 가정교회는 가족이상의 가족임을 제눈으로 본것입니다. 그래서 가정교회는 목장모임인 집에서 밥을 먹고 삶을 나누며, 삶공부를 통하여 지정의 신앙을 성장시키고, 연합주일예배를 통하여 공동체를 섬기는 아름다운 교회를 꿈을 꾸는 것입니다.
이번연수를 통하여 담임목사의 헌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되었고 담임목사의 헌신한 만큼 제자가 생긴다는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부터 어떻게 헌신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충실하게 가정교회 원리대로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제2의 열린문교회가 의정부에도 세워지길 소원합니다.
그리고 섬겨주신 목자님들과 성도님들과 교육담당목사님들과 친절하게 대하여주신 초원지기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리며 특별히 연수를 허락하여주신 담임목사님과 사모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6-18)>
역시 기존교회와 전혀 다른 성도들의 모습속에서 가정교회의 강력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가정교회를 무엇인가 따라 갈수 없다는 이질감이 생길뿐 문제는 계속 쌓아져갔다.
나의 고민을 아시고 지역목자이신 임군학목사님께서 휴스턴 서울교회 곽인순목자를 초청하여 간증집회를 해보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본인의 교회가 가장 힘들때 많이 도움이 되었다고 간증집회를 추천해 주셨다.
그래서 미국휴스톤서울교회 곽인순목자를 메일로 신청하여 기도하시고 오신다고 하시면서 얼마후에 연락주시어 초청하여 간증집회를 열었다.
매시간마다 하나님이 일하심을 듣게되었다
특별한일은 개인 면담을 통해 개인문제를 꺼집어내 주시고 앞으로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예언자적 메세지를 주었다.
몇사람은 마치 예수무당같다면서 부정적인 반응이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거의 맞는 것이라 수긍을 하여 마음의 상처를 많이 치유받았다.
이제 힘들었던 목자/목녀들이 다시 힘을 얻어 할것 같았는데 갑자기 2020년 2월부터 코로나19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여 교회와 목장을 쓰나미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코로나19 사태로 교회도 목장도 전무상태가 되었다. 이제 무에서 유를 다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를 세우보겠다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가며 몸부림쳤는데 '왜 나에게 우리교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앞이 캄캄해보였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께 맞기며 기도로 20일금식을 5번과 40일 금식 2번으로 그동안 교회를 세우기 위해 견뎌왔는데 이번 코로나19는 금식을 해도 해결점이 보이지 않아서 하나님께 극복할수 있는 지혜를 구할 수 밖에 없었다.
코로나기간(2020-2022)에는 하루 하루 사는 것이 목에 숨이 막힌 것 같았다. 차리리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갈멜산 승리하고 쫒기면서 로뎀나무에서 기도한 엘리야의 기도할 정도이었다.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가야할지 답이 나오지 않아 교회살리기위해 코로나 초비상 재정 7단계로 2020년에 계획을 세웠다.
1단계로는 부서의 모든 부교역자 사임하고 담임목사가 유초등 중고등 청년부까지 담당한다.
2단계 담임목사 상여비와 활동비를 당분간 미지급한다.
3단계 운전자보험 신문구독 취소하고, 사택인터넷비 국민건강보험비 교회에서 지불안하고, 사례비는 100만원만 지급한다.
4단계 퇴직적금 700만원 찾아 교회운영자금으로 사용한다.
5단계 사택1억 5천을 대출하여 대출금 조금이라도 값고 나머지 이자로 사용한다.
6단계 사택을 매매하고 어린이집을 사택으로꾸며 이사한다.
7단계 이자감당하지 못하여 경매넘어갈 정도 상황 되면 교회를 매매하여 축소하거나 다른교회와 합병한다.
이렇게 뼈아픈 계확을 세우며 하루 하루 기도하며 지내며 4단계까지 갔고 5단계를 실시하려하니 대출이 막혀서 안되어 5단계에서 주츰하고 있을 때 코로나가 해제되고 조금씩 교회가 힘을 찾아가게 되어 감사하였다.
하루하루가 교회가 경매 넘어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피를 마르는 삶이었던같다.
2023년부터 나의 마음도 조금 추수리고 성도들도 다시 해보겠다는 마음을 조금씩 가지게 되었다.
2024년 부터 교회세움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을 가진성도들이 가정교회를 재구성하여 2023년도에 세운 임직자인 고상욱장로님을 포함해서 장로님 4분을 중심으로 목장이 4개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동안 무엇을 위해 일꾼을 세왔는지 무엇을 위해 교회를 키워왔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2016년에는 교회건축할 때 대출이 많이 남아 있지만 계속해서 사택을 마련해야 겠다는 소원이 항상 마음속에 가득차 있었다.
왜냐하면 계속 월세50-60만원내며 이사를 하게 되어 항상 이사를 가야 한다는 것과 집주인이 월세를 올려달라든가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할때 교회가 대출이 있는 상태에서 목돈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처하기가 참으로 어렵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다른 교회들을 보면 교회가 사택이 있어 목회자를 모실때 하나님만 바라보는 좋은 목회자를 모시게 되고 사택걱정 안하고 목회를 하게된다.
건영아파트에서 보광에서 살고있던 보증금 1,000만원과 은행보증금대출얻어 대출금이자와 월세를 53만원씩 내고 있는 상황이라 안정된 전세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교회에서 방만들어 살려고하다가 보광아파트로 갑작스럽게 이사를 가게 되었고, 몇년을 월세로 살았는데 보광주인이 아파트를 팔게 되었다고 하여 나올 수 밖에 없었고, 그렇치 않아도 수도관이 너무 오래 되어서 수도물에 녹물이 나와 빨래를 하면 붉은색으로 변하고 그릇도 붉은색으로 변해 이사가길 기도했는데 보광아파트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건영아파트로 다른 김00권사님이 알아봐주어 이사를 하게되었다. 보증금 1000만원에 전월세대출금받아 이자하고 53만원을 내고 있었는데 2년을 살고나니 거기도 계약기간이 끝나는 시점에 주인이 아파트를 매매한다고 내놓았다고 하였다
건영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시골에서 아프시고 연로하신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와서 가까운 병원에도 모시고 다니었다.
그러나 살고있는 건영아파트가 방이 좁아 장인/장모님을 거실에 모시고 있어 늘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마침 2년살고 계약기간이 만료되면서 매매로 내놓아다고 하여 이사를 해야할 상황이 오게되어 김권사님께서 이번기회에 사택을 준비하면 좋겠다하며 현재 건영캐스빌로 사택으로 구입하도록 많이 힘을 쓰셨다
교회재정이 없어 대출을 최대한 많이 얻어야 해서 교회이름으로하면 대출이 적고 이율도 높다고하여 다행히 개인이름으로 신용대출과 담보대출로 구입하면 이자저리로 구입하게 되었다
이때 건영캐스빌 아파트 계약금을 일부를 마련하느라 성도들이 배추를 절여서 팔았고 학교졸업식장에 꽃을 만들어 팔아서 약 3,000만원 기금을 마련하고 성도들이 헌금을 하고 대출을 1억4천7백만원을 하여 34평아파트를 2억9백만원에 매입하였다.
구입한 사택은 교회 종탑십자가가 잘 보이는 아파트를 사게 되어 사택에서도 수시로 교회를 보면서 기도하게 매우 기뻤다.
그런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교회내부 속사정도 모르는 몇몇 사람들이 목사님 개인이름으로 등기를 냈다고 악소문을 퍼트렸다. 아직 은퇴하려면 많은 햇수가 남았는데 벌써 자기것만 챙기려고 은퇴준비를 하는 변질된 목사라고 소문을 낸것이다.
이런 이상한 소문으로 사택헌금을 하자고 해도 헌금에 참여하는 성도가 몇분만하였고 , 계약금준비하려고 힘들게 배추절임과 밤을 새워가며 꽃을 만들어 졸업식장에 가서 판매하는 헌신을 오히려 장사하는 교회라는 이미지로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부정적인 생각의 말이 떠돌아 다녀 교회를 떠난 성도가 있어 매우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아펐다.
사택을 구입하고 우리는 목회자 세미나를 일주일 다녀왔더니 욕먹으면서 헌신한 김권사님께서 이사짐센터로 통해 건영아파트에서 구입한 건영캐스빌로 이사를 다 해 놓으셨다.
어려운 가운데 사택을 구입한 결과 제일 기쁜것은 조금 넓은 방이 3개라서 장인 장모님께서 편하게 모실 수 있는 방을 한 개 드리게 되어 감사했다.
그리고 두아이들이 한 개 방를 같이 사용하고 우리도 방 한개 쓰게 되었고 거실에는 책장으로 진열하여 연구실이 되었다
예상치 않은 혼란스런 소문이 퍼졌지만 모두가 헛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는 다 알게 될것이라고 생각하고 주님께 맞기고 우리교회도 사택을 마련한 것에 매우 기뻐하며 감사하며, 자녀로서 장인 장모님 잘 모실 수 있는 효를 실천하게 되어 감사했다.
장인어르신께서 이사한 아파트에서 평안히 2년정도 잘 지내시나가 집에서 93세로 하늘나라에 가셨다.
그리고 장모님도 이사한 아파트에서 잘지내시다가 치매로 2-3년 고생하시었지만 장녀인 사모가 아침 점심 저녁 식사 차려드리고 치매로 실례를 자주하여 하루에도 몇 번씩 목욕해드리며 잘 모시다가 집에서 장인돌아가신지 7년만에 93세에 돌아가셨다.
이 자리를 비롯하여 사랑하는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힘든 어린이집을 하면서 식사준비하랴, 간식준비하랴, 교회청소하랴 고생은 많이 했지만 고생으로 여기지 않으며 따라준것에 감사하며 은퇴하면 평생반려자로 돕겠다는 마음을 가진다.
사실 사모가 어린이집이 원장이지만 어린이집에서 받은 월급으로 어린이집 재정에서 지출할수 없는 어린이집 십일조, 감사헌금, 건축헌금 등으로 헌금으로 매월 약 300만원정도를 내주어 교회운영에 많은 힘이 되어 감사하다.
어린이집이 나중에 더 어려울때는 자신의 월급을 받지 못하고 교회에 헌금 내지 못한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겠다고 힘들지만 헌신 한 것에 감사하며, 그런 와중에 장모님이 집에서 돌아가실때까지 잘 섬긴것에 고마음을 가진다.
건영캐스빌로 사택을 구입하므로 목회자가 이사를 자주 안다녀서 감사하고, 성경말씀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장모장인을 잘 모시며 살았다는 것이 매우 감사하다.
요즈음에는 아파트 값이 올라서 만약에 그 당시에 사택을 구입하지 않았다면 매번마다 이사다니며 살았을 것을 생각하면 캄캄하다.
이 모든것이 지나고 나니 하나님의 정확한 인도하심이 있었다고 확실해졌다.
지금은 사택을 개인이름에서 교회이름으로 증여등기를 하여 용현동교회 이름으로 당당히 사택이 되어 있어 감사하다.
코로나 기간힘든 시기이지만 2021년 9월부터 비전헌금을 시작하여 내자신이 먼저 매일 1만원씩 1004비전 작정해서 내면서 매월 100만원씩 사택대출을 값아 나갔다. 하지만 아직도 값아야할 대출금은 많이 남아 있어서 10년상환대출로 바꾸어 놓았으니 능히 잘 감당하게 될것이라 믿는다.
2023년도에 다시 열린문교회에서 행하는 목회자 세미나 (2023/03/28-4/2) 를 다녀왔다. 세미나 간증문이다.
<사라왁목장에서 기도와 사랑으로 섬김받은 용현동교회 박광필목사/ 김덕례사모입니다.
아버지같이 인자한 성품을 가지고 말씀대로 실천하시는 서상오목자님과 시집간딸이 친정에 올때 맨발로 뛰어나가 사랑으로 손을 잡아 주며 맞이하여 주는 유분희목녀님, 따듯한 방을 내주시고 매일갈아신을 수 있는 양말과 수건 그리고 새로운 치약치솔을 준비하여 감사드립니다.
목장모임에서 투정부리는 연약한 지체를 다 받아주시고 가능성을 보며 칭찬해주시는 모습은 담임목사님을 그대로 빼 닮은것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20년동안 목사목녀로 변함없이 섬기며 매면마다 목장분가를 통해 영혼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목장에서도 일인일사역을 철저히 하되 주일연합예배 일인 일사역에도 목원들에게 남들이 도전하기 어려운 주방일을 하도록 하여 주방에 봉사하는분들이 주로 목장에서 분가해 나간 분들이 거의 도맡아 하는 모습을 보고 기쁘다고 감사하는 말에 저절로 존경이 갑니다.
아쉬운것은 교회의 규칙에따라 장년목장은 더이상 섬기지 못하게 되어 아쉬워하는 모습이 안타갑지만, 우리 서상오목자님과 유분희목자님은 실버목장을 섬기면서 조만간 가정교회에서도 실버가 버려진 존재 숫자도 끼지 못하는 목장존재가 아니라 실버목장컨프런스도 할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를 해봅니다.
저는 가정교회를 서둘러 하다가 폭망한 목사이지만 한국에서 처음으로 가정교회를 개척한 열린문교회 목세를 통하여 큰 힘을 받고 다시 시작해 보아야 겠다는 용기를 얻고 왔습니다.
내가 앞서지 아니하고 주어진 기회를 통하여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가정교회를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목세를 열어주신 열린문교회와 집을 오픈하여주신 사라왁 목장 서상오목자/유분희목녀님과 목원들에게 그리고 주방식사및 간식과 특히 매일 커피를 마음것 마시며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섬겨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감사 합니다. >
그리고 2024년부터 다시 교회세움을 위하여 코로나이후에 용기를 내어서 새로 선출되 고장로님을 포함하여 목장을 4개로 재개편하여 4분의 장로님들을 목자로 세우고, 부인들을 목녀로 하여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2024년 가을쯤에 내년 2025년 8월경에 새로 입주하는 힐스테이 640여세대가 있어서 우리교회로서는 부흥의 마지막 기회라고 여겨져 입주하기전 동사목사 필요성을 느끼어 당회에 건의해서 동사목사청빙위원회를 구성하고 기독신문에 공고하여 서류받았다.
우리 작은교회인데도 동사목사로 31명이 지원하여 주어서 하나님의 사역자가 많은 인제들이 있다는 것을 깊은 감동을 받게되었다. 동사목사청빙위원회가 그중에 3분을 서류심사하고 투표로 뽑아서 수요설교와 면담을 통회 최종 현재 사역하고 있는 김재환 목사를 2년동안 동사목사로 사역하기로 하고 투표로 뽑게 되었다.
적당한때 하나님께서 필요한 분을 용현동교회에 동사목사를 보내주심에 감사를 드리고 있다.
동사목사가 오신지 얼마 안되었지만 열심히 배우며 사역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가지며 나의 다음단계인 은퇴를 어떻게 할까? 존경받는 은퇴는 무엇일까? 아름다운 은퇴는 어떤 것일까? 그리고 행복한 은퇴는 무엇일까? 무에서 유를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보며 개척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이세상 넘어 그 다음단계도 역시 앞으로 맞이할 죽음까지도 기도하며 개척하는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게된다.
인생은 개척이다.
예수님께서 길가시다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것은 열매가 없고 잎만 무성했던 것이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수가 있다.
헌신과 충성은 말만 앞세우고 교회에 발을 깊이 뿌리 내리지 않고 왔다 갔다 한다면 헌신의 사람이 아니다.
믿음이 없으면 의리라도 지키라는 말이 있다.
비록 우리가 세상적으로 가진것이 없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믿음을 가졌으니 아무것도 없어도 변함없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날마다 천성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
디모데후서 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2025년 2월 27일 목요일
담임목사 박광필
첫댓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글입니다
후배 교역자들에게 귀감이 되는 감동의 글들을 책자로
발간하면 한국교회 개척사에 귀한 자료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