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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쓴 한국 고대사》
저자 전우성 선생은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도 식민사관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사이비도 아니다. 프로필에서 그렇게 읽힌다. 행정학을 공부한 후에 관세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퇴직 후에는 관세사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17년 전 〈한국 고대사 다시 쓰여져야 한다〉는 저서를 펴낸 바 있으며, 이 저서를 바탕으로 새로 밝혀진 내용을 담아서 이 책을 다시 펴냈다고 한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 한민족이 긍지를 갖고 바람직한 역사 인식을 갖길 기원하며, 이런 바람을 담아서 이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라고.
그는 또 “축소·왜곡된 사관과 시각에서 벗어나 종합적이고 보편타당성 있는 역사관을 바탕으로 바라본 한민족의 고대 역사는 중국보다 앞선 문명을 구가하였을 뿐 아니라, 동북아는 물론 나아가 세계문명의 중심으로 평가될 만큼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하면서 최근 알려진 ‘홍산문화’를 포함한 ‘발해연안문명’이 이런 우수성을 증명한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민족 국가의 원형인 단군조선을 포함한 역사체계를 갖추어야 할 것이며, 이 문명에 대하여 민족의 긍지를 가지고 미래 역사를 펼쳐나가야 할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저자의 이런 외침이 소수에 그치고 우리가 우리 역사를 주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정리하지 못한 안타까움은 크다. 그러나 이런 외침이 클수록 역사를 바로잡겠다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우리 역사가 제대로 뿌리내리지 않겠느냐는 한 가닥 희망이 보일 것 같다. 역사도 정치와 마찬가지로 보는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식민사관, 중·일 역사 왜곡 이것을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싶다. 저자를 따라 우리 고대사를 다시 공부해 보아야겠다.
저자가 말하는 새로 밝혀진 역사란 익히 들어본 ‘홍산문화’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후기 신석기시대로 불리는 기원전 4500∼3000년경 형성된 문화하고 할 수 있다. 세계4대 문명이라고 하는 ‘황하문명’보다 1000년이나 앞선다. 특히 신석기시대 고대국가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서구학자들이 주장하는 청동기시대 국가형성설을 바꾸어야 하는 획기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흔히, 중국왕조를 하-상(은)-주-춘추전국시대-진-한-위·오·촉 삼국시대-진(서진·동진)-남북조시대-수-당-오대십국-송-원-명-청 등으로 분류하는데, 황하문명은 이 중 하나라 시대, 즉 기원전 2070∼1600년에 해당하는 전설의 시대를 말한다. 그러나 이때 이미 홍산문화는 시작되고, 그 홍산문명이 발견된 곳이 지금은 중국이지만, 내몽고 자치구의 적봉시 홍산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 한민족의 원류라는 것이다.
홍산문화가 정말로 우리 한민족의 문화인가는 이론도 있을 수 있겠으나 이미 중국에서 이것이 발굴된 지역을 동이족, 즉 오랑캐 땅으로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역이라고 기록한 바 있고, 또 여기서 발굴된 유골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인자와 같은 비율이 35.71%나 나타났는데, 이것은 중국 한족에게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유전인자라고 하고, 셋째는 만주와 서울에 있는 적석총 묘제는 한漢족 영역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묘제라는 것이다. 홍산문화의 가장 특징적인 유물이 옥룡(사진)인데, 옥은 압록강 유역 수암지방에서 나온 것으로 옥의 원류는 한족이 아니라 한민족의 것이라는 것이다. 옥을 중국은 자기들의 고유한 문화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홍산문화가 증명하고 있다. 또 중국의 여러 비석과 유물에 기록된 곰 토테미즘은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웅녀와 연결되는 점도 묵과할 수 없으며,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빗살무늬 토기는 황하를 비롯한 중국의 한족 영역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오직 동이족인 단군조선의 세력권에서 발견되고 있다. 고인돌, 비파형 동검, 빗살무늬 토기, 이 세 가지는 단군조선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고유한 것이며, 고구려성에서 흔히 보이는 석성의 치(雉)는 환웅조선을 이어받은 단군조선-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한민족 고유의 문화이다.
우리가 계속 주시하고 살필 문제기도 하겠으나,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것을 통해 고조선과 고구려는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 일어난 지방정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나라가 생성될 당시에는 구체적인 국가라는 개념도, 국경도 없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고 어쩌면 우리가 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고대의 역사, 즉 역사의 뿌리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동북공정 외에도 탐원공정과 단대공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탐원공정→단대공정→동북공정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탐원(探源)공정은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는 3황5제 시대를 복원하여 하→상→주왕조를 복원한다는 것이고, 단대(斷代)공정은 이들을 복원하여 중국의 기원으로 삼는다는 것이며, 동북(東北)공정은 앞서 말한 고조선과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는 작업을 말한다.
신화적인 국가인 하·상·주 3개국의 구체적인 연대를 확정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헌상 주나라는 공화 원년(기원전 841년)이 개국연대이고 기원이다. 그런데 단대공정을 통해 이를 재편하고 있는 것이다.
기원전 2070년경 하나라가 건국되었다.
기원전 1600년경 상나라로 교체되었다.
기원전 1300년경 반경(盤庚)이 은허로 천도하였다.
상나라의 대체적인 연대와 주나라 왕의 재위연대를 구체적으로 확정했다. 이것은 확정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확정함으로써 학문적 편향성에 문제를 야기하고 중국 중심의 문화론에 주위 국가들의 우려를 현실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고조선과 고구려가 중국 漢族의 일개 지방정권이라는 동북공정이 이룩되면 당연히 이들 국가의 근원인 발해연안문명은 거기로 넘어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되면 세계 제1문명이자 동북아 문명의 근본인 韓民族의 뿌리가 중국에 넘어간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저자는 한때 ‘통일대박’을 구상한 적이 있는데 대하여, 이것은 전혀 현실감이 없는 것으로 통일이 되더라도 대박은커녕 쪽박을 차는 망상에 불과하다고 한다. 북한을 우리가 아우를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망상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언젠가 북한에 동요가 일어난다면, 북한의 요청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중국이 개입하여 막강한 군사력으로 북한을 점령할 것이다. 그런 명분을 만들기 위한 것이 바로 동북공정이다. 조상들이 이룩한 세계 제1 문명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면 단군조선과 후예인 고구려를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또 우리 민족이자 우리 영토인 북한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해야 하고 서둘러야 한다.
지금까지‘새롭게 밝혀진 우리 상고사’에 대해 대략 살펴보았다. 이제 제2부 ‘다시 쓴 우리 상고사’내용도 궁금해 진다.
【제2부】다시 쓴 우리 상고사
우리 한민족의 발해연안문화를 ‘세계 제1의 문명’이라고 했는데 무슨 뜻일까? 문명과 문화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동안 우리는 세계 4대 문명을 메소포타미아·인더스·이집트·황하문명이라고 배웠다. 메소포타미아는 기원전 3500년경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서, 인더스는 기원전 3000년 중엽 인더스강 유역에서, 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경 나일강 유역에서, 황하는 이들보다 1000년 가량 늦은 기원전 2000년경 중국의 황하강 유역에서 발달한 문명을 말한다. 그런데 이들보다 앞서 발해연안문명인 홍산문명이 기원전 4500∼3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 하·상(은)나라를 세운 황하문명에 영향을 주었다. 다시 말해 황하문명은 홍산문명의 영향을 받아서 태어났으며, 그것은 중국이 동이족이라 폄훼해 부른 한민족의 문명인 것이다.(문화와 문명의 차이에 대해서는 별도 붙임)
이제부터 ‘세계 4대 문명’은 중국 황하문명을 제외하고, 제일 앞에 ‘발해연안문명, 즉 홍산문명’을 기억해야 하고, 다음에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이집트 문명 순으로 꼽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뿐만 아니라 많은 학자들 주장이다. 고대사에 있어 위서 논란이 끊이지 않는 《한단고기》,《규원사화》등은 물론 재야 사학자들이 환국과 환웅조선(배달국)의 실체를 주장해 왔으나, 강단사학자들은 이를 부정하고 있다. 이것을 증명하는 실체적이고 명백한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었는데도 그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중국은 홍산문명을 자기들 역사로 편입시킨 반면, 우리는 강탈당한 채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환국조선과 환웅조선(배달국)은 신화나 전설(선사시대)로 하더라도 단군조선은 역사적 사실로서 우리 역사학 체제에 정립하여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환웅은 《한단고기》《규원사화》는 물론 《삼국유사》에도 단군조선의 시조 단군왕검에게 건국의 기초를 열어준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그동안 많은 재야 사학자들이 이들의 실재를 주장해 왔으나, 위서로 취급되면서 신화적인 사실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홍산문명을 포함한 발해연안문명이 발견됨으로써 그 실체가 입증되었다. 환웅조선은 환인조선의 뒤를 이어 기원전 3897년 거발한 환웅이 세운 나라로, 이후 18대 환웅들이 1565년간 다스리다가 단군왕검에게 나라를 물려주었다. 이때가 기원전 2333년, 이 모든 과정이 홍산문화의 실체라는 것이다.
고대사는 특히, 고조선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부여, 혹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부여, 그도 아니면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부여라는 도식 중 하나를 확고히 정립해야 한다. 어느 것을 택해야 하는지는 학자들 몫이겠으나,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 아주 길게 사료를 제시하며 설명하고 있다. 여러 사료에 기자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전한시대(기원전 108∼8년) 편찬한 복생의 《상서대전》이며, 《사기》(기원전 91년)와 서진의 진수(233∼297년)가 저술한 《삼국지》에도 기자는 나타난다. 이중 《삼국지》기록을 보면 “옛날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8조의 법을 만들어 가르쳤더니 문을 닫고 사는 집이나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었다. 40여 세대 이후 그의 후손인 조선후(朝鮮侯) 준이 왕을 칭하였다.”고 해, 기자의 후손이 조선의 제후가 되었고, 왕이라 칭하였다는 말이다.
위만조선은 《삼국유사》에도 기록이 있지만 “연나라 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면서 무리 천여 명을 모아 동쪽으로 달아나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빈터인 상하자(上下障)에 머물렀다. 위만은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와 옛날 연나라와 제나라에서 망명한 자들을 예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에 도읍하였다. 원봉 3년(기원전 108년) 여름 이계의 재상 삼이 사람을 시켜 왕을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다. 그러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대신인 성기가 한나라에 대항하였다. 좌장군 우거의 아들 長 등이 조선의 백성을 타이르게 하여 성기를 죽이도록 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군을 두었다.”역사책에서 배운 한사군의 설치 과정이다.
이렇게 하여 조선은 망하지만, 한번 망한 나라는 그대로 끝이었을까? 또 한사군은 우리가 아는 평양과 함경도, 강원도에 둔 것일까. 일부 학자들의 주장대로 요동 이북에 둔 것은 아닐까? 결론부터 말하면 한사군은 한반도 내에 설치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아직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단에 서 있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또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의 위치도 제대로 비정하지 않고 애매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고조선이 강성해지자 불안을 느낀 한은 대군을 보내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이에 우거왕이 약 1년 동안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오랜 전쟁으로 지배층에서 내분이 일어나 왕검성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고 지배하였으나,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물러갔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전까지는 지도를 첨부하고 낙랑군은 평안도, 진번군은 황해도, 임둔군은 강원도, 현도군은 함경도라고 한 것에 비해 엄청나게 바로 잡혔지만, 여전히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사기》「조선열전」에 의하면 한나라가 조선을 침공하여 위만조선을 멸하고 장수들을 포상했는데, 포상을 받아야 할 한나라 장수들이 모두 처벌을 받는다. 그리고 한나라에 항복한 위만조선의 지배층이 오히려 다른 중국 지방의 제후로 봉해지는 포상을 받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전쟁의 승자와 패자가 누구인지 모호하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 지역의 땅을 하사하는 것이 보통인데, 위만조선의 멸망은 한나라 장수의 공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위만조선 지배층이 투항한 것이고 위만조선의 영역을 모두 차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한사군 설치 여부도 의문이지만, 설치지역이 어디인가가 더 쟁점이다. 《사기》「조선열전」에는 사군을 설치했다고만 하고 위치, 임무, 명칭은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애매하다. 《삼국유사》도 이에 따라서 “배구전(裵矩傳)에 이런 말이 있다. ‘고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이었는데, 주나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라 하였다. 한나라는 이를 나누어 3군을 설치하고, 현도·낙랑·대방이라 불렀다.’《통전》도 이와 같다. 《한서》에는 진번·임둔·낙랑·현도 4군이라 했는데, 지금은 3군이라 하고 또 이름도 다르니 어째서일까?”라고 의문을 제시하였다.
한나라 당시 고조선과 국경은 지금의 북경 근처에 있는 난하였다. 이것이 점차 동쪽으로 이동하여 대릉하, 요하, 압록수, 대동강으로 변해 갔는데 이들 강을 중국 사서들은 계속하여 ‘패수’로 칭함으로써 혼란이 야기되었다. 확실한 것은 고조선과 한나라 국경은 지금의 난하였다는 것이다. 고대 조선은 난하 동쪽에 존속하였으며, 설사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하더라도 특히, 낙랑군은 지금의 난하 근처에 있었다는 것이다. 낙랑은 나라를 나타내는 고유명사라기보다 보통명사로 사용되었는데, 여러 시대, 여러 나라에 걸쳐 나타난 나라 혹은 지역을 낙랑이라 칭한 것이다. 다만 후세에 특히, 일본 식민지 학자들이 한사군에다 연결시키고 한반도 내의 평양(북한)에다 억지로 갖다 붙이면서 혼란이 야기된 것이다.
일제는 1910년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는 이듬해부터 ‘고구려고적조사사업’을 펼치면서 엄청난 역사 조작을 벌였다. 이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도 고대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일본서기》는 편찬 때부터 자신들의 모국인 한반도와는 단절했다. ‘일본’이라는 국가를 세우면서 조상이 백제라거나, 없어진 나라의 식민지였던 굴욕적인 역사를 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조작된 역사를 맞추려다 보니, 조작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담 같지만, 일본의 대표적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 1950∼)는 미야기현 사사라기 유적지에서 4만 년 전 유물을 발견하였다고 하여 유명해졌다. 그가 손대기만 하면 유적·유물이 쏟아져 나왔으므로 ‘신의 손’이라는 칭송까지 들었다. 일본은 그동안 구석기 시대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런 일본에도 70만 전 전의 구석기 시대가 있었다고 하여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1981년 일이다. 그러나 그가 유적지에 유물을 몰래 묻는 것이 마이니치 신문의 비밀 촬영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이런 사기, 조작은 이미 식민사학자들로부터 내려온 것이고 《일본서기》편찬 때부터 시작된 사기극이다.
조선총독부는 ‘세끼노 타다시’를 단장으로 평양을 조사한 뒤 내놓은 것이 「평양군지」였는데, 이때 왜곡된 주장이 정설이 되어 아직도 우리 고대사를 괴롭히고 있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설화를 보더라도 낙랑국과 낙랑군은 엄연히 다른데도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면서 세키노가 제시한 증거는 다음과 같다.
·대동강변 토성과 와당 등에 의한 낙랑군치소 설정
·낙랑군 무덤이라는 묘제
·평양지역에서 발견되었다고 수집한 70여 개의 한사군 봉니(封泥)
·평안남도 용강에서 발견된 점제현신사비
·동평양 귀틀무덤 제9호 고분에서 출토된 효문묘 동종(銅鐘)
·황해도 사리원 부근 고분에서 출토된 벽돌 장무이전(張撫夷塼)과 고분
여기에는 모순이 한둘이 아니다. 중국 사서에 사군 설치는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곳에 둔 것으로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패수 동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를 이유로 패수를 난하가 아닌 대동강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낙랑군 치소로 보는 토성이 증거라고 했다. 대동강을 패수로 볼 수밖에 없다면, 낙랑군 치소인 토성은 浿水(대동강)동쪽에 있어야 하는데, 대동강(패수)은 지금도 그렇지만 토성의 남쪽에 있어서 왕검성이 될 수가 없다. 한나라의 유물이 평양에서 여러 개 발견된 것을 증거라고 한 것도 이것은 고구려에 망명한 한나라 사람들의 것으로 볼 수 있고, 실제로도 황해도 안악 3호분 벽화에 그려진 ‘동수’라는 인물은 연나라 왕족으로 왕위 계승 문제로 다투다가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다.
‘평양이 낙랑’이라고 주장한 증거에 대한 설명을 여기에 모두 열거할 수는 없지만, 특이한 것은 ‘봉니’와 ‘점제현신사비’다. 생소하기도 하고 증거로 남아 있기 때문인데, 봉니는 고대에 죽간 등 공문서를 나무상자에 넣은 다음 끈을 묶은 뒤, 이 끈을 풀지 못하도록 진흙으로 봉한 다음 도장을 찍는 ‘낙관을 찍은 진흙덩이’를 말하는 것이고, 점제현신사비는 식민사관의 대표 학자인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1913년 평안남도 온천군 성현리(해방 전은 평남 용강군 해운면 운평동)에서 발견해 세상에 공개한 ‘점제평산군비(秥蟬平山君碑)’로 이름 붙인, 높이 151.5㎝, 너비 109㎝, 두께 12.1㎝ 화강암 자연석에 예서체 7행 99자가 새겨진 비문이다.
이 비는 아마도 우리나라 비 중에 가장 오래된 것 같은데, 일부가 마모되기는 했지만, 일제는 이렇게 해석했다.
‘원화 2년(기원 85년) 4월 무오일 점제장□□과 □건, 승, 속국이 모여 백성들을 위해 점제신사를 수리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평산군 산신인 호랑이의 덕은 높은 산인 대산과 승산에 비길 수 있으며 위엄은 우뢰와 같다. 점제고을을 도와 바람과 비를 잘 조절하고 땅을 기름지게 하며 백성들을 장수하게 하고 오곡이 풍성하게 하며 도적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간사한 것이 자취를 감추며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길하고 이롭게 하고 모두 신의 빛을 받게 하여 주소서.’
점제현의 長이 산신에게 제사 지내는 내용이다. 이 비에도 이상한 점이 많다. 발견 경위도 그렇지만 읽을 수 없다던 비석의 탁본 사진은 아주 선명하다는 것인데, 1915년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에 비석에서 가장 중요한 간지와 연도가 새겨진 비석 오른쪽 윗부분이 사진 2매에는 보이지 않는데, 다른 사진에는 보인다는 것이다. 조작이라는 유력한 증거다. 또 사진 3매의 글씨가 서로 다른 서체로 고대의 서체가 아니라 근현대 서체라고 허선영(안산1대학 관광중국어과)교수는 주장하고 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사진만 있고 탁본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 돌아가 단군조선은 홍산문화를 포함한 발해연안문명을 이어받은 적통이자 종주국으로 한민족 역사체계를 ‘환국-환웅-단군-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발해·신라-고려-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으로 세워야 한다. 이렇게 자리매김에 해야 하는 단적인 이유가 있다. 1982년 러시아 고대사 세미나에서 러시아 사학자 U.M.푸틴 교수가 한 말이다. “동북아 고대사에서 단군조선을 제외하면 아시아 역사는 이해할 수 없다. 그만큼 단군조선은 아시아 고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데 한국은 어째서 그만큼 중요한 고대사를 부인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일본이나 중국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 내는데 한국인은 있는 역사도 없다고 하는가? 도대체 알 수 없는 나라다.”
단군조선의 위성국이던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망함과 동시에 단군조선이 어떻게 되었는지 명확한 답은 없다. 그러나 단군조선을 이어받은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삼국유사》에도, 중국 측 기록에도 있다. 대표적으로 《삼국사기》「고구려본기」‘동명성왕편’의 기록이다.
“시조 동명성왕은 성이 고씨이고, 이름이 주몽이다. 앞서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지내 대를 이을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어느 날 그가 몰던 말이 곤연에 이르렀는데 말이 그곳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임금은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돌을 굴러보게 하니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임금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이 아이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주신 아들이다”라고 하며 거두어 길러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고 아이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훗날 재상인 아란불이 말하였다.
“어느 날 하느님이 내게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희는 피하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이라는 땅이 있는데 토양이 기름져서 오곡이 잘 자라니 도읍을 정할만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불란이 마침내 임금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고 하였다. 그 옛 도읍지에는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그곳에 도읍을 정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부여의 창시 설화다. 《삼국유사》에도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부루가 죽자 금와가 대를 이어 왕이 되고, 다음 왕위는 태자 대소에게 전해졌다. 지황 3년 임오년(서기 22년) 고구려왕 무홀이 동부여를 정벌하고는 왕 대소를 죽이니 나라가 없어졌다.”또 고구려는 졸본부여라고 했는데, 졸본주는 요동 경계에 있었다. 《한단고기》에 부여가 여럿 나오는데,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가 그것이다. 북부여는 기원전 239년 고열가 단군 57년 고리국(탁라국)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군대를 일으켜 아사달을 점거하고 북부여를 건국했다. 이로써 대부여, 번조선, 북부여 세 나라가 존재하였고, 동부여는 기원전 59년 북부여의 해부루왕이 동쪽 가섭원으로 이주해 세운 나라로 지금의 길림성 북부와 내몽고 자치주 동부 및 흑룡강성 지역이다. 북부여는 346년간 존속하였고, 동부여는 서기 494년에 고구려에게 투항하였다. 고구려의 전신인 졸본부여는 광개토태왕비문에 의하면 고구려의 시조인 추모왕의 아버지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로써 추모왕, 즉 동명성왕은 북부여에서 나왔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에 다른 설도 있다고 하면서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을 때 그곳의 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비상한 사람인 것을 알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고 왕이 돌아가시니 주몽이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했다.
책을 요약하고 관심 분야만 적은데도 결코 간단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를 알아 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저자의 공부량이나 노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므로 포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음 장은 고구려, 백제, 신라는 물론 가야가 일본의 원류라는 사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제3부】4국 시대
[고구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기원에 대해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백제는 기원전 18년, 신라는 기원전 57년, 가야는 기원후 42년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은 별로 없는 것이다. 주나라의 역사서 《일주서(逸周書》에 서주가 성주(지금의 낙양)에서 개최한 ‘성주대회’에 고구려가 참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주나라 건국의 일등 공신이며 이후에 齊나라 제후로 봉해진 태공망도 참석했다. 이때가 기원전 12∼11세기로 고구려는 이때 이미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의 기원전 37년 건국설은 근거가 없는 것일까? 주몽이 요동에 고구려를 세웠다는 것은 고구려가 단군조선의 거수국(제후국)이었기 때문에 옛 고구려를 잇기 위해,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한 것으로, 단군조선의 후손들로 거수(渠帥)에 봉해졌는데 이는 고구려 말고도 부여·고죽·예·맥·추·진번·낙랑·임둔·현도·숙신·청구·양이·양주·발·유·옥저·기자조선·진·비류·행인·해두·개마·구다·조나·주나·한·삼한 등 많은 나라가 있었다. 이들 대부분 지금의 요서지역에 위치하였고, 진·비류·개마·조나·한 등은 요하 동쪽 만주와 한반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구려는 이때 단군의 후손으로 바뀌어 나라를 새로 세운 것이다. 이로 인해 고구려 기원은 기원전 1000년 이전이라는 설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고구려 건국 정신은 ‘다물’의 계승인데, 이를 보면 건국이념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 사서 《자치통감》에 “高句麗語復舊土爲多勿”이라고 했다. 이는 “고구려 말에 옛 영토를 되찾는 것을 다물이라 한다”고 한 것이며, 《삼국사기》에도 “동명왕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 땅을 ‘다물도’로 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라고 하여 다물의 유래를 기록했다.
다물多勿은 단군조선의 영광을 되찾고 그 통치 영역을 되돌려 받겠다는 건국이념으로 구토를 회복한다는 말이다. 옛땅이란 지금의 북경 근처에 위치한 난하를 경계로 한 동쪽, 만주와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광활한 영토를 말한다. 이것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할 수 있는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비록 현실적으로 영토 회복은 어렵더라도 정신적인 영토 회복, 역사의 회복은 반드시 이뤄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백제]
우리나라 고대사 중 고구려는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에 대한 정리와 이들과 고구려와의 관계, 고구려의 기원 문제 등 논란이 많다. 또 백제는 기원과 최초의 건국지, 건국자, 계통문제 등에 논란이 있다. 중국과 일본으로 진출한 역사와 대외 관계는 물론 백제는 한반도에서만 활동한 것이 아니라, 중국 본토와 일본 열도에서 역사적 활동을 하였다는 것의 사실 여부 등 궁금한 것들이 뚜렷이 정립이 되지 않은 상태다. 백제의 건국에 대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백제 시조 온조왕은 아버지가 추모다.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 세 명이 있었는데, 주몽을 본 후 그가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는 그에게 둘째 딸을 시집보냈다. 얼마 안 되어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뒤를 이었다. 주몽은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비류와 온조라고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았던 아들이 이곳에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자신이 태자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마침내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 지방으로 떠났다. 그들은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에 올라 거주할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기를 원하였다. 이에 열 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하였다.(…)”
《삼국사기》〈백제지리지〉에 “후한서에 이르기를 삼한은 모두 78국인데, 백제는 그중의 한 나라다.”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사서《북사》에는 “백제의 동쪽 끝은 신라이고 서남쪽으로 큰 바다가 있으며 북쪽 경계는 한강이다. 그 도읍은 거발성인데, 고마성이라고도 한다. 그 외 오방성이 있다.”고 하였다.
백제의 역사와 지리에 대하여는 이외에도 《후한서》《송사》《위서》《주서》《양서》《구당서》《신당서》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대부분 비슷하다. 그러나 시조가 온조 혹은 비류, 온조·비류 공동설, ‘구태’설 등으로 나뉘는데, 이는 다시 고구려→온조, 부여→비류 등으로 나뉜다. 정사 《삼국사기》마저 《후한서》를 빌어 서술한 것처럼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시조를 온조라고 하였으나, 온조의 출생에 대하여는 주몽이 졸본부여 왕의 둘째 딸 사이에 낳은 아들이라고 하였으나, 한편에는 졸본부여에서 월군 여자 사이에서 났다고도 했다. 백제의 건국 시조를 비류라 하면서 비류는 주몽의 소생이 아니라, 우태 소생이며 나중에 주몽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하기도 하고, 아예 중국 사서인 《북사》와 《수서》를 인용하여 시조를 구태라고 하기도 하였다. 김부식 본인도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다고 했다.
여기서 보면 《삼국사기》자체가 「백제본기」를 쓰면서 《북사》나 《수서》인 북조 계통의 사서만 인용하였다는 것이고 《남사》《송서》는 왜 제대로 인용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럼으로써 오래전부터 중국에 대해 사대한 것으로 역사를 고정시키고 오늘에 이른 축소지향적 역사를 여기서도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의 발문인 ‘진삼국사표’에 김부식 스스로가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생각하건대 신라·고구려·백제가 나라를 세우고 솥발처럼 대립하면서 예를 갖추어 중국과 교통하였으므로, 범엽의 《한서》나 송기의 《당서》에는 모두 열전을 두었는데, 중국의 일만을 자세히 기록하고 외국의 일은 간략히 하여 갖추어 싣지 않았다. 또한 그 古記라는 것은 글이 거칠고 졸렬하여 사적(事跡)이 누락 되어 있고 임금 된 이의 선함과 악함, 신하 된 이의 충성과 사특함, 나라의 평안과 위기, 백성들의 다스려짐과 혼란스러움 등을 모두 드러내어 경계로 삼도록 하지 못하였다.”
※중국은 ‘5胡 16國’으로 난립한 적이 있는데, 그만큼 혼란한 시대로 그런 속에 우리의 삼국 아니 사국, 고려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오호 16국이란, 위촉오 삼국을 통일한 서진이 멸망한 후, 한족을 제외한 5개 오랑캐와 16개 나라들이 중국 북부에 난립한 시대를 말한다. 304년부터 북위가 화북을 통일한 439년까지로, 5胡는 흉노·선비·저·갈·강이란 5개 오랑캐 족속, 16국은 북위 말엽 사관 최홍이 쓴 《16국춘추》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16국도 넘었다고 한다. 또 남북조시대란, 420∼589년 사이 한족이 세운 남조와 유목민족이 세운 북조가 대립하다가 수나라가 통일한 시대까지를 말하는데, 남조는 송제양진 4개 왕조, 북조는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를 말한다. 이것을 수가 통일했다.
백제의 역사를 알아 감에 있어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과연 백제가 중국 대륙에 진출하였는가일 것인데,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 시기에 백제는 중국의 요서, 산둥 지방과 일본의 큐슈 지방까지 진출하였으며, 중국 남조의 동진, 가야, 왜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라고 서술하고, 주를 달아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다는 《송서》와 《통전》의 내용을 소개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그런 기록이 없이 다만, 위나라의 침입을 격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소개했다.
여러 사서를 종합하면 요서지방을 차지했다는 백제는 우리가 아는 한성→공주→부여로 이어진 백제와 다르다. 백제가 중국 대륙에서 활동하면서 요서지방을 지배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한반도 백제가 대륙에 진출한 것인가? 아니면 원래 대륙에 백제 세력이 있었는가인데, 백제의 건국지로 알려진 압록강, 한강유역, 미추흘(인천), 아니면 경기도 화성, 충청도 직산과 인주라고 할 경우에도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사실이거나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한반도 백제가 강력한 세력을 앞세워 대륙으로 진출했다는 것일 것이다. 《삼국사기》에 김부식도 북위쪽 사서를 선택했듯이, 후대 사람들이 중국과의 사대가 편하다는 이유로 그렇게 믿었듯이, 유독 온조 시조설을 선택한 것처럼 납득이 되지 않으나, 우리도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백제 건국과 관련하여서 식민사관이 지배하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삼국사기》에 가야나 백제가 일본을 지배하고 경영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단지 일본에 문화를 전파했다는 기록뿐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진출하여 식민지로 다스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은 사실처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칠지도 등 반대의 물증이 나오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많은 일본인 학자들과 우리의 일부 주류사학자들은 이를 부정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한사군 한반도설’‘단군조선 평양 이동설’에 찬동하고 있고, 백제 중국대륙설을 무시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물론 《삼국유사》도 중국 사서를 인용하면서 《북사》계통의 사서만을 참고하여, 백제의 중국 대륙내 활동 사항은 누락시켰다. 그러나 《환단고기》에는 소서노가 대륙에서 백제를 건국하고 비류가 뒤를 이었으며, 온조가 한반도로 옮겨 백제를 세운 후 대륙 백제의 비류가 한반도의 백제에 합류된 것으로 기록하여 백제 건국의 모든 역사를 포함시켰다. 백제는 구태에 의해 중국 대륙에서든, 소서노와 비류에 의하였든 세력을 규합하여 북위와 전쟁을 벌이는 등 활동을 하다가 결국은 한반도 백제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은 대륙에서 백제는 존재하였고, 이 백제가 대륙에서 역사적 활동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대륙에서의 백제는 한반도에서 진출한 것이 아니라, 단군조선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세력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요서에서 세력을 키운 백제는 346년 전연 모용황으로부터 2차례 침입을 받고, 부여 세력과 함께 한반도로 건너와 그중 일부는 한성에 정착하여 근초고왕 세력이 되고, 일부는 가야로 내려갔다. 근초고왕은 광개토태왕에 비길만한 정복군주로 마한을 점거하고 평양성까지 진격해 371년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했다. 이런 힘은 어떤 합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 일부가 가야로 내려가 중국 본토에서 발견된 청동가마솥과 같은 유물을 대성동에 남겼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간 일부는 일본을 지배하다가 고국인 백제가 말년에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받아 위기를 맞자 지원군을 보내 구원하고자 했다. 그러나 백강전투에서 패하여 돌아가면서 선친의 제사를 지내지 못함을 한탄하기도 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들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쳐들어올 것을 염려하여 산성을 축조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백제와 인연을 끊고, 백제의 역사를 자기들 역사로 《일본서기》에 기록했다. 국호를 일본으로 변경하고 독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위나라 기병 수십만을 물리치기도 한 백제, 처음엔 요서가 거점이었던 백제, 수나라 역사서인 《수서》에는 백제를 일컬어 ‘동이강국’이라고 했으며, 건국 초부터 백가가 제해했다고 국호를 백제라고 했던, 백가제해(百家濟海)‘백가가 바다를 제패했다’는 뜻이다. 백제는 처음부터 바다를 제패한 제국이었다. 거대한 해양제국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망했을까? 《일본서기》에는 663년 ‘백제의 최후 거점인 주류성마저 함락되자 조신들이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선조의 무덤을 어찌 오간단 말인가.’일본에서 백제는 모국이었고 본국이었다. 670년 ‘일본’이란 국호로 새로 탄생했다.
백제 마지막 의자왕은 나·당군이 사비로 쳐들어오자 웅진으로 피신해 전열을 정비해 대항하고자 했다. 그러나 웅진성 성주 예식*이 항전 5일째인 660년 7월 18일 연합군과 내통해 의자왕을 사로잡아 연합군에 넘겼다. 의자왕은 내부배신으로 항복했지만, 이때 백제가 망한 것은 아니었다. 임존성 등 각지에서 왕족과 장군들의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663년 6월에는 왜군 2만 7천 명이 백제를 지원해 옴으로써 유명한 ‘백강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부흥군과 왜군이 패함으로써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낙화암과 삼천궁녀 전설은 사실을 아니라는 것은 여기서는 생략한다.
*예식(614∼672)백제 멸망 당시 웅진성 성주. 항복 후에 당나라로 건너가 ‘대당죄위위대장군’이란 정3품 고위직을 지냈다. 낙양에서 묘비가 발견되었다.
[신라]
신라에 대하여는 《삼국사기》《삼국유사》등에 고구려·백제보다 훨씬 더 많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박(조랑박)에서 태어난 박혁거세, 황금 궤짝에서 나온 김알지에 대한 설화를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차라리 석탈해가 신빙성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에 대해 “탈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나이가 62세였다. 성은 석이요, 왕비는 아효부인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는데, 이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1천리 밖에 있었다.”고 했다. 물론 그 나라에서는 탈해도 알에서 태어났다고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 전한다고 했지 사실처럼 기술하지는 않았다.
얼마나 영특하고 영민했으면 굴러온 돌인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신라의 왕은 모두 56명인데, 박혁거세를 비롯 박씨가 10명, 석씨가 8명, 그리고 나머지 38명은 김씨다. 지금 널리 알려진 김해김씨가 아니라 경주 김씨다. 김씨가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는지가 궁금한데, 시림(계림)에서 금궤에 매달려 있었다는 김알지 탄생 설화의 금궤로 인해 김씨로 삼았다고 하지만, 이것은 설화일 뿐이다. 알지는 우리말로 ‘어린아이’를 뜻한다. 탈해 즉 석탈해 이사금은 그 아이를 안고 궁궐로 들어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아이는 파사에게 왕위를 사양해 왕이 되지 않았다. 알지는 열한을 낳고, 열한은 아도를 낳고, 아도는 수류를 낳고, 수류는 욱부를 낳고, 욱부는 구도를 낳았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다. 미추가 왕위에 올랐는데, 알지에서 시작된 김씨계보다.
그런데 김춘추(무열왕)아들 김인문의 묘비에는 김씨는 소호 김천씨의 후손이라고 하였고, 864년에 신라 여인으로 당나라에서 사망한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는 자신의 먼 조상이 흉노 휴도왕의 태자 김일제, 김일제는 소호 김천씨의 후손이라고 했다. 소호 김천씨는 상고시대 3황 5제 중의 제왕(소호금천,전욱고양,제곡고신,제요도당,제순유우)으로서 이름이 현효 혹은 설이고 황제의 장자였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을 신라사람이라고 했는데, 이 부분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내용과 좀 다르다. “김유신은 경주사람이다. 그의 12대 할아버지 김수로는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모른다. 그는 후한 건무 18년 임인에 구봉에 올라가 가락의 아홉 촌을 바라보고 마침내 그 땅에 가서 나라를 열고 국호를 ‘가야’라 했다가 후에 금관국으로 바꾸었다. 그 자손이 대대로 이어져 9대 자손인 구해(구형왕)에 이르렀다. 김유신에게는 증조할아버지가 된다. 신라인들은 자신들이 소호 김천씨의 후예라고 여겼기 때문에 성을 김이라 하였고, 김유신의 비문에도 ‘현원의 후예이며, 소호의 자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남가야 시조인 김수로도 신라와 성이 같았던 것이다.”
조금 이해하기 어렵다. 김유신은 당연히 김수로왕의 후손이며, 가야의 마지막 구해왕 증손으로 알고 있었고, 김수로왕이 신라에서 넘어왔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기 때문이다. 신라의 역사는 무엇보다 경주에 남아 있는 커다란 능이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원릉 등 대표적인 적석목곽분은 단군으로부터 이어온 고구려 대형 피라미드 적석총에서부터 전해져온 것이다. 만주 집안에 7층으로 이뤄진 장군총을 비롯 1만 3천여 기의 무덤군이 있다. 백제도 서울 석촌동 묘제가 적석총을 따르고 있다. 이후에 공주 무령왕릉 등은 횡혈식으로 변화되었고, 신라는 김씨 왕조가 시작될 때부터 수혈식 적석목곽분이었다.
적석목곽분은 통나무로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다 자갈을 깔고 봉분을 쌓은 것인데, 자갈로 인해 도굴이 어려웠으므로 많은 유물이 온전히 발견되는 편이다. 북만주 초원 지역에서 시작되는 아시아 유목민을 그리스에서는 스키타이, 중국에서는 흉노(선비,돌궐(터키),몽골)라고 불렀다. 거란을 포함하는 이들은 부르는 이름만 다를 뿐 모두 동일 혈통의 아시아 유목민이다. 신라의 김씨 계통을 흉노족이라 하여 거부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흉노라는 인식이 강하고, 이들에게 시달린 중국인들이 사서에 야만인이라거나 폭력적이라는 인식을 심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원전 600년경부터 초원에 철기를 받아들이고, 기원전 4세기경에 유목부족을 통합하여 기마민족 집합체를 만들었다. 흉노(匈奴)의 흉은 오랑캐, 노는 노예를 뜻하는 것으로 알았으나, 훈족에서 따온 음사이고 노는 노예가 아니라 낭군 또는 낭자라는 뜻으로 자기 사람에 대한 호칭이라고 한다.
정리하면 신라는 일본처럼 여러 세력들로 구성된 복합국가였다. 《삼국유사》와 《후한서》등 여러 사서에 낙랑 땅에 거주하던 진인들이 진시황의 노역을 피해 마한 땅으로 이주했고, 마한왕으로부터 거주지로 할양받은 경주지역에 6촌(6부)세력을 형성하고, 부여에서 이주해 온 박혁거세 세력과 전한말 왕망이 세운 신나라가 후한의 무제에게 망하면서 탄압을 피해 해로로 유입된 김일제 세력과 고구려와 전연과의 전쟁에서 고구려군에 쫓겨 동해안을 따라 유입된 흉노계 선비족들까지. 이들 세력들은 강력한 기마군대로 성장해 내물왕 때 신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당초 모(牟)씨로 불렸던 왕가의 성을 김일제의 후손이 기반을 잡으면서 김씨로 바꿨다는 것이다.
[가야]
《삼국사기》에는 가야에 관한 기사가 없다고 배웠으나 시조 탄생 설화와 〈본기〉,〈열전〉등이 없다는 것이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삼국사기》제4권 〈신라본기〉진흥왕 조에 “왕19년(532)금관국왕 김구해(구형왕)가 왕비와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 둘째 아들 무덕, 막내 무력(武力)과 더불어 자기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임금이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상등의 직위를 주었으며, 금관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고 하여 금관가야의 항복 사실을 적었다. 김무력은 김유신의 할아버지다. 또 대가야의 멸망도 진흥왕 조에 실렸는데 “왕23년(562)가을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이 부장이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선두에서 달려갔다. 전단문에 들어가 흰 기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사부가 이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임금이 사다함에게 좋은 말과 포로 200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은 세 번 사양하여 임금이 강하게 권하자 포로를 받아 풀어주어 양민이 되게 하고 밭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찬미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없는 것을 《삼국유사》가 보완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무튼 가야는 문무왕의 비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신나라가 후한에게 망하자 핍박을 피해 한반도로 피신해 온 김일제 자손 중에 성한왕 김성(金星)이 김알지가 되어 신라에 정착하고, 김일제 후손 중 또다른 한 사람인 김일제의 동생 윤胤이 같이 후한에 잡혔으나 윤은 일찍 죽고 그 아들 안상(安常)이 투후, 즉 도성후(都城候)가 됨으로써 자손이 번성하였다. 그러나 안상의 3대손 탕(湯) 역시 신나라가 망한 후, 망명하게 되어 바로 김수로가 되었다. 다시 말해 김일제 5대손이 신라 김씨로, 윤의 5대손이 가락 김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만주 조양 부근에 정착했으나, 346년 전연왕 모용황의 공격을 받자 배를 타고 한반도 금관가야로 내려와 머물며 여기서 대성동 고분에서 나온 유적을 만들었고, 400년 광개토태왕의 침입을 받자 일본으로 이주하거나 주도권을 대가야로 넘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의 초기 기록은 허구라는 사실, 가야와 백제가 일본을 건국한 주역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장구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다 옮길 수 없을 것 같아서 이 부분은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정리하면 가야는 부여계 세력과 일본 건국 신화의 주인공인 단군조선인들로 고대 문명을 일으키던 일본 열도로 건너가 고대국가 건립에 밑거름이 되어, 큐슈의 야마대국(邪馬臺國-사마대국)을 건설하고 이어 혼슈의 야마토국(大和國)을 건설하고 다스렸다. 백제를 위시한 이들이 식민지로 만들었으나 백제가 망 후 일본(日本)이라는 나라를 새로 건국하면서 명목상 독립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천황과 지배층은 모두 한반도에서 건너간 가야와 백제인, 신라·고구려인이었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이 한국의 우익을 부추기는 느낌도 없지 않은 것 같으나, 아직은 일본 우익에 비하면 우리는 그래도 양반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제4부】새롭게 정립해야 할 우리 고대사
이장은 지금까지 서술한 것을 정리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우리의 사국시대 이전의 일본은 아직 전쟁용은커녕 일상용 말도 없었고, 청동기 철기도 제대로 없었다.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이런 나라를 처음에는 가야가 나중에는 백제가 분국으로 다스렸다. 그 나라가 엄청난 세력이었던 가야·백제·신라를 정복하고 조공과 인질을 받았다고 《일본서기》는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이 없다고 우리가 일본에 단지 문화문물만 전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은 이것마저도 인정하지 않는다. 설사 사실일 수밖에 없는 일도 교묘하게 중국과 교류를 침소봉대하기 위해, 한반도는 중국과 교류를 위한 중간통로였다고 주장하는 실정이다.
이제 우리는 타당성이 있는 역사자료를 지엽적이라고 부정하기보다는 이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방향으로 역사체계를 바꿔야 한다. 홍산문화를 비롯한 발해연안문명과 연관된 단군조선이 민족국가 시원임을 자랑으로 여겨야 할 것이고, 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가 탄생함으로써 일본에 이른다는 것도 알려야 한다. 그리고 편협한 중국과 일본의 사서를 그대로 인용하거나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이는 역사인식에서 탈피해 우리 사서까지도 참고 자료로, 우리 고대사를 펼쳐야 한다. 그리고 실증주의 사관에 매몰되지도 말아야 한다. 이것은 일본이 식민지 사관을 적용하는데 이용한 합리적 그리고 사료비판적 역사관이란 미명하에 자행된 것일 뿐이다. 이것은 일부러 작은 것을 크게 논하는 잘못이므로 비판하고 배척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작은 것을 따지기보다 큰 물줄기를 먼저 정해야 한다.’기본적으로 역사적 진실을 염두에 두고 세부적으로 따져야 한다는 말이다.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부여는 물론 단군조선 이전의 환국과 환웅도 신화적 역사로 편입시켜야 하고, 고구려에서 파생된 국가로 알던 백제는 부여의 맥을 이은 국가라는 것도, 더 나아가 가야는 물론 일본도 부여의 후계국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부여를 고대국가 역사로 세워야 한다. 고구려는 단군조선을 잇고자 한 다물정신을 국가 이념으로 삼은 만큼 그것을 제대로 가르쳐야 하고, 해상국가로서 위대한 백제의 기상도, 신라가 끊임없는 자극으로 마침내 삼한을 통일한 위대성을 자랑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나주 반남고분의 정체를 명확히 해 이를 역사에 편입시켜야 하는 것도 물론이다. 신라중심의 역사관에서 밀려난 가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대접받지 못한 국가임도 인식해야 하고, 일본에다 고대국가의 초석을 놓은 점도 강조되어야 한다. 그래서 삼국시대가 아닌 사국시대가 되어야 한다. 간도는 분명 우리 땅인데도 외교권이 불법으로 빼앗긴 시기에 일본에 의해 중국과 러시아에 내어준 땅이므로 우리가 찾아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지금 우리 땅은 어떤가? 더 넓은 중국대륙을 호령하다가 만주벌판으로 그리고 한반도로, 다시 그것도 반으로 줄어들어 있다. 우리의 정신은 또 어떤가?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천하관, 다물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역사를 제대로 세워야 정신이 제대로 선다. 중국과 일본을 다스리던 기억이 남아 있는가?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 민족은 세계 최고의 문명을 일으킨 당사자라는 것과 그것을 다시 일으킬 것이라는 것과 그래서 예전의 영광을 되찾고 다시 위대한 민족이 될 것이라는 것을 ….
마지막으로 저자가 ‘글을 마치며’를 통해서 비전문가인 자신이 이런 글을 쓰게 된 이유를 여섯 가지로 나누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를 옮기면서 줄일까 한다.
“논란이 많은 것에 대하여 부족한 본인이 무엇을 결정하고 주장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많은 것을 많은 이에게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를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