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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시인 이성복이 김수영에게 하고픈 말
“선생님, 제가 재능은 짧아도 잘 살게요”
입력 2018.07.07 06:00 | 수정 2018.07.09 05:51
'시인들의 시인' 이성복 "죽으면 김수영 곁에 묻히고 싶어"
"한국엔 김수영, 일본엔 나쓰메 소세키가… 인간 정신의 최전선 살았다"
"시 쓸 땐 다음 말 뭐 쓸지 몰라… 인생과 비슷"
"늙는 건 얼음판에서 브레이크 밟아도 미끄러지는 느낌"
"글 쓰는 원칙은 진지함, 측은함, 장난기… 이젠 생사 건네주는 스승 되고자"
김수영의 책을 들춰보는 시인 이성복(65세).
올해는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정수인 김수영(1921~1968년) 사후 5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 한동안 ‘죽은 시인의 사회'를 살다 보니, ‘시여, 침을 뱉어라'고 일갈했던 ‘불멸의 시인’과 차마 쓰지 못하고 시가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보존된 시인'을 만나고 싶었다. ‘시인들의 시인' 이성복을 찾아 나섰다. 그는 1980년, 스물여덟에 낸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로 제2회 김수영 문학상을 받았다. ‘철저히 카프카적이고 보들레르적'이라는 명명된 그 시집 이후 이성복은 한국 현대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삼십 년이 지났지만 그의 시집은 여전히 ‘잘’ 팔린다.
아침부터 거세게 쏟아지는 장맛비를 뚫고 송추에 있는 그의 작업실로 들어섰다. 창밖으로 초록 나무가 쏟아져 들어오는 작은 복층 오피스텔은 생활의 냄새가 거의 없었다. 중앙에 놓인 작은 책상 하나가 살림의 전부였다. “어서 와요. 2층도 한번 구경해봐요. 느낌이 아주 달라.” 반짝반짝 윤이 나는 눈빛으로 그가 말했다. 책으로 빽빽한 서가를 상상했으나 역시나 텅 비었다.
여백 속에 기척 없이 놓인 건 나무 둥치, 보리수 몇 알, 파란 약통, 돌부처, 대리석 연필꽂이… 흰 종이에 단어 몇 개 부려 놓은 ‘시'처럼 이 공간은 ‘이성복'이라는 시인의 설치 미술처럼 보였다.
“이 ‘어처구니'는 두붓집 마당에서 주워왔어. 맷돌에 끼워 돌리는 나무둥치야. 이게 없어지면 ‘어처구니가 없다'가 되는 거라(웃음). 요건 보리수나무 열매. 두 개만 가져가요. 이건 학생들이 수학여행 가서 사 온 대리석 필통인데, 나는 여기 보이는 이 무늬 같은 시를 쓰고 싶어. 파란색을 좋아해서 콘센트 버튼도 파랑, 짝을 맞춰 파란색 약통 뚜껑도 갖다 놨지.”
공기의 결을 따라 아주 조금씩 배열된 사물. 핵심만 있고 군더더기가 없다. 은퇴 후 작년에 서울로 와서 둥지를 틀었다. 이곳 작업실로 온 지는 한 달이 되었다고 했다.
-서가가 텅 비었습니다.
"책은 이제 많이 읽지 않아요. 공부를 하지. 얼마 전엔 '뷰티풀 퀘스천'이라는 책을 2만 3천 원에 사서 읽었는데 2~3%밖에 이해를 못 했어요. 그런 식으로 산 수학과 과학책이 많아. 난 수학에서 아름다움을 봐요. 키츠가 그랬지. "아름다운 건 진리고 진리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자연과학에 이런 말이 있어. 사실에 부합하지만 지저분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실에 맞지 않지만 아름답다면 그걸 취해야 한다. 당장은 틀려 보여도 결국은 그게 맞다. 나는 자연스럽게 알게 됐어요. 아름다움이 자연의 기본 구조라는 걸."
이성복은 여전히 이곳에서 시를 기다리는 중이다.
-이를테면 수학 공식이나 패턴에서 느껴지는 그런 명료함일까요?
“눈의 결정체를 봐요. 아름답지. 패턴이 드러날 때 참 아름다워요. 모습은 수학자가 아름다워. 수학자들의 수필집에 보면 헝클어진 머리에 운동화 신고 계단에 털썩 앉아 있는 사진이 있어요. 딱 노숙자 폼인데 정말 아름다워. 에미 뇌터라는 유대인 여성 수학자도 수학에 미친 사람이야. 그들의 그 눈이 참 아름다워요. 유배자의 눈, 이방인의 눈이야. 딴 곳을 바라보는 눈이지.”
-선생의 눈도 그렇습니다. 이곳을 보는 데 저곳을 보는 눈이지요. 차원을 꿰뚫는 느낌이 섬뜩합니다.
“하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은 마르케스의 눈이고 김수영의 눈이고 릴케의 눈이에요. 딴 데서 온 사람들이지. 늘 딴 데 가 있는 사람이고. 자기가 온 내면의 고향이 있는 거라. 여기 붙들려서 거기 추억을 갖고 살지. 오직 바깥을 보는 사람, 그걸 실성했다고 해요(웃음). 그런데 시를 쓰려면 실성을 해야 거든.”
이성복은 1952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불문과를 나와 1980년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로 문단과 독자들에게 ‘생의 참모습으로서의 비참'을 선물로 안겼다. ‘모두 병들었으나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로 끝나는 시 ‘그날'을 비롯해 그가 남긴 말의 흉터가 지극히 싱싱하고 선연하여, 유신 시대부터 지금까지 잊히지 못하는 시인이 되었다.
젊은 날 걸작을 낸 후 서울 문단을 떠났고, 유배자의 자리를 자처하듯 30년간 대구 계명대학교에서 불문학과 문예창작을 가르쳤다. ‘남해금산' ‘그 여름의 끝' ‘아, 입이 없는 것들'... 그의 시어가 가리키는 진실만큼, 삶이라는 병명을 자각하며 ‘아름답게 병든 채로’ 살았다.
오랫동안 시를 발표하지 않았기에, 오랫동안 그를 죽은 자로 착각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의 시집 갈피마다 기형도의 ‘그것'처럼 죽음의 임지로 향하는 자의 단호한 리듬, 기어이 패배를 완성하고자 하는 정직한 욕구가 배어 있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으나, 그 이면의 마음은 훨씬 나약하고 어여뻤다.
-이번에 김수영 문학관에서 김수영에 관한 특별 강연을 하셨어요. 이성복이 김수영을 말하는 건 한국 시사에 기록될 아름다운 장면이지요.
“김수명 선생(김수영의 여동생) 만나 한참을 손잡고 사진 찍고 그랬어요. 말하면서 여러 번 울 뻔했어. 김수영은 ‘시미아'야. 시에 미친 아저씨(웃음). 당시에 블랑쇼, 릴케, 하이데거를 읽고 정신의 핵심을 꿰뚫었어요. 김수영 시대에 살았던 시인들이 이념에, 도덕에 꺾여 빛이 바래도 김수영은 푸릇푸릇해.”
-60년대 사람인데 여전히 생생합니다. 선생은 한국의 김수영과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를 늘 함께 언급하셨어요.
“김수영이 1921년에 태어나서 68년에 죽었어요. 47살에. 신기한 게 나쓰메 소세키도 보들레르도 비슷한 나이에 죽었어. 문제적 인간들이야. 일본인들은 나쓰메 소세키를 일본의 셰익스피어다 그래요. 소세키는 영국에서 돌아와 40대에 이미 신화적 존재가 됐어요. 동양, 서양, 전통과 근대, 개인과 집단의 문제가 혼재할 때 길을 냈어요. 혼돈 속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갔지. 김수영이 한국의 그 자리야. 인간 정신의 최전선.”
-천재라는 표현이 부족하지요. 천재는 개인성에 기반한...
“이상이나 서정주, 황지우 같은 시인은 천재야. 김수영은 천재라는 말이 성립이 안 돼. 김수영의 천재성은 시대정신이에요. 정신과 문학을 일치시키려고 했던 본격적인 사람이야. 내가 내 인생의 작가를 선택할 때, 그건 배우자를 고르듯 내 인생 전체를 거는 거예요. 김수영은 믿을만한 사람이었어요. 추악한 이야기도 그 사람 입에 들어가면 고귀해졌거든. 신랄한 구석도 있었지. 그런데 타자를 공격할 땐 자기가 먼저 홀딱 벗고 제물로 내놨어요. 무시무시하게 공부했지.”
-어떤 공부지요?
“책 없는 공부. 인생 자체를 파고들어 가는 공부. 감각에 천재성의 기미가 있더라도. 그 공부는 시에 미치는 거고 삶에 미치는 거라. 예술 작품으로서의 시가 아니라 생의 결기로서의 시를 쓴 거라.”
시를 쓰는 대신 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총망라된 ‘극지의 시' ‘무한화서' 등 시론집을 냈다. 싱크대 안에 놓인 이성복의 책들.
-김수영은 선생에게 특별한 스승이었나 봅니다.
“슈베르트는 잘 때 안경을 쓰고 잤대요. 자다가 악상이 떠오르면 바로 기록하려고. 안경 찾아 쓰고 그러는 사이 영감이 사라지니까... 그 정도로 음악에 미치고 정성이 있던 사람이었어요. 그 슈베르트가 좋아했던 사람이 베토벤이야. 베토벤이 죽기 열흘 전에 슈베르트가 찾아갔는데, 베토벤이 그때 “너, 너무 잘한다" 얘길 해줬지. 슈베르트는 열흘 후 베토벤의 관을 메고 갔어요. 베토벤의 음악은 구조적이고, 슈베르트는 멜로디가 훌륭해요. 슈베르트는 자기가 죽을 즈음엔 베토벤 협주곡을 들었어요. 임종할 때, 주변에 모인 친구와 가족들을 둘러보고도 울먹였어요. “다 있어도 베토벤은 없네” 하면서.”
-아름답고 지독한 관계였네요.
“어쩌면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처럼 아름다움(美)의 다른 얼굴은 미완(未完)이에요. 미완성인 채로 가는 거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는 걸 알면, 집에 갈 가능성도 있거든.”
-시 생각은 언제 하세요?
“논어의 사물잠(四勿箴)에 인(仁)이란 무엇인가가 나와요. 자기를 극복해서 예(禮)를 회복하려면 ‘첫째,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둘째, 예가 아니면 듣지를 말며 셋째,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넷째,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거기서 예를 시로 바꿔 읽어봐요. 뭘 볼 때, 말할 때 항상 시를 생각하죠. 김수영이 그랬으니까.”
-무언가 쓸 때도 항상 김수영을 생각합니까?
“나는 산문을 쓸 때도 열 줄씩 겨우겨우 쓰는데, 김수영은 단칼에 내리꽂지요. 현실참여형 작가이면서도 불가능성을 지키고, 불가능에 닿도록 썼어요. 불가능, 무의미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글은 진부해지고 낡아져. 다들 달의 앞면만 보고 쓸 때, 김수영은 뒷면을 열어뒀어요. 그러니 시대의 메시지가 바뀌어도 더 힘있게 읽히는 겁니다.”
-이젠 선생 얘기를 좀 하시지요.
“나는, 나는… 매우 약한 사람이에요. 정신력이 약한 사람의 특징을 두루 갖고 있어요. 나는 나보다 잘난 사람 앞에서는 매우 분개해요. 하지만 그 사람이 잘났다는 건 인정하지. 김수영은 나보다 너무 뛰어나서 짜증이 나요(웃음). 하지만 그대가 거기 있어 내가 여기 있지요. 나도 문제적 인간이야. 국민학교 5학년 때 단식 투쟁해서 상주에서 서울로 왔거든. 야심가였지. 나는 김수영의 가족묘에 들어가고 싶어요.”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애타는 마음이군요.
“라신느가 죽을 때도 그랬어요. 죽으면 선생 옆에 묻어달라고.”
시집 ‘래여애반다라’를 마지막으로 낸 그가 2013년 이후 띄엄띄엄 발표한 시는 스무 편을 넘지 않는다. 그중 한 편 ‘모란이 질 무렵'이라는 시를 인터넷에서 발견했다.
‘어디 가보아야 하는데 거기가 어딘지/ 몰랐다 해거름 녘에 붉게 핀 것들을 보고/ 한 사람은 작약이라 했고, 또 한 사람은/ 모란이라 했는데, 나도 같이 거기 왜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날 모란이라 했던 사람의 아이는 몹시 아팠고, 우리는 모두 같이 걱정했는데,/ 그 후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시를 쓸 땐 다음 말을 뭐로 써야 할 지 모른다고 했다. 인생과 닮아서 무엇을 쓸지, 왜 쓸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태로 첫 말을 쓸 뿐이다. 종교를 하기엔 믿음이 부족하고, 문학을 하기엔 버텨낼 용기가 없어 그저 ‘시의 자리'에서 가만가만 서성인다는 이성복.
-여기선 주로 뭘 하세요?
“아무것도 안 해요. 시를 써야지… 하면서 와요. 오기 위해서 와요. 나는 운전하는 걸 좋아해요. 아무 것도 안 하면서 뭔가 하는 것 같거든. 또 좋아하는 건 하염없이 기다리는 거.”
-여기서 하염없이 시를 기다립니까?
“다시 쓸 수 있을까? 얼마든지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리 부러져 침상에 있다가 깁스 풀면 금방 걸을 수 있을 것 같잖아. 그런데 안 되지. 근데 또 뱀 한 마리 들어오면 진짜 걸어(웃음). 뱀이 오면 나도 쓸 수 있을까. 한편으론 할 말은 다 끝낸 것 같기도 해요.”
-시 ‘그날'은 ‘모두 병들었으나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로 끝납니다. 김현 선생이 평론에서 이야기했듯이 꿈과 아픔을 계속 자각하는 것이 선생에겐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
“문학은 한낮의 악몽이에요. 죽을 때까지 꿈에서 진땀을 흘리며 사는 게 인생이지요. 최민식이란 배우가 이순신을 연기하는 격인데, 최민식이 죽을 때만큼은 이순신으로 죽지 말고 최민식인 걸 깨닫고 죽어야 해요. 나는 삶이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꿈을 못 벗어나는, 그 상태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요.”
독자와 시인들에게 사랑받는 이성복의 시집들. 삼십년이 넘도록 쇄를 거듭하며 읽히고 있다.
-왜 그게 못 견딜 일입니까?
“그게 진실이니까. 나는 진실이 너무 좋아요. 진실을 꼭 껴안고 잤으면 좋겠어요. 거짓 위안 속에 편안히 살기보다 진실 속에 불편하게 살고 싶다는 거죠.”
-언젠가 ‘극지의 시' 강연에서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외국시, 특히 랭보와 보들레르를 잘 베꼈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나는 잘 베끼는 사람'이라고… 왠지 위안이 되더군요. 고흐가 밀레를 베꼈다고 할 때와는 또 그 느낌이 달랐어요.
“나는 니체, 보들레르, 카프카, 김수영의 영향권 안에 있었어요. 김수영을 베끼고 보들레르를 베끼고… 선생이 남긴 밥을 먹으면 나도 선생처럼 될까 한다 그런 간절함. 언어가 이미 남의 것인데 어떻게 베끼지 않을 수 있나. 그런데 언어가 신기한 게 베끼는 순간에 다른 문맥이 돼버리죠.”
표절과는 다르다고 했다. “훔치는 것은 안 돼요. 새들이 짝짓기할 때 집을 짓잖아. 자기 둥지 지으려고 남의 집 뜯어오면 안 되는 거지.”
-생각하기에 따라 부끄러울 수 있는 고백을 왜 합니까?
“그게 진실이니까. 내가 얼마나 개새끼인지 나는 알아요.”
도서관에서 만년필 심도 몰래 훔쳤고 우물에 똥도 눴다고 했다. “물론 아무에게도 못하는 얘기도 있지요. 어쩌면 까발림과 숨김 사이의 갈등이 문학의 자리라. 정확한 자리로 던지는 투포환 같은 거지. 약한 사람은 진실을 너무 일찍 떨어뜨리고, 강하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끝까지 풀지 못해요.”
-역설적으로 선생의 모습도 삶의 방식도 참하고 어여쁜 사람, 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못됐다는 소리 많이 들어요. 바깥은 여자 안은 남자라. 여성적이지만 모질고 끈질긴 면이 있어서 한번 물면 놓지 않지요. 뱀 대가리 같아. 그것 때문에 출세의 야심도 있었지. 법대 가려고 했는데, 회의가 들어서 문학으로 왔어요. 공부도 처음엔 서양으로 갔다가 결국 동양으로 왔고.”
-시는 삶의 위기와 불길을 노래했지만, 실제 삶은 그 어떤 문인보다 평안했다는 게 놀랍습니다. 2001년 산문집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가 나오기 전까지, 선생이 생존했다는 걸 저는 믿지 못했습니다.
“많은 시인이 비장하게 죽었어요. 기형도, 김소월, 이상, 백석… 그렇게 살아서 죽은 게 아니라 죽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된 거죠. 나는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할 땐, 불문학이 그리 대단한 줄 모르고 졸업하면 대기업에나 취직하려 했어요. 그런데 거기서 김현(문학평론가)이라는 대가를 만났어요. 좋은 스승을 만나 좋은 잡지(문학과 지성사)로 데뷔를 했어요. 시인이 교수(대구 계명대학교 문창과 교수로 재작년 은퇴했다)로 살았으면 온실에서 산 거지. 복이다 싶으면서도, 어쩔 땐 내가 오리 비슷하다 싶어. 날지도 못하고 헤엄도 시원하게 못 친 것 같은 기분.”
-어떤 야심이 있습니까?
“출세는 재미없고. 정말 하고 싶은 건 김수영처럼, 나쓰메 소세키처럼, 카프카처럼 살아보는 거예요. 그렇게 살다 죽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우리 집안이 장수 집안이라 죽기까지 불가능한 지점을 응시하는 게 괴로워. 어머니가 99세에 돌아가셨어요. 60대부터 오래 살았으니 언제 죽어도 좋다 하셨는데, 죽기 전엔 일주일을 우셨어요. 울음을 참으려고 이불깃을 깨물었지. 아버지도 85세까지 살다 가실 때 그 눈빛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내가 20권 정도 책을 쓰고 할 얘기는 다 했는데…”
-‘시인이라 더 잘 살아야겠다’는 신념이 있었나요?
“시 쓰는 게 별 게 아니라. 타인을 위해 신발을 바깥쪽으로 돌려놓는 행위가 시예요. 나는 애살이 많은 편이에요. 그렇게 안 살면 안 되는 사람이야. 시집갈 때 “아빠 저 잘살게요"하는 것처럼, 김수영에게 “선생님, 제가 재능은 짧아도 잘 살게요.”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는 식당에서 밥을 먹어도 6천 원 이상 먹으면 부끄러워서 목에 걸리는 사람이다. 언젠가부터 생명 있는 것도 먹기 힘들다고 했다.
-주변 상황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만드는 기운이 있으세요. 자긍심도 있고 조심성도 있는 ‘수련된' 어른들의 특징입니다.
“나는 엄마를 닮았어요. 우리 엄마도 자존심이 세고 못된 구석이 있었어요. 나보다 잘난 사람 있는 곳엔 가기 싫어했지. 한편으론 상황주의자라 판이 짜이면 반항을 안 하고 잘 맞췄어요. 그게 임기응변이라. 기운이 흐르는 결에 그때그때 잘 맞춰서 살았어요. 엄마 이름이 ‘송정남'인데 아내가 나더러 “오빤, 정남 스타일"이래(웃음). 그런데 죽기 전에 엄마한테 물어봤어요. “엄마, 나 착하지?” 그랬더니 딱 잘라요. “니가 뭐가 착해? 넌 안착해.””
-섭섭하지 않던가요?
“아니요. 그게 진실이니까.”
-노화는 어떻게 맞이하고 있습니까?
“늙고 죽는 것? 얼음판에서 브레이크를 밟아도 계속 미끄러지는 느낌. 그때의 막연함 같은 거죠. “어어" 하면서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죠. 그럴 땐 시동을 껐다 다시 켜면 돼요(웃음). 잘 맞이하기 위해 저는 좋은 문장을 많이 외워요.”
-청년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멀리 보지 말고 자기 발밑을 보세요. 잘 안되면 똑같이 어느 순간엔 시동을 꺼야 해요. 어느 날 내가 면도를 하다 면도기가 잘 안 들어 AS센터에 전화했더니, 완전히 끄고 다시 켜래. 하지만 상황에 빠지면 끌 생각을 못 하죠.”
-제자들에겐 좋은 스승이었습니까?
“선생은 자기 속에 선생을 가진 사람이지요(웃음). 제자들에게 난 성깔도 있고 곁을 안 주는 사람이기도 했고, 늘 꿈속에 나오는 육친 같은 사람이기도 했어요. 시와 삶에 대해서는 거품을 물고 이야기했어요.”
-어떤 것은 가르치고 어떤 것은 안 가르쳤습니까?
“선생은 생사를 건네주는 사람이라 하잖아요. ‘죽는 게 뭔가?’ 이걸 알려주려고 생과 사를 공부했어요. 강을 건널 때 겁먹고 급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이쪽으로 바지만 걷고 오라고. 아이가 셋이에요. 아들 둘에 딸 하나. 둘째가 내 말이 크게 위로가 됐던 적이 있다고 해요. 그 말이 “지금 네가 고민하는 것 외에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다 잘 되고 있다”예요. 생각해보면 잃어야 할 것은 잃을 만 하니까 잃는 거지요.”
-기형도의 시집 ‘입속의 검은 잎'과 선생의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에서 시인에게 ‘입’이라는 단어가 주는 영묘함을 생각해봤습니다.
“언젠가 계림에 가서 500마리 호랑이 떼 앞에 먹이로 던져진 소를 봤어요. 그 소가 파랗게 질려서 다리뼈가 부러지도록 울타리에 제 몸을 던져요. 생사 앞에 선 누구나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해요.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게 시인인 거고.”
지금 자신의 처지는 문학 하려고 온갖 좋은 것을 다 먹고 나서 문학을 못 하게 된 것 같다고 했다. ‘벌침 맞다가 고추 썩은 격’이라고. 조금 쓸쓸할 뿐, 결핍의 기미는 없었다. 시를 쓰는 대신 시를 살아온 자, 왜 그를 보면 하룻밤도 형기를 잊은 적 없이 일기를 써온, 평온한 사형수를 보는 것 같을까. 삶보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눈빛은 더욱 형형해지고.
어떤 말을 하든 비유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비유는 그가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튀어 오르는 배구공에 맞춰 반사적으로 몸이 떠오르듯, 오래전부터 있던 비유가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일 뿐. “내가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가령 이런 거예요. 여기저기 못 쓰는 걸 주워 모아 이 방에 놓았잖아. 프랑스에선 브리꼴라쥬라고 해요. 아무 관계 없는 걸 결합해서 창조하는 것. 이미 창조된 걸 결합해서 다른 걸 만들어내는 것.”
-글을 쓸 때 진지함, 측은함, 장난기 이 3가지를 염두에 둔다고 했지요? 삶에서도 외워두고 싶은 원칙입니다.
“한여름에 우물에 똥 누는 것(웃음). 어처구니 주워오는 것, 그런 거(웃음). 자기 비하나 냉소는 한참 들으면 기분 나쁘잖아. 유머의 특징이 인간의 특징이에요. 요한 바오로 2세는 아이들이 수염 잡고 놀도록 허락했어요. 시가행진에선 음악에 맞춰 봉을 돌리며 시민을 웃겼어. 그분은 사물과 사태에 있는 결을 따라 아름답게 살았어요. 연민은 사물의 핵심에 해당해요. 그게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죠. 난 잘 차려입은 사람이 피가 밴 스테이크를 먹으며 ‘민중운동'을 논하는 걸 보면 아득해져. 그럴 땐 생이 괴물같아.”
그는 개가 생리하는 것만 봐도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써야할 시를 1977년부터 1979년까지 다 썼다고 했다. 자신의 노트 필기를 손으로 짚어보는 이성복.
-아끼는 시가 있습니까?
“최근에 쓴 ‘정선'이라는 시가 좋아요.”
‘내 혼은 사북에서 졸고/ 몸은 황지에서 놀고 있으니/동면 서면 흩어진 까마귀들아/숨겨둔 외발 가마에 내 혼 태워오너라//내 혼은 사북에서 잠자고/ 몸은 황지에서 물장구치고 있으니/ 아우라지 강물의 피리 새끼들아/ 깻묵같이 흩어진 내 몸 건져오너라’-시집 ‘래여애반다라(2013)’에 실린 시 ‘정선'
‘정선'은 정선에 놀러 갔다가 말장난처럼 언어들이 들러붙어 나온 시라고 했다. 사북, 황지, 동면, 서면, 아우라지… 고유명사들이 문장속에서 춤을 출 때, 작가는 얼마나 흥이 날까. 써야 할 시는 스물다섯부터 일곱까지(1977~1979년) 다 써버리고 남은 생은 망가진 잉크병처럼 헛도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지만, 이성복은 1분 1초도 ‘시의 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가 싱크대 수납장에서 노트 몇 권을 꺼내 왔다. 대학 시절 습작과 그가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들을 써놓은 손바닥보다 조금 큰 하늘색 노트였다. 개미들이 열맞춰 기어가듯 글씨는 어여쁘고 반듯했다. 그렇게 둥글고 참한 글씨가 거대한 입이 되어 생의 비참을 말했다는 것이 놀랍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온종일 지치지도 않고 비가 쏟아졌다. 빗줄기를 피해 함께 중국집에서 짬뽕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작별 인사를 하려는데 주섬주섬 검은 봉지를 꺼내 건넸다. 크고 잘생긴 토마토 몇 알이었다. “아침에 오다가... 내 것 사는 데 생각나서 같이 샀어요.”
“아름다움이 뭘까요? 진실할 수 없어도 진실해지려는 노력,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노력, 그게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의 다가 아닐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름다워지는 것 뿐이라고 믿는 탐미주의자 이성복.
귀갓길, 배낭에 토마토를 넣고 아파트가 있는 언덕길을 오르면서 나는 이것이 과연 시시포스의 등짐인가 싶어서 웃었다. 이성복은 시는 ‘자신을 제물로 진실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라 했고 ‘타인의 신발을 바깥으로 놓는 행위'라 했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했다. 다만, 그날 저녁 나는 혀에 달고 시원하게 감기는 토마토 한 조각만을 생각했다. 아침에 땅콩 열 개를 구우면 먼저 나간 아내를 위해 여섯 개를 남겨놓는다는 그는, 이성복이다. 아름답게 ‘보존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