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무엇일까? 뇌가 멈추고 심장이 멎는 것을 죽음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예수께선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가 ‘자고 있다’ 하셨고, 바울도 죽은 사람들을 ‘자는 자들’이라 불렀다. 잠은 죽음과 유사해보이나, 잠을 잘 때도 뇌는 활동하고 심장도 뛰고 있어서, 잠과 죽음이 같은 건 아니다. 그런데 예수와 바울은 왜 죽음을 잠이라 표현했을까? 부활 때문이다. 예수와 바울은 잠을 자고 아침에 깨듯, 죽음을 지나고 깨어나는 부활이 있다고 믿었다.
부활하는 시간이 ‘최후의 심판’이다. ‘최후의 심판’은 죽음을 심판하는 시간이다. 전쟁, 기근, 재난, 질병, 사고 등 역사 속에도 심판은 있다. 역사 속에 간헐적으로 일어났던 심판은 생명을 심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판은 인간에게 두려운 것이요 슬픈 것이다. 역사 속 심판은 고통스럽고 슬픈 까닭에, ‘최후의 심판’을 떠올리면 다소 두렵다.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는 예수께서 다시 땅으로 오시면서 시작된다.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최후의 심판’을 선고하실 때, 역사 속 심판의 때에 억울하게 희생된 자들과 의롭게 죽은 자들이 무덤을 뚫고 부활한다. 죽은 자들이 무덤을 뚫고 부활한다는 게 무엇인지, 인간의 미숙한 언어로 설명하긴 어렵다. 사람이 죽어 묻히면 뼈도 썩기 마련이다. 뼈마저 썩어 흙과 섞여버리는 게 죽은 몸인데, 죽은 자들이 무덤을 뚫고 부활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마태는 예수께서 돌아가시던 직후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27:49~53)」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 때에 죽었던 이들이 부활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왼발을 이제 막 땅 위에 디딘 채 상체를 내미는 사람, 천사가 양팔을 끼워 일으켜 세우는 사람, 천사가 무덤 속 사람의 두 발을 잡아 당기는 바람에 물구나무 서듯 공중에 떠 있는 사람도 있다. 또 무덤에서 나와 앉았는데도 아직 근육과 살이 회복되지 않아 백골 상태로 주변을 살피며 다른 사람의 몸을 받쳐주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계신 공중으로 올라가게 된다.
살아서는 중력을 거스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중력에 잡힌 채 자기 무게만큼 힘을 들여야 한 발 한 발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해 발바닥을 들어 올려도 곧 다시 땅바닥으로 추락한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다가도 어쩔 수 없는 땅의 현실과 타협한다. 먹고 일하고 사랑하는 모든 일들이 무겁다. 죽음 이전 우리네 삶은 중력에 사로잡혀 제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순간순간 추락한다.
마침내 죽어 땅 아래에서 뼈가 썩기까지 깊이 잠들어서야 겨우 가벼워진다. ‘최후의 심판’은 죽음을 심판하고 먼지만큼 가벼워진 인생으로 하여금 하늘을 살게 하는 것이다. 죽음을 죽이는, ‘최후의 심판’은 그래서 온 땅에 은총이다. ‘최후의 심판’으로 부활한 몸은 중력에 당겨지지 않는다. 땅으로 추락하지도 않는다. 하늘을 산다. 로마제국 치하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이들이 ‘최후의 심판’으로 하늘을 산다. 예수께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다. 십자가를 진다는 건 죽음을 감수하며 사는 것이다. 자본의 제국에서 가난은 죽음과 같다. 자본주의 체제에 부역하지 않고, 일한만큼 일용할 양식으로 사는 가난한 사람은 이미 부활의 신비를 누린다. 땅에서도 하늘을 산다. 가난한 사람에게 하늘을 사는 복이 있다.
〈그림묵상〉 《목회와 신학 24년 2월호》
글/ 김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