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혹여 암이 걸리거든
국가에 손해배상청구를 해야 한다는 말을 가끔 했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사는 나에게
정치 또는 정치가들이 주는 울화증 때문이다.
어처구니없는 세월호의 재앙을 지켜보면서
내 속에서 이성으로 꾹꾹 눌러 재워놓았던
그래서 나 자신도 존재를 의식하지 못했던
욕이란 언어가 쿡쿡 올라온다.
정확하게는 소통을 위한 언어가 아니라
비명이라 하는 것이 맞는 말인 것 같다.
비명이라도 지르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은 이 갑갑함.
연일 신문과 온라인을 통해 전해지는
사고 소식을 접할 때마다 경악할 따름이다.
나는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도 뉴스를 볼 때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보호받고 존중받는다는 느낌은커녕
뭐 이런 바보 취급이 있나 싶었었다.
심한 모멸감마저 드는 건 지나친 피해의식인가?
속수무책.
눈앞에서 침몰하는 세월호엔
나와 형편이 그다지 다르지 않은 이들이
그 동안 보호받고 존중받지 못한 소시민들의 끝을 보여주듯
재앙을 맞았다.
그 재앙은 내가 서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일깨워 주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만들어낸 아비규환을 본 것이다.
남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나의 안위.
이 재앙의 근본은 그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모두 뚜껑 열면
우리 안에 똬리 튼
탐욕의 덩어리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탐욕의 끝은 늘 더 가진 자들이
보여주고 있음에 예외가 없는 것 같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이 메커니즘이
왜 이리 화나고 참을 수 없느냐고 묻는 냉소적인 신자들이 있다.
다 알고 있는 타락한 본성이 빚어내는 부조리인데...
헐...나는 그렇게 간단한 결론 속에 숨어버리는 것은
“함께 살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비겁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끝날까지 부조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안에 함께 살아야 하는 우리는
공존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
주님께서는 교회에게 타락한 우리의 본성을 일깨우고
그 본성과 싸우는 일을
잘할 수 있도록 권하는 일을 하라고 하셨다.
그것은 교회와 세상의 분리된 원리가 아니다.
세상이나 교회나 동일한 타락한 본성과의 싸움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세상의 권위를 옹호하는 것도,
타락한 본성은 마치 불신자에게만 있는 것처럼 치부하며
자기 영역을 구분하는 따로국밥같은 신자들도
결국 이 땅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라고 하신 뜻을
잘못 이해한 처사라 생각한다.
상식의 수준을 넘어 선
이런 탐욕의 참사는 결국 그 탐욕을 방관한
우리의 책임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곳간 열쇠를 맡기고
무한신뢰를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타락한 본성에 대해
무지하거나 외면하거나인 것이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욕심이기에
우린 그 욕심이 빚어내는 탐욕의 변주곡들을
평생 보고 살 것이다.
로마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와 경주 최부자집의 처세는
인간의 고상한 사랑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더 가짐이 어디에서 왔는지
또 그것을 지키려면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가 무엇인지
잘 아는 지혜로운 처사에서 나온 것이다.
몇 대를 걸쳐 이어오는 고택들을 돌아보면서
내가 확인했던 것은
그들이 베풀던 솔선수범과 자비는
결국 다시 자신의 가문을 지키는 방패막으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민란과 전란 속에서도
티끌 하나 다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고택의 위용은
함께 사는 세상이 보여주는 지혜로운 유산인 것이다.
우리는 가진 사람들이
가진 것으로 끝없는 욕망에 빠지지 않는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불법을 자행할 때 침묵하지 말아야 하고
누군가를 억압하며 자기이익을 챙길 때 눈감아주지 않아야 한다.
지켜줄 가치가 있는 권세만 지켜주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의 들끓는 욕망이 눈치를 볼 것이고
이런 막장의 드라마가 발붙이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