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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백련사에 대한 사적은 1432년(세종 13)
윤회(尹淮)가 저술한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와 정약용(丁若鏞)의
『만덕사지(萬德寺誌)』 등에 나타나 있다.
만덕산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하였다.
이 절은 839년(문성왕 1)무염(無染)이 창건하였으며,
중요한 수도도량으로 면모를 달리한 것은 1211년(희종 7)요세(了世)가 크게 중창한 뒤부터이다.
요세는 천태종계(天台宗系)의 승려로서 고승 지눌(知訥)과 깊은 친분 속에서
지눌과 함께 송광사에 머물다가,
1208년에 천태종의 묘의(妙義)를 얻었고, 강진에 살고 있던 최표(崔彪)와 최홍(崔弘)·
이인천(李仁闡) 등의 권유로 만덕산에 자리를 잡고
그의 제자 원영(元營)으로 하여금 가람 80칸을 짓게 하였다.
이 역사(役事)는 1211년부터 1232년(고종 19)까지 21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당시 목백(牧伯)이 지극한 정성으로 재물을 보시(布施)하였다고 한다.
절이 완공되자 요세는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하고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결사(結社)를 맺었다.
이것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수선사(修禪社)와 쌍벽을 이루었던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이다.
그 뒤 이 절에서는 120년 동안을 이어 고려의 8국사(國師)를 배출하였다.
고려 말에는 강진지방이 세 차례의 왜구침입을 받았을 때 이 절도 함께 폐허화되었다.
조선 세종 때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보호를 받아 주지 행호(行乎)가 불타버린 가람을 복원하였다.
그 뒤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였으며, 그때 탑과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조계종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하여 종세(宗勢)를 키우고 있을 때,
이 절은 천태사상에 입각한 결사도량(結社道場)을 개설하여 침체한 불교중흥을 꾀한 중심지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외세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절 주위에 성을 쌓았는데,
이 성을 행호토성(行乎土城)이라고 한다.
현재의 절 또한 그때 쌓은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시왕전(十王殿)·나한전(羅漢殿)·만경루(萬景樓)·칠성각·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써 각 추녀마다
네 개의 활주(活柱)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전면 두 개의 주두(柱頭)는
용두(龍頭)로 장식한 다포집 건물이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만경루는 규모가 큰 누각으로 강진만 일대의 바다를 환히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 밖의 사중유적(寺中遺蹟)으로는 만덕산 백련사사적비와 원묘국사중진탑(圓妙國師中眞塔)이 있다.
사적비의 거북은 앉은 키가 높은 편이고 용의 눈이 험상궂게 생긴 귀부(龜趺) 위에 비신(碑身)이 있으며,
그 위에 옥개석(屋蓋石) 모양을 한 가첨석(加檐石)이 놓여 있다.
중진탑은 방형의 지대석(地臺石)인 위에 연화문(蓮花文)의 중대석(中臺石)이 있으며,
상대석에도 무늬가 있으나 잘 보이지 않는다.
고복형(鼓腹形)의 옥신(屋身)에는 두 줄의 주렴문이 조각되어 있고, 옥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하며,
상륜부에는 노반(露盤)·복발(覆鉢)·보주(寶珠)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절 주위에는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백련사의 동백림과 정약용이 신유사옥 때
강진으로 귀양와서 조선의 실학을 집대성하고 차를 끊여 마시던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백련사를 가리켜 ‘남쪽바다에 임해 있고 골짜기 가득히 송백이 울창하여
동백 또한 곁들여서 수목이 싱싱하게 푸른 모습이 사계절을 통해 한결같은 절경’이라고 한만큼,
주위의 경관 또한 아름답다.
백련사의 원래 이름은 만덕사로 신라 문성왕때 무염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옵니다.
1211년(고려 회종7년)에 원묘국사 요세스님이 옛터에 중창하고 백련결사로 크게 이름을
날려 백련사로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고류 후기 정치와 종교가 제 기능을 상실한 채 몽고와
왜군의 침략으로 살육과 눈물로 점철된 고난의 시대에 요세 스님은 어둠의 한 가운데서
온 몸으로 희망을 말하고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는 결사운동을 벌입니다.
이렇게 태동된 백련결사는 삶속에서 민중들과 함께 참회와 염불수행을 통해 현세를 정토로
만들자는 최고의 민간 결사 운동이었습니다.
원묘국사의 백련결사는 120년간 고려8분의 국사(원묘국사,정명국사,원환국사,진정국사,
원조국사,원혜국사,진갑국사,목암국사)를 배출하고 번창하였습니다.
고려사기를 보면 공민왕자가 1351년(충정3년)에 백련사에서 살앗다는 기록이 있으나
사찰은 고려말 왜구가 세 차례나 침입하여 노락질을 일삼았을 때 폐허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1430년(세종12년)에 행호대사가 호령대군의 후원으로 동원20동과 서원4동을 건림하고
왜구의 침입에 맞서 행호토성을 쌓았습니다. 세종의 둘째형인 효령대군은 백련사에 입산하여
8년간 큰 법회를 열고 불,법,숭 삼보에 기원하는 수륙재를 지내며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도 백련사는 청허 휴정선사의 이발을 전수받은 8명의 종사(소요대사,해운대사,
취여대사,화악대사,설봉대사,송파대사,정암대사,연파대사)를 배출하며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백련사에8국사와 12종사가 나온다고 하였는데 8국사는 고려때 나왔으며
8종사는 조선시대 배출되었으니
앞으로도 4종사가 나올 것 이라는 예언이 있습니다.
그가운데 여덟번째 다산 정약욕과 교류하던 아암혜장선사로
두륜산 대흥사에서는 12대 강사로 꼽힙니다.
백련사 옆 다산초당에 적거했던 다산 정약용은 백련사에 자주 들러 차를 마시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합니다.
백련사는 참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사찰입니다.
고려 원묘국사의 백련결사로 정신운동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고,
조선후기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 정약용 선생님과
아암 혜장스님과의 아름다운 교류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초의선사 또는 백련사에 머물면서 다산을 모시고 유학을 배우며 학문의 기초를 닦습니다.
그분들의 사귐의 중심에는 항상 만덕산에서 나는 차(茶)와 스스로 만족하며
청빈한 삶을 일구었던
조선시대 선비와 스님들의 철학이 녹아 있습니다.
백련사에서 차를 마시고 명상을 하고 옛 숲길 따라 산책을 하면서
옛 선조들의 향기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