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염원하는 은빛들의 호소문
기미 삼일운동 백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오늘 우리는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착잡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지난 해 4.27 남북정상회담과 판문점선언은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치닫던 한반도 전쟁위기의 상황을 진정시키고 역사적인 6.12 북미정상회담과 싱가폴 선언으로 이어졌습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어렴풋이 보이지만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이라는 도착지점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지고 있습니다.
향후 북미간의 극적인 관계전환이 이루어진다 해도 한반도의 궁극적인 평화는 남북 간의 평화만이 아니라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과 긴밀하게 연결 되어 있습니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또 하나의 선결과제는 남남평화를 이룩하는 일입니다. 지금과 같은 남남갈등과 분열의 상황에서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향한 그 첫걸음도 내디디기 어렵습니다.
우리들은 스스로 ‘은빛’이라 부르는, 60대에서부터 90대에 이르는 나이 든 사람들입니다. 해방 전에 태어난 세대부터 육이오 전쟁, 4.19혁명, 산업화 그리고 군부독재와 민주화의 역사를 겪어 온 세대들입니다. 역사의 격랑 속에서 서로 다른 경험을 하였고 정치적 입장도 다를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 땅에 드리워진 전쟁의 먹구름을 걷어내고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를 만들고자 하는 염원으로 한 데 모였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우리는 한반도평화만들기 은빛순례 길에서 지역의 많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또 그 분들의 이야기를 경청하였습니다.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았고, 내 종교 남의 종교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해묵은 역사의 상처로 인한 고통의 소리도 들었습니다. 남북 간의 민족 갈등과 한국정치의 오랜 이념 갈등이 지역에서 고스란히 반복·재생산되고 있었습니다.
지역에서의 갈등은 구체적이고 일상적이어서 더 고통스럽습니다. 지역 갈등의 해결 없이 남남 갈등을 해결할 수 없으며, 한반도 평화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였습니다. 그래도 희망인 것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은 내남없이 누구나 원하는 한결같은 염원이었습니다. 해묵은 역사의 구원(舊怨)을 떨치고, ‘우리’와 ‘저들’을 가르는 편협함을 벗어나 다 함께 우리가 되어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해원과 상생의 염원이었습니다.
백 년 전 오늘 삼일운동은 이념과 종파, 지역과 계층의 차이를 넘어 남녀노소 방방곡곡 온 민족 온 나라가 함께 하였던 운동이었습니다. 기미 독립선언의 주체인 ‘우리’(吾等)는 ‘저들’과 구분하는 배타적 ‘우리’가 아니었습니다. 나와 너를 포함하는 ‘온 민족’의 우리이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이 땅에 살아 갈 모두를 포함하는 ‘우리’였습니다. 이제 쪼개진 남북을 잇고 분열된 우리를 다시 모을 상생의 시간이 돌아 왔습니다. 이념과 이익의 편 가름으로는 번영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습니다. 우리사회에서 오랫동안 대립적 갈등과 분열의 원천이 되어왔던 보수와 진보,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은 적대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함께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만들어 갈 역사의 주역들입니다.
저희 은빛들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간절하게 염원하면서 다음과 같이 호소합니다.
1. 협치와 연정을 통한 대통합의 정치를 열어가야 합니다.
남남 갈등의 해소 없이는 한반도의 평화체제 실현은 불가능합니다. 지금 한국의 정치는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면서 그러한 상황에 기생하고 있습니다. 정치문화가 개선되어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양당제에 기반 한 정치문화로는 우리사회의 다양한 이해와 상충되는 요구를 조정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를 전망하는 다양한 흐름들을 국가 발전의 동력으로 통합하는 일도 어렵습니다. 그간의 남북 분단 체제 그리고 경제발전에 대한 급박한 요구들로 우리사회에서 협치와 연정의 실천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체제의 실현을 비롯해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내외의 어려운 현실을 헤쳐가기 위해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입니다.
2. 남북관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남북은 지난 70여 년 간 서로 다른 성격의 국가와 사회를 만들어 왔습니다. 섣부른 통일논의나 열정은, 평화는 고사하고 묵은 갈등과 모순을 확산 시킬 뿐입니다.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남북을 ‘통일을 전제로 한 특수관계’가 아니라 ‘일반국가관계’로 이해하는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평화공존을 바탕으로 하는 남북수교의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소 통일을 위한 제반 여건들이 순조롭게 만들어 질 것입니다.
3. 북핵은 반드시 폐기되어야 합니다.
핵무기를 폐기하겠다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핵무기의 폐기는 경제발전을 위한 ‘거래용’이 아니라 한반도 공동 번영의 선결조건입니다. 핵무기를 내려놓고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길을 함께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4. 주변국 정치지도자들에게 요청합니다.
동북아의 평화와 한반도의 평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입니다. 최근 중국의 패권적 대국주의의 경향은 주변국들의 안정을 해칠 뿐만 아니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에 맞서려고 하는 일본의 움직임도 마찬가지입니다. 더욱이 일본은 전쟁을 일으켰던 역사적 잘못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중국과 일본은 무력적 대립과 패권의식이 아니라 과거 역사에 대한 반성과 함께 ‘참된 이해와 선린’을 바탕으로 하는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에 기여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미국과 러시아는 작금의 남북 분단체제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만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보다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한 전략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 가져 줄 것을 요청합니다.
특히 미국의 경우 북핵 문제의 한 당사자로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보다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합니다. 한미동맹의 정신에 입각하여 한국에 대해 동등한 파트너쉽을 인정하고, 북핵문제의 해결과 항구적인 한반도평화체제 실현을 위한 한국정부의 진지한 노력들을 보다 전향적으로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5. 우리 아이들에게 평화 한반도를 물려주고자 하는 평화시민들께 호소하고 스스로 다짐합니다.
이 땅의 평화를 실현하고 꽃피우는 주체는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내가 먼저 평화가 되어 일상의 삶에서 그리고 나의 삶터에서부터 평화를 실천하고 가꾸어 가겠습니다.
2019년 3월 1일. 3.1운동 100주년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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