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은발
미천 홍성혁
산을 다니며 넓은 바다를 꿈꾼다
미천 홍성혁, 그는 진정한 산꾼이다.
젊었을 때 그는 목적도 없이 그저 산이 좋아 그의 말대로 짐승처럼 산을 쏘다녔다.
지리산의 어려운 종주 산행을 당일로 해치우기도 했고, 도봉산에서 벙어리 산행을 한 일도 있으며, 북한산에서 별빛을 보고 무작정 비박을 하기도 했다.
지리산 설악산을 혼자서 헤매고 다니다 죽을 고비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산을 다니기 시작하여 큰 일을 해냈고, 더 큰 일을 하기 위하여 지금도 꾸준히 산을 살피며 다니고 있다.
산행 전에 1;50,000 지형도를 펴놓고 산경표를 따라 마루금을 이어 개념도를 만들고, 산행 뒤 다시 그것을고치는 일을 해왔다. 그것을 산꾼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고 산행 안내도 했다.
그러다가 낙남정맥 언저리의산 100여개와 지리산 32개 지역과 가칭 남강기맥(덕유산에서 진양호까지의 산줄기) 11구간을 답사한 내용을 정리하여 <낙남의 산, 그 언저리>라는멋진 책을 펴냈다.
부인이 마산에서 큰 식당을 경영하고 있는덕으로 마음 놓고 산을 다니며 뜻있는 일을 추어나가고 있다. 그러면서 또 틈틈이 지리산 설악산을 자주 찾았고, 2000년에 백두대간 구간종주를 마쳤고, 2001년에는 낙남정맥, 2002년 낙동정맥, 2003년에는 호남정맥 종주도 마쳤다.
종주방식은 고개에서 고개로 달리기를하는 것이 아니라 구간의 중간 잘록이에서 끊어 마을로 내려오고 다시 반대편에서 종주하여 1구간을 두 번으로 나누어 종주했다.
이러한 종주 방식을 고집한 것은 마루금 자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의모습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미천은 마산 창원 지역의 산악회인 어울림산악회 회원으로 지금도 전국의 산에 대한 산행안내도를 만들고 있고, 낙동정맥과 그 언저리의 책을 내려고 준비하고 있다.
해방동이인 그가 경남 소가야 땅에서 태어나 그의 말대로 지리산에서 가까운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것이 화근이 되어 지리 선생에게 이끌려 지리산을 찾았고, 졸업 뒤에는 일본 와세다대학 공학부를 나와 서울시청에서 근무하던 그의 숙부를 따라 산을 쏘다녔다. 그의 숙부는 북한산에서 타계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소천(小泉), 큰아버지가 아천(我泉)이라는 아호를 가졌던 것에 견주어 겸손하게 아주 작은 샘이란 뜻으로 미천(微泉)이라는 아호를 쓰고 있다.
그러나 아주 작은 샘에서 나온 물이 큰 내를 이루고, 드디어 바다에 이르듯 미천은 산을 다니며 넓은 바다를 꿈꾸고 있다.
조선일보사 발행 <월간 산> 2005년 1월호 217쪽에서
진정한 산꾼' 미천(微泉) 홍성혁 선생
"정상 정복 위한 산행 아니었습니다"
무작정 山에 갔다.
自然이 보고 싶어 山에 갔다.
바람 소리, 새소리, 물소리를 듣고자 가고, 나무가 숨쉬는 소리를 들으러 갔다.
이제는 사람과 自然이 어떻게 調和를 이루어야 하는지 알기 위해 山으로 간다.
"어머니, 제가 왔습니다."
나는 山에 가면 이렇게 말한다.
언제나 나는 山에 두고 온 내 모습이 서러워 항상 산이 그립다.
수시로 닥치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맛보고 나오면 그렇게도 가슴이 벅 찬다.
산을 다니며 넓은 바다를 꿈꾸는
'진정한 산꾼' 미천(微泉) 홍성혁(마산시 오동동 5-12) 선생.
그는 자신이 쓴 책 <낙남의 산, 그 언저리>에서 산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소가야의 땅' 고성에서 태어난 홍 선생이 산과 40년 이상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진주고 시절 지리 선생님 덕분이다. 지리산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던 선생님의 권유로 오른 산은 무대를 바꿔 당시 서울시청에 근무하시던 숙부를 따라 북한산과 도봉산을 누비기 시작했다. 그토록 산을 사랑했던 숙부는 결국 북한산에서 생을 마감하시고 산의 품으로 안겼다.
숙부의 영향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홍 선생은 젊은 시절 목적도 없이 산으로, 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유도 없었다. 이유가 있었다면 단 한가지 '그냥 산이 좋았다'였을 것이다.
지리산, 설악산을 혼자서 수도 없이 헤매고 다니면서 죽음 직전에 이르는 고비도 여러 차례 맞았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산에 올랐는지 본인도 정확히 셀 수 없을 정도다. 단지 셈을 해본다면 3일에 하루는 몸이 산에 가있고 강원도와 경기도 일부를 제외한 우리 땅 곳곳을 찾아 두발로 걸으면서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백두대간·낙남정맥 줄기 밟아가며
'우리 영혼이 있거든 따뜻한 가슴으로 사랑을 품고 산으로 가자.
산이 있어 고맙고 산에 갈 수 있어 얼마나 행복한가'라고 말할 정도로
산 예찬론자인 홍 선생의 산행은 목적이 뚜렷하다.
많은 산악인들이나 동호인들이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낙남정맥을 따라 산줄기를 밟아 나가지만 선생의 산행은 그렇지 않다. 우리 국토를 사랑하고 그 지역민들의 문화와 삶을 이해하는 데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지난 2000년 백두대간 구간 종주와 2001년 낙남정맥, 2002년 낙동정맥, 2003년 호남정맥 종주라는 대장정을 마쳤다.
고개에서 고개를 이어 달리는 종주가 아니라 구간의 중간 잘록이에서 끊어 마을로 내려오고 다시 반대편에서 종주하여 1구간을 두 번으로 나누어 다녔다.
산만 오른 것이 아니라 그곳의 자연과 삶, 문화, 역사까지 익히는 방식이다. 힘도 들고 경제적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선생의 산행의 원칙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선생의 산행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정상 정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행 전 1 대 50,000 지형도를 펼쳐놓고 <산경표>를 따라 마루금을 이어 개념도를 만들고, 산행 뒤 다시 그것을 고치는 일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개념도와 안내도를 산꾼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의 산행 길라잡이를 해오고 있다.
지역민 문화와 삶 이해하는데 의미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안내도를 전파하기 위해 지난 2003년 낙남정맥 언저리의 산 100여 개와 지리산 32개 지역별 산행기,
남강기맥(덕유산에서 진양호까지의 산줄기) 11구간을 답사한 내용을 정리해 <낙남의 산, 그 언저리>라는 책을 펴냈다.
선생은 지난 2002년 답사를 모두 마친 낙동정맥을 제대로 소개하는 책을 펴내기 위해 집필 중에 있다. 선생의 산행 안내도는 위성으로 찍은 사진과 한치의 오차도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그려졌다. 당신이 직접 발로 다니며 경험하고 답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번 갔던 코스를 2~3번 더 오르기도 한다. 시간과 경비가 만만찮아도 보다 정확한 안내도를 작성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시중에 나와 있는 등산 안내도의 상당수는 선생의 것과 많이 차이가 난다. 그래서 선생은 정확도를 중시한다.
선생의 아호 미천(微泉)은 아주 작은 샘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더 큰 뜻이 담겨 있다. 아주 작은 샘에서 나온 물이 흘러 큰 강을 이루고, 강은 다시 넓은 바다에 이른다.
선생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먼저 근교의 산을 찾으라고 권한다. 그곳에서 삶의 뿌리를 찾아보고 자신과 더불어 사는 민초(民草)들의 애환과 삶을 이해해 보라는 것이다.
산행 안내도 그려 산꾼에 나눠주기도
또 산에 가서 그림을 그리라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이에 대해 홍 선생은 "어설픈 솜씨라도 작은 종이나 수첩에 산이 생긴 모양 그대로 그림을 그려보아라, 그러면 산이 점차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산을 보는 눈도 달라진다. 마음의 그림도 중요하지만 직접 그림을 그려보면 훗날 소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산 전문가가 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도 산을 찾는 홍 선생의 발걸음은 변함이 없다. 산에 오르면 그림을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모습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메모를 한다. 사진으로 찍고 메모한 산 이야기를
당신의 인터넷 홈페이지
( http://cafe.daum.net/mtnaknam)에 올린다.
그리고 절대로 무리를 하지 않는다. 나이 탓도 있지만 산에 대한 경외심에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뗀다. 현재 선생은 마산과 창원지역 산악인들의 모임인 어울림 산악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면서 산행 길라잡이 의뢰가 들어오면 어머니 품처럼 따스한 산을 찾아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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