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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강신주·지승호
이런 류類의 제목을 단 책은 처음 본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거나 피하고, 눈이 오면 눈을 맞거나 피하면서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철학책이면서 ‘개그책’이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시대 존경하는 철학자 강신주 선생을 인터뷰하고 그것을 개그로 편집한 책이라고 책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신주 선생을 인터뷰한 지승호 선생은 “열심히 읽고 성의껏 듣는 것밖에 재주가 없어서 전업 ‘인터뷰어’로 살고자 하나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다.”면서도 그 일을 21년째 하고 있는 작가로 그래서 60여 권의 인터뷰 단행본을 낸 ‘글쟁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개그’라는 말은 지승호 선생이 머리말에 아제개그가 아닌 가재개그(가재도 등을 돌리는)를 던지는 자신의 고질병으로 강신주 선생에게 수시로 개그를 던졌는데도 다행히 썰렁해지는 막다른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런 농담하지 마세요. 늙었단 소리 들어요. 이제 잠깐 휴식할 때가 됐나 봐요”하고 웃어넘겼다는 개그를 소개하기도 하고, 영화 〈베테랑〉에서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고 한 개그를 인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후손들에게〉라는 시를 인용했다.
힘은 너무나 약했고 목표는
아득히 멀었다.
목표에 내가 도달할 수는 없었지.
목표가 시야에 들어왔다고 해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
그러나 너희들은,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그런 세상을 맞게 되거든
관용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생각해다오.
누구에게 쉽게 ‘꼰대’라고 손가락질할 때 “누구나 어제보다 꼰대가 된다는 것처럼 이제는 혁명 같은 것은 감히 생각하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으로 보인다. 가장 급진적인 혁명가도 혁명 다음 날부터는 보수주의자로 바뀔 것이다”고 한 한나 아렌트(1906∼1975)와 “소설과 마찬가지로 혁명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결말이다. 혁명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잘 마무리 짓고 또 지속시키는 것일 것이다”고 한 토크빌(1805∼1859)처럼,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신뢰하되, 진리를 찾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의심하라”고 한 앙드레 지드(1869∼1951)처럼 누구는 진리를 찾았다고 하고, 스스로가 진리라고 말하는 시대에 강신주 선생은 마크 트웨인(1835∼1910)의 “타인의 종교가 바보짓이라는 사실이 자명해지자 나의 종교도 그렇지 않은지 의심스러워졌다.”고 했듯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의심해볼 필요가, 이 시대에는 있지 않을까?하고 묻는다.
혐오가 혐오를 부추기는 시대, 가족이라는 공동체마저 위태로운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엽기적인 사건들, 팬데믹과 언택트 시대의 현상들이 왜 일어나는지? 더하여 강신주의 철학적 담론과 책과 쓰고 있는 것에 대한 궁금증들을 물었고, “현상의 본질에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라고 털어놓으며, 강신주라는 철학자가 “점점 더 본질을 파고들어 꿰뚫어가고 있다”고 그와 만남의 소회를 전했다.
“개인이 시장市場과 한 몸이 되고, 자본주의에 물든 이 사회에 강신주라는 치료제 혹은 해독제가 필요한 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 책을 읽으시는 여러분과 함께, 강신주와 함께, 그리고 등불의 패밀리들과 함께라면 자유를 위한 싸움이 외롭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지승호의 소회다.
“우리가 철학과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텍스터와 콘텍스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능력을 기르는 거예요. 문자로 쓰인 것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책은 배우지 못한 어머니 아버지라는 책이고, 우리는 그걸 잘 읽어내야 해요. 잘 배웠다는 것은 표현을 잘한다는 뜻이예요.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가 화낼 때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대학까지 나왔고 배웠다는 놈이 그거 가지고 화를 내고, 역정을 내고 어미를 구박하고 타박하냐?’대학 가서 잘못 배운 거예요. 배웠다는 것은 표현을 잘 읽어내는 거니까요. 인문人文이란 말이 사람인人자에 무늬결 문文자 잖아요. 천문天文은 하늘의 무늬, 지문地文은 땅의 무늬잖아요. ‘터무늬 없다’는 말이 터의 무늬가 없다는 말인데, 풍수지리적으로 ‘좋지 않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인문은 사람의 문맥을 읽어야 한다는 거죠. 텍스트가 던져졌을 때는 콘텍스트*까지 이해하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 텍스트와 콘텍스트 사이에서 중 -
*텍스트(text, 문화어)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소통할 목적으로 생산한 모든 인공물을 이르는 용어 *큰텍스트(context) 문맥, 맥락
제대로 살아가려면 ‘문맥을 이해하고 읽어야 한다’는 말은 공감이 간다. 우리가 일상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스마트폰이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만들어놓은 나쁜 점 중의 하나가 올바른 판단, 지속 가능한 판단, 객관적 판단을 못 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저는 SNS 활동을 하지 않는 거고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책을 쓰고 강연을 하는데 집중하는 거죠. 당장의 이슈에 대해 발 빠른 대응은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평가를 내리기 힘들어요. 먼저 선정적인 정보부터 들어오니까 나중에 후회할 수 있는 판단을 하기가 쉬워요. 평론가는 넘쳐나는데, 감정적으로 배설하니까 몇달 지나면 자기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도 못 해요. 스마트폰이 발달하면서 뉴스는 더이상 가치 덕목이 아니예요. 모든 것이 새롭잖아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언론은 뉴스가 아니라 올드스(olds)에 있어요. 얼마만큼 희석되지 않고 시간을 견디는 - 한 노동자가 죽은 사건을 10년 이상 들여다보는 언론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조회수에 의존하는 언론이 그게 가능할까요? 그러니까 제목도 내용도 똑같아요. 2,000∼3,000년 전에도 가능했고, 앞으로도 지속 가능할 수 있는 그런 것을 애기해야 해요. 이제는 뉴스의 시대가 아니라 올드스의 시대니까요.”- 쾌와 불쾌의 세상에서 문맥 읽기 중 -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의 전제는 ‘죽음’이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평생 의료비 90%를 말년에 쓴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부의 격차가 생명까지 좌지우지하기도 하고, 자녀 세대에게 부양 부담을 떠안긴다고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죽어가는 고양이, 떨어지는 꽃잎을 보고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인간이고, 깨어서 살아 있는 동안은 고통을 느낀다. 불교의 가르침 중의 하나가 일체개고(一切皆苦)이다. 산다는 것은 고통과 동행하는 것이지만, 삶의 매력이 또한 거기에 있다. 고통스러운데 왜 사느냐고? 고통이 완화되는 느낌이 행복이거든…, 좋은 음악을 듣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 행복을 느끼잖아, 죽으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니 행복도 없어, 죽음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 삶은 고통을 느끼는 것, 고독과 배고픔도 거동의 불편함도, 근심도 걱정도 없는 것이 죽음이다. 죽음의 안타까움은 단 하나 ‘고통을 느끼지 못하니까 행복도 느끼지 못한다’는 거다. 나이 든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묻지 않고 젊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묻는 이유다. 나이 든 사람들은 대부분 안다. 고통이 없으면 행복도 없다는 것을, 기력은 떨어지고 거동도 불편하지만 오히려 그 상태로 행복이 무엇인지 정확히 안다. 미세한 바람에 떨어질 듯 떨리는 벚꽃처럼 노쇠함과 죽음이 곧 끝이 아니라, 성숙함과 삶을 상징하는 그 무엇이라는 것을 …. - 변화하니까 소중한 것이다 중 -
유사 이래로 어떤 세대는 전쟁을 겪었고, 어떤 세대는 전염병을 겪었다. 지금 40∼50대는 전쟁을 겪지 않은 거의 유일한 세대로 이제 전염병을 한 번 겪고 있다. 또 겪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팬데믹인가 언택트인가? 이런 지승호 선생의 물음에 강신주 선생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이 책이 철학을 논하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따라오는 인물이 ‘데카르트(1596∼1650)’다. 데카르트는 인간은 지적인 사유의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솔직해서 오히려 재미가 없는 그의 말이다. 대신 ‘파스칼(1623∼1662)’은 《팡세》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도 아니고 그저 허영 덩어리로 이성적이지도 합리적 존재도 아니므로 구원될 수 없다. 그래서 신을 믿어야 되고, 믿게 된다고 했다. 인간의 잔인함, 이기적 욕망, 허영심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떽쥐베리(1900∼1944)’는 《인간의 대지》에서 “사랑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라고 했지만,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고 같은 지향점을 갖고 있다고 사랑이 깊어질까? 어쩌면 사랑은 죽을 때까지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주 보는 것인지 모른다. 같은 TV 프로그램을 보고, 서로 애기하고 산책하고 너와 내가 마주 보는 관계가 사랑 아닐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우리, TV를 시청하고 있는 우리,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우리,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공통의 방향이 사라지면 바로 부서지고 흩어지고 만다. “사랑은 서로 마주 보는 관계예요. 공통된 방향, 공통된 이해로 유지되는 관계는 사랑이 아니죠. 조금이라도 ‘공통의 방향’이 사라지면 흔들리는 관계가 어떻게 사랑일 수 있겠어요? 이런 점에서 인터넷상의 만남은 불편한 데가 있어요. 나한테 도움 되지 않는다고 해서 관계를 끊으면 그만인 그런 관계에서 사랑은 있을 수 없죠”
사람들은 혼자 살 때보다 같이 살 때가 힘들고 이득이 안 된다고 생각되면 같이 살지 않으려고 한다. 아이가 생기면 생활이 더 힘들어진다고 생각하면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가족공동체와 지역공동체를 그렇게 만든 때문이다. 사랑의 관계가 맺어지면 한 사람이 더해지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자신에게 손해라고 생각하면 결혼도 출산도 기피하게 된다. 이건 자본주의가 낳은, 그것에 길들여졌기 때문으로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사회가 고령화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만 생각하는 자본주의적 개인이 어떻게 가족이나 공동체를 만들겠는가? - 내 손안으로 들어온 市場시장, 사치품에서 필수품으로 중 -
지하철에서 휴대폰으로 드라마나 스포츠, 연예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도 있지만,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도 꽤 많은 것 같다. ‘게임’이라는 말은 어원부터가 심상치 않다. 17세기 유럽에서 상류층 숫자가 늘어나자 모두 여유를 즐겼는데 가장 흔한 것이 사냥이었다.(그래서 사냥을 오락 중에서 최고로 치는지 모르지만…), 그러자 여우의 개체 수가 줄어 전멸상황에 이르렀고 이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여우 가죽을 입힌 농노의 아이들을 들판에 풀어놓고 사냥을 했다. 피 흘리며 죽어간 아이들이 눈에 어른거리듯 슬픈 이야기가 게임의 시작이었다. 도박장에는 노름꾼들이 몰려들어야 장사가 되는 것처럼 자본가 입장에서는 주식시장, 부동산시장에 투자가들이 몰려들어야 장사가 된다. 스마트폰 경제가 게임산업을 육성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게임을 하려고 폰을 자주 켜야 게임이용자들이 소비시장이나 금융시장, 혹은 투기시장을 더 많이 더 자주 접할 테니까…. - 게임,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의 학습장 중 -
앞뒤가 막히고 엉뚱한 애기를 하는 나이 든 세대를 흔히 ‘꼰대’세대라고 한다. 그러나 꼰대와 관련한 이슈에서 피해를 보는 쪽은 누구일까? 피해 보는 쪽은 젊은 세대들이다. 젊은 세대가 자신들은 과거 기성세대와 다르다고 주장하면 할수록 자본주의 세대에 포획되고 마는 것으로, 가장 모던(새로운)하고, 세상과 소통하고 트렌드를 정확히 안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그 흐름을 조장하고 신제품을 만들어 파는 게 자본주의로 이런 시스템에서는 인간적 유대라든가 인간적인 교훈은 사라진다. 그들은 지금 젊은 노동자지만 곧 늙은 노동자들이 된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 경성의 지식인들이 북적대는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고, 진열된 상품처럼 번쩍대는 일들이 마치 옥상에서 이상(李箱)처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하고 탈주하고자 하는 놈도 있는 것처럼…, 그때하고 지금하고 겉보기에 트랜디한 것은 조금 변했지만, 신제품을 강조했던 자본주의 메카니즘은 똑같다. 자본주의는 매번 새롭게 변하는 것으로 유지되는 유일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요즘 세대들은 ‘스타가 되는 것이 꿈’이기도 한데, 돌 가지고 노는 바둑, 공 가지고 노는 축구나 야구, 노래하는 가수 연기하는 배우가 되어 스타가 되면 좋겠지만 바둑계, 축구계, 연예계에서 최고의 스타가 되려면 다른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스타가 되면 점차 불안해한다. 바둑을 잘 두지 못하면, 축구를 잘하지 못하면, 연기가 떨어지고 인기가 떨어지면 생계마저 위태해질 것이라는 불안감이 생긴다. 나이가 들면 총기도 신체 능력도, 섹시한 젊음도 사라지고 스타라는 절정에서 추락하자마자 대중들로부터 버려지게 된다. 톨스토이를 읽거나 여행한 적도 없고, 친구와 갈등한 적도 없고, 그것을 해결한 경험도, 내가 도움을 준 어떤 사람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고, 바위에 앉아 구름을 바라보거나 시냇물에 발 담그고 간지러움을 느껴 본적도 없이 어떤 분야에 최고의 스타가 되려고 경쟁만 했던 것, 내가 AI 같은 사람이 되면 이 사회에서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아이든, 어른이든 경쟁을 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라면, 전문가만 되면, 삶이 부유하고 안전하리라는 것이 착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꼰대 그리고 신제품 중 -
‘진보와 보수’의 개념이 통념화된 것은 이미 오래되었다. 19세기 말에 마르크스가 주장한 개념으로, 진보를 표방했던 20세기 제도권 사회주의 국가들, 즉 소련과 중국 그리고 북한도 진보적인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도 국가기구와 관료들이 생산수단을 독점한다. 마르크스 정의는 농민만이 땅을, 노동자만이 공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라고 애기하는 이들 중에 마르크스주의자가 정말 있을까? 국가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거대 문명에는 모두 억압이 있었다. 생산수단을 폭력적으로 독점했기에 억압체제가 가능했으며, 다만 자율적 복종이냐, 타율적 복종이냐 차이만 있다. 피라미드를 만들든 시대 노예들은 도망할 수는 있었지만, 지금은 도망은커녕 어쩌면 해고당하지 않을까 궁리하기에 급급하다. 야근도 서슴치 않고 상사의 괴롭힘도 참아 낸다. 전세계 거의 모든 생산수단이 이미 누군가에 의해 독점되어 있다. 진보를 표방하는 어떤 사람도 이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사회주의와 마르크스를 표방하면서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도 사모펀드에 투자하는 세상이 되어 있다. 한국은 진보정당과 중도정당까지 생산수단의 독점과 정치 수단의 독점 문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최소한 그들은 정치 수단을 독점하고 있으니까 할 말이 없다. 중세시대도 왕조시대에도 관료가 있었다. 공복(公僕)이라는 말은 대의민주주의 시대 등장한 용어로 대통령, 국회의원은 국민 투표로 뽑게 되니, 자신의 지위를 국민을 섬기는 종이라고 포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진정한 주인은 국민이 아니라, 봉급을 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진정한 공복이었던 적은 없었다.
절에 가면 ‘성불하세요!’하는 인사가 보편화되어 있다. 그러나 누구나부처가 되기가 싶지 않은 것 같다.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되면 사찰을 찾아 부처상에 경배할 일도 없고 당연히 시주할 일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불교라는 종교가 가진 위대한 아이러니다. 절에 가는 이유가 부처가 되는 것이고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것이라면, 그래야 이기적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라면, 바로 이 순간 우리는 남에게 복종하거나, 남을 지배하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타인은 존중의 대상 그리고 아낌의 대상이 돼야 결국 내가 부처가 되고 타인도 부처로 보이게 된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것처럼’- 복종하지도 지배하지도 않는 자연인 중 -
‘가족’은 자본주의가 파괴한 공동체의 마지막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자본주의가 파괴하지 않고 남겨둔 마지막 공동체다. 그러나 점점 그 가족마저도 와해 되어 가고 있다. 개인주의가 범람하니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흐름에 저항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젊은 부모들은 심신이 지친 상태로 퇴근해 집에 돌아오지만, 육아에 전념하기에 심신이 피로하고 아이는 자신을 안아달라고 한다. 주는 것 없이 받으려고만 하는 아이가 밉다. 화가 나고 짜증이 날 수도 있다. 갈림길에 선 젊은 부모들 중에 정인*이 양부모 같은 부모가 있었다. *2020년 16개월로 입양되었다가 확대로 사망한 아이 이름
평소에 자주 만나지 못한 친척이 찾아오면 우리는 무언가 개인 프라이버시가 침해받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방에서 올라왔으니 잘 재우고 잘 먹여야지’이런 생각보다는 ‘삼촌이나 고모는 언제 내려가지’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사랑의 교환, 공동체적 교환…, 이런 것은 자본주의에서는 불가능한 교환이다. 따뜻한 보살핌으로 자란 정인이라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 다른 외로운 아이들을 돌볼 수도 있었겠지만, 정인이 부모는 내가 너에게 에너지를 쓴 만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시도는 해보지만 갚아지지 않는 것, 만약에 부모가 자신을 돌보느라 소진한 노력을 돈으로 계산해 엑셀 파일로 정리한 다음 돈을 보낸 자식이 있다면, 그는 당장 아무리 금액을 높여도 부모님 사랑보다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 테고, 돈을 받은 부모는 자식이 관계를 끊으려 한다고 슬퍼할 것이다.
인간은 자족적이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자기 살을 뜯어 먹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먹는 것부터 타자에게 의존한다. 뭔가를 파괴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죽을 때 자유를 얻고 죽는 것을 그렇게 힘들어 하지 않는다. ‘이제 자연스럽게 죽어 모든 것을 내가 파괴할 일은 없다’고 생각하면 자유로워진다. ‘그동안 너무 많이 해쳤어, 그래도 나이 들어 많이 안 먹어서 다행이다’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맛집 찾아다니고 게걸스럽게 고기 뜯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먹기 위해 죽인 생명뿐 아니라 나를 돌봐준 가족한테도 폐가 되지 않아야 한다. ‘병든 부모님을 혹은 남편 수발드느라 내 아내가 너무 힘들었어’‘나 때문에 지하철이 번잡해졌다’고 생각하고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내 목숨이나 식욕을 위해 물고기나 식물을 죽이지 않고 나를 돌봤던 자식, 아내, 남편의 삶을 덜 힘들게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목숨에 연연하지 않고, 잘살아 왔듯이 죽을 때도 잘 죽을 것이다. 우리 나이쯤 되면 내가 존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타인을 힘들게 했는지, 얼마나 많은 생명을 파괴했는지 돌아볼 때다. - 가족공동체, 기브 엔 테이크의 세계 중 -
젊은 세대가 노인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하고 묻는 것은 경험을 묻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아무도 노인에게 그런 조언을 구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되니까 필요 없어진 것이다. 수많은 정보들이 넘쳐난다. 문제는 정보들이 표피적이고 선정적이며 심지어 자극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디지털 혁명’이라고까지 하지만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체제를 뒤덮고자 한 프랑스 혁명이나 갑오농민전쟁에 비교하면 그렇다. 4차 산업혁명이든 정보혁명이든 ‘진보’를 앞세우고 일어나는 일들이지만 모두가 자본주의 체제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정작 기계들이 인간의 노동력을 빼앗고 체제는 설레발을 치지만, 스마트폰 경제에 멍든 저임금, 임시직 노동자들만 늘고 있다. 심지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가족끼리 서로 마주 보는 일도 힘들어지고 있다. 소수의 지배계급은 이를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 쾌재를 부를 것이다. 사람들이 스마트폰이 아니라 꽃과 바위, 동료들과 인간을 바라보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 4차 산업과 스마트폰 중 -
‘보수’는 타인보다도 자기를 더 사랑하고, 사회구조나 기득권 체제가 현재 상태로 유지되는 걸 좋아한다. ‘진보’는 타인을 더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도 타인보다 자기를 더 아낀다. 사랑에는 방법을 가진 사랑과 방법을 만들어 내는 사랑이 있다. 스스로 진보라면 후자여야 하고, 새로운 방법을 창조해 낼만큼 사랑해야 한다. 21세기 들어서 신자유주의 질서가 뿌리내리면서 우리 사회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전쟁터가 되고 있다. 그 결과 자살률 급증, 취업률 급락, 양극화 심화, 세대 갈등, 남녀갈등 등…, 크게는 전체 사회, 작게는 가족 공동체성의 뿌리마저 흔들리고 있다. 합리적 이기주의가 범람하고, 체제가 양산한 약자를 보듬는 사회운동이 번성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시민단체 운동이 신자유주의 체제와 맞서 싸우지 않고, 사회정의를 떠들면서 자본계급의 이익을 환수해 노동계급과 사회적 약자에게 ‘재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라는 것이다. 국민과 노동계급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 그들이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자기 자신이나 자기 가족이었고 진보를 팔아서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했던 것이다. 사이비 진보와 진짜 진보를 구분하고 싶다면, - 사이비 진보와 진짜 진보가 헷갈린다면 - 그들에게 지주에 대해, 자본가에 대해 그리고 국가에 대해 물어보라. 1997년 IMF 이후에 우리 이웃들 대부분이 ‘작은 자본가’로 훈육되었다. 주식투자, 부동산 투기, 임대 사업 등 노동하지 않고 수익을 얻는 데 전념하고 있다. 그래서 우파는 타인을 사랑하지 않고, 자본가는 노동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이 제일 중요한 이들도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이라는 미명하에 공동체를 사랑하고, 환경을 아끼겠다고 말은 한다.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그들이 환경을, 지배구조를, 사회참여를 애기한다는 것은 노동자가 해야 할 애기를 선점한 것이다. 굉장히 위험한 현상이 아니고 무엇일까.
진보는 타인에 대한 사랑이 가치고 핵심이다. 독일사람이자 공산주의 창시자로 알려진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에 대한 사랑이 절절했다. 노동자가 아닌 인간으로서 살아갈 실마리를 제공한 그라고 하여 우리는 배우지도 가르키지도 않는다. 마르크스 《자본론》과 《헌법》의 가치를 교과서에 실어 가르쳐야 한다. 인간의 모든 기본권은 여기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헌법》의 가치가 하위 법률로 인해 무력화되고 있다. 전세계 모든 나라 헌법 기초는 ‘바이마르’헌법에 두고 있는데,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하위법인 ‘도로교통법’으로 막고 있다. 자유가 있다고 하면서 신고해서 허가를 받아야 한다니? ‘아들아, 잠잘 자유가 있기는 하지만 허가를 받아라’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 진보의 전제는 타인에 대한 애정이다 중 -
2014년 4월 16일 진도 팽목항 앞바다에서 인천항을 떠나 제주도로 가던 세월호가 침몰해 300명이 넘는 학생과 선생들이 죽었다. 사건이 일어나고 8년이 지났고 정치적 사안이 아닌데도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고, 아이들 부모들은 왜 아이들이 죽었는지 아직도 묻고 있다. 저자의 판단은 자못 신랄하다. 첫째,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해운법 시행 규칙’을 바꿔 선령 20년을 30년으로 늘린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사람이 비명횡사한 경우, 고인이나 유족은 왜 죽었는지 알아야 관뚜껑을 덮고 고인의 명복을 빌 수 있다. 하지만 시신을 찾지도 못한 이들은 구천을 떠돌고, 억울함을 해결하지 못해 팽목항을 떠나지 못한다. 가장 본질적인 것은 ‘자본을 위해 국가가 그 법을 통과시켰고 그 법 때문에 죽었다’고 밝혀야 하는데도 아직 그 법은 그대로다. 일본에서 폐기처분하려던 것을 들여와 선령을 늘여준 시행규칙을 변경해 준 정부와 국회의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도 해경의 잘못, 지휘자가 잠을 잤다든가 구할 수 있었는데 못 구했다던가 자꾸 남 탓을 한다. 심지어 ‘해상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라고 너무 쉽게 말하기도 한다. 당시 대통령이던 박근혜의 책임을 무마하려는 보수 우파의 망발이 아닐 수 없다.
박근혜 정권에서 문재인 정권으로 바뀌었는데도 별로 변한 것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2009년 신자유주의 입법이 현재까지 전혀 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죠. 해운 자본의 이익을 위해 그 법률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거예요. 자본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신자유주의는 대다수 국민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고, 미취업과 실업문제, 비정규직의 양산, 정리해고, 명예퇴직, 아웃소싱 증가 등 모든 것이 규제받지 않고 자유를 만끽한 결과로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대한민국호에 우리는 타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규제완화는 자본이 자유롭게 이윤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에 날개를 달아주는 대신, 노동에 가해지는 족쇄를 더 촘촘해 매기는 것과 같다. 세상이 좋아지리라는 막연한 희망도 버려야 하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으리라는 비관도 버려야 한다.
전국적으로 200만 명, 광화문에 150만 명이 모여서 촛불을 들었지만, 그때 촛불집회는 ‘합법적 평화집회’를 지향했다. 합법은 혁명이 될 수 없는 것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박근혜를 내치지 못했다. 선거 때 만 되면 거수기 노릇을 하는 대의제도, 선출된 대표가 임기 동안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는 의회제도로서는 천만다행이었지만, 결국 박근혜는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것은 하나의 코메디였고, 행정부에서 만든 폭탄이 국회로,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을 가결함으로써 폭탄은 사법부로 넘어갔다. 그 사이 촛불집회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은 청와대를 보다가 국회의사당을 보다가 마지막에는 헌법재판소를 보았는데, 만약에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을 인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박근혜에 분노했던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 소수의 권력독점과 생산수단 독점을 법률적으로 비호하는 조직이 사법부다. 자칫 잘못하면 대의제나 자본주의 체제, 나아가 사법체제가 붕괴될 수 있었으나, 그런 결정을 지켜보면서 사람들은 ‘내 손에 피 묻히지 않고 일이 잘 됐다’고 안심한 것이 아니었을까?
박근혜 탄핵의 대가로 부르주아 체제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고 모든 지배형식은 그대로 유지됐다. 박근혜가 떠난 자리에 문재인이 들어섰을 뿐, 우리는 정치 객체로서 명령을 듣는 자로 돌아왔다. 회사나 공장에서 자본의 명령을 듣고 행정부의 명령과 국회의 입법을 투덜대며 따르는 익숙한 자리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촛불집회 이후, 박근혜 탄핵 이후,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전세계 부르주아 국가들이 한국의 촛불집회를 ‘합법적 평화집회’라고 환호를 보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합법’은 부르주아 체제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평화’는 권력을 잡은 소수 자본과 독점에 대해 직접적인 힘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찬사였던 것이다. - 촛불은 혁명이 아니다 중 -
여성단체들은 남자축구 선수 한 명의 연봉이 세계 상위 7개 리그에서 뛰는 여자 선수 연봉을 모두 합친 것보다 2배 더 많다면서 남녀간 임금 격차를 죽여 달라고 하는데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축구나 야구 같은 프로 스포츠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진다. 하나는 노동계급을 스포츠 관람에 몰두하게 하여 자신의 남루한 현실을 잠시 잊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경쟁 논리를 노동계급의 내면에 자연스럽게 각인시키는 것이다. 스포츠에도 자본과 노동의 논리가 적용된다는 말로 당연히 그들도 연봉을 받는 노동자라는 것이다. 스포츠를 보면 과거 로마제국 시절 검투사 경기에 열광했던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지금도 그와 같다. 천문학적 연봉은 경기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기는 한다. 그런데 여기에 비싼 노동자 남성, 싼 노동자 여성이라는 도식이 대입되니 ‘젠더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도 남자 선수만큼 훈련하고 시합하니 연봉 격차를 줄여달라는 여성들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불행히도 목소리만큼의 힘을 받지는 못한다.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을 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고, 더군다나 남자 프로축구의 경우는 집단적 검투사 경기로 여기에 내부적 정의는 중요하지 않으며 당장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뿐이기 때문이다. - 젠더갈등, 노동자와 노동자의 갈등 중 -
“당당하고 자유로운 사람의 공동체가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고,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들이 살고 있는 땅, 불국토예요. 원효가 꿈꿨던 불국토, 모두가 부처고 모두가 나눌님인데 누가 누구를 지배해요. 누가 자유인의 목을 눌러요. 나를 죽이지 않는 이상 누구도 내 몸에 걸터앉을 수 없어요. 사자를 죽여야만 사자 목에 발을 올릴 수 있는 거죠. 강자한테는 사자 같은 사람이어야 해요. 그것이 자유인의 권리고 전통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권력에 타협하지 않고 자기 글을 쓰고, 자기 애기를 쓰는 거죠. 권력이나 자본에 꺾여서 글을 쓰고 책을 내면 뭐해요” -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1871∼1945)의 〈해변의 묘지〉라는 시 마지막 구절에 나온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바람에 대한 감수성은 오래된 이야기다. 불교에서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우주를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 중 하나로 보았고, 그리스에서도 4원소 중 하나로 바람을 꼽았다. 바람은 따뜻한 모닥불이나 촛불처럼 다가오기도 하지만, 세차게 세상을 흔들어 놓을 때도 있다. 그냥 혼자 앉아서 바람을 맞는 온기가 느껴진다면 그는 바람을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다.
〈해변의 묘지〉(일부) - 폴 발레리 -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세찬 바람이 내 책을 펼쳤다가 닫고,
파도는 부서져 바위틈에서 작열한다.
날아 흩어져라.
눈부신 모든 페이지들이여!
부셔져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셔져라.
삼각의 돛들이 먹이를 쪼고 있는
이 고요한 지붕을
오늘은 좀 그러네요.
가라앉은 날들을 위해…
주저앉는 것도
당신의 운명이라면
운명은
이겨내라고
있는 것!
“저는 그늘이 넓은 나무처럼, 사람들이 와서 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에게 쉴 수 있고 자랄 수 있게 해주었던 철학자들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거기서 쉬어가는 사이에 조금씩 더 인문주의자가 되고, 철학자가 되고, 민주주의자가 됐으면 좋겠어요. 거기서 살아가는 힘을 얻었으면 하는 거죠. 나가르주나나 비트겐슈타인이나 마르크스 같은 철학자들이 내게 힘을 주지 않았다면 저도 자라지 못했을 거예요. 저도 제 담론 속에서 힘을 얻어 당당히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살아냈으면 좋겠어요. (…) 나무가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당겨서 자기 밑에서 쉬라고 강요하지는 않잖아요. 제가 신경 쓰는 것은 그저 가지를 넓혀놓는 거예요. 마르크스나 스피노자나 나가르주나는 자신이 만든 나무 밑에서 강신주가 살았다는 것을 알까요? 가끔 고마운 일은 제 책을 보고 달라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예요.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모르지만, 기분 좋은 말이잖아요? 10년쯤 지나고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열한 번째 이야기, 넓은 잎을 가진 철학 나무처럼 중에서 -
강신주는 폴 발레리가 〈해변의 묘지〉에서 빛과 어둠, 바람과 파도에 맞서 영겁의 세월을 보냈던 해안의 바위들과 이제 그 대열에 합류한 죽은 자들의 비석들을 보면서 읊은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외치며 쓴 묘지명 같은,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까지 삶이 박제된 것처럼, 한 편의 시가, 한 편의 소설이, 한 편의 인터뷰가 무섭고 서늘한 느낌을 준다면서 더 이상 쓰지 못한다면 작가는 살아도 죽은 것이고 설령 살아있다고 해도 그의 마지막 책은 ‘묘지명’될 것이라고 하고 “글 쓰는 사람은 글을 써야, 아니 쓰고 있어야 살아 있는 것이다”라고 외친다. “치열한 삶만큼, 절정에 이른 삶만큼 무거운 것은 없다”알랭묘지에 부는 바람 같은 삶,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분다… 글을 써야겠다!”고 외치는 그가 존경스럽다. 2023.2.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