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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
제목에서 썩 재미있게? ‘세계사’가 읽힐 것이라는 짐작을 해 본다. 술은 인류의 역사와 같이한다고 하는데,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술에 대한 문헌상 최초 기록은 인도의 「베다」경전으로 기원전 1,000년 전부터 쓰인 제사용 ‘주문집’에 바라문교의 불의 신 아그니(agni)와 함께 술의 신 소마(soma)를 모셨다 한다. 소마는 제사를 지낼 때 공물로 바친 음식인 동시에 신격화된 이름으로 주신(主神)이자 천둥과 벼락의 신인 ‘인드라’가 악귀 ‘브리트라’와 싸울 때 소마를 마시고 용맹스럽게 브리트라를 무찔렀다고 하는데 소마는 신과 인간 모두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주는 음료였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조문시대(기원전 1,300∼기원전 300년)에 산포도를 발효시켜 만든 술을 마셨다고 하고, 중국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왜인전〉에 왜인들이 술을 좋아해 장례를 치를 때도 마셨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저자 미야자키 마사키츠는 1942년생으로 도쿄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 및 대학 교수로 재직타가 2007년 퇴임 후 저술활동 등을 하고 있는데, 이 책 외에 ‘돈의 세계사, 지도로·물건으로 읽는 세계사, 경제 세계사 등 여러 각도에서 세계사를 바라보고 연구하는 학자로 이 책은 2020년 말에 출간되었다.
흔히 술을‘알코올’이라고 하는데 인도의 고대 문헌에 보리로 만드는 ‘코호라’라는 술이 있었고 이것이 아라비아로 전해져 정관사 알(Al)이 붙어 ‘알코올(Al kohl)’이라는 말이 만들어져 유럽에 전해졌다고 한다. 알코올의 어원은 아라비아지만, 콜은 분말을 뜻하며 증류할 때 발생하는 정제물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500만 년 전(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700만 년 전, 제럴드 다이야몬드는 〈총균쇠〉에서 900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탄생한 인류는 오랜 세월을 거쳐 지구 전체로 퍼져나갔고, 복잡하고 다양한 풍토를 기반으로 발효되는 포도, 사과, 살구, 야자, 버섯 등과 수액과 꿀, 말과 염소 등의 젖을 이용한 다양한 양조주를 만들었으며, 문화와 문명에 그들만의 독특한 술이 생겨났는데 그것은 직접 발견한 것과 다른 지역에서 전파된 것들로서 양조법이 확립된 시기만큼 천차만별하다.
현재 전 세계 60개국에서 만들고 있다는 ‘와인’은 연간 생산량이 3,000만㎘ 이상으로 맥주의 1/5정도지만,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와인 소비량이 가장 많은 나라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이들 두 나라에서 세계 포도의 약 40%를 소비한다고 한다. 와인은 지엽적인 술로 부패가 빠르기 때문에 산지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와인은 풍토를 마시는 것이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와인에 물을 섞어서 조심스럽게 마셨다고 하는데, 과음은 좋지 않다는 인식 때문으로 와인 원액을 그대로 마시는 것은 스키타이(이란계 유목민족)식 음주법이라 하여 기피했다고 한다. 플라톤은 “18세 이전에 와인을 마셔서는 안 된다. 서른 살까지는 적당히 마셔도 되지만 술주정을 하거나 과음을 해서는 안 된다. 마흔이 되었다면 들뜬 기분으로 소란을 피워도 좋다. 와인이야 말로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하고 괴로운 마음을 치유하며 젊음을 되찾아주어 절망적인 생각을 잊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고 하여 술에 대한 식견을 보였다. 지금도 이탈리아인들은 식사에서 분리된 음주는 나쁜 버릇으로 여기고 술에 취한 모습은 결코 좋게 보지 않는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을 재현하는 전례 미사는 사제들이 집전하는 공적인 행사였으나, 8세기 이후에는 수도원에서 사적으로 미사를 드릴 수도 있었다. 미사에 ‘성체’를 상징하는 빵과 ‘예수의 성스런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 와인이 필수로 수도원은 앞다투어 고품질 와인을 제조하기 위해 노력했고, 중세 교회나 수도원은 여관으로도 이용되었으므로 손님을 대접할 음식으로 와인을 만들기도 했다. 포도는 곡물이 잘 자라지 않는 거친 땅에서도 재배할 수 있었고 북유럽의 척박한 풍토와의 싸움이 오히려 양질을 와인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수도사들은 포도밭을 만들고 포도를 재배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화물의 무게를 측정하는 단위인 톤(ton)은 와인 한 통의 무게를 말하는 것으로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서 영국으로 대량의 와인이 운반될 때 몇 개의 와인 통을 실었는지로 선적을 나타냈다. 한편 와인통을 두드릴 때 통통 소리가 났으므로 이 소리가 톤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유목민들은 2500년 전부터 가죽 부대를 이용하여 말젖을 발효시켜 마셨는데, 트루키예어 ‘쿠미스’와 몽골어‘아일락’은 마유주(馬乳酒)를 말한다. 알코올 도수가 1∼3%밖에 되지 않지만, 비타민C가 풍부하여 혈관을 강화하고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만드는 ‘생명수’나 마찬가지다. 말이나 낙타가 새끼를 낳아 기른 뒤인 6월부터 10월까지 짠 젖으로 만들고, 겨울 내내 실외에서 얼려서 보관하여 마셨는데 유목민에게 마유주는 가정용 술이자 영양공급원이었기 때문에 상품화되지는 않았다.
인류의 문명사를 이야기할 때 꼭 따르는 것이 ‘4대 문명 발상지’다. 문명을 발전시킨 곡물 중에서 가장 빨리 술로 만들어진 것이 가루로 빻아 발효빵으로 만들었던 보리로, 곡류를 발아시킨 곡아(穀芽)에는 전분을 당으로 바꾸는 효소가 함유되어 있고 보리를 주식으로 하는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문명에서는 발아시킨 보리(麥芽, 몰트)를 발효시켜 맥주를 만들 수 있었다. 보리는 술로 만들기 쉬운 곡물이었던 것이다. 곡물이 발효하면 알코올로 변화하는데, 이는 효모(이스트)가 분비하는 치마아제가 글루코오스(포도당)나 프룩토오스(과당) 등 단당을 분해하여 에틸알코올과 이산화탄소로 바뀌는 현상으로, 알코올 발효에는 당분이 필요하면서 전분(탄수화물)을 맥아당으로 바꾼 후 이를 다시 단당으로 변화시키게 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最古의 법전인 〈함무라비 법전〉은 함무라비 왕(재위 기원전 1792∼1750년)이 제정해 바위에 새긴 것(루브르 박물관 소장)으로 282조가 규정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당시의 술집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내용도 있다. “맥주집 여주인이 맥주 대금을 곡물로 받지 않고 은으로 받거나, 곡물 분량에 비해 맥주 양을 부족하게 준경우 여주인을 물속에 던진다(108조)거나, 만약 수배 중인 범인이 맥주집에 숨어들었을 때 이를 숨기고 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경우 맥주집 여주인을 사형에 처한다(109조)는 것 등이그것이다.
중세로 오면서 맥주는 와인과 마찬가지로 수도원을 통해 발전하였는데, 벨기에에서는 지금도 수도원에서 양조 되는 맥주나 수도원 제조법을 계승한 진한 맥주를 선호한다. 맥주의 향기를 위해 처음에는 버드나무 잎을 넣었으나 점차 향료와 약초를 혼합한 ‘그루트’를 사용했다. 8세기에는독일에서 그루트 대신 홉(Hop)을 넣었는데, 홉의 암꽃 믿둥에서 노란색 분말을 채취해 맥주에 첨가해 맥주 특유의 쓴맛을 내도록 했다. 뽕나무과이며 한삼덩쿨속 식물인 홉은 독일 맥주의 향미를 더하고 거품을 잘 나게 하는 것으로 ‘맥주의 영혼, 녹색의 황금’이라고 일컬어진다.
중국도 술이라면 빠지지 않는데, 고대 중국 술은 잡곡인 피를 원료로 한 것이었다. 은(殷-기원전 1600∼1046)과 주(周-기원전 1046∼770) 나라는 왕실의 일족들을 지방에 파견해 다스리게 한 봉건제로 지방관이 부임할 때 지배의 상징으로 황제가 하사한 것이 다름 아닌 작(爵)이라는 술그릇이었다. 하지만 고대 중국도 과도한 음주는 악이었고, 지탄대상이었다. 은나라 마지막 주왕의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고사도 그래서 나왔다. 녹대(鹿臺)라는 궁전을 지어 엄청난 양의 보물을 모으고, 거교(鉅橋)라는 창고에 어마어마한 곡물을 넣어두고 사구(沙丘)라고 부른 별궁에서 새와 짐승을 사육하고 연못을 파 술로 채우고 나뭇가지마다 말린 고기를 걸어 숲을 만들었다는 것이 ‘주지육림’이다. 거기서 벌거벗은 채 애첩 달기(妲己)와 향략을 즐겼다는 주왕(紂王)은 마지막에 녹대 위에 올라가 불 속으로 몸을 던졌다고 하는데 그래도 싸다.
중국을 대표하는 술은 마오타이, 사오싱, 황주, 백주 등이 있는데, 사오싱주는 알코올 15% 정도로 그리 독하지 않고 부드럽게 마셨던 기억이 난다. 성룡이 영화 〈취권〉에서 마시던 술이다. 사오싱주는 황저우(杭州) 남쪽 사오싱(紹興)에서 양조한 술을 말하는데, 여기는 루쉰의 고향이기도 하고 이미 춘추시대부터 술을 만들었다고 한다. 와신상담(臥薪嘗膽), 회계지치(會稽之恥), 오월동주(吳越同舟) 등 고사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 바로 회계산이 사오싱 남쪽에 위치한다.
술은 양조주·증류주·혼성주 세 가지로 구분하는데, 양조주를 가열하면 증류주가 되고, 증류주에 허브·향신료·과당·착색료 등을 첨가하면 혼성주가 된다. 알코올 농도를 높이는 증류주에는 포도로 만드는 ‘브랜디’, 사과로 만드는 ‘키르슈바스’, 곡물로 만드는 ‘위스키·진·보드카’, 고구마로 만드는 ‘아쿠아비트·소주’, 사탕수수로 만드는 ‘럼’, 용설란으로 만드는 ‘데킬라’, 옥수수로 만드는 ‘버번’등이 있는데, 증류주와 혼성주는 이슬람 제국에서 사용한 증류 기술로 출현한 새로운 술로서 증류기술 그 자체로 술의 세계를 확대한 위대한 혁명이었다.
증류(蒸溜)란, 물이 끓는 점 100℃인 것과 달리 알코올이 78℃에서 끓는 점을 이용해 고농도 알코올을 얻는 방법으로 술을 증류기에서 가열하면 증기가 발생하고, 증기를 채취하여 식히는 것으로 반복하면 짙은 농도의 알코올을 얻을 수 있다. 증류한 것을 다시 또 증류하면 70%까지 달하는 알코올음료를 얻을 수 있는데 음주를 금지한 이슬람 세계에서 증류기술이 발달했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증류기술은 금과 은을 인공적으로 만들겠다는 ‘연금술’에서 기인했다는 것도 재미있다.
이슬람 세계에서 탄생한 증류기 ‘알렘빅’은 이집트를 지나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서 유럽으로 전해졌는데, 이로써 유명한 스코틀랜드 위스키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1347년부터 70년 동안 유럽에 창궐하여 인구 1/3에 해당하는 3,0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하는 ‘페스트’와중에 ‘불사의 영’이 깃든 생명수를 마시면 절대 페스트에 걸리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소문으로 생명수라고 일컬었던 증류주가 유행한 것이다. 특히 알코올 도수가 높아 불을 붙이면 불꽃이 이는 모습을 보고 술 속에 영기(靈氣)가 서려 있고, 불의 정기가 몸에는 활력을, 남자에게 정력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독한 증류주를 ‘스피릿(spirit-영혼)’이라 부르는 이유다.
서양의학의 시조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기원전 460?∼377?)는 약초에 와인을 녹여 마셨다고 하는데, 증류주에 향료나 약초, 감미료 등을 첨가해 독특한 풍미가 나게 하는 술을 ‘리큐어’라고 한다. 십자군 원정 중에 증류기가 유럽에 전해지자 수도승들은 허브를 알코올에 넣어 불로장생의 비약으로 믿었던 ‘엘렉시스’제조에 도전하기도 했다고 한다. 프랑스 왕실에 리큐어가 들어온 것은 루이 14세 때인 1533년 이탈리아 거상 메디치가의 딸 ‘가트린’이 앙리 왕자에게 시집오면서다. 부와 권력이 손을 맞잡은 것이었다. 리큐어는 약용 또는 최음제로 사용되며 프랑스 왕가를 뒤흔든 술이 되었고 프랑스 왕실의 풍요를 찬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소주는 세계를 재패했던 몽골(元)에 의해 중국에도 조선에도 알려지고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저자는 다른 말을 하고 있다. 15세기 중반 타이에 전해진 알렘빅과 증류수 제조법이 류큐(琉球, 현 오키나와)로 전해져 이것이 ‘아와모리 소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포르투칼인의 기록에 아와모리를 잔에 따를 때 거품이 일어나는데, 이를 류큐인들은 ‘레케오’라고 하였다고 하고, 류큐에 전해진 알렘빅과 고구마가 가고시마의 사쓰마로 전해졌으며, 레케오는 타이 쌀로 빚었는데 지금도 그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쌀을 조달하기 어렵자 화산재로 덮힌 사쓰마 토지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던 고구마로 원료를 대신했다고 한다. 에도시대에는 소주가 일본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소주를 ‘아카리주(荒木酒)’라고 부르는 이유가 서아시아, 인도, 동남아시아에서 즐기던 ‘아락’이 류큐를 통해 일본 열도에 전해진 것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중국의 술은 고량(수수)을 발효시킨 황주(黃酒)와 이를 증류시킨 백주(白酒)로 크게 구분되는데, 백주가 만들어진 것은 몽골이 지배했던 원(1271∼1368) 제국 시대 이슬람 상인들에 의해서였다. 명나라 시대 『본초강목』의 저자 이시진도 “옛 법에 없으니 원 시절에 그 법이 창시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전의 송나라 때 증류주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원제국이 중국의 술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은 분명하다. 인도 아락이 아삼(인도동부) 지역을 경유해 윈난(雲南)과 구이저우(貴州)로 전해진 것이다. 90년의 몽골 지배는 끝났지만, 마유주만을 마시는 몽골인들은 중국에서 가져간 기술로 마유주를 ‘아일락’이라 부르며 마유주를 강력한 독주로 만들었다.
‘데킬라’는 멕시코를 대표하는 술로서, 1492년 콜럼버스에 의해 신대륙을 발견된 26년 뒤, 500명의 병사와 200명의 뱃사공, 14문의 대포, 16마리 말로 쿠바를 출발한 스페인 장군 ‘코르테스’는 1522년 멕시코 고원에 위치한 ‘아스테카 왕국’을 정복했다. 당시 왕국의 인구는 2,50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프랑스 인구보다 많았다. 9개월 동안 공방을 주고받은 끝에 아스테카의 수도인 ‘데노치타틀란’을 함락시키고 엄청난 부를 손에 넣은 서른여섯 살 코르테스에게 자아 도취감을 높인 것은 아스테카의 술이었다. 스페인에서 볼 수 없었던 용설란의 일종인 ‘마케이’수액으로 만든 술로 축제일에 신관(神官)과 전사에게만 허락된 술이었다. 몰래 이 술을 마시다 들키면 처음에는 채찍, 두 번째는 추방, 세 번째는 사형당했다고 한다.
술은 제조법부터 독특했는데 멕시코 고원에 분포하는 다육성 용설란 ‘아가베 아트로비렌스’는 뿌리 폭이 30㎝, 높이가 2m에 달하고 수십 년에 한 번 10m 정도의 이삭을 내고 끝에 꽃을 피운다. 이 시기 이삭을 뽑으면 오목한 자리에 달고 신 맛이 나는 액체가 체워진다. 이것을 모아 자연 발효시킨 것이 알코올 5∼6도의 ‘풀케’라는 것이 되는데 변질되기 때문에 오래 보관은 어렵다. 우리나라 고로쇠 비슷하지만 매년 나오지는 않는 모양이다. 이것을 스페인 사람들이 증류해 45도의 술로 만든 것이 ‘데킬라’다.
뱃사람들의 술로 알려진 ‘럼’주는 흥분을 뜻하는 영국지방 방언인 ‘럼 블리온’에서 따온 말이다. 당분의 농도가 50∼55%에 달하는 당밀을 12∼20% 희석하여 만든 원료에 효모를 넣어 양조한 것을, 두 번 증류한 럼주는 간단히 만들 수 있었기에 가격이 저렴했다. 신대륙 카리브해역에 사탕수수밭을 만들고 많은 노예들에 의해 설탕을 정제해 일용품과 함께 유럽 시장에 내다 팔면서 설탕의 대중화로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탄생할 때 흑인 노예들을 서인도제도까지 운반하고는 돌아오면서 당밀과 럼주를 싣고 아프리카에 들러 노예 값을 치르게 되었는데, 이 삼각무역에 럼주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두운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권투에서 상대를 강타해 비틀거리는 모습을 ‘그로기’상태라고 하는데, 럼주를 과음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태평양은 모든 지구상 육지를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의 넓은 바다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거기도 개발을 피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영국의 제임스 쿡(1728∼1779) 선장이 세 번에 걸쳐 항해함으로써 호주, 뉴질랜드를 비롯한 한 가운데 있는 하와이섬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산업혁명으로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었으나, 아직 전기가 없던 시절 램프를 밝힐 고래기름 획득을 위한 포경업이 주요 산업으로 부상했다. 석유로 불을 밝히던 1890년 이전의 이야기로 포경의 중심은 미국이었고, 하와이를 거점으로 향유고래, 참고래가 서식하는 태평양은 주요한 어장으로 연간 1만 마리의 고래를 포획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고래 수난시대였다.
당시 포경선은 선창에 고래기름이 가득할 때까지 4년 이상 걸리는 긴 항해를 했다고 하고, 하와이는 포경선에 식량 등을 공급하는 기지로 역할을 했다. 1790년 영국의 사업자 윌리엄 스티븐슨이 하와이를 방문해 특산물인 ‘타로 고구마’에 주목한 것은 우연이었을까? 고구마로 증류주를 만들면 큰돈을 벌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와이에는 증류기가 없었지만, 그는 풍만한 여인의 엉덩이와 비슷한 고래기름 짜는 철 냄비 ‘오코레하오’를 증류기로 대신했다. 하와이가 자랑하는 ‘철 엉덩이’오코레하오, 줄여서 ‘오케’가 탄생한 것이다. 오케는 미국의 술로 바뀌었고 하와이 사람들은 오케를 그냥 마시지만, 독해서 두려운 관광객들은 콜라나 쥬스를 섞어 마신다.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나라 간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돈이 되는 상품인 와인을 부패 없이 수송해야 했던 네덜란드 상인들은 와인 속의 세균을 죽여 장기 보관하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탄생한 것이 ‘브랜디’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중세의 생명수를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이익을 내기 위해 계산을 했던 것이다. 프랑스 브로도에서 생산된 와인을 구매해 맥주를 주로 마시던 영국과 북유럽에 내다 팔면 큰 돈벌이가 되었으므로 와인을 운송해 더 큰 이익을 내고자 노력하던 중, 와인을 증류·농축시킨 후에 물로 희석해 팔면 양도 많아지고 부패도 방지할 수 있어 일석이조가 될 것이란 생각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오늘날 브랜디는 신맛이 강한 백포도주를 발효, 증류시킨 후, 5∼10년 혹은 그 이상 오크통에 넣어 숙성시킨다. ‘불태운 와인’이란 의미의 브랜디는 이렇게 탄생했다.
브랜디 중에 ‘코냑’은 프랑스 남부 샤량트 지역 작은 도시 코냑에서 오래전부터 와인을 생산·판매하고 있었는데, 보르도 와인에 밀려 인기가 떨어졌다. 이에 지역 특산품인 암염을 사러 왔던 네덜란드 상인이 ‘와인을 증류해 보라’는 조언에 힘입어 브랜디를 만들었는데, 신맛이 강했던 와인이 오히려 강점이 되어 매우 훌륭한 맛으로 변했다. 와인을 증류하자 지역 포도의 진가가 발휘된 것이다. 2년 이상 숙성시키는 코냑은 숙성과정에 술의 양은 줄지만 대신 향과 고유의 색채를 얻을 수 있었다. 보르도 포도로 만드는 ‘아르마냑’은 알코올 농도 55∼60도로 만든 뒤 오크통에 넣어 숙성시키는데 반해, 코냑은 두 번 증류해 60∼70도에 달하는 술로 만든 뒤 병에 넣을 때는 40∼43도로 조정해 판매하는 술이다.
각테일의 대명사가 된 ‘진’은 보리와 호밀 등을 혼합해 발효시킨 뒤 노간주나무 초근목피와 고수풀 등 허브를 추가해 증류하여 만든다. 무색투명하고 알코올 농도가 40∼50%에 달하는 데다 특유의 송진 향이 난다. 무거운 술이지만 의외로 송진 향을 쉽게 받아들여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술이 되었다. 진이라는 이름은 영국인들이 ‘제네바’를 착각해 철자를 줄여 진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네덜란드 출신인 월리엄 3세가 영국국왕이 되자 프랑스산 와인과 브랜디의 관세를 올리고 영국에서도 생산 가능한 진보급을 장려했다. 런던에서는 차나 우유보다 진의 가격이 훨씬 싸고, 이발소나 담배 가게에서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진을 진탕 마시고 술주정뱅이가 되기 일쑤였는데, 이로 인해 범죄가 급증했다. 과음이 사회문제가 되자 1736년 주정뱅이를 줄일 목적으로 한꺼번에 세금을 4배나 인상하는 법률을 개정하자 악법이라며 반발했고, 결국 15년 후 법률은 폐지됐지만, 단속과 폭동으로 진을 제조하던 소규모 영세 증류소들은 도태되었다.
1830년에는 독한 진에 ‘베르무트(백폭도주에 넣는 약재)’를 첨가하여 ‘마티니’같은 칵테일이 속속 등장했는데, 이로 인해 싸구려 술이라는 이미지가 바뀌면서 다시 인기를 얻었다. 1920년대 미국인들이 금주법으로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술을 마실 때 주로 사용했다. 무색인 데다 다른 음료와 궁합이 잘 맞아 미국에서 새롭게 시작한 것이다. 이런 진에 대해‘네덜란드인이 만들고 영국이 발전시키고, 미국이 영광을 돌렸다’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1789년은 세계사적으로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지만, 미국에서는 미합중국 헌법이 발효되어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해이기도 하고, 미국을 대표하는 술 ‘버번’의 역사가 시작되기도 했다. 아직 주(州가) 아닌 켄터키 버번 카운티에 살던‘엘리자 크레이’목사가 식민지에서 생명의 양식으로 추앙받던 옥수수를 원료로 증류수를 만들고, 어느 날 불에 그을린 술통에 위스키를 넣어 저장했는데, 얼마 뒤 독특한 붉은색을 띠고 불에 탄 향이 가미되면서 맛이 한층 더해져,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밸런스를 이룬 좋은 술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붉은색과 탄 맛이 특색인 ‘버번위스키’는 이렇게 탄생했다. 크레이를 ‘버번의 아버지’로 칭송하는 이유다.
20세기는 밤을 낮으로 만들었다. 에디슨의 백열전구 발명은 밤시간이 그만큼 길어졌고 철도와 증기선, 자동차, 항공기에 이르는 교통수단의 발달은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이어져 술의 폭발적 수요를 창출하기도 했다. 술집의 기원은 여인숙에서 시작된 것으로 로마 시대 카이사르(기원전 100∼기원전 44년)가 갈리아를 공격할 때 전선에 물자를 보급하기 위한 보급기지와 숙박시설이 필요할 때 처음 만들어진 것이 ‘인(inn-비나 이슬을 피할 수 있는 장소)’이었고, 주변에 당연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술집은 그런 숙박시설에 지나지 않았고, 제대로 된 술집은 4세기 이후에 ‘태번(Taverm)’이란 이름으로 역시 주둔지 근처에 생겼다. 이후 인은 호텔로, 태번은 레스토랑 모습으로 바뀌었다.
13세기에는 음식점과 선술집이 분리되었고, 15세기에는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에일 하우스’가 등장해 전성기를 맞았다. 19세기에는 ‘펍’이 마을의 커뮤니티 센터로 맥주와 간단한 식사가 가능해져 현재 영국에는 약 7만 개 이상의 펍이 있다고 한다. 16세기 이후 지금까지 영업하는 곳도 있다고도 하지만, 오늘날 펍은 대부분 맥주 회사가 경영한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선술집을 ‘카바레’혹은 ‘타베르뉴’라고 하는데, 커피를 제공하기도 했으나 오늘날은 주류를 취급하는 카바레와 커피를 취급하는 카페로 분리되었다.
술에 관련된 용어로는 ‘바’와 ‘바텐더’‘소믈리에’등이 있는데, 바는 서부개척시대 ‘살로네(저택 안의 손님 접대용 방)’에서 유래한 ‘살롱(프랑스어, 고객의 휴식장소)’에서 나무술통에 넣어 둔 위스키를 글라스에 담아 판매했는데, 취객이 주인의 눈을 피해 마음대로 술을 꺼내 마시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자 튼튼한 봉(bar)으로 취객의 접근을 막았던 것이 나중에 판자로 바꿔 대면식으로 변한 것으로 안에서 일하는 ‘텐더(tender-감시, 심부름)’가 한 단어로 되면서 바텐더가 된 것이다. 20세기는 호텔과 바가 늘고, 칵테일을 대규모로 만들게 되면서 와인에 정통한 소믈리에, 각종 술과 각테일 전문가 바텐더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흔히 위스키를 ‘스카치’와‘몰트’로 구분하는데, 이는 1908년 영국왕립위원회가 당화시킨 곡물 순액을 증류해 얻은 것을 ‘스피릿’이라고 하고 스코틀랜드에서 증류한 것을 스카치라고 한데서 시작되었다. 몰트와 그레인위스키가 스코틀랜드에서 증류한 것이 아니라며 스카치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몰트위스키는 스코틀랜드 북부 하이랜드에서, 그래인위스키는 스코틀랜드 남부 로우랜드 어든베러와 글레스고를 연결하는 지역에서 생산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인공적으로 맛과 향을 조합시킨 공업제품으로 자연적 풍미를 잃고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가 되자 몰트위스키를 고급 ‘싱글몰트 위스키’로 판매하기 시작했고, 삼각형 모양의 술병은 이 위스키의 상징이 되었다.
맥주병에는 유통기간이 표기되지 않았지만 보통 1년으로 알려져 있다. 대항해시대로 급성장한 해군 국가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지만, 이들은 유럽 각지를 연결하는 상업 네트워크를 가지지 못했다. 벨기에의 항구도시 ‘폴랑드르’는 달랐다. 1531년에 세계 최초의 상품거래소가 설치된 여기서는 맥아를 달인 물을 발효시킨 맥주 ‘에일(Ale)’이 대량으로 팔리는 효자상품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알코올 도수가 낮아 쉽게 부패하는 약점이 있었다. 독일 뭔헨의 맥주업자들은 이를 막기 위해 술통을 지하에 내려 언 얼음을 채워 차게 보관하는 방법을 생각했고 이렇게 저온 숙성된 맥주를 ‘저장한 맥주’즉 ‘라거 맥주’라고 불렀다. 폴랑드르 상인들은 장기간 저장이 가능한 맥주를 대대적으로 광고해 큰 이익을 낼 수 있었다고 한다.
라거 맥주는 발효하는데 4∼6주가 걸리고 2주 만에 끝나는 상면(상온) 발효보다 시간이 걸리지만, 품질이 일정하고 차갑게 두면 장기간 저장이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다. 에일 효모는 상온에서 발효하기 때문에 미생물 등의 번식으로 맛에 미묘한 차이가 생긴다. 자연과 밀착된 맥주로 때로 불쾌한 맛이나 신맛이 나서 균일하게 맛을 맞추기도 어렵다. 대량생산과 균일한 품질의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라거 맥주가 적합하다. 하지만 오랜 전통을 가진 에일 맥주에는 영국의 ‘블론드 에일’‘비터’, 독일 바이에른의 특산품인 ‘헤파바이젠’, 뒤셀도르프의 ‘알트비어’, 쾰른에서 만드는 ‘쾰수’등이 대표적이다. 한때 라거에 시장을 잠식당한 에일이지만 최근 20∼30년간 대형 맥주 제조사가 만드는 균질화된 맥주에 질린 애주가들이 다시 에일 맥주를 찾고 있다고 한다.
세계 맥주 생산량은 1억㎘가 넘는다. 최대 소비국은 미국이고, 2위인 중국보다 1.5배 더 많다. 국민 1인당 알코올 소비량은 전통적으로 맥주 제조가 발달한 유럽의 체코가 1인당 157Ŀ로 1위, 아일랜드, 독일, 오스트리아가 뒤를 잇고, 100Ŀ이상 소비하는 나라가 다섯 나라나 된다. 우리나라도 2020년 맥주 184만 1619㎘를 소비해 1인당 85.4병을 소비해 체코에 비해 반쯤 되는 것 같지만 소주를 1인당 56.3병을 소비했다는 것을 보면 비슷한 수치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우리나라 술 소비량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까 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독한 술은 어떤 술인지 비교한 것은 없지만‘압생트’라는 환상의 술이 65도에서 79도에 이르는 매우 독한 술이다. 멕시코의 데킬라가 50도, 러시아 보드카가 40도에서 50도인 것에 비하면 그렇다. 향쑥(압신티움)으로 빚은 압생트는 녹색으로 빛났고, 그냥 마실 수 없으므로 물에 타서 흰색으로 탁하게 만들어 마신다. 압생트는 1797년 프랑스 의사 ‘피에르 오디네르’가 시도해 ‘앙리 루이 페르노’에게 전수하고 페르노가 스위스 ‘쿠베’에서 본격적으로 제조했다. 1805년 프랑스에서도 제조가 시작되어 좋은 향기와 아름다운 색채, 싼 가격으로 삽시간에 거의 모든 계층이 사랑하는 술이 되었고, 1840년 프랑스 육군이 해열제, 소독제로 사용하기도 했다.
압생트를 애용한 예술가로는 모파상, 베를렌, 고갱, 모네, 드가, 피카소, 헤밍웨이 등이 있고, 이들 중 일부는 압생트 중독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자화상을 그릴 때 방해가 된다며 왼쪽 귀를 절단하고, 수차례 자살을 시도한 ‘고흐’도 압생트를 수시로 마셔 정신이상을 일으켰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압생트의 중독성은 향쑥에 함유된 성분 때문으로 신경에 유해한 영향을 끼치고 중독 중상을 촉진한다는 결론이다. 그래서 1차 세계대전 이후 점차 사라졌지만, 현재는 압생트를 이어받은 ‘파스티스’가 제조 되어 프랑스에서 소비되고 있는데, ‘비슷하게 만들다’는 의미로 파스티스라고 하며, 향쑥을 뺀 압생트 유사품으로 판매되고 있으나 이것은 물을 섞으면 흰색으로 탁해지지 않고 녹색을 띤 노란색으로 변한다고 한다.
술은 사교에도 빠질 수 없지만 암흑가와도 관련이 깊다. 희대의 암흑왕 ‘알 카포네(1899∼1947)’와 술은 어떤 관계였을까? 1차 세계대전에서 어부지리를 얻은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미국의 시대)’를 구가하며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1920년대 이미 전기가 매 가정에 들어오고, 5명 중 1명이 자동차를 소유하며 재즈와 스포츠를 즐기고 급변한 변화의 생활을 만끽했다. 대량생산과 소비로 풍요를 구가했으나 1929년 세계공항을 예견이라도 한듯 알코올 도수 0.5 이상은 판매하지 못하는 이른바 금주법을 시행하였는데, 이로써 공식적으로 미국에서 술은 사라졌다. 남편들이 술집에 드나들면서 가산을 탕진하고, 폭력을 일삼는데 화가 난 여자들이 ‘술집반대동맹’을 조직하고 모든 ‘악덕의 근원이 술’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금주운동을 전재하여 마침내 술의 제조와 판매, 운반을 금지한 수정헌법이 발효(1919.10∼1933년)된 것이다.
‘마시지 말라고 말리면 더 마시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 이 기묘한 현상을 부추겨 비밀스럽게 마셔댄 미국의 알코올 소비량은 리큐어가 연간 2억 갤런, 맥주 등 소프트 리큐어가 6억 8천만 갤런, 와인이 1억 2,000만 갤런에 달했다고 한다. 시카고 갱 ‘조니 트리오게’로부터 밀주와 밀매, 도박과 매춘 조직을 이어받은 암흑가 지배자 알 카포네는 7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161곳의 불법 술집을 경영해 1927년 한해에 1억 5,0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고 하고, 국회의원·판사·경찰 등을 매수하여 이권을 독점했다. 기관총까지 동원한 범죄와의 전쟁과 항쟁을 계속하다 1929년에만 500명의 갱단이 목숨을 잃는 ‘발렌타인데이 학살’이 벌어지고 1931년 알 카포네가 체포되어 탈세로 11년을 선고받았고, 1939년 가석방되었으나 매독이 심해 자유를 누릴 수는 없었다. 금주법으로 소침해진 미국인들의 원기를 북돋아 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루즈벨트 대통령은 1933년 금주법을 폐기했다.
‘각테일’은 서로 다른 역사와 배경을 지닌 세계 각지의 술이나 음료를 혼합해 섞은 뒤 그때까지 맛볼 수 없었던 새로운 맛과 향을 만들어내는 술이다. 이 발상은 합리적이면서 인공적인 미국의 문화적 풍토와 잘 매치 된다. 각 나라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로 상대적으로 혼합된 접점이 칵테일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펼쳐낸 것이다. 보드카·진·데킬라·위스키·럼· 브랜디·리큐어·와인·맥주·소주 등을 기본으로 하는 이것은 식재료에 조미료를 가미해 요리하는 것과 같은 발상이므로, 이름만도 2천 종류, 세분하면 2만 종에 달한다고 한다. 각테일이란 어원도, 발상의 기원도 하도 다양해 어떤 것이다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압생트가 지배적인 술이었다면 칵테일은 신흥국인 아메리카의 술이었다. 고유의 음주 문화를 가지지 않고, 많은 민족이 유입되어 섞인 이민국가 미국은 술에 대해 관용적이었으며, 조합해 새로운 음료를 만들거나 새로운 음주법을 연구한 것이 칵테일일지 모른다.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는 새로운 칵테일이 등장하고 세계의 물자, 사람, 정보를 지구 규모로 이동시키고 술 문화 역시 이에 따르고 있다. 20세기 후반부터는 냉장고를 매개로 한 콜드 체인(Cold Chain)기술의 보급으로 식재료가 대양을 넘나들며 ‘차가운 음식문화’의 시대를 풍미하고 있다. 술 역시도 차갑게 해서 마시는 경향이 강해졌고, 칵테일 같은 여러 종류의 술을 조합하는 시도도 활성화되고 있다. 우리도 뒤질세라 ‘소맥’이 판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물고기는 물과 다투지 않고 주당은 술과 다투지 않는다”내가 기억하는 술과 관련된 숙어(熟語)로 주당(酒黨)들에게 꼭 전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