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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 관한 두 권의 책
〈오랑캐의 역사〉, 〈중화명승〉이 두 권의 책을 같이 빌려서 2주 안에 모두 읽어야 한다는 데 부담감이 없지 않다. 〈오랑캐의 역사〉가 485쪽, 〈중화명승〉은 310쪽이나 되기 때문이다. 내용을 깊이 이해하고 정독이 어렵다면 겉핥기로 읽어 나갈 생각을 해 보기는 한다. 두 권 다 중국에 관한 책이므로 앞뒤 대중없이 읽다 기억하고픈 것만 여기에 적거나 그냥 앞으로 나갈 생각을 하기도 한다. 〈오랑캐의 역사〉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계명대에 출강하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편집위원을 역임하기도 한 김기협 선생이 ‘만리장성 밖에서 보는 중국사’라고 소개한 책이고, 〈중화명승〉은 ‘중국소설학회’소속 김명구(명지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등 21명이 ‘독특하고 빼어나다’는 뜻을 지닌 형용사 2개를 묶은 ‘명승(名勝)’을 탐방하고는 거기에 담긴 혼에다가 색깔을 입혀서 입말을 통해 들려주는 책이다.
이것으로 두 책의 성격을 짐작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는 중국과 관련한 역사책, 다른 하나는 중국의 명승지들이 우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짐작해 볼 수 있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은 땅덩어리가 큰 만큼 명승지가 많고, 역사도 깊다. 그러면서 그것을 잘 정리하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만큼 조상들중에 뛰어난 인물과 역사의식을 뚜렷이 가진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100여 년 전 그들은 서구 세력에 의해 유린당했을 뿐 아니라 오랜 역사와 정치제도, 학술체계까지 서양의 충격 앞에 무너졌던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그 무너진 중화제국이 복원된 것 같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려고 한다. 소위 ‘바다오랑캐’라고 한 서구 세력은 중국에 한 차례 변화와 충격을 준 것에 불과한 것일까? 이제 ‘신천하주의(新天下主義)’가 되려고 하는 중국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기술발전과 자원공급이 무제한 확대될 수 있을 것 같았던 과거 200년 동안 사람들은 행복의 기회가 열려 있는 것 같은 세상을 살았다. 그런데 그 믿음이 환상에 불과했던 것이었는지 의문이 일어나고 있다. 믿음이 없었던 세상에서는 어떤 질서가 어떤 방법으로 운영되었는지 새로운 눈으로 돌아볼 때가 바로 지금이다. 그래서 중국을 다시 볼 수 있는 이런 책들이 세상에 나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자신들을 中華라고 하고, 자신들을 둘러싼 이민족을 오랑캐, 즉 이만융적(夷蠻戎狄)이라고 해 낮잡아 보았다. 우리 조선민족도 당연히 오랑캐였다. 역사를 돌아보면 민족적 자긍과 자부심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더러는 안타까움과 굴욕적인 생각이 앞서는 일도 있다. 그만큼 우리의 힘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이 그랬고, 한국전쟁이 그랬다. 서울 잠실 롯데호텔 남쪽에는 ‘삼전도비’라는 굴욕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비가 하나 있다. 그렇지만 굴욕의 역사도 분명히 역사고 그래서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한 신채호 선생의 말이 실감 되기도 한다. ‘삼궤구고두레(三跪九叩頭禮)’를 행한 인조의 행적은 영화 「남한산성」에서 자세히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은 이 부분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따라 부르다)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무미건조하리만치 감정 없이 객관적 사실만 기술되어 있지만, 이어지는 실록의 내용은 그날의 굴욕을 더욱 처절하게 보여준다. 항복 의식을 마치고 해질녘에 창경궁을 향해 출발하는 상황에서 한강을 건널 배가 부족하자 백관들이 임금의 옷을 잡아당기며 다투어 배를 타려고 해 난장판이 벌어졌고, 산성에서 버티다가 잡혀가는 만여 명의 백성들은 인조를 향해 ‘임금이시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라며 울부짖는데도 그냥 지나쳐 가는 무능한 임금은 ‘삼궤구고두례’보다도 그날의 굴욕을 ‘삼전도의 굴욕’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실 삼궤구고두례는 춘추시대 이전 주나라 때부터 있었던 인사법으로 황제를 알현할 때 복종의 의미로 행하던 것이다. 청나라가 중원의 주인이 되자 그대로 받아들인 것인데 청나라 즉 만주족의 인사법은 직접 껴안고 친밀감을 나타내는 ‘포견례(抱見禮)’로 삼궤구고두례를 굳이 ‘치욕’의 상징으로만 볼 수는 있다. 이후 조선은 청나라에 정기적으로 사행을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매년 동지 무렵에 정기적으로 보내는 동지사, 부정기적으로 사은사, 주청사, 진주사 등을 보내야 했다. 사은사는 사행 30명을 포함해 수백 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이 베이징(北京)에 도착하면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정기 사행의 경우 12월 말 베이징에 도착하면 동악묘(東嶽廟)에서 정식관복으로 갈아입고 조양문(朝陽門)을 통해 자금성에 들어가 숙소를 배정받은 뒤, 1월 1일 정조의(正朝儀)에 참석해 황제에게 ‘삼궤구고두례’를 올렸으며 태화전에서 황제가 주재하는 조참의(朝參儀)에도 참석했다. 그러나 대부분 조선 사행들은 명나라를 그리워하며 청나라가 주재한 행사를 꺼렸다. - 김민호 한림대 교수, 치욕의 삼궤구고두례 -
〈육조고도〉라는 말은 난징(南京)을 말하는 것인데, 역대 여섯 왕조의 수도로 금릉, 말릉, 건강, 강녕, 용천, 경사, 천경 등으로 불렸다. 여기서는 태평천국의 난, 난징 대학살,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혈투, 아편전쟁과 난징조약, 쑨원에 의한 중화민국 건국 등 여러 역사가 서려 있다. 난징에는 장강의 지류인 진회하(秦淮河)가 흐르는데, 용장포 또는 회수로 불리다가 당나라 이후에 진회하로 불렸다. 진시황이 회계로 가는 길에 여기 적산호에서 왕기가 피어오른다는 소리를 듣고 알아보게 하였더니 거기가 용이 숨어 있다는 용장포였으므로 자신을 뒤엎을 것을 우려해 산허리를 잘라 왕기를 덮고는 ‘말릉포’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말릉은 난징의 다른 이름으로 말(秣)이 말이나 소를 먹이는 꼴이란 뜻이므로 이곳이 꼴이나 생산하는 별 볼 일 없는 곳으로 의미를 축소한 것이었다. - 이민숙 한국외대 교수, 난징 진회하 -
“하늘에 천당이 있고 땅에 쑤저우(蘇州)와 항저우(杭州)가 있다.”고 한이 말은 송대 문인 범성대(范成大)가 『오군지』에 기록한 말이다. 그만큼 풍요롭고 아름다운 도시의 대명사가 항저우였다. 13세기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는 항저우의 매력에 빠져 ‘세상의 어떤 도시보다 아름답고 당당한 곳’이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오래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배나 만드는 작은 어촌에 불과해 나룻배 항(杭)자를 써서 항주라고 했던 것이다. 춘추시대 월나라 수도였으나 한나라 때는 궁벽한 어촌으로 퇴락하기도 했다. 7세기 수隨나라 문제가 베이징과 항주를 수로로 연결한 운하의 종점이 되자 사람들이 몰려들고 번화하기 시작했다. 남송 때는 황제가 임시 거처하던 곳이라 하여 행재(行在) 또는 임안(臨安-임시 주둔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풍광이 빼어난 곳이다 보니 여러 시인 묵객이 머물렀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와 전설이 만들어진 것은 당연했다. 넓은 호수인 서호를 배경으로 양산박의 무대가 되기도하고, 축영대와 백낭자의 애절한 눈물이 흩뿌려진 뇌봉탑에 얽힌 전설, 육화탑과 육화의 전설 등이 그것이다. 서쪽에 있다 하여 서호(西湖)로 불리는 이곳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와 동진의 소동파로 인해 더욱 유명해 졌다. 소식(동파)이 서호를 유람하면서 월나라 범려가 서시를 데리고 서호에서 배를 타고 사라졌다는 전설을 떠올리며 호수의 모양이 서시의 눈썹 같다고 한데서 ‘서씨의 눈썹을 닮은 호수’로 알려지기도 했다.
서호 뇌봉탑의 석양은 가히 일품인데 여기에는 ‘구미호’의 전설 같은 애잔한 전설이 전한다. ‘남송 때 백사 한 마리가 1,000년 간 수련하여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했는데 그녀가 백낭자다. 그녀는 청어 요괴인 소청과 더불어 서호에 놀러 왔고 마침 단교를 지나면서 허선이란 남자를 보고 좋아하게 되었다. 이때 소청이 비를 내리게 하자 이를 본 허선이 백낭자 일행에게 우산을 빌려주었고 둘은 사랑에 빠져 부부가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는 전설이지만 이런 이야기에는 항상 반전이 있게 되어 법해라는 승려가 나타나 허선에게 백낭자는 1000년 묵은 뱀의 요괴라고 알려주고, 바리때(공양그릇)로 백낭자를 가두게 하고는 바리때를 봉하여 뇌봉사를 짓고 뇌봉탑을 쌓았다는 것인데, 그다음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백낭자가 요괴지만 사람보다 더 착한 마음씨를 가졌다거나 허선 역시도 백낭자가 뱀의 요괴임을 알고도 그녀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사랑을 지키며 자신을 희생한 인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아무튼 뇌봉탑은 오늘도 서호의 아름다운 풍경을 굽어보고 있다. - 정명구 명지대 교수, 항저우 뇌봉탑 -
일본 작가 미야자키 마사키츠의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술로 ‘사오싱주’가 있고 중국 저장성 사오싱(紹興)에서 만든다는 것을 알았고, 영화 ‘취권’에서 성룡이 그것을 마시고 화려한 무술을 보였던 기억이 난다. 사오싱은 술로도 유명하지만 명필 왕희지의 고향으로 난정(蘭亭)이라는 정자에서 ‘난정서(蘭亭序)’를 썼고 그것이 전하명품 글씨라 하여 서예를 꿈꾸는 이들이 꼭 가 보고 싶어하는 곳이 난정이다. 지금의 난정은 1979년 복원한 정자지만, 왕희지 당시 정자는 그의 글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영화 9년 계축년 늦은 봄 초순에 회계 산음현 난정에 모인 것은 계사(契社)를 치르기 위함이다. 여러 어진 분들이 모두 오셨는데 젊은 사람, 나이 든 사람 할 것 없이 다 오셨다. 이곳은 높은 산 큰 고개와 무성한 숲, 긴 대나무가 있고 또 세차게 흐르는 맑은 여울물이 좌우를 비추며 띠처럼 들러있어서 그 물을 끌어다 유상곡수(流觴曲水=포석정?)를 만들고 차례대로 벌여 앉으니 비록 관악과 현악이 함께하는 성대함은 없으나 술 한 잔 들고 시 한 수 읊으며 그윽한 정을 펼치기에는 충분하구나.”
왕희지(王羲之-303∼361년)는 동진 시대 인물로 예서, 초서, 해서, 행서 할 것 없이 능했으므로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서법뿐 아니라 노장 철학과 유가의 중용의 도가 녹아 있는 심원한 서체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난정은 사오싱을 대표하는 역사적·문학적 명소이고 그것은 왕희지라는 걸출한 인물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를 존경한 청나라 강희제의 각별한 애정으로 더욱 신성시되는 곳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인물을 찾다가 명소를 발견하기도, 아니면 명소를 유람하다가 그곳과 인연이 깊은 인물을 만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여행은 내가 알고 있는 반쪽을 채워주는 공부가 아닐까? - 천대진 경상대 교수, 사오싱 난정 -
〈오랑캐의 역사〉로 돌아가 본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통일하면서 안과 밖의 경계가 뚜렷해졌다. 한나라 초기에는 흉노에 시달리면서 외이(外夷)를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심리가 중국인 마음속에 자리잡았다. 중화제국에 외이의 위협은 북방으로부터 닥쳤다. 선비족의 북위, 거란족의 요, 여진족의 금, 몽골족의 원, 만주족의 청에 이르기까지 한족을 위협하고 전복시킨 것은 모두 북방의 오랑캐였다. 만리장성이 북방에 설치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동·남·서가 아닌 북쪽에서 심각한 위협이 제기된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일까?
중국 철기 시대는 세계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광석에서 추출한 철괴를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망치로 두들겨서 모양을 만드는 단조(鍛造)가 주종이었으나 중국에서는 높은 온도로 녹여 거푸집으로 찍어내는 주조(鑄造)가 일찍부터 발달했다. 단조가 수공업이라면 주조는 기계공업이라 할 만큼 생산성이 높은 방식이다. 중국은 철기 사용량이 다른 지역보다 많아서 여러 방면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유럽 고고학에서 말하는 석기-청동기-철기 3분법을 중국에는 적용하기 어렵다. 중국에는 문자기록이 일찍 시작되어 청동기 시대에 이미 역사시대로 진입했다. 지중해 지역의 철기시대가 한참 지난 뒤에야 문자가 나타난 것과 다르다.
춘추시대 이전에는 장강문화권은 ‘남만’에, 파촉문화권은 ‘서융’에 속했다. 오랑캐라고 불렀지만 화하와 비슷한 농업문명과 정치조직을 발전시키고 있던 지역들이었다. 중원과 이만융적 모두 자신의 거처와 음식, 의복, 도구, 기물을 가졌으므로 『예기』에 ‘5방 사람들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기록하면서도 우열을 논하지 않은 것은 농업문명이 중원에 한정되지 않았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중국과 오랑캐 사이의 관계에 관한 기록은 중국 쪽에 압도적으로 많이 남아 있다. 중국입장에서 남긴 이 기록들은 중국의 우월성을 강조, 과장하는 경향이 있고 이 경향은 오랑캐와 중국의 차이를 크게 보려는 입장으로 이어졌다. 북방의 장성은 화이대립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는 현장이다. 대립이라는 것이 서로 공유하는 것이 있을 때 나타난다. ‘소 닭 보듯’하는 이질적 존재들 사이에는 대립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장성을 쌓는데 가장 적극적인 왕조는 한나라와 명나라였다. 한나라는 흉노가 숙적이었고, 명나라는 몽골족과 오랫동안 다투다가 결국 만주족에게 유린당했다.
1644년 청나라 군대가 요동 지역의 숱한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명나라를 무너뜨릴 때 명나라가 스스로 무너져 장성이 뚫린 것이지, 장성이 뚫려서 명나라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명나라의 반란군 대장 이자성(李自成)이 명나라가 잃어버린 천하를 차지할 것인가? 청나라가 차지할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였다. 장성은 중화제국에 존재한 2000여 년 동안 華下와 外夷 사이의 장벽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굳건한 장벽도 소통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안팎의 상호관계에 절제를 가함으로써 변화를 순조롭게 만든 효능도 있었다.
기원전 771년 주나라가 오랑캐를 피해 서안(西安)에서 낙양(洛陽)으로 왕도를 옮기면서 ‘동주시대’가 되고, 동주시대 전반부를 춘추시대 후반부를 전국시대 또는 서주시대라고 한다. 그때까지 130여 개 나라가 전국시대에는 전국 7웅으로 일곱 개 나라가 자웅을 겨루다가 결국 秦始皇에 의해 패권이 장악되었고, 그전 춘추시대는 춘추 5패라 하여 다섯 제후가 패권을 겨루었는데 문헌에 따라 5패를 齊桓公, 晉文公, 秦穆公, 楚莊王, 宋襄公(『사기』의 기술)으로 보기도 하고, 다른 문헌에는 吳王闔閭, 越王句踐, 鄭莊公으로 보기도 하는데 진나라와 초나라는 춘추시대에야 비로소 존재가 나타난 나라였고, 오·월도 춘추 말기에 일어난 신흥국이었다.
서주시대 오랑캐 취급을 받았던 진·초·오·월 등 신흥국들이 주변부에서 실력을 키워 강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모두 전쟁에서 승리 한 때문이었다. 기원전 506년 오나라가 초나라를 보름 동안 다섯 차례나 공격해 수도 영(郢)을 함락시켰다. 100여 년 전 송을 혼내준 초나라지만 그사이에 도입된 우아한 전쟁방식에는 속수무책이었던 모양이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달려드는 오나라 군대에 기가 질렸던 것일까? 이때 오나라 지휘관은 손자병법을 완성한 손무(孫武)였다. 손무보다 100년 후 위나라 출신 오기(吳起) 장군은 초도왕(悼王)을 도와 왕권을 강화했다. 도왕이 죽은 날 아들 숙왕(肅王)이 즉위하자 그동안 오기에게 눌려지내던 왕족과 대신들이 도왕을 등에 업고 안하무인이었던 오기를 죽이겠다고 들고일어나 오기를 공격했다. 오기는 도왕의 시신 밑에 숨었는데 저들은 화살로 도왕의 시신을 마구 쏘아댔다. 이에 태자가 불경죄로 공격한 자들을 모두 처단했으니, 오기는 죽으면서도 초나라 중앙집권에 공헌했다.
항우를 ‘사면초가’에 빠뜨리고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에게도 체면을 구기는 일이 생긴 일이 있었는데 나라를 건국한 다음 해(기원전 201)의 일이다. ‘평성의 치욕(平城之恥)’으로 기록된 그 일은 한왕 신이 흉노에 투항한 때문이었다. 분노한 유방이 30만 대군으로 정벌에 나섰지만, 흉노의 40만 군대에 막혀 7일간 포위되어 있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사건이다. 그 후 70년간 한나라는 흉노에 해마다 막대한 재물을 보내고 황실 여인을 시집보내는 굴욕적 유화정책을 취해야 했다. 신기한 것은 한나라 황제를 잡아 죽이지 않고 대신 골려준 뒤, 유리한 조건을 제시해 70년간 평화를 누렸다는 사실이다. 이는 인질을 잡아두는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흉노에게는 훌륭한 병법가나 지략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흉노에 대한 기록은 극히 간략하다.
우리가 피해의식을 가지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고구려를 ‘중국의 한 지방정권’으로 보는 것으로 지금의 중국 강역 전체를 ‘중국사’로만 보는 관점이다. 이에 대해 김한규 교수(서장대)는 이렇게 말했다.
“한중 간의 역사 전쟁에서 한국의 학계와 언론계가 고구려사의 중국사 편입을 규탄하면서 ‘고구려사는 오로지 한국사의 일부일뿐’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역사가 사물을 형성하는 과정의 서술임을 인정한다면 고구려 역사가 현재의 한국을 형성하는 과정의 일부였음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중국을 형성하는 과정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서도 발견하기 어렵다. 고구려사가 중국사인가, 한국사인가 하는 문제는 처음부터 논쟁거리가 되지 못한다.”(김한규 「천하국기」13쪽)
어찌보면 자랑스럽기도 한 한반도가 중국에 흡수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천하질서를 구축하려고 한 한무제는 조선과 남월을 정복해서 제국에 합치려고 했다. 그래서 남월에는 9군을 설치하고 조선에는 4군을 설치했다. 그런데 남월은 굴곡 없이 중화제국에 편입된데 반하여 조선은 결국 4군을 축출하고 고구려라는 독립국가로 발전했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일까?
220년 한나라가 멸명한 후 5호16국이란 오랑캐의 시대가 열릴 때 중화제국은 남쪽으로 퇴로를 찾았는데, 조조·유비·손권에 의한 삼국시대를 거쳐 진晋나라가 280년 중국을 재통일했지만 천하질서를 충분히 회복하지 못했다. 남쪽으로 내려간 중화 제국으로 인해 남월은 한화(漢和)될 수밖에 없었고, 이때의 남월은 지금의 월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운남, 귀주 등을 포함한다. 반면에 오랑캐의 각축장이 된 북중국 바깥에 있던 조선은 중화제국의 압력에서 벗어나 독자적 발전의 길을 수 있었다.
앞에서 보았던 흉노제국은 한무제에 의해 무너졌으나 304년 흉노족의 유연(劉淵)이 조趙나라를 세우고 광문제(光文帝)라 칭하면서 ‘5호16국’ 시대를 열었다. 5胡란 흉노와 갈(羯), 저(氐), 강(羌), 선비(鮮卑) 등 다섯 종족을 말하는데 유연은 한나라에 귀순해 제국체제 안에서 다른 종족들을 한나라로 끌어들여 외이 아닌 내이로 통제된 대상이었다. ‘劉’라는 성도 한나라에서 하사받은 것이었다. 한나라기 끝나고 진이 재통일 이후 100년 동안은 혼란시대로 군사적 수요 때문에 이들의 역할이 커졌고 결국 제국체제의 전복에 앞장서게 되어 북위가 수나라를 세워서 재통일하기에 이른다.
당나라 하면 태종 이세민의 ‘정관의 치’나·당연합군과 신라고승들의 불교 유학, 양귀비와 현종, 두보와 이태백, 최치원, 그리고 ‘안록산의 난’등이 생각나는데 중화제국의 판도를 크게 넓혔을 뿐 아니라 외부와의 관계도 매우 활발했던 당당한 제국이었던 당이 과연 중화제국이 맞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남북조시대 북위는 선비족을 조상으로 당 황실은 북위, 즉 오랑캐의 혈통을 의심받기 때문이다. 그것은 528년 북위 효문제가 19세 나이로 독살당한 뒤 군벌권신들의 전횡이 이어지다 534년 서로 다른 황제를 앞세워 나라가 둘로 쪼개져 서위와 동위로 갈라지고, 550년에는 북제와 북주로 왕조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동위·북제는 중국화 노선을 지킨 반면에 서위·북주는 선비족 전통을 지키려 했다. 중국식 성을 취한 효문제의 정책을 뒤집어 선비족 원래의 성으로 돌아가려고 한 것인데 성씨만으로 한족인지, 선비족인지 판별하기 어렵게 되고 이런 상황에서 수나라를 세운 북위출신 양씨, 당나라를 세운 이씨가 과연 한족인지 선비족인지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당나라 태종은 수나라의 통일기반을 이어받은 황제로서 ‘천가한’을 겸하던 이중성을 가졌으나 3대 황제인 고종(649∼683)은 한족으로 행세했다. ‘정관의 치’를 내세워 율령을 확립하고 나라의 기틀을 세운 태종은 이방원처럼 형과 아우를 죽이고 아버지 이연을 밀어내고 황제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같은 비운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 즉위하자마자 장자 승건을 태자로 삼았으나 형제간 알력으로 이방원이 이도(세종)를 태자로 세운 것처럼 삼남(고종)을 태자로 세워 측천무후 시대를 열게 했다. 고종은 아버지 때부터 숙원이던 돌궐을 밀어내고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고구려를 정벌하고는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 계림도독부를 설치하는 등 적극적 경영의지를 보였으나 나중에 느슨한 기미(羈縻)정책으로 물러선 이유는 신라측의 저항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당나라 조정의 문민화가 그 배경 조건이었다. 전성기 고구려는 다양한 사회를 포괄하는 복합국가로 고구려가 사라진 자리에 신라와 발해가 당나라의 기미정책 아래 발전해 갔고 신라가 고려로 이어져 소중화(小中華)의 길로 향하게 되었는데 이는 농경에 적합한 기후조건 때문이었다.
당나라 말 불과 50년 동안에 5개 왕조가 명멸하다 지방 병권을 가졌던 절도사 ‘조광윤’이 송나라를 열었다. 그는 개국초부터 무력을 억제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오랑캐와의 관계가 상존하는 상황에서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300년간 이어진 오랑캐와의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고 막대한 재물을 내줘야 했고, 중원의 일부를 떼줘야 했고 결국은 몽골의 침략을 막지 못했다. 송나라가 요나라와 금나라에게 매년 수십만 냥의 은과 비단을 보낸 것은 큰 손실 같았지만, 평화의 값으로는 결코 무리한 것이 아니었다. 북쪽 땅을 금나라에 내주고 남송으로 내려간 것은 생산성이 높은 지역을 지킨다는 강소국(强小國) 전략이었다. 몽골의 침략을 금나라보다 50년이나 더 버텨낼 수 있었던 이유기도 하다.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세운 요나라(907∼1125)는 중원 진출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946년 후진(後晉)의 수도 개봉(開封)을 점령하였으나 곧바로 퇴각했다. 서희(徐熙)장군이 담판(993)을 통해 강동 6주를 돌려받을 수 있었던 것도 영토야욕이 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서희는 용맹한 기세로 거란 장수를 겁줘서가 아니라 요나라가 원하는 고려의 역할을 정확하게 짚고 그에 부응했던 것이다. 당시 강동 6주는 발해가 멸망한 후 여진족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임에 비추어 요나라가 고려에 바란 것은 여진의 견제였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유목을 문명과 대비되는 ‘야만’으로 여긴다. 그러나 유목은 문명발전의 다른 한 축이다. 식량 확보가 농경이라면 같은 목적으로 동물을 길들여 식량자원을 확보했다. 초기 목축은 식량을 확보하는 데 목적이 있었지만 기원전 4000∼3000년대에는 털, 사역, 운송 등 부차적 용도로 목축이 대형화되고 부산물은 농경사회에 제공되어 곡식, 직물 등과 교환이 이루어졌다. 당나라 시대에 유목민들의 세력인 돌궐과 위구르가 중국과의 관계에서 이득을 취한 데는 무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 방면의 거란과 여진이 9세기 중엽까지 세력을 키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당나라보다는 돌궐과 위구르의 압력 때문이었다.
돌궐이 유목제국을 세워 수·당제국을 상대하다 위구르가 그 뒤를 이은 것인데, 위구르 제국이 무너지자 북방의 유목제국이 사라지고 당나라가 용병으로 활용한 돌궐일파인 사타(沙陀)가 당나라가 망한 후 후당(後唐)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당나라 성을 하사받았던 인물이지만 제국이 사라진 틈새에는 동북방의 거란이 일어섰다. 농경민이 초식성, 유목민이 육식성이라면 동북방의 오랑캐는 잡식성이었다. 5호 16국 혼란 속에서 선비족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농경사회에도 유목사회에도 강력한 세력이 없는 ‘틈새’가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운 여진은 영토를 크게 늘려나갔다. 그런데 거란과 여진의 차이는 무엇일까? 서로 다른 종족일까? 주변 종족들의 이름은 중국 기록에 의해 확인되지만 인식이 현실과 맞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 서로 다른 종족을 같은 이름으로 부른 경우도, 같은 종족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숙신과 말갈과 여진은 같은 종족이다. 동호(東胡)와 선비는 거란의 조상이다. 몽골고원 동쪽 초원지대는 동호의 영역이었고, 흉노에게 격파된 후 동호의 일부가 오환(烏桓), 선비(鮮卑) 등 작은 세력을 이루다가 흉노족이 한나라에 무너지면서 선비족이 두각을 나타냈다. 말갈은 《삼국사기》에도 고구려 북쪽에 나타나지만, 한강 상류에 나타나기도 한다.
저자는 말한다.
“애초에 〈오랑캐의 역사〉를 구상하면서 모든 방면을 균형 있게 다루고 싶었으나 역사가 균형 있게 전개되어오지 않은 것을 어쩌나. 산동에서 강동까지 전국시대에 오랑캐 지역이던 중국의 남해안과 동해안 일대가 당·송 시대에는 모두 중화에 편입되어 있었다. 동남 방면의 오랑캐라면 한반도와 일본, 유구(琉球), 그리고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물러나 있었다. 긴 시대에 걸쳐 중국과 얽힌 오랑캐의 역사가 긴박하게 진행된 곳은 역시 서북 방면이었다.”(156쪽)
다시 〈중화명승〉으로 가 본다.
‘소림사(嵩山 少林寺)’는 가 보지 못했지만, 영화에서 자주 봤다. 중국 5대 명산 중의 하나인 숭산은 해발 1512m에 불과하지만 암석과 경관이 빼어나 깊은 인상을 준단다. 3년 전 갔던 서안의 화산과 비교 될 수 있을 것 같다. 화산도 무술의 성지로 이름이 높기 때문이다. 중국 선종의 근원이자 쿵푸의 발상지로도 유명한 소림사는 지금까지도 무협 정신이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곳이다. 무협이 이제는 사라졌는가? 아니면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가도 궁금하다.
황하 중하류에 위치한 허난성(河南省)은 기원전 21세기부터 20여 왕조가 도읍지로 삼은 곳으로, 중국 8대 도시 중 네 곳이 여기 있다. 낙양·개봉·안양·정주가 그곳이다. 숭산 북쪽에 있는 소림사는 북위 효문제가 소승불교를 전파한 인도의 고승 발타(跋陀)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효문제는 3살에 황위에 올라 19살에 죽은 황제다. 당나라 때 소림사 곤승(棍僧) 열세 명이 당태종의 목숨을 구하면서 호국불교의 대명사가 되고, 청나라 때는 강희·옹정·건륭황제의 총애를 받아 편액과 시사(詩詞)를 하사받으면서 더욱 번성했다.
소림사 건립 30년 후에 달마대사가 여기서 9년 동안 벽면 수행을 하고 있을 때 신광이란 스님이 가르침을 구했다. 많은 구법승들이 제자로 받아 달라고 간청했지만, 어느 누구도 응락하지 않았던 달마는 신광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신광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곧 서 있다가 어느 눈 오는 날 자신의 왼팔을 잘랐다. 이에 달마대사가 물었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더냐?”“저에게 감로수와 같은 문을 열어서 널리 중생을 구제하도록 해주십시오”이때서야 방으로 들어오게 하고 도를 전하고 혜가(慧可)라는 법명을 주어 선종의 대를 잇게 했다고 한다.
소림사 서쪽 250m 떨어진 곳에는 당나라 때부터 청나라 때까지 쌓은 석탑 230여 개가 세워져 있는데, 각기 다른 모양과 형태와 탑에 적힌 명문도 풍부해 중국 불교사, 고대 건축, 필법, 조각 등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거의 전탑 형식인 탑은 역대 고승들의 사리탑으로써 덕망이 높을수록 층수와 높다고 한다. 소림사를 배경으로 한 무협소설은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으로 꾸준히 등장하는데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소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악인을 응징하고 정의를 대표하는 정통 무협의 상징, 무협 영화의 단골 소재다. 소림사는 지속적으로 무술인을 양성하고 대중에게 그들의 위용을 널리 알리는 작업을 활발히 계속하고 있다. 여전히 무협의 산실이자 무협 정신을 증명하는 존재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 김명신 한양대 교수, 숭산 소림사 -
인도에도 그리스에도 석굴이 있지만, 중국만큼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중국에는 3대 석굴이 있는데 둔황의 막고굴, 다퉁 운강석굴 그리고 용문석굴이 그것이다. 용문은 시안에서 동쪽으로 370㎞ 떨어진 뤄양(洛陽)에 있으며 뤄양은 옛날에는 몰라도 지금은 중국 10대 도시에도 들지 못하는 인구 700만의 보통 도시다. 역사적으로는 『삼국지』에서 동탁이 불태운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안과 더불어 고도다. 이수(伊水)를 사이에 두고 양쪽 절벽에 2000여 개의 동굴이 있고, 내부에는 10만여 개의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어 마치 어떤 욕망을 투영하는 것 같다. 이곳에 처음 불상을 조성했던 황제는 북위의 효문제지만 이곳 불상군을 대표하는 ‘노사나대불’은 당나라 시대 측천무후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천자문』에 ‘배망면락(背邙面洛)’이란 말이 있는데 ‘망산을 뒤에 두고 낙수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이는 뤄양의 입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일찍이 풍수지리가 빼어난 망산은 주나라 때부터 제왕들의 릉이 조성돼 진나라 재상 여불위, 시성 두보 등 수많은 명사들이 묻힌 곳이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살아서는 쑤저우와 항저우에서 죽어서는 망산에서’이라고 하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살아 진천 죽어 용인’처럼 쓰이고 있는 모양이다. 사람이 죽어 상여를 메울 때 ‘어서 가자 북망산천’하는 곳이 바로 여기다. 아무튼 뤄양에 갔다 용문석굴을 보지 않고 온다면 헛걸음 한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일지 모른다. 중국의 이들 3대 석굴은 2000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데, 북위의 효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중국 역사에서 유일한 여제 측천무후는 여기에다 왜 이런 석굴을 새기게 했을까? 그녀의 야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권력을 꿈꾸었던 무후에게 유교세력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자 새로운 지지 세력이 필요한 그녀는 상대적으로 여성에게 우호적인 불교에 힘을 실어주고 후원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이곳 봉선사 기록에 따르면 ‘무후가 지분전 2만 관을 내놓았다’고 한 것인데 화장품 값으로 2만 관의 개인 돈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또 봉선사가 완공되자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경축행사에 참여했을 정도로 적극적인 후원자였다. 봉선사의 중심이자 용문석굴을 대표하는 노사나대불의 얼굴이 무측무후의 얼굴을 본떴다는 전설까지 내려오기도 한다.
효문제와 측천무후와 함께 했던 뤄양의 영화는 이후 송나라가 뤄양에서 먼 개봉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점점 역사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되었지만, 석굴이 오늘날까지 쇠락하지 않고 남은 데는 석회암 불상에 빗물이 직접 닿지 않게 물길을 만들어 쇠락 속에서도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권력자들과 수많은 불자들의 욕망과 기원이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 전주현 이화여대 강사, 석굴에 새긴 욕망 -
세계인들이 가장 여행 가고 싶어 하는 곳이 미국에 있는 ‘그랜드 캐년’이라고 하지만, 중국 시안도 그에 못지 않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자연과 인공이라는 차이가 있겠으나 아직 발굴되지 않은 진시황릉은 차치하고라도 사후에 자신을 호위하게 한 거대한 ‘병마용갱’만으로도 그저 감탄이 나온다. 시안은 주나라부터 진(秦), 서한, 진(晉), 신, 동한, 서진, 전조, 전진, 후진, 서위, 북주, 수, 당까지 무려 13개 왕조의 수도였다. 3000년이나 된 고도 시안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1974년 병마용이 발견되면서부터다. 진시황 지하궁전은 여전히 발굴 중이지만, 외곽의 규모가 대략 56.25㎢로써 둘러보려면 며칠씩이나 걸리는 베이징의 자금성과 막 먹는다. 지하궁전에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규모도 짐작이 안 될 정도다. 황릉은 시안에서 떨어진 함양에 있던 실제 궁전을 복제한 것으로 봉분 아래에는 내성과 외성을 쌓고 내성에는 황제의 관을 모셨고 주위에는 관리들의 진흙 인형이 묻혀 있고, 외성에는 말들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들 중간에는 각종 동물과 악사들의 인형이 묻혀 있다고 한다. 진나라 당시 사람들은 사후 세계가 현세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으므로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진시황(기원전259∼기원전210)은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런 거대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했을까 궁금하다. 재상인 여불위 첩의 아들이라는 설과 진나라 장양왕의 열네 번째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장양왕이 죽고 열세 살 나이에 보위에 올랐으나 여러 감시 속에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스스로 통치권을 갖게 되자 가장 먼저 한 일이 가신과 측근들을 처단한 일이었다. 누구도 믿지 않았고 오로지 자신만 믿었다. 싸움의 시대라는 전국시대 말 진나라가 다른 여섯 나라를 병합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진나라는 융이라는 유목계통으로 말을 사육하는 기술이 뛰어났다. 중원의 세련된 문화를 흡수했지만 자존심 높은 화하(華夏) 제국들은 진나라가 자신들과 동등한 나라로 인정하지 않았다. 사례로 기원전 632년 여섯 나라가 ‘성복의 전투’를 끝내고 회합을 가졌는데 진나라는 여기에 초대받지 못했다. 융적(戎狄)이라며 따돌린 것이다. 그러나 진시황은 이에 굴하지 않고 초나라를 시작으로 한·조·위·연·제나라를 차례로 병합해 기원전 221년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제국을 세웠다.
비정통에 야만 혈통에 안하무인이던 진시황의 개혁은 거침이 없었다. 호칭부터 어떻게 다른 제후들보다 높게 격상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황제라는 이름 고안했다. 화하 최고의 조상인 삼황에서 皇을, 하늘신 천제의 帝를 결합한 것이 皇帝다. 거기다가 처음 시작한다는 의미를 붙였으며, 주나라 때부터 시행되어온 봉건제를 과감히 떨치고 군현제를 시행했는데 이는 제왕이 파견한 제후가 지역을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에 의해 운영되는 체제였다. 공자가 그토록 따르고자 했던 주나라 제도를 일시에 바꾼 것이었다. 그렇게 한데는 순자의 제자기도 한 이사(李斯)를 승상에 앉히고, 같은 스승의 제자였지만 이사에게 목숨을 잃은 한비자(韓非子)가 주장한 법가를 따른 때문이었다.
전국 7웅을 통합해 최초의 통일제국을 이루자 진시황은 수도인 함양을 우주와 제국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피정복국 유력 가문 12만호를 복제해 함양에 이주시켰다. 이는 함양이야말로 제국의 심장임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진나라 심장부 안에 정복민들을 두고 철저히 감시하는 의도도 들어 있었다. 함양은 우주와 제국의 축소판이었다. 당시의 중국은 왕이 보위에 오르면 자신의 능묘건설을 계획해야 했는데 이는 하나의 예법이었다. 그래서 진시황은 함양에서 떨어진 여산(驪山), 시안 동쪽 20㎞ 지점에 자신의 능묘를 만들었다. 당나라 때는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속삭이던 화청궁이 있는 곳이다.
진시황은 살아생전에 72만 명을 징집해 30년 넘게 걸려 자신의 능묘를 건설했다. 민가(民歌)에 보면 ‘황릉을 짓는데 돌 하나가 집채만 해 이를 옮기는데 위수가 막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완성된 능을 보지 못하고 마흔아홉에 죽었다. 진이세(秦二世) 호해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때는 착공한지 38년 만이었다. 원래 능 높이가 115.5m였으나 2000년 동안의 풍화로 지금은 76m로 낮아졌다. 모두 발굴되지 않았지만 언젠가 이집트 피라미드를 넘어서 세계 최고의 규모가 될지도 모른다.
그토록 불사를 꿈꾸었던 진시황이 죽었다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일찍이 중국의 도교는 수련을 통해 죽음을 피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신의 영역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방사(方士-도교 술수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사람) 였던 서불(徐市) 등은 수은과 황을 합성한 단약을 만들어 왕과 귀족에게 바치거나 팔았다. 불로장생을 믿었던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고 인류역사에서 종교적 믿음이 이성적 과학을 넘어섰던 것을 보면 진시황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중국사회과학원의 고고학자들이 진시황릉 바닥에 수은으로 된 물이 흘렀다는 것을 발견했었고, 황릉에는 평균치의 여덟 배가 넘는 수은이 묻혀 있다고 한다. 수은의 불변성을 믿었던 진시황은 지하궁전에 수은으로 된 강과 바다를 만들고 자신도 수은처럼 영원불변할 것을 꿈꾸고 믿었는지 모른다. 비록 제국은 15년 만에 막을 내렸지만 그는 영원한 인물이 되었고, 아마도 지하궁전을 파보면 진시황은 살아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그래서 나오는 모양이다. - 송정화 이화여대 교수, 수은이 흐르는 지하궁전 -
‘비단길’은 ‘실크로드’라는 아름다울 이름을 갖고 있지만, 막연한 추측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실크로드 유적지 중에서 딱 한 군데를 가려면 둔황으로 가야한다”고 한 이 말은 독일 학자 ‘발레리 한센’이 한 말이다. 그녀가 이렇게 말한 데는 오아시스 주변에 풍요롭게 우거진 녹음 속의 절벽에 조성된 막고굴이 둔황의 풍경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둔황은 중국의 맨 서쪽 간쑤성(甘肅省)에 위치 하는데, 서역으로 통하는 곳으로 한나라 말 역사가 반고(班固)는 동쪽으로 옥문관과 양관을 접하고, 서쪽으로 지금의 파미르고원까지를 경계로 한다고 기록했다. 둔황에서 두 관문을 넘으면 돌아올 수 없는 사막 타클라마칸으로 통한다. 당대의 시인 왕유(王維)는 서역으로 떠나는 벗에게 “그대에게 술 한 잔 다시 권하노니 서쪽 양관을 나가면 친구가 없다네”라며 친구와의 이별을 안타까워했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오지 절벽에 동굴을 파고 부처를 모시게 된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다. 16국 시대인 366년 전진의 승려 낙준(樂僔)이 이곳을 지나게 되고, 잘라놓은 듯한 언덕 위에서 보면 신기루처럼 삼위산 봉우리가 보이지만, 언덕 앞으로 사막과 어울리지 않는 하천이 흐른다. 이 이상하고 기이한 경치에 빠져 낙준은 그곳에 석굴을 파고 수행에 들어갔다. ‘막고굴기(莫高窟記)’에 따르면 낙준스님은 여기서 금빛 부처를 맞이한 후 굴을 뚫고 불상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로부터 시작해 원나라 때까지 1000여 년 동안 끊임없이 조성된 것이 둔황 막고굴이다. 막고굴은 석굴 하나하나가 사원이다. 700여 개의 석굴 중 불상을 모신 석굴은 492개로 지금은 보호를 위해 입구를 막고 있지만, 20세기 초까지 사람이 들어가 소원을 빌고 명상을 하고 벽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막고굴은 단순히 기도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다. 1900년 발견된 장경동(藏經洞)에서 무려 6만 건이 넘는 자료가 무더기로 나왔다. 그것은 불경뿐 아니라 그림, 여행기, 계약서, 기도문, 시, 소설, 일상 메모, 아이들 연습장까지 분류하기도 힘들 정도로 다양한 문서들이었다. 한문 외에도 티베트어, 위구르어, 소그드어 등으로 제작된 것인데 제작연대도 당대가 대부분이지만 전체적으로 4세기 말부터 11세기 초까지 900년을 숨어 있었던 것이다. 입구가 막혀 있어서 비밀스럽게 보존된 것인데, 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한다.
문제는 신라 승려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여기서 나왔음에도 왜 프랑스에 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1907년 무렵 영국과 벨기에, 프랑스 탐험가들이 수천 건의 자료를 본국으로 보냈는데, 프랑스의 ‘폴 벨리오’는 약 6000건의 자료를 현지에서 탐독하고는 귀중한 것만 본국으로 보냈다. 왕오천축국전도 있었다. 그후 19세기과 말 20세기 초 일본인 탐험가 ‘오타니’도 현지에서 많은 자료를 구매해 갔는데 그것도 1000건에 이른다고 한다.
가장 많은 자료를 가져간 나라는 러시아지만, 이들이 가져간 것을 원래 주인인 중국에 돌려줄 것 같지는 않고, 돌려달라고 하더라고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무단반출했으니 돌려준다고 해도 유물 처리 문제가 불거질 것이 분명하다. 전혀 관리되지 않던 자료를 그대로 두었다면 대부분 유실되거나 훼손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에도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라며 문헌 유출 당사자인 영국도서관은 1994년 IDP(국제둔황 프로젝트)를 설립하고 둔황과 실크로드 관련 자료를 고화질 인터넷으로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오랜 세월 닫혀 있던 사막의 도서관이 온라인에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된 것이다. - 정광훈 한국외대 교수, 기약없는 구도의 길 둔황 -
몽골 유목민들이 계절에 따라 짓고 사는 집을 ‘게르’라고 하고 중국 남부 푸젠성(福建省)에 흙담으로 집을 짓고 사는 객가족의 집을 ‘토루’라고 한다. 토루에 사는 사람들을 민(閩)이라고 하는데, 문 앞에 벌레가 서성이는 글자로 남만의 오랭캐라는 뜻이다. 제갈량이 일곱 번 붙잡고도 놓아준 맹획이 대표적인 인물인데 객가족은 중원을 떠나 오랑캐 땅으로 이주한 한족들이지만, 그들은 영원한 손님이었고 이방인이었다. 대개는 서진 시기에 난을 피해 남쪽으로 간 것이지만, 남송 시기에 피난 온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푸젠의 서쪽은 무이산맥이 솟아 있고 동쪽과 남쪽은 바다에 접해 90% 이상이 험준한 산악지대여서 일찍이 해상무역이 발달한 곳이다.
피난을 와 살면서 이들은 지형적 영향에 따라 유토피아를 품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곳으로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황씨 성을 가진 집안의 장자가 논에서 일하고 있는데, 마침 황새가 우렁이를 잡아 먹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는 황새를 쫓아 버리고 우렁이를 살려주었다. 그날 저녁 일을 마치고 집에 와 보니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고,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똑같은 일어 벌어졌다. 4일째 되는 날 자신을 위해 요리해 상을 차려주는 이가 궁금했던 황씨는 어느 날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와 보고는 놀랐는데 선녀 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집 안에 있었다. 우렁이의 화신이었던 그녀와 혼인한 둘은 토루를 짓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후손들이 지은 토루가 전라갱촌 ‘보운루’라고 한다. - 이유라 인하대 교수, 이민자의 유토피아 푸젠 토루 -
견우·직녀가 만나는 날을 칠석날이라고 하여 여러 행사를 벌이지만, 중국에서는 이날을‘걸교절(乞巧節)’이라고 한다. 광동성(廣東省)의 주강(珠江)마을에서는 이날을 여자들이 길에서 배에서 즐기는데 공통적으로 곱게 땋은 머리를 틀어 올리고, 머리 위에는 솜씨껏 만든 나무빗이 꽂혀 있다고 하는데, 이 여인들을 이곳에서는 ‘자소녀(自梳女)’라고 부른다. 걸교절이란 여인들이 베 짜는 솜씨를 겨루는 날이라는 뜻이지만, 자소녀들이 마을 어귀 사당에 모여 즐겁게 노래 부르며 하루를 보낸다고 하는 것으로 여인들이 폼을 내고 그냥 즐기기만 하는 풍속이 아니라고 한다. 이들은 현대화된 도시 저편, 머지않은 과거에 비혼(非婚)을 선언한 여인들이라고 하니 바로 그들을 자소녀라고 부른단다.
중원의 역사에서 남만의 땅이었던 광동성은 진나라 이후에 한족이 이주하면서 다수의 소수민족과 소수의 한족이 어우러져 사는 일종의 다문화 지역이었다. 중국 남쪽 끄트머리 땅이라 이곳이 중국 역사에 등장한 것은 우리나라의 제주나 남해처럼 지금의 구이저우(貴州)와 윈난(雲南)일대에 해당하는 검남도(劍南道)와 더불어 당나라 시대까지만 해도 가장 열악한 유배지에 해당한 곳이었다. 광동이 알려진 것은 비교적 후대 일로 16세기 서양인들이 중국으로 진출하면서 교두보로 삼으면서부터로 마찰도 적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중국에서 가장 먼저 서양인들을 접함으로써 그들의 종교와 문물을 비롯한 생활양식 및 문화 전반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이 되었다.
광동의 주강 여인들은 혼자 살기를 작정하고 자소녀가 된 것이라는데 송나라 때 이런 노래가 전한다.
‘남의 집 며느리 참으로 하기 어려워, 일찍 일어나 문안 인사하고서 눈물도 마르기 전에 부엌으로 들어가네. 부엌에 호박이 있어 시부모께 물어니, 시아버지는 삶으라 하고 시어머니는 찌라고 하네. 삶아도 싫다. 쪄도 싫다. 다 맘에 안 드는지 머리를 지어 박으며 한바탕 야단을 치시네. 사흘 아침이면 후들겨 패느라 세 개의 몽둥이가 부서지고 나흘 아침이면 꿇어앉느라 아홉 벌 치마가 찢어지네!’
구박의 설움으로 점철된 결혼생활 어려서부터 노래로서 불러온 주강의 여인들은 결혼으로 인해 시련과 압박을 받느니 차라리 독신을 선택하고 스스로 머리를 땋아 올렸던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결혼만큼이나 혹독한 통과의례를 치러야 했는데 목욕제계하고 보살 앞에 나가 종신토록 시집가지 않겠다는 ‘불혼 서약’을 해야 했고, 모든 의식을 마치면 새옷으로 갈아입고 마을 사람들을 불러 피로연을 열었다. 딸자식이 자소녀가 되겠다고 할 때 부모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이것도 저것도 강요할 수는 없었을 것 같은데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따로 집단생활을 하거나 부모와 같이 살면서 일하고 생활했다고 한다. 한때는 사후의 제사가 문제가 되기도 했으나 지금은 해소되고 있다고 한다. - 이주해 이화여대 연구교수, 광동 주강의 자소녀 이야기 -
〈오랭캐의 역사〉에서 ‘천하 밖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보자. 몽골은 세계를 제패했던 오랑캐로 화하(華夏)까지 지배했다. 1206년 40대의 태무진(1162∼1227)은 ‘칭기즈칸’으로 즉위하면서 대몽골국을 완성시킨다. 이때 몽골 인구를 30만 혹은 70만 명으로 추정하지만, 그로부터 21년 후에는 금나라를 황하 이남으로 내쫓고 서아시아의 이슬람권을 손에 넣고, 유럽 일대까지 휩쓸었다. 1279년 남송을 무너뜨림으로써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지배했는데, 작은 인구 집단이 몇십 년 사이에 유례(類例)가 없는 거대한 제국을 일으킨 일이 가능한 일일까? 역사학자들은 이에 대한 인과관계를 설명하지 못한다. 유례란? 이전 사례와 비교하여 나오는 것인데 애초 유례가 없는 사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인류문명의 발생 자체가 하나의 유례없는 사건이다. 생태계의 한 틈새에 머물러 있던 인류가 어느 날 문명을 발생시키고 1만 년이 지나면서 그 개체 수가 수십억이 되어 지구 표면을 뒤덮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몽골제국의 특성은 여러 문명권을 관통하는 통치체제를 세웠다는 데 있다. 이전의 제국들은 하나의 문명권을 관리하고 주변부를 얼마간 확장하는 역할을 넘어서는 일밖에 하지 못했다. 그러나 몽골제국에서 일어난 일들은 수백 년 후, 근대 세계에서 일어난 ‘세계화’ 현상에서 다시 나타나게 된다. 19세기 작은 섬나라 하나가 세계를 호령한 일, 신대륙의 식민지였으나 20세기 후반 그 나라가 세계를 통제한 일, 소수 자본가 집단이 대다수 인류의 생활조건을 오랫동안 좌우해 오고 있는 일, 모두 몽골제국 이전에는 없었던 현상들이다. 농경 문명의 발생 이래 지속되어온 하나의 정상 상태가 해소된 시점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새로운 단계가 몽골제국을 계기로 가시화된 것이다.
20세기가 시작할 때쯤은 10여 개 국민국가의 향배에 따라 국제정세가 좌우되던 상황이었지만 국가 간 동맹과 연합은 임의적인 것으로 구속력도 지속성도 없었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강고한 진영이 구축되고 국가의 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개별 국민국가 향배가 전처럼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한 지역의 여러 국가를 묶어서 고찰하는 ‘지역사’의 비중이 늘어나게 되었고, 이것이 ‘역사학’으로 발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역사는 지역학의 발전에 자극받아 일어났다. 인류학이 그 중심에 있고 그것이 역할을 맡게 된 것인데, 인류학은 과학성과 법칙성을 중시하나 20세기 중엽 이후에는 그런 경향이 약화 되었다. “인류학이 인문학 중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사회과학 중에서 가장 인문학적 분야”라고 한 ‘에릭 울프’(1923∼1999)의 말은 그래서 유용하다.
‘흉노와 돌궐, 거란과 여진이라는 집단을 아무리 살펴봐도 몽골제국의 흥기를 설명할 틈을 찾을 수는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유례가 없는’것이 몽골제국의 특성이어서 ‘중세와 근대의 분기점’을 몽골제국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하기도 한다. 유목민의 역할을 적게 보는 풍조는 정착민의 오래된 편견이고 초원에 사는 사람들을 야만인으로 혹은 문명의 파괴자로 보거나 기껏 좋게 봐도 자연인 혹은 고귀한 미개인 정도로 보는 편견이 있다. 하지만 아틸라와 칭기즈칸과 티무르의 추종자들이 각자의 우주관과 미적기준과 도덕적·경제적 가치체계를 갖춘 복잡한 문화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 같다. 초원에 사는 사람들은 여러 문명권 사이에 이런저런 요소들을 아무 생각 없이 옮겨다 주는 택배회사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이슬람의 탄생이라는 이슬람 혁명 이후 세계의 지각변동은 13세기 몽골제국이 이루었다. 동아시아에는 중국, 남아시아에는 힌두, 서아시아에서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반도까지 확장한 이슬람, 기독교 문명권이었다면 몽골제국은 유럽의 문명권을 상당 부분 정복해서 이룩한 ‘다문명 제국’으로 ‘문명권 통합’을 이루었다. 몽골제국이 유라시아 대부분과 대항해 시대와 이후에 나타난 세계사 전개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는 단순히 농경지대와 정주문화를 중시하고 유목의 세계를 소홀하게 여기는 편견과 과거 전통적 관점을 타파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객관적 시각을 지키려고 애쓰는 학자들조차도 유럽사를 보는 틀에 모든 지역의 역사를 끼워 맞추려는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근대’를 유럽의 발명품처럼 여기고 모든 인류가 새로운 시대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유럽의 특성을 본받아야 한다는 근대화 바람이 20세기를 휩쓴 것만 봐도 그렇다.
서기 105년에 중국에서 발명되고 751년 탈라스 전투를 계기로 이슬람 세계에 전파되어 12세기 이후에 유럽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진 종이, 종이처럼 모방하기 쉬운 발명품이 이웃 문명권으로 전파되는데 수백 년이란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중국에서 종이 사용이 크게 확장된 것은 7세기 당나라 때로 이때 당나라가 상대한 것은 이슬람권이 아니라 유목민이었다. 유목민에게는 종이가 필요 없었고, 식물성 재료도 구하기 어려워 당나라에서 유입되는 종이를 사용했을 뿐, 제지술을 도입하지 않았다. ‘달라스 전투’는 이슬람 제국과 당나라가 최초의 정면 대결을 벌인 전쟁으로 ‘아바스 제국’은 당나라 황제에게 선물로 받는 종이로 만족할 수는 없었고 큰 잠재적 수요를 갖고 있었으므로 독자적으로 발전시키고 재료와 기술력도 가져갔다.
제지술이 늦게까지 유럽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종이의 수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종이는 다양한 용도를 가졌지만, 기본적으로 ‘기록’에 쓰인다. 돌, 끈, 천, 점토판, 파피루스, 죽간, 양피지 등 정보의 축적과 전달에 사용된 다른 어떤 재료도 따를 수 없는 정보 매체로서 큰 역할을 한다. 수많은 정보 처리가 가능했던 종이와 인쇄술이지만, 8∼12세기 중국과 이슬람권이 제지술을 공유하고, 인쇄술을 발전시키는 동안 유럽은 아직 제지술을 배우기 전으로, 중국과 이슬람권과는 대등한 수준의 문명을 갖지 못하고 외곽에 머물러 있었다. 13세기 몽골의 세계정복, 19세기 유럽의 세계정복, 이 둘 사이에는 어떤 상통하는 점이 있다.
몽골이 세계를 정복하고 중국과 이슬람권 두 문명권의 영향을 받으며 흥기(興起)할 때, 이슬람은 7∼8세기 팽창을 통하여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등 고대 문명권을 통합해 대서양 연안으로부터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했고, 중국과 함께 양대 문명권을 형성했다. 그러나 751년 탈라스 전투 이후 두 세력이 직접 충돌이 없었다는 것은 중화제국의 후퇴 때문이었다. ‘안녹산의 난’(755)으로 당나라의 대외정책이 약화 되고, 5대10국 혼란기를 수습하고 송나라가 일어난 뒤에는 서북방은 요·금, 그리고 서하에게 가로막혔다. 교류의 잠재적 수요가 커지는 데 비해 교류의 실현이 미흡한 상태가 오래 지속된 것이다.
1234년 금나라가 멸망하고 1276년 남송이 멸망하는 사이 몽골제국의 정복정책은 크게 바뀌었다. 오랑캐라며 타자화하던 한족사회와 마찬가지로 농경사회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한 유목민은 중국을 약탈의 대상으로만 보았지만, 접촉이 많아지고 넓어지면서 농경민을 백성으로 다스리려는 입장으로 변했다. 1271년 원(元)왕조를 선포하고 침략이 아니라 천하통일 사업을 하기에 이르러 몽골은 초원을 벗어나 북경을 대도(大都)라 하여 수도까지 옮겨 문명권 경영에 나선 것이다.
초원제국에서 문명권 경영에 나선 몽골은 중국문명과 페르시아 문명의 통합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쿠빌라이 시대 ‘볼라드’라는 인물이 관리자 역할을 맡았는데, 그의 아버지는 칭기즈칸 친위대의 간부로 칭기즈칸의 아내 보르테의 요리사였고, 볼라드는 쿠빌라이 자제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대칸 일족의 그림자 같은 측근으로 관직에 나아가 일반 관리들과 달리 ‘대칸’의 분신과 같은 역할을 맡은 것인데, 한인들이 지방을 관리하는 전문가였다면 볼라드는 관리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다가 1280년 중서성 승상이 된 뒤 40대 후반 나이에 일칸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근 30년 만에 돌아왔다. 그는 초원지대를 포괄하는 거대한 세계관을 제시했는데, 그의 경험과 식견이 뒷받침되었을 것이다. 쿠빌라이는 자신의 최측근이면서 왕조의 설계자인 볼라드를 사신 명목으로 보내면서 왕조를 안정시키는 길을 돕게 한 것이다.
일칸국은 원나라 조공국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나라였고, 그다음이 고려였다. 고려에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현지 사무소, 省의 기원)을 설치했는데, 형식적이던 정동행성이 부각된 것은 1299년(충렬왕25) 한희유(韓希愈-?~1306) 반란사건을 계기로 평장정사(平章政事)에 활리길사(濶里吉思)를 보내 정동행성을 활성화하고 두 가지 정책을 추진했다. 하나는 고위관리의 처벌을 원 조정에 보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비제도를 원나라 기준에 맞춤으로써 지나친 학대를 막는 것이었다. 고려 귀족층은 고려 습속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반대해 결국 1년 만에 정동행성의 역할은 축소되었지만, 부마국이던 고려에 대해서는 보편적 기준을 권하되 강압적 수단은 가급적 피한 것이 원나라의 고려에 대한 원칙이었다.
책 제목이 〈오랭캐의 역사〉로 중국에서 본 오랑캐의 역사를 기술한 것인 줄 알았는데, 대부분 몽골제국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몽골이 화하를 통합하면서 중국의 역대 왕조 중 가장 강한 기세를 보였다. 대칸들은 ‘더 큰 천하’를 만들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고 경제·문화·학술 등에서 서방, 특히 일칸국과의 밀접한 교류를 통해 중국문명의 폭을 크게 넓혔고 성과도 거두었다. 하지만 원의 수명은 길지 못했다. 1279년 남송을 정복한 후 90년 만에 중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원나라의 중국 통치는 그 앞의 여진과는 아주 달랐다. 여진은 행정기술을 가진 중국인을 채용했지만, 몽골은 애초에 중국인을 받아들이지 않고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온 이방인을 관리로 채용했다. 중국의 지식인 관리와 문화적 자산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다른 길을 택했던 것이다.
색목인(色目人-외국인)의 역할은 원나라 체제의 성격을 말해주는 중요지표가 된다. 중국을 통치하는 왕조로 유라시아 대륙을 휩쓴 몽골제국의 대칸들은 중국을 통치 영역의 한 부분으로 본 것이였다. 1290년 원나라 조사에 따르면 몽골인 100만, 색목인 100만 한인(북중국) 1,000만, 남인(남중국) 6,000만으로, 몽골인과 색목인은 전체 인구의 1.4%에 불과하지만, 모든 관직의 30%를 점하였고 고위직은 더 높았다. 몽골인은 종족의 혈통이나 종교적 기준으로 차별하는 이념적 원리를 보이지 않고 실용적 기준만을 보았던 것이다.
대칸들은 큰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제국 건설과 통합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는데, 쿠빌라이는 말년까지 그것을 향한 의지를 지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280년 해양 방면의 연이은 군사적 실패(자바, 일본정벌 등), 그로 인한 재정적 난관 앞에 좌절을 맛보았다. 열린 시스템을 지향했던 몽골제국 회복의 꿈은 닫힌 시스템을 지켜내는 중화제국 경영의 과제에 집중하지 못한 것이 원나라가 단명했던 큰 이유기도 하다. 명나라는 원나라 천하를 넘겨받으면서 열린 시스템 꿈과 닫힌 시스템의 과제까지 함께 이어받았다. 영락제(永樂帝, 1402∼1424재위) 시대서 대항해 시대가 거창하게 펼쳐지다 닫아버린 해금(海禁)정책은 원나라로부터 넘겨받은 유산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간략히 영락제에 대해 보고 줄일까 한다. 그것은 처음에 예견한 대로 두 권의 책을 다 읽지 못하고 반납해야 하기 때문이다.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는 태조 홍무제(洪武帝-주원장, 1368∼1398재위)의 아들로 홍무제가 30년 전 개국하고 통치한 뒤 아들 윤문(允炆)에게 황위를 넘겼으나, 조카로부터 황위를 찬탈했다. 연왕에 책봉되어 있었던 것을 경험으로 과감히 남경을 버리고 북경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영락제 때 정화 함대는 해로 확보라는 100년 전 쿠빌라이의 꿈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정화 함대보다 100여 년 후 세계 일주에 성공한 마젤란의 항해는 배 5척에 270명이 출항했다가 18명 만이 살아 돌아왔다. 그보다 100배 규모의 정화 함대는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405년 참파, 자바, 수마트라, 말리카, 실론을 거쳐 인도의 칼리크트를 거쳐 돌아왔고, 1407년에도, 1409년에도 황해를 계속했는데 이때는 군사행동도 있었다. 1413년에는 페르시아만 입구의 호르무즈에 이르렀으며, 이때는 이슬람 세계와 접촉도 있었다. 1417년 홍해 입구 아덴을 방문하고 동아프리카 해안까지 인도양 각지의 해류와 풍향을 파악했다. 제6차는 1421년 3월에서 이듬해 7월까지 비교적 짧은 항해기간이지만 동아프리카 해안까지 다녀온 것으로 보아 원할한 항해를 위한 조건이 모두 갖춰졌던 것이다. 그런데 정화 함대의 활동이 명나라에 어떤 이득을 가져왔을까? 함대가 당장 가져온 것은 기린과 사자 등 신기한 동물과 진주 등 진귀한 사치품이었다. 그것이 어떤 반대를 불러일으켰는지. 민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정화 함대에 대한 비판을 황제도 의식했을 것이고, 영락제의 뒤를 이은 46세의 인종은 즉위하면서 해상원정을 중단하고 남경으로 돌아갈 것을 선포했다. 중요한 정책을 하루아침에 바꾼 데에는 얼마나 많은 반대가 강력했는지 짐작케 해준다. 인종의 뒤를 이은 선종은 북경을 수도로 확정하고 정화 함대를 다시 보내겠다고 해 1430년 함대가 남경을 출항했지만, 정화는 도중에 죽었지만 의문은 남는다. 선종이 일찍 죽지 않았다면 함대 활동은 계속되었을까? 명나라의 대외정책은 해금정책으로 변했고 중국은 바다에서 멀어져 결국 해이(海夷)에게 집어삼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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