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무안 초당대 문현철 교수는 대중에겐 알려지지 않은 ‘그만의 법정 스님’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문 교수가 법정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고교 2학년 때인 1982년 12월 초였다. 시골 중학교에서 전교 1~2등을 하다가 광주에 올라와 떨어진 성적 때문에 말 못할 방황을 하고 있을 때 학교 상담교사가 법정 스님의 책 <산방한담>을 읽어보면 마음이 풀릴 것이라고 했다. 하룻밤 만에 <산방한담>을 읽은 지 일주일 후 평소 좋아하던 광주광역시 금남로1가에 있는 클래식음악감상실 베토벤에 들렀는데, 그곳에 꿈에도 그리던 법정 스님이 있었다.
바로크시대의 클래식음악을 좋아했던 법정 스님은 불일암에서 광주에 올라오면 그 감상실에서 지인들을 만나곤 했다. 그는 법정 스님 앞에 앉아 “군인도 되고 싶고, 교수도 되고 싶은데 뭐가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당돌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스님은 “‘무엇이 될 것이냐.’보다 ‘어떻게 살 것이냐.’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가톨릭 입문을 준비하고 있던 그는 다음해 3월 다니던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다. 그리고 바로 그날 교통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매다 1주일 만에 깨어났다. 5월 말 퇴원하자마자 조계산 불일암을 찾았다. 법정 스님은 텃밭에서 딴 채소를 다듬고 있었다. 싫은 것도 좋은 것도 별로 표현하는 법이 없고, 잔정을 보이지 않던 법정 스님은 그의 홀쭉해진 몸을 보고 한마디 했다. “다쳤어?” 그뿐이었다.
그는 스님에게 “하느님이 계시다면 나를 친 차를 붙잡아주지 않고 영세 받은 바로 그날 들이받게 내버려둘 수 있겠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법정 스님은 “천주님은 그런 만화 같은 일을 하는 분은 아니다.”라며 “이런 아픔을 통해 네가 더 성숙해져, 더 큰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문 교수는 “무소유 등에 대한 스님의 말씀은 허무주의가 아니라 늘 희망과 긍정을 일깨우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의 도움으로 살면서 조선대 법대 1학년 1학기를 겨우 마친 뒤 등록금을 마련 못해 학업을 포기할 지경에 있던 그가 불일암을 찾아갔을 때 스님은 불현듯 “등록금 고지서를 베토벤에 맡겨놓으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졸업 때까지 빠짐없이 등록금을 부쳐준 스님은 그가 추천한 가난한 친구 3명의 등록금도 졸업 때까지 도와주었다. 그러면서도 도움 받은 사실을 일절 함구토록 해 지금까지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그가 은근히 불교로 개종할 의사를 내비치자 빙그레 웃던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는 청국장을 좋아하고, 누구는 김치찌개를 좋아할 뿐이지만 천주님의 사랑이나 부처님의 자비는 풀어보면 한 보따리다. 그대로 있어라.” 덕분에 그는 지금까지 가톨릭 신앙을 지키면서 그를 스승으로 따를 수 있었다.
법정 스님은 불일암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오기 시작하자, 고향 땅과 많은 지인들이 있는 땅을 떠나 강원도 오지로 들어감으로써 둘의 만남은 이어지지 못했다. 문 교수도 “익숙한 것들을 뒤로한 ‘제2의 출가’ 정신을 존중해 스님을 찾지 않았지만, 스님은 내 마음의 산 이었다.”고 했다.
출처 : 한겨레 시문 <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