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사우스 케롤라이나 주립대) 약자가 USC인데,
흔히들 USC하면, 캘리포니아에 있는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를
떠올립니다. 인터넷에서도 usc 를 치면 이 학교가 나오지요. 현제 전반적인
학교 랭킹이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가 사우스 케롤라이나 주립대보다
더 높고, 웹사이트 주소인 usc를 이 학교가 먼저 등록하여 쓰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우스 케롤라이나 주립대는 1801년에 세워진 미국 주립대학의 효시로서
North Carolian 대학, Gerogia 대학과 함께 남북전쟁 이전 미국에서 가장 우수한
대학으로 그 명성을 자랑하였습니다. 그 당시 [Encyclopedia America]
의 편집인이며, [Civil Liberty and Self Government]의 저자이기도 한
Francis Lieber와 미국 최초로 은판사진(Daguerreotype) 을 생산한
화학자 William Eller 등 저명한 학자들이 교수로 재임하였습니다.
남북 전쟁 당시 USC는 남부연합군의 병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잠시
의 휴교(1877-1880)와 재정립의 시기를 겪은 후, 1906년 대학원 활성화
계획을 수립하여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1925년 William Davis
Melton 총장은 “교육은 소수층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다” 라는 교육
철학을 공표하며,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USC는 자유와 전문인 육성을
위한 학문의 전당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이러한 노력은 전세계에
불어 닥친 대공황으로 말미암아 수강등록의 감소와 교과과목의 축소라는
좌절과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USC는 다
시 활기를 찾기 시작하며, 20세기초 Melton총장의 약속을 1950년대에 와
서야 마침내 실행하게 됩니다.
대학원 교육의 활성화, 주요한 연구과제 수행, Campus의 확장과 현대화는
뛰어나 교수와 전세계로부터의 우수한 학생들을 매료하기에는 충분하
였습니다. 현재 23,000여명의 학생들이 Columbia campus에 등록되어 있으
며, 그 중 3분의 1이 대학원생이며 100여 개국에서 모여든 외국인 학생
은 3,000여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특히 1960~7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인
의 유학은 1980년대 이후 한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에 힘입어 그 수가 급
격히 증가하여 현재 학부와 대학원을 합하여 140여명에 달하고 있습니
다.
그리고 USC 한국인 가족으로 7명의 교수님과 3명의 교직원이 함께 하
고 있습니다. 한국의 USC동문들은 학계, 정계, 경제계, 국제기구, 정부기
관 등 각 분야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으며, 한국 사회의 발전에 공헌
하고 있습니다. (USC 한국 학생회 홈페이지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Richard T. Greener Images
While Searching the archives at Harvard University, a USC graduate student discovered 17 images of USC taken during the Reconstruction Era of the 1870s. The glass-plate negatives were shot by William Main Jr., a faculty member at Carolina and a colleague of Richard T. Greener, the college’s first African-American faculty member. Greener, who taught at Carolina from 1873 to 1877, was Harvard’s first African-American graduate. Greener later donated the images to the Boston university.







첫댓글 Just for your information...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립대가 설립되었던 1801년... 태평양 건너 우리나라에선... 그때는 조선이었지요, 천주교 신자들을 정부에서 박해했던 신유박해가 일어난 해입니다. 중국인 천주교 신부이자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를 비롯하여 만천 이승훈, 정약종(다산 정약용의 형), 여성 평신도 지도자인 강완숙 등이 사형당했고, 한때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던 정약용 등은 귀양보내져 박해 피해자는 수백 명에 달하는 사건이 우리나라에 있었던 것 잘 아실 줄 압니다. 그 외에 그해 우리나라에선 공노비가 완전히 해방되는 등, 이제 막 서양 종교와 제도, 인권등에 눈을 떠가고 있던 시절이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