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알의 단을 헐고
(삿 6: 25-27)
하나님은 새 일을 하시기 원하신다.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시고자하시는 분이시다(사 43: 19-20). 사람들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기를 원하신다. 메마른 심령에 새로운 은혜를 부으시기 원하신다. 왜 새 일을 하시기 원하시는가? 우리에게 새로운 축복을 부어주시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새로운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는 새 일이 필요하다. 옛것을 가지고는 새것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새로운 축복을 부어주시기 원하시는가? 하나님은 축복의 샘이시기 때문이다. 마치 아기 엄마가 젖을 흘려보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축복을 흘려보내 우리를 새로운 축복으로 가득 채우고자 하신다. 하나님은 복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축복의 하나님이심을 알기 원하신다는 이야기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하나님은 새로운 포도주 부대를 짓기 원하신다. 우리를 새로운 부대로 만들고자 하신다. 새로운 포도주를 주시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새로운 포도주는 새로운 부대에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마 9: 17). 그런데 문제는 새로운 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변화가 가져오는 번거로움과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부대가 되기를 거부하는 셈이다. 새로운 포도주를 담으려면 새로운 부대가 되어야 한다. 새것이 되려면 옛것을 버려야 한다.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갈망해야한다. 하나님은 새것을 갈망하는 자에게 새것을 주시기 때문이다.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여기 새것을 갈망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기드온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미디안에게 갈취당하는 현실 상황에 만족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힘겹게 농사한 것을 추수 때가 되면 미디안이 와서 수탈해 가버렸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미약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기드온도 수탈당하지 않으려고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해야 할 정도였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풍성함을 가지고 바알과 아세라에게 달려가기 바빴던 것이다. 우상숭배는 반드시 징계를 불러오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7년 동안 미디안 손에 붙이시므로 징계하신다. 그 압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르짖으며 다시 하나님을 찾게 된다. 고난이 유익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시 119: 71).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죄악을 버리게 한다.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만든다. 고난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든다. 마치 비바람이 불고 폭풍이 불면 양들이 목자 곁으로 모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평소에는 각기 제 길로 갔다가도 비바람이 불고 폭풍우가 불면 목자 곁으로 모여든다. 그것이 살 길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 그들의 죄가 무엇인가를 확인시켜주신다. 죄에 대한 명백한 인식이 없이는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히 불편한 상황을 모면하고자 하는 것은 회개의 마음이 아니다. 진실로 죄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 돌이켜야 회개가 되기 때문이다. 회개해야 하나님은 용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았음에도 용서를 한다면 그 죄를 용인하는 꼴이 된다.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보내 이스라엘백성들이 죄를 지적한다. 하나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선지자를 보내 죄악을 질책하는 것은 여전히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계신다는 하나님 마음의 표현이다. 그들이 돌이켜 죄사함을 받고 축복을 누리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도 심판 받기를 원하지 않고 아무도 멸망받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신다(벧후 3: 9).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할 사람을 찾기 시작하신다. 그 때 발견된 사람이 바로 기드온이다.
기드온을 찾아오신 하나님
하나님은 기드온을 찾아오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찾으신다. 찾아 발견하면 기꺼이 찾아오신다. 찾아오신 하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 동참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은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기드온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갈망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신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이 하나님이 거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지성소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환영하는 곳에 오시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기뻐하는 곳에 오시기를 원하신다. 그런 자리가 하나님이 거하실 보좌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무 곳에나 오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리에 오시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가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잠 8: 17).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그곳에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도 그 때문이다(마 18: 20).
하나님은 기드온을 찾아오셔서 새로운 도전을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을 미디안의 손에서 건져내라는 것이다. 기드온은 찾아오신 하나님을 향하여 불만을 털어놓는다. 조상들로부터 들어온 기적적인 사건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다고 불평을 한다. 사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떠나시면 하나님을 대신할 것이 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대치물은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오지 않는다. 저는 우리를 돕는 자가 아니라 우리의 원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물러난 자리에 미디안이 차지하므로 이스라엘은 압제를 당했던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그 상황을 역전시켜주시겠다는 것이다.
바알의 단을 허물고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찾아오신다. 찾아오셔서 그에게 도전을 던진다. 바알의 전을 헐고 바알신상(우상)을 찍어 번제를 드리라는 것이다. 이는 옛것을 버리라는 것이다. 옛것을 버리지 않고는 새것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다. 바알신상을 찍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 않고는 하나님의 새 일에 동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 백성을 미디안의 손에서 건져내고 싶으면 우상을 타파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이스라엘 백성을 새로운 축복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옛 것에서 나와야 한다. 옛 사고에서 옛 방법에서 옛 전통에서 나와야 한다. 옛 것에서 나와 하나님의 새 일에 동참해야 한다. 새 일을 행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려면 하나님의 음성을 먼저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려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 패러다임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기드온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잘못되어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신 하나님이었다.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렸다는 것이다. 자신의 대한 생각도 잘못되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말씀으로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큰 용사라고 말하는데 자신은 므낫세 지파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자신은 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면 힘이 생기지만 사탄의 소리를 들으면 절망이 온다. 누구의 소리를 듣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새 일에 동참하려면
하나님의 새 일에 동참하려면 하나님께 주권을 드려야한다. 그분이 원하는 시간에 그분이 원하는 일을 하시도록 허락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분이 우리의 비전과 꿈을 바꾸시는 것을 허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생각과 뜻은 우리의 생각과 뜻보다 크고 위대하기 때문이다(사 55: 8-9). 우리는 틀릴 수 있으나 하나님은 틀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재앙이 아니라 장래 소망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렘 29: 11).
새 일을 행한 후에라도 다시 새 일을 하려면 성공 신화를 버려야 한다. 안주 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이 앞을 향하여 나아가실 때 따라 나서야 한다는 이야기다. 성공신화나 과거에 대한 고정관념에 묶여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것에 순종해야한다.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불편하게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면 새해는 하나님의 새 일을 할 준비가 된 것일 것이다.
첫댓글 할렐루야
귀한 말씀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