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으로 한 해의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다음 주면 연중의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내고, 그 이후에 대림시기로써 또다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 참 분주하게도, 이것저것 많이 한 것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뭘 한거지?’하는 허무한 생각도 드는 듯합니다. 외적인 일의 결과만 몰두하다가 무언가 허전함이 남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의 자리에 있어 남아야 하는 것은 호랑이 가죽도 아니고, 이름도 아니고 무엇보다 사랑이 남아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해를 돌아보며 성찰해야 하는 것은, 내가 살아온 자리에 ‘사랑의 흔적이 남아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부족해도, 때로는 사소하고 작아서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그래서 ‘차라리 이렇게 할 바에는’하고 포기하는 유혹에 젖어들지라도, ‘그래도’ 묵묵히 사랑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 즉 종말에 관해 전하시는 말씀이 들려옵니다. 세상에서 아름답게 꾸며진 성전이 ‘허물어지고’, 온갖 ‘혼란스러운 일’과 ‘자신이 위협을 받는 일’로 마음이 흔들리게 됨을 말씀하십니다. 표면적으로는 혼란스럽고 두렵기도 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들의 본질적인 이유는 우리가 흔들림없이 따라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식별하고, 그 삶을 따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인내를 가지고 살아갈 것을 촉구하고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복음을 살펴보면, 먼저 사람들은 ‘종말의 시간이 “언제” 일어나고, “어떤 표징”이 나타나는지’ 물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대답에는 그 어떤 장소나 시간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곧, 그런 것들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것이 언제, 어떤 모습이든 ‘그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이 종말의 시간이어도 준비된 이들은 기쁘게 하느님 나라가 펼쳐지는 것을 맞아들일 것이고, 그 순간이 언제인지 안다하여도 평소 준비되지 않은 이들은 여전히 그 순간을 두렵게만 맞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종말에 관해 펼쳐질 혼란한 상황들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성경에서 ‘뒤를 따라가다’는 표현은, ‘그 모습을 닮다. 따라서 살아가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됨의 조건에 대해 말씀하시면서도 “내 뒤를 따라 오려면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뒤를 따라간다’는 것은 그 제자가 되어, 스승을 닮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마지막 순간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고 그래서 혼란스러워 이것저것 세상의 논리를 따라가고, 세상의 무언가를 닮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만을 닮고, 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삶은 분명 쉽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를 혼란하게 하는 세상의 논리는 끊임없이 하느님 나라의 논리를 위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진실되게 실천하려하면 할수록 세상은 더더욱 그 모습을 ‘우둔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매도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신앙인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진정한 예수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우리 안에 젖어있는 세상의 논리. 그래서 희생, 이해, 용서, 사랑. 이런 가치들을 바보같은 것으로, 내가 손해보는 것으로 여기고 있어서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성경에서 ‘인내’라고 번역된 단어‘ ὑπομονή (후포모네)’는 ‘견디다. 항구하게 머무르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끝까지 사랑하신’ 그 모습과 같은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런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어려움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사랑하면서, 세월이 흘러가도 끝까지 예수님 곁에 ‘남아 있는’ 것이고, 함께 있는 이들을 ‘붙들어 주며’ 끝까지 견뎌내는 이런 모습의 표현입니다.
이 말씀과 함께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시간’이라는 개념에서 우리 삶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례력으로 지금 우리에게 들려지는 말씀의 오묘함 속에서도 그런 하느님의 뜻을 살필 수 있습니다. 전례력으로 첫 해를 맞은 지난 대림 제1주일의 복음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시나요? 루카복음 21장의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해를 살아온 한 해의 막바지인 오늘 연중 제33주일의 복음도 다시 루카복음 21장의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입니다. 결국, 그저 ‘마지막’에 초점이 맞춰져서 그 때와 그 시간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두려움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한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결국 바로 ‘지금, 여기’에서, 마치 지금이 그 마지막 때인 듯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 삶은 단연코 ‘사랑’이란 단어 외에는 설명할 표현이 없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심판이 이루어질 마지막 때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은, 현재 하느님께서 우리 삶에 요청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저 먼 순간. 하느님 나라가 닥쳐오고 그래서 심판이 일어나고. ‘그 때에 어떻게’ 맞아들이느냐에 고민할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 마치 그 순간이듯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답게 예수님을 따라서 지금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그 모습이, 언제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심판의 순간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예수님의 살아있는 모습’으로 살지 못하면, 그렇게 내 작은 이웃조차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면, ‘시체와도 같은 모습’, ‘죽어있는 신앙’에만 머무르는 것이고, 그 삶은 스스로가 그 이웃 안에 계신 예수님을 외면함으로써 결국은 하느님 나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며 지난 한 해를 돌아보게 되는 이 때에, 우리 자신, 또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우리 공동체의 모습을 보았으면 합니다. 특히 각 단체의 임원들이 바뀌고 또 곧 새로운 사목평의회를 구성하는 이 때에 우리가 서로의 공과 과를 따지며 부족함을 지적하기보다, 그동안 서로를 위해 봉사해온, 아니 그저 힘내어 살아온 삶을 위해 격려해주고, 용기를 주는 모습. 다른 이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따지기보다, 그 부족함을 내가 먼저 채워주지 못했음을 아쉬워하고 좀 더 사랑으로 채워주려는 마음을 가졌으면 합니다. 이것저것 따지기만 하는 집단?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그저 아무 다를 바 없는 종교집단, 비정부기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신앙인들이라면, 신앙인 공동체라면, 조금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우리 교회 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유형이 여러 가지인데 여기에 ‘백설공주형'이 있답니다. ‘백방으로 설치고 다니는 공포의 주둥이’랍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바빠야 하는데 내 말만 하면서, 오히려 남을 흉보고 헐뜯고 욕하는 사람입니다. 제2독서에서의 바오로 사도는 그렇게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전합니다.
한편으로는 원망하고, 불평불만하며 교만한 ‘원불교’신자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오늘 제1독서에서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전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거지’형도 있습니다. ‘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성적인’ 신자입니다.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어떤 사랑이 진실된 사랑인지, 존중과 배려 가운데에서 헤아리고, 그런 태도가 몸에 배어있는, ‘사랑을 살아가는’ ‘우거지’형 신자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이왕이면 우리는 ‘우거지 신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하루. 이 시간이 나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하루의 시간. 그 마지막 날이라면 어떻게 지내시겠습니까?
마지막 날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 바꾸어 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하루하루의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후회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소중한 한 주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늘 깨어 사랑하여라.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첫댓글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오늘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