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작품 교리
교리는 성경에 대한 교회들의 해석을 정돈해 놓은 것이다. 사람의 작품이기 때문에 교리는 성경 이해의 완성판이 아니라 과정이며, 성경을 열어주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리를 해석의 표준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 교리의 안경을 쓰게 된다. 교리의 안경을 쓰고 나면 각자가 자유롭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상상력이 제한을 받는다. 그것이 유일한 기준이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 현실은 기준이 되버린다.
중요하지만 교리를 강조할수록 교회는 지적인 능력이 우대를 받게 되고, 그것은 교회 안에서 자연스레 계급을 만든다. 교리를 잘 이해한다는 것이 교리에 순종하는 일과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지식의 이해의 능력에 따라 우열이 만들어진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은 더 나은 기회를 얻는다.
반대로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은 그들 무리 가운데서 소외당한다. 이해가 더딘 사람들, 어리거나 지적인 장애를 가진 이들은 교회에서 훨씬 낮은 지위를 얻는다.
교리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충분히 담아낼 수도 없고 완벽하게 옳은 것도 아닌 사람의 작품이라고 말하지만, 일단 교리로 확립되면 하나님에 대해 상상하고 연구할 수 있는 훨씬 다양하고 광대한 자유를 잃는다. 하나님에 대해 틀린 생각을 할 수 있는 자유 말이다.
사실은 정말 위험한 것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행함이 없는 그런 태도임에도 불구하고 정통교리의 울타리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이 안전을 보장해주리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사실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는 일은 모든 신자들에게 가장 흔한 일 아닐까? 어린아이는 물론이고, 어떤 목사라도 오해와 왜곡에서 더 밝은 진리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고, 어떤 학자라도 유치한 초보시절을 지내왔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은 인류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이어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이단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도리어 자신의 유치한 과거를 비난하는 것이며 보다 온전한 지식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현재의 자신을 이단으로 내모는 것일 수 있다. 교리가 사랑이 아닌 정죄의 도구가 되는 일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다.
무지했던 지식에서 오늘에 이른 자신의 과거를 관대하게 받아들이듯이 타인의 오늘의 무지가 내일 더 나아질 것이라고 관대하게 기다리는 것은 신자의 상식 아닐까. 이단이라도 내일 그 자리를 털고 일어설 기회가 있다면, 굳이 오늘 서둘러 정죄할 것이 무엔가.
첫댓글 모처럼 마음이 시원해지는 글을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