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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시인은
전북 정읍 출생
1993년 계간 <시와사회> 겨울호로 문단에 나옴
시집으로는 하늘자물쇠, 슬픈자유, 나는 허정이라는 말을 좋아해 출간
경향신문, 서울신문, 내일신문, 고양신문, 무등일보, 오마이뉴스, 부천신문, 부천헤럴드신문, 부천포커스
시인, 작가들, 시와사람, 문학들, 불교문예, 시와인식, 수주문학, 부천문단, 싸이빌,
문예연구, 리토피아, 시현실, 미네르바, 삶글, 부천작가, 현대시문학, 한국문학평화포럼, 불교방송국,
모던포엠, 생명과문학, 한국작가회의 회보, 작가회의웹진,복사골부천, 소금창고, 시엽서
한국농어촌공사사외보, 상동복지관사외보, 세종병원사외보, 방송대학보, 등등에 작품 100여편 발표와
각종 잡지와 신문에 초대시, 여는시, 사외보에 다수 발표. 학원에서 다년간 글쓰기 강사 일을 했으며,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결혼이민자들에게 한국어 강사로 일했다. 또한 경기일보 시민기자 선정,
부천작가 사무국장 역임, 한국어교육지도사, 사회복지사, 독서논술지도사, 경기도서예대전 입선.
대학에서 국문학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전공했다.
김정숙 시인의 대표시 모음
아버지와 승우
아버지는 기역자 조선낫을 들고 꼬불꼬불한 논둑길을 걸어갔다 허리춤에는 가을 햇빛이 다가와 졸고 있었다 어느만큼인가 냉해맞은 논배미 비우고 있을 때 후두둑 후두둑 콩알만한 소나기가 아버지 등을 때리기 시작했다 아차, 앞마당에 승우 놈이 거둬 들일지 몰라서둘러 돌아오니 고추도 콩도 안색을 붉히며 떨고 있었다 대학나와 영화쟁이 되겠다넌 승우 놈, 밤새 씨부렁거리더니 푸푸 팔자로 누워 자고 있었다 아버지는 승우야 승우야, 드르릉 드르릉 저승을 넘나드는데 이놈, 승우 집에 사람 없을 땐 이런 것 좀 거두면 손발이 부르트더냐아버지 나 흙이 싫어요 농사 짓기 싫다니까요 영화감독할거예요 우루과이 농산물이다 무슨 농산물이다 해서 마흔 가까운 나이에 장가도 못 가고 죽어 버린 철산이 형 못 보셨어요 너 고얀놈 영화 감독은 밥 안 처먹고 산다더냐 이날 평생 허리 뿌러지게 농사 지어서 대학 가르쳐 놓은께 이놈, 기껏 한다는 소리가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버려 이눔 자식아 아버지는 산모퉁이에 앉아 담배불을 그었다 그때 누런 들판 위에 서서 비를 맞고 있던 허수아비 씨익, 웃고 있었다
전봉준가
어화가자 어화넘자 마른 손엔 죽창 들고 피 묻은 손엔 곡괭이 들고 백산, 원평 고부들에 찌르레기 찌르르 강아지풀 도르르르 조병갑을 효수하여 썩은 정치 징치하고 이서배를 몰아내어 알곡, 양곡 주인에게 돌려 주자 어화뛰자 어화둥둥 궁궁을을 을을궁궁 가슴으로 주술 외며 살자살자 인간주의 가자가자 평등주의 지상평화 전라낙원 보국안민 민족주의 광제창생 민중주의 5월 하늘 전라도는 푸르구나 푸르구나 전라우도 전봉준아 전라좌도 김개남아 탐관오리 불량양반 수세, 잡세 고리채로 배부르게 먹은 놈을 솎아내어 뽑아내어 살자구나 살자구나 미끈미끈 살자구나 마한의 피와 백제의 온화함이 육자배기 가락 속에서 여무는곳 슬프고도 슬픈 땅 고부관아 터지도록 꽹과리 북장구 상모야 돌아라 높이높이 돌아라 황톳길 한이 붉은 슬픈 남쪽으로 가자가자 인내천아 청포장수 너도가자
하늘 자물쇠
삶을 향해 주저하지 않았다
철지난 옷 걸치고도
캠퍼스 끝자리를 걷는 기분
쾌청한 하늘이었다
한 솔기 바람 외면해도
가방 가득 피어나는 미소 버릴 순 없었다
떨어진 한 컬레 사유 깁기 위해서 산고 치르지만
와중 속으로 걸어가는 모습 고독해 보이지 않았다
보랏빛 환상 쇼윈도우에 걸친 화려한 옷가지
네온사인 따라 오관 끌어내고
콩닥콩닥 끼 발동하는데
지성 심는다는 한 송이 양심
공처럼 튀는 사유 속으로 파고들었다
고모님 이야기
할머님 생신 날이면 모악산 굽이굽이 재를 넘어저 쌀 한 말 닭 한 마리 북어 두 마리 머리에 이고 금구에서 정읍 용머리까지 쑥길따라 산구절초 꽃길따라 오시던 고모님 형제들은 내가 고모를 닮아 못생겼다고 놀려댔지만 정 많고 따뜻한 고모님이 나는 참 좋았다 바쁘다고 핑계를 대며 몇 년동안 못뵈었는데 요즈음 시름시름 앓으시다가 코쟁이따라 떠나간 순이언니를 부르며 대성통곡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전 손없는 날 반가운 전화,이십년 만에 순이언니 고향
온다는 소식 구부러진 허리, 미수의 목숨줄 쫙 펴지더니
하늘도 맑더니 김제 만경들에 웃음꽃이 만발하더라
밥을 안친다
비둘기 모이만큼의 쌀에
목숨 하나 세워 놓고
너와 나를 섞어
정갈하게 세월 풀어 씻으며
밥을 안친다,
밖에는 여름의 녹음 눈부시고
외로움의 껍질 새벽녘부터 벌어져
석류처럼 울고 있는데
나를 일으켜 세우겠다고
사랑의 줄잡아 끌겠다고
가스레인지에 화려한 불 밝힌다
훅 불어버리면 날아갈 것 같은
조금 남은 내일의 씨앗
조심스레 희망의 봉지에 묶어
고이고이 간직했었는데
마침 오늘 아침 그 종이봉지를 풀어
희망으로 밥을 안친다
끈질기게 너를 사랑할 거라고
오래도록 너의 맘속에서 꿈틀거릴 것이라고
홀로 견디는 아른거리는 슬픔
비단 혼자만의 것은 아니리라고
너를 달래며
나를 달래며
밥을 안친다
목숨 줄기를 안친다
밥을 끓이며
심장에서 너를 보글보글 끓이다가 갑자기 온몸으로 허기가 져서 냄비에 밥을 끓인다 밥알들은 기운도 없이 끓는다 밥을 끓이다가 주걱으로 휘휘 저었는데 주걱에서 밥알들 떨어지지 않는다 처음엔 이놈들 털어내려고 툭툭, 그래도 안 떨어져 냄비 모서리에 대고 탁탁, 주걱을 친다 밥알들은 끈끈이주걱처럼 달라붙어 꼼짝도 않는데 밥알 몇 개 국냄비로 얼굴로 붙는다 나는 이것들을 떼어내다가 밥알들에게, 감히 날것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설쳐대고 엉겨붙느냐고, 호통을 친다 밥알들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다가 내 속을 끓고 있는 너를 한 번 뒤집는다 뒤집어서 뜨거운 심장에서 뜸들이는 사이 밥알들 익는다, 익으며 독을 품는다 당신은 완전히 익었느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노려본다
그래 속인다, 속삭인다
불현듯 지나가는
한 줄기 저녁바람
가루가 되도록 패대기치는 밤
내 그늘진 눈가, 눈물 한방울
젖은 삶을 속인다
물끄러미 눈을 뜨고
한웅큼의 수면제를 털어넣고
헝클어진 정신을 잠재우는 밤
내가 나를 잘못 읽었다는 자괴감
폐부를 쿡쿡 누르고
부르르 떨리는 머리통
벽에 짓이기다가
코드가 맞지 않는
너와 나일지라도
속인다가 속삭인다였으면
그래, 내가 너를 속삭인다
나를 다독이고
내가 나를 웃다가
구겨진 잠을 돌돌 말아
도르르 굴리면
잠이 하얗다
그래
속인다
속삭인다
언니야 별을 따러 가자
언니야!
오늘밤 잘 생긴 별을 보러 가자
토담집도 좋고 오두막집도 좋아라
다정히 손목 잡고
유년의 아슴한 이야기 나누며
개똥벌레 반듯거리는
들길에 누워 메나리를 불러 보자
고요히 고요히 흐르는
우리의 애틋함 넘쳐나는
핏줄의 하이얀 산맥
아버지 별 어머니 별 언니 별 내 별
모두 모두 반짝이며 소리치던
동진강변 모래자갈밭 풀숲에서
미역 감고 다슬기 잡던 옛 추억 길어 올리며
어머니의 감미로운 자장가 들려오던 그 곳으로
오늘 밤 별을 따러 가자
슬픈 자유
가고 싶었다
네 쪽을 향해서
그 어떤 침묵도 순리도 거부한 채
빨리 만날 수 있는
지름길이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가슴에는 화끈거리는 집념
어떤 비난도 죗값도 감내하면서
네 곁에서 부는 바람 따라
흐르고 흘러가서 너의 고운 뺨
따스한 온기로 서러움 걷어내고
외로움 맑은 물로 헹구어
슬픈 자유일지라도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널 차지할 수 있다면
생전 찾지도 않던 하느님께 기도도 해보고
바람에게 애원도 해보고
타닥거리는 풀잎 어루만져 주면서
눈물 글썽이는 ...
동백꽃
동박새 한 마리 날지도 않는데
선연한 핏자욱 울먹울먹 일어서서
엄동설한 매서운 바람 모르고
객혈하는 속울음 너는 피었는가
또 피었는가
삶에는
추위가 대롱거리고 있는데
너는 피었고 나는 아직 철이 아니라고
반쯤만 열려 있구나
한 잎 한잎 떨리는
저 꽃잎 좀 보아라
사람과 사람 모든 것들
순리대로 꽃 피워진다면
얼마나 얼마나 행복에 젖을까
저기 저 붉은 꽃잎
한 장 한 장 고요하고 단아한
자태를, 순수를
여고 동창생들
슬픈 비가 목울대를 울렁거리게 내리던 을해년 7월 19일
반 년 만에 만나는 여백회 모임, 유리창에 비추이는 내 모습은 초라한데
화사한 영님이 아직은 20대 영실이 초미니 청반바지 여고생 임숙이
바람 불어도 끄떡없는 24인치 미즈 순자,
돌아오라 돌아오라던 의정부 송추행 전동차는 빗살에 미끄러져
동숭동 대학로에서 문을 여는데
진로 소주 한 잔이 정겨워라 섞어찌개 푸짐한 점심도 맛 있어라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한다는 문주란 노래도 흥겨워라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3만원씩 하는 연극이 웬 말이냐
저녁 지어야 하고 아이들 목욕도 시켜야 한다며
3시반 공연도 안 되고 7시 공연은 더더욱 안 된다며
우산을 치켜드는 동창생들
비 오는 날 남산 올라가던 20세 추억 무참히 짓밟히고
전망대 안 보이는데 올라 갈까?
분위기가 밥 먹여 주느냐며
남대문 시장에 들러 악세사리 구경하면서
순대와 떡볶이로 아쉬움 녹이다가
맛 없다며 비싸다며 투덜대는
아줌마부대 동창생들
시집가는 딸에게
울음 녹인 것이여
마음 녹인 것이여
기쁨 녹인 것이여
그리여 그것이여
어제 음미하고
오늘 다스리며
내일 준비하는 것이여
바로 그런 것이여
그리여 그런 것이여
목숨 걸고 미워하다가도
미안하다고 가슴 내밀면
마음 털고 일어서서
덥석 안아 주는 것이여
바로 그런 것이여
그리여 그런 것이여
인생 큰 것 아니여
지 몸, 지 맴
귀하게 여겨 주는 게
최고인 것이여
쓸쓸함에 대하여
별이 진다
소박하게 상큼하게
한 무더기 별꽃들
소리 없이 진다
달이 진다
풍만해지면 더욱 허무해지는
생의 모퉁이
허둥지둥 달이 진다
해가 진다
골무꽃, 노랑매미꽃, 고깔제비꽃
한나절 허기가 지고
성급히 해가 진다
별이 지고
달이 지고
해가 지고
이젠 내가 져야하는가
또 하늘을 본다
초록의 새순들을 보아라
게슴츠레 눈꼽이 막 떨어지고 있는
산등성이
아직 함박웃음 웃지 않았지만
올망졸망 가슴에 쌓인
한을 풀어내듯
한 올씩 한 올씩
차례대로 고개 내미는
곱고 고운 얼굴들 보아라
겨우내 고독했지만
어머니 품속처럼
두 팔 벌려
우리의 젊음 반겨주고 있는
나무들
수수하게 변함없는 우정
얼마나 대견하고 사랑스러운가
가난하지만 군소리도 없이
새벽 이슬 비비고
시린 볼 마주하고
내일의 희망 시작하는
새까만 눈망울
저기 저 다정한 이웃들 좀 보아라
들깨밭에서
마른 나무처럼 서걱이는
아버지 등결 곁에서
들깻잎 땁니다
한 잎 두 잎
바람 소리결 따라
가지런히 고웁게
땀방울 땁니다
동생은 동생 몫
올케는 올케 몫
나는 나의 몫
아버지는 각각의
자식 바구니에
하늘만한 사랑 담아주십니다.
노동에 구부러지고
세월 닮았지만
진실의 버팀목되어
아궁이 지펴주시던 아버지
오늘 식구들 모두 모여
아버지의 혼을 땁니다
정읍 내장산으로 가자
가슴 텅 비어오는 날은
정읍 내장산으로 가자
사람은 다 외로운 법
나 혼자만 외로운 것이
아니라고 위로하면서
자꾸만 쓸쓸해지는 날에는
농민군의 혼령들 살아 숨 쉬는
고부 황토현 푸른 들로 가자
가서 연줄이라도 실컷 당겨보자
옥정호 돌아 섬진강 언덕까지
구절초 손짓하는 계절
강 따라 거슬러가다 보면
귀여운 쏘가리 떼 옹알이하고 있으리라
하루하루 궁색하게 버티며 사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고
거듭거듭 되새기면서
눈물겹더라도 따스하게 버티러 가자
마음 울적한 날에는 호남선 열차를 타자
붉은 황톳길 따라 남쪽으로 가자
정겨운 사투리에 마음 녹이며
동진강 구비 돌아 정읍 내장산으로 가자
거기 무엇이 있나, 묻지 말고
훌쩍 떠나자
저녁 창가에서
고향집 담벼락에는 담쟁이넝쿨
말도 없이 기어오르는데
기다리는 소식 아직 오지 않는다
동구 밖 느티나무처럼 정좌하고
오늘은 네 생각 하지 않으려고
입 속의 어금니 꽉, 다문다
그렇게 뒤돌아서는 저녁 창가
내 안의 나를 내려놓는다
기억의 붉은 반점 하나 꺼내
가지런하게 서가(書架)에 꽂는다
그대 마음 읊조리던 저녁 창가
마당가의 분꽃들 눈시울 붉어진다
검은 하루가 조용히 익는다
한글교실
오늘은 구청 복지관에서 한글교실 자원봉사 수업이 있는 날이다
한껏 멋을 부리고 있는, 카페를 한다는 김미연 아줌마
여호와의 증인이고 도덕교과서인 이순례 할머니
남편이 00청 고위공무원을 하다가 정년퇴직을 했다는 오순자 아줌마
몸이 새우처럼 오그라져 남편에게 소박맞고 혼자 산다는 이영미 아줌마
시집살이 남편살이, 글살이도 무지무지했다는, 글을 빨리 배우기 위해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는, 남편이 명문대학교 영문학과 나와 무슨 고등학교에서 영어선생을 한다는 황금성 아줌마
인천역부터 역이란 역은 다 칠판에 대서특필해놓고 외친다, 읽는다, 달린다
큰소리로 읽어야 자신감이 있다고 여호와의 증인 할머니는 일어나서 큰소리로 외친다, 대화역, 대화역!
소싯적에는 글 모르는 게 부끄러워 은행에 갈 때마다 오른손을 붕대로 칭칭 감고 갔다는 황금성 아줌마도 읽는다 교대역! 교대역!
제일 먼저 글을 깨우치면 운전면허를 따고 싶다는 김미연 아줌마도 전철을 타고 달린다 마장역! 마장역!
한글교실 자원봉사 수업이 있는 날에는 구청 복지관도 달린다 복지관! 복지관!
들꽃의 자존심으로
그래, 그렇게
선하게, 소박하게
산들바람에도 행복의 하모니카 부르는
구절초, 삐비꽃 맹감나무,억새풀, 산돌배나무
누가 눈여겨 보아주지 않아도
들꽃의 자존심으로 살아내야지
그래 그렇게
동진강 유년의 꿈송이 밭에서
가지고 놀던 차돌멩이
단단한 그 마음 그 빛깔 지키면서
살가운 미소 건넬 줄 아는 여인으로
사랑스럽게, 순하게 살아야지
그래 그렇게
절망의 안개 속에서 배회할지라도
널, 처지를, 세상을
원망하지도 뒤돌아보지도 말며
빛부신 소나무처럼
힘차게 푸르게 살아가야지
칠월칠석
튼실한 시 한편 들어 올리려고 후줄근히 식은땀 젖어오는 밤
살금살금 도토리를 찾아다니는 다람쥐처럼 귀 쫑긋 세우고 있자니 슬프다
서둘러 운동복을 걸치고 동네 한 바퀴 돈다 발부리에 돌멩이가 차인다
아프다 아픔을 생물학적 나이테로 견디는 날들, 꼬집듯 번갈아 가며 나를 쳐다보는 달빛의 시선 차갑다
어느 조폭 영화에서 나온 짧은 대사를 떠올려본다 “나는 한 놈만 골라 팬다고”
시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중얼거리는 음악의 형상으로 가슴에서 시가 걸어 나오리라
동이 터오는 새벽, 점점 더 빗줄기가 거세진다 흔들리는 스탠드 불빛아래 위스키 한 잔 말아 마신다
턴테이블에 Secret Tears(남몰래 흐르는 사랑의 묘약)/Rebecca Luker의 LP판을 건다
칠월 칠석을 핑계로 시답잖은 말로 시를 쓴다
독(篤)한 슬픔을 위하여
슬픔을 방류하자
펄펄 끓어오르는
치통의 신열도 아픔 아래 동동
끙끙대는 마음, 넓고 넓은 세상으로 돌려보내자
외로움도 넉넉하게 채우고
페퍼민트 진한 허브차도 한잔 하면서
진수성찬, 행복한 만찬을 위하여
샴페인을 터트리자
생일 선물로 배달되어온 안개꽃 향기처럼
은은하게, 유유자적하게
거드름도 좀 피우고, 분 냄새도 뿌리자
독毒한 슬픔도 진급하면
독篤한 희망으로 꽃필 수 있으려나
세상 속, 나의 不在를 슬퍼하지 말자
부풀어 오른 권태를 욕하지 말자
맘만 잘 먹으면 그까짓 권태, 태만, 무관심 따위야
금방 수선하지 못할까
달빛으로 흘러가는 기력은 왕성하고
바람소리도 다정한데 화려한 유월 열사흘 날
슬픔의 모서리 고즈넉하구나
밝고 아름다운 행복의 전주곡 울리며
오늘밤에는 진통제를 복용하자
나는 허정(虛靜)이라는 말을 좋아해
책을 보다가 죽음이라는 단어가
마음속으로 들어왔어
참 허무한 것, 참 허약한 것
참 보잘 것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나를 늪 속으로 내던졌어
나는 허정(虛靜)이라는 말을 좋아해
매일매일 모든 것으로부터
고요해지고, 차분해지고 싶지
붓 가는 대로 세상을 껴안지 못하는
마음의 부산함이여 소란함이여
내 안의 나의 不在여
삶의 규율들이 모가지를 뚝뚝 분지르는군
리듬에 맞추어 리드미컬하게
고통의, 고뇌의 춤이라도 출거나
습관적으로 또 죽음을 생각하는 나여
전류처럼 흐르는 산화(散化)의 파장이여
꽃불을 환하게 밝히고 싶어
어리석고도 불쌍한 바퀴벌레여
동굴속 어둠이여 허름한 골방이여
言語여 冊이여
나를 사정없이 내동댕이쳐다오
가벼운 사유 아니었구나
나는 너에게 가벼운 사유 아니었구나
재빠른 몸놀림 아니었구나
수도꼭지에서 콸콸 허투로
흘러넘치는 물줄기 아니었구나
심산유곡에서 다 나름의 까닭을 지닌
물 한 사발이었구나
그런 거구나
절대 가벼운 물방울 아니었구나
눈물씨, 말씨, 행동씨 하나하나
움직이는 모든 것들의 밑동
쉽게 저항할 수 없는
카테고리 우듬지였구나
언행일치의 아버지였구나
진실의 시험대였구나
고유의 목소리 지닌 시였구나
애처로운 속눈썹 떨림이었구나
그런 거구나
그냥 할일 없이 제 물줄기 따라
저 홀로 흘러가는 물결 아니었구나
제 모양이고 제 울음이고
제 빛깔 내며 흐르는 원천이었구나
반짝반짝 뛰는 두근거림,
깡충깡충 귀여운 토기의 빠알간 눈빛
그런 거구나
밀폐된 너를 본다
두 팔 벌려 안락한 침실에서 잠을 잤다
그래도 자꾸자꾸 잠이란 놈이 끈질기게
눈 속으로 따라 들어온다
너는 가슴으로 들어오거나 말거나
근심도 너도 삶도 다 잠 속에 구겨 넣고
동공에 동동 떠있는 밥알도 잠 속에 말아 먹는다
그러다가 삶의 시퍼런 칼날을 본다
독기도, 광기도 칼금 채우고 싶다
터벅터벅 내일을 걷는다
현관문을 들어선다
밀폐된 네가 다시 들어온다
하늘이 노랗다
세상은 온통 회색빛 먹구름
너를 열고 싶지는 않아
오늘은 뒷걸음질 치고 싶다
그래도 숙명처럼 너를 열어야만 해
사람들은 젊은이가 가엾다고 한다
무엇이 가여운지 모르지만 혀끝을 끌끌 찬다
아직 갈 길이 멀리 있다고 하면서
다문화센터 우리 우리엔
구절양장, 구불구불한 시간을 지나 삶이 밥을 헌팅 하러갑니다 하루를 재촉하는 새벽 시간 주섬주섬 전철에 몸을 싣고 기역, 니은 디귿……
서로 다른 문화들과 교신하는 시간, 검은색의 피부를 가진 유랄딘이 아닌 우리엔을 만나러 갑니다
피부색은 달라도 정신만은 올곧은 필리핀 부투안에서 찾아온 그녀, 희망이 up이라고, 내일이 up이라고 강당에 모여 윷놀이를 하시네요 왁자하게 코리안 드림, 전통을 배우시네요
물도 낯설고, 문화도 낯설고, 꿈마저도 낯선 타향에서 오직 잘 살아보겠다는 신념 하나로, 20살의 생물학적 나이테도 초월한 대단한 인내력을 가지신 그녀
삶과 현실의 장벽을 넘어, 국경과 사랑을 넘어, 대한민국의 귀한 자손을 잉태하셨네요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필리핀에서 건너온 그녀, 우리 우리엔 이름도 참, 예쁘네요 맘씨도 얼굴도 거룩한 그녀, 시어머니 사랑도 남편 사랑도 듬뿍 받는 우리 우리엔
오늘은 대한민국의 문화를 배우시네요 한국어를 배우시네요 김치 만드는 법을 배우시네요 고부간 갈등, 시집살이를 배우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