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맘때가 되면 10여년전 보좌신부 시절에 접했던, 안타까운 한 학생의 이야기가 생각나곤 합니다. 그래도 공부 좀 한다는 학생으로 외국어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늘 안타깝게 1등을 놓치곤 했습니다. 그러나보니 부모로부터 성적에 대한 압박, 1등을 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압박을 끊임없이 받아왔습니다. 그리고 겨우 어렵게, 처음으로 전교1등 성적표를 받아든 그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 학생이 부모에게 남긴 유서에는 단 한 마디의 말만이 비통하게 적혀있었습니다. “이제 됐어?”
1등을 해야한다는 너무나 큰 압박 속에서 그동안의 노력은 잊혀져 있었고, 그렇게 부모가 원하는 1등을 했을 때에 찾아온 공허함이 그 학생을 극단으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 어쩌면 늘 ‘남을 이겨야 하고, 남보다 더 앞선 위치, 더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전례력으로 한해를 마무리하는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선포된 복음은,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아야하는지를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오늘 하늘나라의 임금이신, 그런데 세상에서는 어쩌면 너무나 초라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한 해의 삶을 아등바등하며 살아온, 그럼에도 남보다 더 앞서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자책하는 우리에게 “지금, 그대로 충분히 괜찮다”, “조금은 내려놓아도 괜찮다”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늘 타인을 평가하고 별점 매기기 좋아하는 세상에서 날카로운 평가의 단어들을 받아들이고 평범한 척 웃음짓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늘 우리는 남들보다 더 위에 서려고 합니다. 내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내가 무시당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낮춰지는 것 같아 참지 못하기도 합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인정받는 모습에 격려와 지지로 동참하기보다 질투하고 깎아내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직책, 경력 심지어 나이 등의 인간적 조건을 앞세워서 ‘나의 옳음’, ‘나의 높음’을 내세우려 합니다. 교회에서도 세상에서도 힘과 권력이 중심을 차지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반복되는 오늘날.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그렇지 않다는 것, 그래서 교회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하느님 나라의 임금, 우리가 왕이자 구원자로 모시는 분의 십자가상 처절한 죽음이라는 그 초라한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높고 낮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는가?’는 것만이 조건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진짜 ‘왕’의 모습은 권력과 힘이 아닌 ‘사람’을 중심에 두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에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닙니다. 유다인 지도자들도, 로마 군사들도, 심지어 예수님 곁에 있던 죄수조차도 조롱섞인 그들의 말에는 ‘구원’이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 참된 임금이자 예언자며 사제인 존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그들의 기대와는 한참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아로는커녕, 제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만 바라보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통치방식, 참된 구원은, 권력이나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세상의 논리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힘과 권력을 가지고 홀로 분리되어 있는 이를 왕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하느님 나라의 왕이란 당신의 백성과 ‘함께’ 살아가며, ‘함께’ 십자가를 지는 자비로운 봉사자였습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의 탄생 때부터 예고된 것이었고, 예수님의 삶을 통해 온전히 선포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에 하느님은 천사를 통해 당신 구원의 방식이 임마누엘,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예고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가운데’ 계심으로써 그 구원을 이루셨으며, 결국 하늘로 올라가시는 마지막 순간에도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으로 당신의 구원이 우리 가운데에서 계속 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고 살아가는 삶을 살자는 사목지침으로 묵상하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요한복음의 구절은 우리에게 구원의 말씀이 되고,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몸소 낮아지시고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철저히 ‘낮아지는’ 사랑을 통해 당신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그 낮아지는 사랑의 절정인 것입니다.
우리가 애완동물을 많이 키우고 아끼지만, 그렇다고 그 애완동물과 같은 존재로 낮아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낮추셔서 인간이 되시고, 죽기까지 낮춘 모습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나라 임금의 모습이고, 세상을 구원하는 왕의 모습인 것입니다. ‘낮추는 사랑’만이 하늘나라 완성의 조건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마치 유다인들처럼) 하느님을 그저 나에게 힘과 이익을 줄 수 있는 인간적인 조건의 왕으로 기대하고 바라보고 있던 것은 아닌지, 아니면 정말 사랑으로 자신을 낮추고 언제나 나와 함께하는 하늘나라의 구원자로 믿고 따르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전한 왕의 신비로운 모습에 대한 프랑스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프랑수와 바리용(François Varillon) 신부님의 말씀을 제가 조금 다듬어서 나누어 드립니다.
“하느님 나라에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인데, 사랑한다는 것은 죽는 것이다. 우리는 통상 소유함으로써 부유해진다. 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을 내어 주심으로써 부유해지신다. 하느님의 전능함이란 자기를 낮추고 지우는 전능함이다. 하느님의 전능이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그 어떤 커다란 위력적인 힘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님으로 만들어버리는 전능함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하느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십자가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우리 일에 개입해 주시는 유능한 하느님을 기대한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무능이야말로 하느님의 진정한 본질임을 깊이 깨달아야만 한다.”
우리 신앙인들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간을 맞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 밤, 내일은 더 나은 삶을 꿈꾸고 다짐하지만 어제보다 못할 때도 많습니다. 한해의 마지막에 우리는 내년은 더 좋은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하지만 작년보다 못한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괜찮다’고, ‘하느님과 함께라면 지금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서로를 격려해주는, 그렇게 내 자신이 살아있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함께 해줄 수 있는’ 연말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 우리와 함께 하신, 우리 임금이신 예수님처럼 엎어진 이를 일으켜주고, 우는 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지친 이들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힘을 주는, 오히려 서로 손을 맞잡고 참된 화해를 이루는, 그런 모습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참된 임금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따르려는 참된 제자이자 하느님 나라의 백성로서 살아갈 때, 우리는 서로에 대한 조롱과 업신여김으로 자신의 뜻을 내세우려는 세상의 소리들에 앞서 예수님의 따스한 목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과 함께하는 소중한 한 주간되시길 바랍니다.
“너희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