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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제 1장: <처음에, Les débuts, Beginnings>(1948)
1.1 보나티의 삶에서 등반의 시작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등반하는 이들의 삶에서 첫 번째 등반의 동기와 의미가 어떻게 진술되는가는 매우 흥미롭다. 등반에 관하여 아무런 예비 지식이 없이, 바위를 오르는 이들을 바라보는 하염없는 시선은 등반과의 첫 번째 조우일 터이다. 이어서, 어느 순간 나도 오르고 싶다는 간절함이 가슴 속에서 일렁이는 순간, 산은 이미 몸과 마음속에 들어와 있게 되는, 산으로의 망명과도 같은 것, 지루함없이 등반하는 모습을 보고 또 보고나면 이제 남은 것은 몸과 마음의 독립, 그 절실함일 것이다. 그 다음은 바위에 오르는 치열함을 경험하는 것이다. 대부분 이런 순서로 등반의 원형을 쓰기 마련이다. 보나티의 글과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적어도 산에 입문하는 내용에 있어서는 어떠한 위화감도 지니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 보나티 산장 앞을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에 대하여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만약 새로운 알피니즘을 개척한 보나티를 알고 있었다면, 보나티 이름이 붙은 산장을 지나가는 나의 산행은 더욱 예뻤을 것이다. 그 즈음, 나는 그를 응시할 힘이 없었다. 이러저러한 느낌없이 산장 앞에서 한동안 머물렀을 뿐이다. 엊그제 일만 같다. 산과 등반에 관한 어떤 역사적, 미적, 윤리적 의식이 없었던 나로서는 보나티의 삶, 등반의 역사를 공유할 수 없는, 그저 걷는 이에 불과했다.
지금 나는 알피니스트 보나티의 역량, 그가 발휘한 인간적인 역량을 읽으면서 배우고 있다. 이탈리아 북부 시골사람인 보나타의 삶은 애초부터 알피니즘과 긴밀한 20세기 국가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처음부터 사적인 등반을 했던 존재였다. 그가 믿었던 알피니즘의 공공성은 철저하게 개인의 자유, 진실함, 살아있음에서 기인한다. 보나티의 삶에 있어서, 적어도 이탈리아 K2 원정대 이후, 추한 진실을 직시했던 인물로서 자기분열과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국가주의의 피해자였고, 참혹한 2차 세계대전을 본, 그는 반국가주의적인 시민이었고, 개인이었다. 그리고 등반의 주체로서, 그 가치를 통해서 알피니스트, 알피니즘의 공공성을 창조하고 실천하고자 했던 인물로 보인다. 그는 산을 독점한 적도 없고, 사적인 자기 세계에 빠져 등반의 역사적 배경을 모른 척 하지도 않았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이탈리아 북부 작은 지방도시는 알피니즘의 성지와도 같았다. 멀리서 보아도, 산들이 그의 눈 안에 들어왔다. 그는 등반하기 가장 좋은 곳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만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자극이 되어, 등반이라는 문을 열어젖힌 존재였다. 18살부터 시작해서 계속해서 등반을 이어가면서, 그는 자신과 격투하면서 자신만의 알피니즘을 추구했다. 그 앞에는 머지않아 그가 오를 산들이 즐비했다. 점차 그는 알피니즘 속에 거주하면서 삶 전체를 이어간 인물이 되었다. 산에서 내려와 일상의 삶으로 망명 생활을 한 시간은 짧지도 길지도 않았다.
사실 그는 등반의 개혁자만이 아니었다. 그의 글은 탁월하고, 글의 깊이는 융숭하다. 그가 남긴 책들은 무엇을 길어올리려 한 것일까? 나는 보나티처럼 높은, 험한 암릉을 오를 수는 없지만, 그의 책을 읽으면서, 마치 명작을 뒤늦게 보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나이가 들어 이탈리아 북부 산악지대에 가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탄식이 절로 나온다. 보나티는 이렇다 할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그의 독서량은 많았고, 자연과 교감하는 능력은 탁월했다. 그에게 등반은 자연과의 대립이 아니라 자신의 성찰이기도 했다. 그는 혼자서 자연을 철저하게 바라보았고, 연구했고, 새로운 등반이라는 것을 위해서 격렬하게 이제껏 가볼 수 없었던 하늘길을 올랐다. 그 결과 그의 삶의 가치를 현대 알피니즘의 새로운 지평이라고 말하면, 그 속은 너무 좁게만 보인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나티의 원형을 찾고, 보나티와 대화하기 위하여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해제를 이어놓고 싶은 것은 그 기쁨을 산서를 좋아하는 이들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글을 연재하겠다는 것은 그와의 대화를 마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1.2 발터 보나티가 2011년 9월 13일 로마의 한 병원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르 몽드 Le Monde, 2011년 9월 21일자>지는 그를 화강암에 비유하면서 강건한 알피니스트였고 동시에 산악계의 부패에 분노했던, 백발의 알피니스트였다고 썼다. 『내 생애의 산들』 원본 맨 앞 에는 이탈리아 영화배우 같은 모습을 한 20대 보나티의 사진이 있고, 한글 번역본 앞 날개에는 1989년 보나티가 파타고니아에서 찍은 백발의 보나티 사진이 들어있다. 한 인간의 시작과 끝은 이렇게 머리카락의 색깔로도 규정된다. 앞 사진의 배경은 산이고, 뒷 사진의 배경은 남미에 있는 호수쯤으로 보인다. 등반의 시작과 끝, 알피니스트의 젊음과 늙음의 변화는 산에서 호수의 물로, 검은색 머리에서 흰색으로 이어지는 스펙트럼에 있다.
잘 알려진 사실처럼, 1954년 보나티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K2(8,611m)에 오르기 위한 이탈리아 원정대의 대원이었다. 팀의 막내인 그는 공격팀에게 정상으로 가는 열쇠와 같았던 산소통을 들고 결정적인 위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보나티를 경쟁자라고 여기고 두려워한 콩빠뇨니Compagnoni와 라체델리Lacedelli는 마지막 캠프를 예상보다 높게 배치하고 장비도 없이 해발 8,000m가 넘는 얼어붙는 야영지에 캠프를 버렸다. 이 일로 인하여 보나티는 육체적으로는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지만, 악랄한 모독으로 입은 도덕적인 상처는 결코 치유되지 않았다. 오히려 적으로 간주되었던 보나티, 이 때부터 그에게 산악계의 계보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산악계의 어떤 정파에도 의지하지 않았다. 이 책의 첫 장은 이와 같았던 보나티 가 생애 처음으로 산과 등반에 관한 도덕적 가치를 경험한 바에 관한 것이다. 서구 산악계는 이탈리아 K2 원정대 사건을 "실패한 살인"이라고 명명했고, K2 등정에 관한 "국가 거짓말"에 맞서 싸우는 것은 보나티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50년 후, 라세델리는 보나티가 진실을 말했다고 인정했다. 그 후 몽블랑 대산괴에서 보나티는 한 번 이상 죽음을 피했다. 1961년 7월, 프레니 기둥Freney Pillar에서 그의 동료 4명이 목숨을 잃었다. 나중에 보나티 는 친구였던 피에르 마조Pierre Mazeaud(1929년 생, 1978년 프랑스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이 끌었고, 프랑스 헌법위원회 위원장 역임 등)의 생명을 구하기도 했다.
알베르 카뮈를 존경했던 독학자 보나티는 『내 생애의 산들』 이전에 K2의 "악몽"이 자신을 " 깊은 우울증"에 빠뜨렸다고 고백하는 장엄한 책인 『나의 산으로A mes montagnes』(Editions Guérin, Chamonix 1961, Editions Arthaud, 1972)를 썼다. 이 고백은 이어서 그의 부활로 이어졌는데, 1955년 보나티는 현재 그의 이름을 딴 드루(Dru)의 남서쪽 기둥을 6일 동안 혼 자서 오르려고 했다. 한국 산서회 회원인, 프랑스에 사는 남동건은, 젊은 날 무정부주의 활동을 했던, 피에르마조의 자서전 벌거벗은이를 위한 산,산에 오르기위하여 자신을 벗어버린,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벌거벗은, 산에서 다시 태어나는 인간..으로 읽히는 『Montagne pour un homme nu』(Arthaud, 초판 1971, 재판 1998, https://cafe.daum.net/peakbook/KMYF/173)을 소개하면서, 그 가운데 피에르 마조와 보나티와의 관계를 이렇게 썼다. “한번은 보나티의 쁘띠 조라스 등반 제안을 받고 단숨에 샤모니로 내려가 그날로 등반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밤새 무시무시한 낙뇌를 동반한 악천후로 다시 살아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무서운 밤을 지샌 후 이틀간 어렵게 등반을 마치고 정상을 올라 이태리 쪽 능선을 거쳐 하산” 했다. 보나티는 피에르 마조를 당대 최고의 등반가로 극찬하며 법률가이자 국회의원으로 너그러운 심성과 섬세하면서 아주 호의적인 사람이라 평했으며 그의 언변은 설득력을 갖춘 유수와 같고 정열적이며 앞날을 내다보는 정확한 식견을 겸비한 사람이라고 했다.
1.3 이 책의 첫장 제목은 <처음에Les débuts, Beginnings, 初陳>(1948)이다. 처음은 강제가 아닌 어떤 탄생 즉 원형을 의미한다. 때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겨우 3년이 지난 해였다. 이탈리아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었던 때, 첫 등반에 관한 글이다. 보나티 나이 18살, 자기 삶이 막 펼쳐지는 젊음의 나이, 그러나 세상은 파괴되었고, 미래가 없어 보였다.(한16, 불19-20) 이 모든 결핍을 채워준 것은 순수한 자연에서의 등반이 었다. 첫 번째 장의 결론을 먼저 말하면, 보나티는 전쟁 기간동안의 삶을 “나를 받아주지 않 는 인생”(한17, 불22)이라고 정의했고, 전쟁 이후의 삶을 등반을 통해서 어떤 다른 것 즉 “스스로 존재하는 삶의 방식ma façon d’être”(불22)의 깨달음이라고 했다.
첫장에는보나티가 전쟁 전후에 살던 지명과 그가 처음으로 오른 암릉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 있는 베르가모Bergamo, 베르토바 디 발세리아나Vertova di Valserriana, 알벤Alben, 그리냐Grigne, 몬자Monza, 브리안자La Brianza, 캄파닐레토 Campaniletto 등 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등반지는 바늘끝처럼 생긴 그리냐(2410 미터)와 캄파닐레토(1730미터) 암벽이다. 그리냐는 보나티보다 선배였던 리카르도 캐신이 좋아했던 산군이기도 하다. 인터넷 검색으로 위 지명을 살펴보면, 젊은 보나티가 첫 등반을 어떻게 했는 지 가늠할 수 있다. 보나티가 살던 마을 뒤에는 이런 아름다운 바위 산들이 있었다. 전쟁의 고통과 시체가 난무하는 전쟁 이후 도시와 다른 ‘아름답고 순수한 자연’은 이렇게 쌍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은 누구나 오를 수 있는, 모험과 즐거움의 대상, 준수한 암릉지대, 연봉, 산괴였다.
2차 세계대전 내내 반 파시스트였던 보나티의 아버지는 강제로 가게를 닫아야 했고, 보나티를 시골로 보내 굶지 않게 했다.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에 뿌리를 내린 보나티는 어린 시절 포(Po) 강둑에서 했던 게임에서부터 자연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간직할 수 있었고, 청소년기의 독서량(커우드, 키플링, 런던...)은 10배나 늘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무솔리니 청소년단의 검은 셔츠를 입고 다녀야 했다. “우리는 독일처럼 세뇌당했습니다.”라고 그 때를 회상했다. 1925년부터 스스로를 “파시즘의 두체(duce, 최고통치자), 제국의 설립자라는 칭호를 사용한 베니토 무솔리니의 시체가 1945년 밀라노에서 군중들에게 공개되었을 때 보나티는 겨우 15세 였다. “그의 시신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습”은 그에게 충격적이었다. 보나티는 그 후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전쟁 이후, 낮에는 노동자로, 여가 시간에는 체조 선수로 활동했던 그는 1948년 8월, 캄파닐레토코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했다. 그리고 1965년 마터호른 정상에서 산악인들과 작별을 고할 때까지 등반활동을 멈추지 않다. 첫 번째 장은 1948년 그가 처음으로 등반을 하게 된 계기, 그로 인해서 등반의 도덕적 가치를 경험한 바를 밝혀주고 있다.
1.4 첫 번째 장의 내용은 길지 않다. 보나티가 태어나 어렸을 때 살던 곳인 베르가모 북쪽 골짜기 마을인 베르토바 디 발세리아나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몬데 알벤, 베르가모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그리냐 능선과의 만남이야기이다. 2차 대전 이후에, 보나티는 몬짜에서 살았다. 2차 세계 대전의 패배 이후, 이탈리아 사람들의 삶이 피폐해졌을 때였다. 보나타는 그 때를 “파괴된 세상, 미래가 없던 세상un monde en ruine et encore sans perspectives” 이었다고 썼다. 그의 어린 시절, 보나티의 시선은 평지인 몬짜에서 알벤 산(Monte Alben, 2019m)으로 그리고 그 보다 더 높은 그리냐(2410m)로 옮겨가게 된다. 해발 2019m 높이의 알벤 산Mount Alben은 베르가모 지방의 발세리아나 계곡과 브렘바나 계곡을 분리하는 능선을 따라 위치해 있다. 정상에는 동서로 뻗은 능선이 형성되어 있으며 동쪽이 가장 높은 봉우리이 다. 알벤 산은 단순한 길과 전문 등산객이 함께하는 엽서 같은 파노라마를 제공하는 아름다운 곳이다. 흔히들 사계절 모두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내는 이곳을 베르가모 알프스라고 한다.
첫 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보나티는 그리냐Grigne,Grigna 능선(La chaîne des Grigne, 2410m)을 오르는 다른 이들을 보게 되고, 이들을 따라하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영어본, 불어본의 혼합이다. 즉 불어본에 없는 문장이 영어본에 있는데, 한글본에는 영어본의 것이 들어있다. 한글본에 있는 보나티가 그리냐를 등반하는 이들을 보면서 “이것을 보고 마음이 동하고 샘이 나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행복해하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 보았다.”(한16)라는 부분에서, ‘마음이 동하고’는 놀라움wonder, émerveillment이고, ‘샘이 나서는’ 자신도 하고 싶다는 욕망envy, envie이다. 그 다음 문장, “(장비를 몸에 많이 지니고 있던) 엘리아가 나타났다. 나는 자일을 묶은 두 팀이 암벽을 오르고 있는 것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한16). 한글 번역본의 이 문장을 보면 ‘그 모습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던‘ 주체는 보나티라고 여기게 된다.Cela dut l′attendrir, It must have rather touched him.(불20, 영4) 그러나 이 문장에서 주어는 보나티가 아니라 엘리아이다. 등반하고 있는 모습을 매혹적으로 바라보던 초보 보나티에 끌렸던 이는 엘리아였다. 그래서 엘리아가 보나티에게 다가가서 등반을 제안하게 된다. 엘리아가 보나티에게 이렇게 묻는다. “해보고 싶니?”. 보나티가 대답한다. “해보고 싶어요”. 김영도는 이렇게 번역했다. “한번 해볼래?”, “멋있겠는데...한번 해보지”(한16). 여기서 ‘멋있겠는데‘라는 문구는 원본에 없다. 한번 해보지라는 대답도 일어본에서처럼 “꼭ぜひとも”(일20)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 영어본에서는 더도덜도없이 꼭 하고 싶다는 뜻의 “I could‘t think of anything, I‘d like more”(영4), 불어본에 서는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다는 뜻인 “Je ne demande pas mieux”(불20)이다. 이러한 보나티의 대답 속에는 바위를 욕망하는 간절함이 베어있는 데, “한번 해보지”라고 번역한 부분 은 앞의 번역본들과 비교해서 바위의 외침같은 울림이 없다.
이 날 생애 처음으로 보나티는 엘리아와 함께, 장비를 갖고 하는 첫 등반으로 캄파닐레토 Campaniletto(1730m)를 오르게 되었다. 이 첫 등반에 대해서, 보나티는 “1948년의 일인데... 나에게 강한 충격을 주어, 바로 그 길로 나아가게 됐다. 그 뒤로 그리냐의 다른 침봉들에도 도전하고 일요일마다 동이 틀 때부터 저녁놀이 질 때까지 등반을 많이 했다.“(한17)고 회고했다. 김영도가 “충격을 준”(한17)이라고 번역한, 영어본, 불어본에서 공히 쓴 과거분사 galvanisé, galvanized는 움직이게 한, 비유적으로 말해서 열광, 흥분시켰다는 뜻에 훨씬 가깝다. 첫 장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첫 등반과 이어지는 충격과 같은 등반경험에 관하여, 보나티가 이렇게 고백할 때이다.(등반하면서) “생각과 행위를 통해 나의 강점과 한계를 더욱 알아갔다. 아마도 나를 받아주지 않는 인생의 다른 것을 채워나가고 있는지도 몰랐다.”(한17, 불22, 영5) ‘생각과 행위를 통해’는 정확하게 번역하면, ‘생각과 행위의 직접적인 상호교감, 소통을 통해 서Dans cette sorte de communion directe entre pensée et action/direct communion between thought and action’(불22, 영5)이다. 보나티는 첫 장의 맨 끝에 이르러, 첫 등반이 었던 캄파닐레토 등반을 “소심하고 우스꽝스러운 등반”(한18)이라고 정의했다. 영어본에서는 이 등반이 소심한 등반timid climb(영6), 불어본에서는 소심하고 우스꽝스러운timide et cocasse(불23), 일어본에서는 소심한おずおず(일23)로 번역되었다.
1.5 보나티의 나이 18살, 세상 무엇이 그의 삶에서 비껴간 것일까? 그를 받아주지 않는, 망가 진 자신의 삶이란 무엇이고, 그 “삶을 보상하려는se dédommager/repaying myself”(불22, 영5) 삶이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 책의 첫 장에서 이 부분에 대한 답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 다. 단락의 앞뒤를 미루어 짐작하면, 망가진 삶이란 전쟁 전후, 그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공포, 파괴된 도시에 보태진 암흑과 같은 풍경과 암담한 미래 쯤 될 것이다. 보상하려고 한 삶은 등반이었고, 이 등반하는 삶은 보나티를 살아 있게 했고, 자유롭게 했고, 삶의 결핍을 충족 시켜줄 수 있었다.(불22, 영5, 일22-23) 보나티가 등반의 미덕으로 삼는 것은 이 세 가지 “살아있음alive/vivant, 자유로움free/libre, 삶의 충족 즉 진실됨fulfilled/vrai”이다. 이것이 하나로 조화를 이룰 때, 보나티는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 ma façon d′être/my way of life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등반을 통해서) “나는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발견했다J′étais en train de découvrir, surtout, ma façon d′être/I was discovering my way of life.”(불 22, 영5) 김영도는 한글번역본에서 단락 말미에 보나티가 쓴 이 문장을 “인간성을 고양시키는 모든 요소가 들어 있었다”(한18)라고 모호하게 번역했다. 일어본은 등반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찾으려 했다라고 번역했다.(일23) 일어본에는, 이 즈음 보나티가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군화를 신고 등반하는 사진이 담겨있다.(일21)
1.6 첫 장에서 청년 보나티는 두 번, 그러니까 그리냐Grigne 피라미드 연봉과 그리냐 피라미드의 하나인 니비오Nibbio 암벽 아래에서 등반하는 이들을 보게된다. 보나티는 등반하는 이들을 행복한 이들ces bienheureux이라고 썼고, 자신도 이들을 시간가는 줄 모르는 채 지켜 보았다고 썼다. 여기서 한글 번역본에, 우리나라에서 자주 쓰는 자일 파티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불어본에서 보나티가 본 첫 번째 등반은 ‘줄을 묶고 등반하는 이grimper des cordées’라고 썼고, 그 다음으로 본 등반은 같은 뜻으로, ‘줄을 묶은 이들quelques cordées (불20)’라고 썼다. 영어본에서는 climbing rope at work, a rope pair(영4), 김영도는 일어본 번역대로 “자일 파티”, “자일을 묶은 두 팀”(한16)이라고 번역했다. 일어 번역본은 “등반하는 클라이머”, “자일 파티”(일20)라고 했다. 김영도는 번역하면서 일어본을 저본으로 삼은 터라, 자일 파티라는 단어를 그대로 옮겨썼다. 한국 산악계에서도 일어식 용어인 자일 파티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한 신문의 논설위원도 독일어seil과 영어 party의 합성어인 자일파티라는 단어를 사설에서 쓰고 있다. “하산하던 자일 파티 하나가 아이젠을 떨어뜨렸다.”(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2560.html), 닛타 지로新田次郎의 소설인 『銀嶺の人』(新潮社 1975, 新潮文庫 1979)도 우리나라에서는 『자일 파티』(주은경 옮김, 일빛, 1993)로 번역되었고, 개정판(1999)에서는 그 제목이 ‘『아름다운 동행』)로 번역되었다. 천박했던 전쟁 이후, 이탈리아의 만사가 비극적일 때, 보나티에게 유일했던 공화국은 고향의 거대한 산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소심하지만, 풍요로운 알피니스트의 삶 을 시작할 수 있었다. 어두운 시대, 보나티의 첫 등반, 산으로의 망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2023. 12.22, 안치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