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에 쓰는 편지
(1978년5월5일 ~2024년5월5일)
일흔이라는 경계를 넘어서자 황혼이라는 말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바람이 심하게 분날 떨어진 나뭇잎을 보아도 문득 가을 같은 나이가 떠올라
노년에사고가 가장 많이 난다는 욕실에 한발 들여 놓는 것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꿈 많은 소년의 시계는 늦게 흐르지만 노년의 시계는 너무 빨리 흐르는 것 같아요.
올해도 벌써 5월로 한 해의 중반에 들어섰습니다. 그 사이에 ‘다사다난’ 이라는
말도 함께 했지요. 하지만 그 난도질(?) 소용돌이가 앞으로 조심하며 살아가라는
경고등처럼 여겨지고 한편은 축복이라 생각했습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이 나이엔
그동안 쌓아 온 많은 경험과 자녀들로 인하여 기쁨도 많지만 아프거나 여러 곳이
고장 나기도 하잖아요.
‘사람의 년 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일지라도 독수리처럼 신속히 날아가나이다.’
이런 성경 구절도 생각나고 하루하루의 삶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 그렇게 소중한 시간들을 다가오지도 않은 일을
앞당겨 걱정도 하고 두 아들과 며느리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잠이 오지 않으면
억지 잠을 청하지만 감은 눈 속에 숨은 정신은 말짱하여 또 다른 생각을 합니다.
‘우리 둘 중에 누가 혼자 남으면 무척 외로울 것 같다.
이 땅에서 부부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영원히 함께 살고 싶은데......’
우리의 남은 시간은 쉼 없이 빠르게 흘러 어느 날 공원 벤치에 앉아 먼 산 바라보며
쉬기도 하겠지요. 더 시간이 많이 흐르면 약발 떨어진 시계처럼 가다서다 벤치에
오래 앉아 있겠지요. 나는 당신과 한날에 한시에 멈추는 시계바늘이 되어 두 손
겹쳐 잡고 누구를 먼저 보내지 않고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점점 멈춤의 시간이 다가오는데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앞으로 나에 대한 걱정들을 멈추어 주세요. 이젠 멈출 시간이 온 것 같습니다.
그걸 멈추고 당신 말대로 못해 본 여행도하고 외식도 하고 삽시다.
그동안 일만 하고 살아온 우리의 몸과 눈과 혀와 귀를 호강 시키는 시간을 갖기로
노력해 봅시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여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줄까’ 고민하며 살아 왔지만
이젠 그 사랑의 고민도 내가 많이 할 테니 당신은 멈추어주기를 바랍니다.
사랑 많은 당신이 그동안 물가에 내 놓은 아이 같은 남편을 사랑하느라고 무척
힘들었지요? 요즘 들어 매사에 신경을 많이 쓰는 당신 모습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당신이 나를 더 많이 사랑해서 정신과 마음과 몸의 소모가
심해졌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을 볼 때마다 마치 오래 사용하여 닳고 닳아진
골다공증의 뼈 사진을 본 듯합니다. 그래서 숭숭 뚫린 그 곳을 채우는 사랑을
내가 감당하고 싶습니다.
어떤 정원사가 꽃을 가꾸기 위해 작은 우물을 팠어요.
가뭄이 지속되고 고인 물은 바닥을 드러내는데 시들어 가는 꽃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떨까요. 귀한 꽃일수록 더욱 마음이 아프겠지요.
아파도아파도 꽃을 사랑하는 정원사는 물을 찾아 나서고 비가 오기를 기다릴 겁니다.
이제 그 정원사를 내가 하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꽃은.
모든 걸 쉬고 그 자리에 피어 있기만 하면 정원사에게 향기를 줍니다.
비가 오고 우물에 물이 가득하자 꽃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참 좋은 처녀가 결혼하고 아이 낳고 세파를 견디어 오면서 현숙한 부인이 되었습니다.
딱 한 가지만 부족하여 부유층이 되어 홈드레스 좔좔 끌며 아침이면 커피를 마시는
여유로운 삶을 즐기지는 못했지요. 저 아래 지방층으로 살다가 저지방 우유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치즈도 요거트 닭 가슴살 카무트와 조가 좋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인은 그 좋은 걸 남편만 먹으라고 주었는데 남편은 먹으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고
너무 미안해서 혼자 먹으니 소화도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화장실에
가서 변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 말했습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놈. 네 놈은 미안하다면서 저 지방우유도 미끄럽게 잘 넘기고
치즈도 목구멍에 넣자마자 잘 녹이고 퍽퍽한 닭 가슴살도 소화도 잘 시키고
설사도 없으니 참 속도 없다.”
여보. 이젠 제발 나를 속과 겉이 다른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 주세요.
미안해서 혼자 먹을 수가 없어요. 콩 한쪽이라도 나누어 먹는다는 속담처럼
우리 작은 것이라도 함께 나누어 먹고삽시다. 내가 보니 당신이 저지방이 더
필요하고 요거트도 치즈도 더 필요한 사람 같아요.
밥 지을 때 카무트는 잘 섞이던데 조 란 녀석은 저만 살겠다고 뜨거운 솥에서
아우성치다가 저희들끼리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던데 그럼 주걱을 휘이~저어야
하는 불편이 있잖아요? 우리 이젠 둘이 어울려 잘 섞여진 잡곡밥처럼 영양가 있는
삶을 살고 싶어요.
모처럼 면발이 생각나는 날 나도 자장면을 좋아 하지만 굳이 짬뽕을 시키는 것은
두 가지 맛을 서로 느껴보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세상살이 이 맛 저 맛 함께 보며
살아갑시다.
세월 앞에 당신 머리카락에 윤기가 전보다 못하고, 마악 부풀어 올라 만지면 터질 것
같은 목련 꽃봉오리 같은 예쁜 손가락 부풀기가 전보다 못한 것을 보아도 미안해집니다.
우리가 남은 생을 산다고 한들 건강한 걸음과 예리한 판단과 똑바른 정신으로 살아갈
날이 몇 년 이겠어요. 우리 둘만의 아름다운 시간들을 많이 만들어 갑시다.
서로 사랑해서 만났지만 그동안 내가 준 사랑보다 당신에게 받은 사랑이 너무 커
너무너무 미안합니다. 눈물이 날 것 같은 밤, 고백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앞으로 내가 더 많이 사랑하겠습니다.”
(1978년5월5일 ~2024년5월5일 결혼기념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