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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담유사(龍潭諭詞』
100년 전만 해도 과학(科學)이라는 말은 우리말에는 없었다. 물질이나 정신이란 말도 우리 언어가 아니었다. 개화기를 지나면서 새로운 로고스*의 권력화에 따라 경쟁적으로 조선인들의 마음에 침투한 이러한 말들은 오늘날과 같이 고차원으로 승화된 시기에도 정신과 의사와 외과 의사가 서로 교섭이나 관계가 없는 것처럼 다른 몸 영역을 다루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나의 ‘몸’은 실체가 아니고 나의 ‘몸’을 구성한다는 육체도, 정신도 실체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육체라는 실체, 정신이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생성하고, 변화하고, 교섭하는 몸이 있을 뿐. 이것은 철학적인 체계를 요구하지 않고 그냥 사실로 인정하면 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지성인들은 이런 얘기를 대부분 수용하려고 하지 않고 있다. 왜일까?
*로고스(logos) 본 뜻은 말(言語)·논리(論理)·이성(理性)을 뜻하지만, 철학용어로는 만물을 지배·구성하는 질서·원리란 의미를 가진다. 이론적인 것뿐만 아니라 실천상의 도덕적 질서를 나타내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용담유사』라는 책은 제목만으로 쉬운 책 읽기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가 밀물처럼 밀려와 우리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생각한 ‘서학’에 빗대어 동학을 일으켜야 한다면서 그 근본원리를 한자로 『동경대전』을 지었는데, 그전에 한글로 이 『용담유사』를 지었다. 『동경대전』이 동학의 경전이라면 『용담유사』는 동학의 원리를 담고 있는 한글가사(歌詞)다. 수운은 조선의 지성인들이 서구의 철학과 종교와 과학과 무력에 무릎을 꿇고 그 장점을 배워야 한다며 겸손하고 비굴하게 아양을 떨 때 주먹을 불끈 쥐고 분기탱천(憤氣撑天)한 모습으로 서구 제국주의를 향해 외쳤다.
“너희들은 하느님을 모른다. 너희들은 사람을 모른다. 너희들은 평화가 무엇인지 모른다. 너희들은 인류를 파멸시키려 하고 있다. 우리가 반만년 이상을 더불어 살아온 우리의 하느님만이 너희를 구원할 수 있다. 우리를 죽이려 하지 말고 우리를 살림으로써 너희를 살려라! 너희들의 미래는 서학이 아니라 동학이다!”
우리 몸의 일부인 대뇌피질(大腦皮質-대뇌를 둘러싸고 있는 회백질의 얇은 층)을 물질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뉴런의 복잡한 시냅스를 정신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몸의 일부지만 손톱은 부담 없이 잘라낼 수 있지만, 대뇌피질을 아무 이유 없이 잘라내는 미친놈은 없다. 함께 몸을 구성하는 중요한 성분이지만, 손톱은 물질에 가깝고 대뇌피질은 정신에 가깝다. 그렇다고 손톱에 정신이 없고, 대뇌피질에 물질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정신과 물질은 실체화될 수 없는 어떠한 역동적 관계에 있다. 흔히 ‘몸’이라고 이해하는 정신과 물질이 이렇다고 말하는 이는 이 책 『용담유사』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저자 도올 김용옥*이다. 그에 대해서는 부언하지 않는다. 많이 알려져 있으므로….
민중을 개혁시키고 어떤 종교를 만들어 민중 속으로 파고들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주장을 담은 경전을 만들었으면 되지 왜 한글로 굳이 ‘가사집’인 『용담유사』를 만든 것일까? 한문을 읽지 못하는 민중이 읽고 쉽고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을까? 『용담유사』는 한글로 만든 가사집이지만, 개념이나 성어(成語) 대부분은 난해한 한문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형태가 민중의 일상언어와 연속성을 지니고 있어 문맥은 쉽게 연결된다. 한문은 아예 발음이 불가능하지만, 한글가사는 발음할 수도 있고 남에게 전달할 수도 있다. 따라서 『용담유사』는 민중 속에서 암송의 대상이 되었고, 베껴 쓸 수도 있었다.
『용담유사』가 쓰여진 해는 1860년 수운의 나이 40세일 때다. 책으로는 간행되지 않다가 『동경대전』이 간행된 이듬해인 1881년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하지 않으며, 1883년 목천에서 목활자본으로 간행된 것이 처음이었다. 『동경대전』『용담유사』둘은 동학의 경전인 동시에 수운 최제우의 문집이다. 1888년 강원도 인제에서 이 둘이 동시에 간행되었고,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893년은 전국에서 동학군의 대집회가 열리는 등 분주한 시기였음에도 현존하는 이것들이 간행되었다는 것은 『용담유사』에 대한 민중의 갈망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예수와 부처의 말씀들은 모두 그들의 제자들에 의해 쓰여졌다. 예수의 초기 자료를 기록한 ‘로기온’에는 예수의 기적 행위나 신적인 언행이 부각 되지 않고 있어서 예수의 실존성에 근접하지만, 로기온 자료 자체도 이미 상당 부분 초대교회의 케리버그(그들이 선포하고 싶어한 예수상)에 오염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용담유사』는 수운의 로기온 자료로 중간을 거치지 않은 언어이며, 육필로 캐리버그가 배제된 것이다. 어떤 사상을 개념적이고 이념적인 논리 구성이라고 한다면, 삶은 비개념적이고 초이념적이다. 그래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사이에는 어떤 차별성을 띤다고 볼 수 있다. 영문학을 번역하듯이 조선시대 한글문학도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독이 생기고 읽기도 이해하기도 어렵다. 『용담유사』가 지금의 한글로 번역된 이유다.
수운의 사상을 표현한 주요 경전은 한문으로 쓴 『동경대전』이란 사실에는 별로 이견이 없다. 당시 한문은 서양 카톨릭문화의 라틴어처럼 보편언어였다. 한문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던 수운이 한글로 가사를 남겼다는 것은 충격이다. 수운이 한글 가사를 쓴 것은 우발적, 흥에 겨워 쓴 것이 아니다. 독자적인, 아주 명백한 문학적 의도를 가지고 쓴 것이다. 정조가 한글을 남겼고 추사도 한글 편지를 썼지만, 수운처럼 가사 문학을 남기지는 않았다. 수운의 가사 문학은 유니크(유례가 없다)한 것이다.
『용담유사』의 유(諭)는 ‘깨우친다’는 뜻이고, 동학을 이어온 지금의 천도교에서는 ‘한울님’이라고 하는데, 이는 수운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하느님’혹은 ‘하늘님’이라 하는 것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당하다. 개신교나 천주교에서 부르는 하느님으로 오해받는다고 하기도 하나, 기독교의 하느님이야말로 동학의 하느님이 민중의식 속에 배어 있는 하느님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모든 교인들이 수운이 말한 하느님 신앙으로 다시 태어날 때 인류에게 빛이 드리울 것이다. 라고 저자는주장하고 말한다.
『용담유사』는 한글 가사로 용담은 경주의 별칭이고 유사는 깨우치는 노래라는 뜻이다. 수운이 자신의 고향인 용담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지은 것으로, 거기에는 어떤 노래가 담았을까? 1) 용담가 2) 안심가 3) 교훈가 4) 도수사 5) 권학가 6) 몽중노소문답가 7) 도덕가 8) 흥비가 등으로 한글이라고는 하지만, 제목도 쉬이 닿지 않는다.
첫 장 「용담가」에는 1860년 4월 5일, 수운이 하느님과 해후하고 무극대도(無極大道)을 받아낸 느낌을 생생하게 적고 있다. 흔히 대각의 체험을 한 뒤에는 시 한 수를 쓴다든가, 제자들에게 설파한다든가, 계시받은 대로 영험스럽게 손을 움켜쥔다든가 하는 사례는 있어도 수운처럼 자신의 전 생애를 회고하면서 지세를 설파하고, 영적체험의 객관적 맥락을 상술하는 경우는 없다. 수운은 자신의 성품 자체가 매우 영험스럽고 신비로운 동시에 격화시키거나 소외시켜서 언어화하는 데 매우 지적이고 명철함을 보여준다.
“수운이 최초의 하느님과 해후한 느낌을 한글로 적었다는 것, 즉 무극대도의 출발이 한글 가사였다는 것, 동학의 시작이 한글 노래였다는 것은 조선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가 한문 「포덕문」을 쓴 것은 한글 가사를 적은 1년 3개월 뒤의 사건이다. 「용담가」의 생생한 느낌은 많이 희석되고 개념화되고 언어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용담가」에 담긴 한글 가사의 느낌이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이유이기도 하다. 비극적인 삶의 역정이 무극대도의 수용을 계기로 환희로 전환되는 감격이 여실히 표현되어 있다.”고 저자는 말했다.
「용담가」는 한글로 써졌지만 고문(古文)을 그대로 적는 것도 어려워 여기서는 그냥 한글로 써본다. ‘국호는 조선이요 읍호는 경주로다. 성호(城號)는 월성이요, 수명(水名)은 문수(汶水)로다. 기자(箕子)의 왕도로 일천 년 아닐런가? 동도(東都)는 고국(故國)이요, 한양은 신부(新府)로다. 아동방(我東方) 생긴 후에 이런 왕도 또 있는가. 수세(水勢)도 좋거니와 산기(山氣)도 좋을시고, 금오(金鰲)는 남산이오 구미(龜尾)는 서산이라. 봉황대 높은 봉은 봉거대공(鳳去臺空)하여 있고, 첨성대 높은 탑은 월성을 지키고, 청옥적(靑玉笛) 황옥적(黃玉笛)은 자웅(雌雄)을 지키고, 일천 년 신라국은 소리를 지켜내네.’
‘경주같이 찬란한 왕도가 또 있는가? 주봉인 금오산(494)과 북쪽의 구미산(594)이 경주를 감싸고 있고, 읍내에는 봉황대가 있고, 첨성대가 있는 월성에는 옥적의 소리가 자웅을 겨루는 소리 끊이지 않으니 이런 문명의 고도가 또 어디 있으랴!’말로 자신이 태어난 곳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이 만난 하느님께서 다음과 같이 또렷이 말씀하시었다고 하였다. “수운아! 이 천지가 개벽 된 후 오만 년이 지나도록 나는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고자 했는데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너를 만나고 보니 너야말로 내가 만난 첫 사람이로구나! 네가 여태까지 허송세월을 했다고 하지만, 나도 또 개벽 이후 인간세의 역사를 위하여 여러 가지 노력을 해보았으나 아무런 공도 성취하지 못했다. 그것이 나의 비극이었다. 그런데 너를 만나 오만 년 만에 성공하니 나도 성공한 것이요. 너도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인간이 된 것이다. 이것이 너의 집안의 행운이기도 하다. 나는 이러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마음속으로 홀로 기뻐하면서 스스로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어화! 세상 사람들아! 이런 무극의 대운(無極大道)이 우리 모두에게 닥쳤다는 사실을 너희들이 어찌 깨달을 수 있을까 보냐! 정말 답답하고 또한 걱정스럽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용담가」처음에는 인문지리를 토로하면서 수운 자신이 하느님을 만난 과정을 서술하면서도 그 대각의 내용은 지극히 짧고 간결하게 처리했다. 하느님과의 해후 직후였기 때문에 많은 얘기를 할 것도 같은데 ‘무심한 구미용담이 평지될까 두렵고 애닮다.’고 하고는 끝낸다. 이것이 수운의 기백이요, 오만 년(긴 세월을 말함) 시혼(詩魂)으로 우리가 수운을 우르러 보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것이 바로 단백미다.
용담에서 득도한 수운은 자신의 득도 사실을 대외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내면화를 위한 시간을 가졌다. 1년 2개월 뒤에 내면적 확실성을 가짐에 따라 1861년 6월 초 주민들을 모아놓고 용담에서 포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복음(福音-복된 소리)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여러 트러블이 생겼다. 이럴 때 문제들을 해명하기 위해 쓴 글이 포덕문(布德文)이다. 그리고 포덕문에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테마를 제시했다. 포덕문에서 미비한 내용은 한글로 『용담유사』를 지어 알렸다. 제2장 「안심가」의 핵심은 내가 가르치는 도는 ‘서학이 아니니 안심하라’는 것이었다. 동학이란 말은 아직 생기지도 않았으나 서학에 대비되는 ‘무극대도’자신의 도가 서학으로 오해받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 때문이었다.
「안심가」는 그 기개와 내용의 밀도가 매우 높은 작품으로 득도 과정에 대한 묘사가 리얼리티(사실적)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여기서는 ‘개 같은 왜적 놈아’라는 표현이 3번이나 나오는데 아무리 서양 제국주의 위세가 세계를 전복시키고 있다 해도 이러한 틈새를 타고 발호하는 것은 개 같은 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었다. ‘진정한 보편주의는 항상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다’는 만고의 진리를 수운의 종교철학, 정치철학에서 발견하게 되는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수운은 왜적에게 조선의 국운과 함께 명줄을 앗긴다. 그것은 「안심가」에서 ‘개 같은 왜적 놈’이라고 비난한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너의 신명 되돌아보라! 네놈들이 강도질하러 이 땅을 밟았다만 과연 너희들이 하륙(下陸-섬에서 들어옴)이 과연 너희 자신들에게 무슨 은덕을 가져다주었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라! 전세(前世)의 임진년 그때도 오성과 한음 같은 큰 정치가가 없었더라면 국가 정체의 근본인 옥새를 과연 누가 보전했을 것인가? 나 또한 하느님으로부터 옥새를 보전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이다. 전쟁은 없었다 해도 천재·경제적 궁핍·정치의 혼란 등으로 무수한 난리를 겪으면서도 살아남은 인생들은 그 복록은 하느님으로부터 정해진 것이지만 수명에 관해서는 무극대도를 밝히는 나에게 의지하려 한다. 가련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내 나라 조선의 운수, 무슨 액이 끼었길래 이다지도 기험할꼬! 거룩한 내 집 부녀들아! 전후 사정을 자세히 살펴보고 안심하소.”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임진왜란을 민족의 수난이자 위국(危國)의 한 축으로 꿰어 바라보지만, 우리 민족이 그것을 승전으로 이끌었듯이 오늘의 위기 상황도 결국 극복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는데, 여기서 짚어볼 것은 오성(鰲城-李恒福)과 한음(漢陰-李德馨)은 선조를 호종한 공신이기는 해도, 그들이 임란을 극복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아마 수운은 단지 민중이 믿고 있는 이야기를 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만고충신 김덕령이 그때 살았더라면 이런 일이 왜 있을쏘냐? 소인들의 참소야말로 참으로 역사를 망치는 위태로운 젓거리로다.”고 한 것을 짚어보면, 아기장수설화의 주인공인 김덕령(金德齡-1568∼1596)은 어려서부터 무인 기질과 뛰어난 용맹, 신체적인 강건함을 타고났으며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고, 백 근 철퇴를 허리에 차고 다녔으며 왜장이 김덕령의 화상을 보기만 해도 무서워 군대를 철수했다는 민중설화가 있을 정도였다.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난 그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왜란이 일어나자, 1593년 담양에서 자신이 모은 의병 3천여 명을 이끌고 출정했다. 당시 전주에 내려와 있던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이란 군호를 받았고, 이듬해 1월에는 선조로부터 춘용장이란 군호를 또 받았다. 1594년 4월 팔도의병총사령관이 되었으며 그의 나이 28세였다. 의병장으로 활약하고 선조로부터 지원을 받은 그는 반란수괴들과 내통했다는 이몽학의 고변으로 처참하게 고문을 받다 옥사하고 말았다.
김덕령은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출병한 장수였고 이몽학과 만난 적도 없었다. 이때는 임란 전투가 소강상태로 김덕령은 명성이 높은 만큼 실제 전투에서 전공을 세울 기회를 얻지 못하고,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휘하 장수들을 혹독한 군율로 다스린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 무렵 개인적 원한을 품은 소인배들이 그를 죽음으로 휘몬 것이 확실하다. 당시의 조정에는 김덕령을 옹호할만한 객관적 자료도, 그를 살려야겠다는 의협심 강한 정치가도 없었다. 그러나 민중은 그의 억울한 죽음을 애석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수운은 여기서 “소인 참소 기험하다.”고 했다. 짧은 멘트지만 김덕령 사건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덕령 사건과 더불어 임진왜란에 대해서도 새삼 통찰해야 한다고 저자 도올은 말한다. 김덕령이 옥사한 것은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으로 수운도 말했지만, 김덕령이 살아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이런 일은 정유재란을 말한다. 정유재란을 임진왜란의 연장선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부적절하다. 재란이 아니라 다른 ‘왜란’이었다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는 것을 자각하고 ‘정명가도’대신 ‘호남집중공략’이라는 새 전략을 세우고 이순신을 궤멸하고자 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조선조정은 여기에 휘말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사형에 처할 죄인으로 몰아 파직하고 고문을 가했다. 칠천량해전에서는 치욕을 당했다.
조선 민중이 처참하게 당한 것은 임진왜란이라기보다 바로 정유재란의 비극이었다. 인적 물적 자원의 보고였던 호남이 일본 수중으로 들어갔고 ‘약무호남 시무국가’라는 말은 허언이 되고 말았다. 칠천량의 낭패 이후 이순신의 백의종군 그리고 명랑대첩과 순천성전투와 관음포해전(노량해전) 이것들이야말로 임진왜란의 승전사 중의 백미가 아닌가? 수운이 말했다. “임진왜란을 전체적으로 조망해볼 때 조선이 정신을 차려 체계적으로 대처했더라면 불과 석 달이면 끝내버릴 수 있는 전쟁인데, 8년을 질질 끌다니 그 무슨 창피한 꼴인가!”라고 말이다.
「안심가」 끝부분은 “음해하는 이 말 저 말 일체 귀 기울이지 말고 거룩한 내 집 부녀들이여! 근심 말고 안심하소. 이 가사를 외워서 다시 개벽 되는 춘삼월 호시절에 평화의 노래를 마음껏 불러봅시다.”라고 외쳤다.(그말져말 듯지말고 거룩ㅎ 니집부녀 근심말고 안심ㅎ소 이가ㅅ 외와니셔 춘삼월 호시절의 티평ㄱ 불너보세)
『용담유사』는 결코 국문학자 손에 희롱 될 물건이 아니다. 모든 통제(通才)들이 힘을 합쳐서 끊임없이 정해(正解)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수운을 이해한다는 것은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요구한다. 그것은 어휘에 대한 사전적 지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수운의 문·사·철을 통관한 지식이 이토록 심오하고 해박한 줄을 나는 미처 몰랐다. 그래도 나는 진실로 최선을 다했다. 도올의 말이다.
제3장 「교훈가」는 1861년 6월 경주 용담에서 포덕을 시작한 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자 한 달 후에 포덕의 정당성을 논한 ‘포덕문’을 지었다. 그러나 미흡하다고 생각했는지 8월 「안심가」를 지었는데, 이때는 이미 경주 관아에서 수운이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인물로 지명해 탄압의 손길을 뻗어왔다. 그는 무죄를 주장하고 결백을 항변해도 음해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것을 알았고, 11월 초 제자 최중희만을 대동하고 울울한 심정으로 용담을 떠나 남원으로 향했다. 「교훈가」는 남원에 도착하기 전에 구례에 머무는 동안에 쓴 것이다. 「교훈가」는 문자 그대로 경주에 남기고 온 제자들을 향해 무극대도의 교훈을 일깨우기 위한 것으로 8장의 『용담유사』중에서 227구로 가장 길다. 다른 가사들은 압축적인데 반해, 산문적이고 유장(悠長)하다. 그러면서 『용담유사』중에 가장 하느님관을 선명하게 나타내기도 한다.
“대저 이 우주에서 태어난 생령들을 보라! 그토록 많은 사람이 있건만, 사람이 없어서 나에게 내렸을까? 왜 하필 나인가! 이미 누천년 이 지구상에서 도를 펼쳐온 유교나 불교의 운세가 다 끝나버렸단 말인가? 윤회처럼 돌고 도는 대전환의 운수라 해도 운수를 나 수운이 어찌 받을 수 있었으며, 억조창생(億兆蒼生) 사람들은 그토록 많고 또 많은데 어찌 그 대도를 내가 받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인물이란 말인가? 대명천지(大明天地) 한 세상을 뒤집고 찾아봐도 없는 그 사람! 그 사람이 어찌 너란 말인가? 어찌 네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고! 아무리 생각해도 묵묵부답(黙黙不答) 해답이 없다.”
대극무도를 받았다고 하는 실존적 체험의 의미를 오롯이 드러내고 있는 수운은 종교체험의 본질을 말하고 득도의 필연성을 설파했다. 또 마지막에는 ‘묵묵부답’이라는 말로 자신의 이름과 관련지어 암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제선(濟宣)에서 제우(濟愚)로, 도언(道彦)에서 성묵(性黙)으로 자를 바꿨던 것을 말한 것이다. 자신의 삶을 대하는 진실성과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교훈가」에서는 내면 의식의 흐름을 드러낸 것과 주관적인 탐색 과정이 나타나 있으며 타관객지에서 체험을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구례에서 장문의 「교훈가」를 쓴 수운은 남원으로 가서 약종상을 하는 서형철의 집에 머물렀다. 서형철은 단번에 그를 알아보고 자신의 집에서 머물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러나 수운은 새로운 풍요로움 속에서 여전히 고독했다. 「교훈가」를 완성한 보름 뒤에 그는 다시 「도수가(道修歌)」를 썼다. 「도수가」는 도를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를 말한 것으로 「교훈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도수가」는 일반인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중간지도자를 위한 것으로 용담에서 시작한 도통(道統)을 지키고 그것을 이어가려고 한 것이었다.
“내가 무슨 대가도 아니고 좁은 소견의 서생일 뿐이지만, 소신대로 법(法-원리)과 도(道-방법)를 가르쳤다. 몇 개월 동안에 열심히 가르쳤으나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오해와 음해가 일어나 불현듯 갑자기 망창(茫蒼-큰일을 당해 앞이 아득한 모양)한 걸음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 내 소견이 좁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좁은 소견에 대한 보상으로 읊어가며 글을 지어 천리밖 고향에 있는 벗들에게 전하노니, 어질고 어진 벗들이여! 매정한 이내 사람 탓하지 말아주오. 부디 그대들 마음속에서 나를 지우지 말아주오. 내가 간곡히 부탁한 성(誠)과 경(敬), 이 두 자의 뜻을 지켜내어 차차 닦아내면 그대들도 무극대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오. 때다! 때다! 바로 그 개벽의 때가 오면 우리는 모두 도성입덕(道成立德)의 대장부가 되어 있을 것이라오. (…) 큰 결심 내려 정도를 지켜 그 마음 변치 않으면 바로 군자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대들의 한 구절, 한 구절, 한 글자, 한 글자 모두 정성스럽게 살펴내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도를 닦는다면 우리는 다시 개벽의 봄이 올 때 당당히 대면할 수 있을 것이라오”희망을 강조한 것이 아닐 수 없다.
1861년(신유년) 12월 말 수운은 남원의 교룡산성 안 덕밀암(德密菴)으로 거쳐를 옮겼는데, ‘자취를 숨기고 은거하는 곳’이라 하여 은적암(隱跡庵)으로 이름을 고쳤다. 집사람과 오래전에 교룡산성과 은적암을 답사하고는 수운과 그의 제자들이 거처하고 동학운동이 일어난 곳이라는 설명을 보기는 했어도, 수운이 여기서 무엇을 했는지 몰랐고, 수운에 대해서도 잘 몰랐었다는 생각이 난다. 서형철의 집에서 은적암으로 옮기자 수운은 자신이 오히려 이단으로 몰리고 있는 난처한 상황에 대해 매우 근원적인 기획을 하게 된다. 그것은 사상적 기획일 수밖에 없었다.
수운은 우선 ‘무극대도’라고 한 득도 내용을 서민들이 알아듣기 쉽게 고쳐야 할 필요를 느꼈다. 또 자기를 음해하는 난법난도자들에게 왜곡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을 서학을 추종하는 자로 낙인찍는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배제할 필요도 있었다. 이에 필연적이고 명료한 해답은 「서학」에 대한 「동학」이라는 새로운 아이덴티티(현재 자기가 가진 특성이 언제나 과거의 그것과 같으며, 미래에도 이어진다는 생각)였다. ‘동학’이라는 명칭은 ‘무극대도’라는 본래적 성격을 너무 피상적으로 만들고 대립적이고, 국부적 상대적 제한성을 가질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해동(海東)과 조선의 동東은 발음이 편하고 서학으로 오인될 소지를 없애버린 것으로 은적암에서 이를 구상했던 것이다.
「동학」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구상하면서 수운은 동학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필요를 절감하고 임술년(1862)새해 첫날부터 ‘동학론’ 집필을 구상했다. 그 동학론 내용을 암시하는 한글 가사가 『용담유사』제5장 「권학가」이다. 권학가(勸學歌)는 ‘동학을 권하는 노래’로 주자가 말한 ‘배움을 권한다.’는 뜻과는 다르다. 권학가와 동학론의 요소는 동시적 사건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권학가」는 당시에도 달랐던 경상도와 전라도 풍속과 풍경을 소개하며 “이곳의 아름다운 풍경은 말할 것도 없지마는, 동지섣달 설한풍 속에 이 동네 저 동네 전진하다가 은적암에 당도하게 되었으니 이제 한바탕 웃고 털어버리는 수밖에 없다.”라고 한다. 이어 민중의 현실은 전라도도 처참하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모든 용례에서 ‘인간’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 사이’즉 사회를 가르킨다. 중국 사람들도 사람을 인간이라고 말하지는 않고 그냥 ‘르언(人)’이라고 한다. 사람 사이는 모두 똑같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난세는 역사의 운수가 윤회하듯이 뒤바뀐 것이니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소? 쇠운(衰運)이 지극하면 반드시 성운(盛運)이 오게 되어 있소. 그러나 한마음으로 단결하지 않으면 성운은 실현될 길이 없소.”라고 하고는 혁명의 가능성을 분명하게 암시했다. “아∼ 통난스럽도다! 사지에 빠져버린 민중들아! 이 나라 운명을 어찌할 것이냐? 보국안민을 과연 어떻게 달성할 것이냐!”고 외치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 외세 문명의 폭력에 저항하는 포괄적 가치관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권학가」에서는 ‘장평갱졸(長平坑卒)’고사를 인용하고 있는데, 처음 듣는 이야기라 간추리면 이렇다. 출처는 『사기』, 「진본기」「백가왕전열전」과 「범수채택열전」이다. 백기(白起, ?∼BC 257)는 선진시대 타고난 명장으로 가장 많이 이기고 가장 많은 사람을 죽였다. 진나라가 강성해질 수 있었던 것은 백기 덕분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그 백기가 항복한 조나라 군사 40만을 속임수로 꼬여내 한 구덩이에 몰아넣고 매장해 버렸다. 그러나 내부 음모에 휩싸여 소왕으로부터 칼을 받고 자결하게 되는데 백기가 칼을 목에 대고 이렇게 외쳤다. “도대체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기었길래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我何罪于天而至此哉)”그리고 한참 후에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 같다. 장평의 전역에서 나에게 투항한 조나라 수십만 병졸은 투항했을 뿐 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들을 속여 모두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이 죄만으로도 나는 죽어 마땅하다.”
투항한 조나라 병졸들이 나중에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엄청난 죄악을 저지른 것이었다. 수운이 ‘장평갱졸’을 언급한 것은 사서(史書)에 맥락이 닿아 있다. 다시 말해 한 장수의 좁은 소견으로 40만 고귀한 생명이 무참히 살해한 것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피력한 것이었다. “가련한 사람들아, 백기와 같이 자기 편만을 위하여 마음을 쓰는 이기적 생각을 하지 말아라!”고 하고는 이것이 ‘각자위심(各自爲心)’의 결과로 “각자위심하지 말고 경천, 순천하였스라! 호박한 세상에 살수록 그대들은 그대들의 근본인, 즉 하느님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잊어서는 안 된다. (…) 나는 세속의 짜여진 틀에서 보자면 허송세월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이오. 어느덧 문득 나이 사십이 되고 말았구려! 사십 평생을 열심히 산 나의 모습이 겨우 이것뿐인가! 무가내(無可奈-어찌할꼬)! 뭔 다른 도리가 있으랴!”고 하며 자신을 한탄하기도 하였지만, 궁극적으로는 동학을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태극마저도 사라진 극(極-한계, 산정)을 넘는 무극의 행보인 무극대도를 주장한 수운은 제사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서양인과 인도인들은 하늘을 하나의 기(氣)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층 차원으로 생각하기에 하늘마다 그 신이 다르다. 수운은 ‘하늘나라(Kingdom of Heaven)’를 옥경대(玉鏡臺)라고 했는데, 전통적으로 옥경대는 천제가 거하는 곳을 말한다. 도교에서는 옥황상제가 사는 천상의 궁전을 옥경대라고 한다. “우습다. 저 하느님 믿는다는 사람들은 저희 부모 돌아가신 후에 신위도 없다 일컬으며 제사조차 거부하고 있다. 오륜의 상식에 벗어나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빨리 죽어 옥경대에 갈 것만 기도하고 있으니, 도대체 이게 뭔 짓들인가! 부모에게 있지도 않은 혼령혼백이 어떻게 자기 혼자에게만 있어 하늘로 올라간단 말인가? 부모도 없는 혼령혼백이 상천하여 무엇할꼬? 어리석은 소리 하지도 마라.”
제사는 우상숭배와는 다르다. 기독교 신앙의 문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동방에 뒤늦게 도착한 도미니칸 종파의 선교사들이 제사불가를 내걸어 전례 논쟁을 유발시켰다. 우리나라에 온 파리외방선교회 신부들은 대체적으로 매우 저질적인 제국주의자들이었다. 이들에 의해 우리나라의 순결한 천주교인들이 희생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1962년 개최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제사가 공인되었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얻을 수 있다는 ‘보편구성원설’의 방향으로 교회의 진로를 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기독교인들은 제사를 터부하거나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궁금하다.
제6장은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라는 제목인데, ‘꿈속에서 노소가 문답하는 노래’라니 혁명가사로는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현실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꿈을 빌어 하는 이야기고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코믹하기도, 경쾌하게 읽히는 문학작품 같기도 하다. 하지만 가사는 진실로 ‘혁명의 노래’자체로 동학 탄생의 배경에는 이 혁명의 노래가 민중의 가슴에 배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수운이 은적암에서의 반년의 생활을 청산하며 이 노래를 완성함으로 은적암에서의 고독한 지적 탐색을 완수했다. 수운은 서학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도 장점을 취하고, 당시 크게 유행하던 『정감록』의 피세주의를 비하하면서도 혁명의 기개만은 취한 것이다. 초월과 내재, 인격과 비인격, 불연과 기연(機緣)이 하나로 혼융된 데 수운 사유의 특질이 있다 할 것이다. 「몽중노소문답가」는 그런 특질이 유감없이 표출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살면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현실 진단이 언제나 중요하다. 수운은 당시의 현실을 ‘관작을 팔아먹는 세도자 놈들, 돈과 쌀이 창고에서 썩어나는 부유한 첨지양반들, 유리걸식하는 불쌍한 패가자들까지 도피할 생각에 미쳐있고 바람결에 떠도는 가짜뉴스에 현혹되어 부유하는 인생들’이라고 진단하고는 ‘내가 옳고 네가 그러다’는 생각은 합리적 대화나 혼란타개에 대한 공통의 생각이 없는 것이라 개탄한다. 꿈속에서 신선이 나타나 “하느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이 서로 상통한다는 것을 네가 지금은 모른다 해도 언젠가는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다시 개벽에 뜻을 두게 되면, 금수 같은 세상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뜻을 어렴풋하게나마 알아낼 것이다. 언제 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너 또한 신선의 연분이 있는 사람이니 나를 아니 잊고 다시 찾아올까?”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 놀라 주변을 살펴보니 신선이 있던 곳은 찾을 수 없었고, 꿈이었던 것이다. 수운이 꿈꾸었던 세상은 「몽중노소문답가」에서 나타내고 있다.
상당히 어려운 책 읽기라고 예상했지만, 그런대로 읽힌다고 생각하면서 이제 제7장 「도덕가」와 제8장 「흥비가」를 보도록 한다. 1862년 7월 은적암을 떠난 수운은 경주 근처 건천읍 금척리 대추나무골로 돌아왔다. 그가 경주로 돌아왔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만큼 스승을 모시고 싶은 도인들에게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젊고 잘 생기고, 체력도 좋은, 한문과 언문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문장가로, 합리적 사상가로 신비로운 능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시대적 우환의식 속에 민중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졌던 수운이었다.
수운이 머물렀던 박대여(朴大汝)의 집에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자 경주감영에 고변한 자가 있었고, 감영에서는 수운을 불렀다. 당당히 말을 타고 간 수운을 여러 도인들이 따르고, 감영에 들어 세를 과시했기 때문인지 감영에서도 함부로 건드리면 화근이 된다는 판단을 내렸는지 며칠 후 그를 방면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관과 조직적 대결이 불가피해졌을 뿐 아니라, 수운도 인간적으로 몹시 불쾌해했고, 모욕감을 느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수운은 흥해면 매곡리 손봉조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거기서 그는 최초로 동학 교단인 접제도(接制度)를 만들고, 접주 16명을 임명했다. 1862년 12월 30일의 일이다. 그리고 이듬해 3월 9일 용담으로 돌아왔다. 본거지이며 득도장소인 용담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동학」을 숨길 필요가 없고, 세간의 눈을 피할 이유도 없으며, 당당히 무극대도의 진리를 선포한 셈이었다. 그 댓가는 ‘죽음’일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용담에는 항상 사람들이 들끓었고, 이전과는 달리 자체적 시스템이 돌아갔다. 이런 분위기에서 「도덕가」가 집필되었다.
「도덕가」의 도덕은 영어 ‘morality’라고 하는 현대적 개념의 도덕이 아니다. 현대의 도덕은 과학적 사실과 대비되는 인간행위의 가치영역을 의미하지만, 동양의 언어에는 그런 대비적인 개념이 없다. 도는 길이고, 인간이 마땅히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덕은 인간이 길을 가는데 필요한 덕성으로써 길과 더불어 온축(蘊蓄-깊이 쌓임)되어 있는 것이다. 도덕은 삶의 총체, 삶이 위치한 우주의 총체다. 수운은 「도덕가」를 쓰기 전에 흥해에서 제창한 접주제도를 거두었는데, 그것은 점점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는 사후의 일을 정리한 것이다. 접주 제도를 거둔 파접(罷接)과 동시에 구상한 것이 ‘해월의 후계자 지목’이었다.
「도덕가」가 후계자로 지목한 해월(海月-崔時亨)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아니지만, 도덕의 핵심은 지식이 아니라, 천지가 귀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있고 그것은 도깨비의 광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天)과 따님(地)에 대하여 경외지심(敬畏之心)을 갖는데 있음을 말하고 있다. 수운의 신관과 인간관을 가장 명료하고 간결하게 보여주는 것이 「도덕가」다. 「도덕가」를 통해 그의 사상적 변천과정을 읽을 수 있으며 또 그가 얼마나 시대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하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지력과 필력과 뚝심은 조선의 어떤 사상가 그 누구도 그에게 필적할 수 없다.”저자 도올이 말했다. 「도덕가」는 집필 당시 「도수가(道修歌)」였으나 이미 반포한 「도수사(道修詞)」와 혼동될 우려가 있다고 보아 「도덕가」로 바꾼 것이다.
「도덕가」마지막은 「포덕문」마지막과 같이 “일일이 그대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찌 내가 그리워하는 회포가 없을까 보냐! 내가 그대들을 위해 쓰는 이 한글가사 두어 귀라도 나에게 직접 들은 듯이 외워내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도를 닦은 후에, 잊지 말고 생각하도록 하시오.”라고 당부하고 있다. 수운은 지극히 고매한 정신적 경지를 획득했지만, 결국 역리(逆理), 비루(鄙陋), 혹세(惑世), 기천(欺天)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고 조선 문명의 허구를 까발리고 있는 것이다.
수운의 이러한 자기부정의 용기는 동학으로 하여금 모든 계급·계층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한다. 수운은 이미 자기 죽음을 현존화함으로써 유교문명을 제압하고 있으며, 앞으로 조선 문명은 과거의 유교 문명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무극대도를 이상하게 보는 영남유생들의 음해를 눈치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음해와 함께 조선왕조가 망할 것을 예견하고 당당히 ‘다시개벽’이라는 자기 논리를 나타낸 것이다. 그것은 문명에 대한 새로운 외침이 아닐 수 없다.
『용담유사』마지막인 제8장 「흥비가(興比歌)」는 제목부터가 와 닿지 않는 느낌인데, 수운이 남긴 마지막 한글가사이기도 하고, 어쩌면 그가 남긴 유언장인지도 모를 글이고, 특히 동학의 운명, 자신 사후에 전개될 애절한 심려, 도인들의 수도 자세에 대한 훈도의 말들이 어느 가사보다 절실히 적혀 있다. 수운이 이 노래를 쓴 것은 1863년 8월로 「도덕가」를 쓴 직후이고 이해 12월 13일 용담골에서 서울서 내려온 선전관 정운구에 의해 체포된 수운은 이듬해 3월 10일 대구 남문성 앞 관덕당(觀德堂) 뜰에서 효수되었다. 그렇게 보면 「흥비가」는 삶이 끝나기 4개월 전, 마지막 투혼을 불살라 지은 것이다.
1863년 3월 9일 수운이 흥해에서 용담으로 돌아온 것은 그가 조선왕조체제와 영남유생조직과의 대결을 불사하고 본격적인 포덕을 감행한다는 것을 의미한 것으로 세는 크게 넓혔지만, 동시에 도통(道統)을 사칭하는 사기꾼들이 모여들고, 정도(正道)와 사도(斯道)의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다. 수운은 과연 내가 죽은 후에 정도가 지켜질 것인가를 의심했다. 자신과 도유들을 파고드는 사기꾼들을 ‘의아 있는 그 사람’으로 표현했는데, 삐딱한 놈이란 뜻으로 모든 사태를 삐딱하게 왜곡해 자기가 사기 처먹기 유리한 상황으로 만드는 놈들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쓴 것이다. 의아 있는 그 사람을 ‘모기’에 비유하여 논한 가사가 바로 「흥비가」다.
「흥비가」는 제목부터 이상한 느낌을 받는데, 이유가 이 노래는 모기의 형태를 자세히 분석한 뒤에 사기꾼들의 행각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으로 그것이 무극대도의 경전 내용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기노래」라고 하면 사람들이 얕잡아 볼 것 같아서 『시경』의 시짓는 작법에 비유하여 「흥비가」라는 제목을 정한 것이다. 모기의 특성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도와 비유하면 1. 모기는 생존을 위하여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것이 삶의 소임이다. 2. 모기는 사람의 피를 빨아먹으려는 사악한 목적을 가지고 타자(동학도유)에 접근한다. (…) 9. 모기는 피를 빼먹고 사라진다. 10. 사라지면 모기는 잡기 어렵다. 수운이 죽기 전에 이렇게 코믹하고 문학적 향기가 짙은 가사를 쓴 것은 위대한 통찰력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얼마나 애틋한 위국 사상가인가를 알 수 있게 한다. 「흥비가」에는 모기 외 ‘천고청비(天高聽卑)’, ‘오비이락(烏飛梨落)’, ‘위산구인(爲山九仞)’, ‘두어 자 썩은 나무’등 비(比)를 테마로 하는 마이너들이 정확한 출처를 두고서 해석하고 있는데 모두 매우 어렵게 느껴지는데, 수운도 「흥비가」를 짓고 나서 제자들이 과연 이 가사를 제대로 이해했을까 의아심을 품었던지 자신의 생일날 모여든 제자들에게 물었다. “내가 일전에 「흥비가」를 지었는데 누가 그것을 외워 독송할 수 있겠는가?”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자 ‘극사묘연간’이란 시를 지어 보여주었다.
“吾心極思杳然間 疑隨太陽流照影(오심극사묘연각 의수태양류조영)”
(나의 마음은 저 묘연한 우주의 극한을 헤매고 있다.
나의 그림자조차도 허상이 아니라, 밝고 밝은 저 태양을 따라 흐르는 실상이다) 허황된 자괴감이 아니라 자신감이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는 일반적으로 사람은 칠팔 세에 글을 배워 유명한 문장이나 찾아내고, 멋있는 구절을 따다가는, 조립하는 그런 짓을 하면서 심장적구(尋章摘句-옛사람의 글을 따서 적음.「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한 말)로 과거에 급제해 입신양명하고자 했다. 수운도 그것을 위해 노력했지만 시대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 꿈은 깊은 웅덩이에 쑤셔 넣어야 했다. “얼마 남지 않은 듯한 내 인생도 이 말 저 말 다 하니 할 말도 너무 많고 써야 할 글도 너무도 많소. 그러나 다할 수 없으니 기록한 것이 이와 같소. 내가 쓴 이 글도 보고 저 글도 보아 그 속에 담긴 무궁한 이치를 파악하시오. 초자연적 사태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자연적 사태라는 것을 파악하시오. 글과 말이 모두 언어의 한계를 넘어 무궁한 세계를 달려가고 있소. 나의 친구들이여! 그대들이 무궁한 세계를 살펴내어 무궁한 앎에 도달하기를 바라오. 무궁한 천지대자연 속에 무궁한 나 아니겠소?”
「흥비가」마지막 구절이다. 이제까지 『용담유사』대략을 살펴보았다. 2021년 5월 대한민국 정부는 1894년 일어났던 ‘동학농민운동’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했다. 실로 127년 만의 일이다. 흰옷을 입고 죽창 하나 든 몸으로 싸우던 그들을 바라본 토벌대장 이규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서로 앞을 다투어 수만 명의 농민군들이 산등성이로 올라왔다. 도대체 저들은 무슨 의리(義理)와 무슨 담력(膽力)을 지녔기에 저리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그때 저들의 정황과 자취를 기록하려 하니, 생각만 해도 뼛골이 떨리고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들은 과연 죽음을 향해 돌진했을까? 아닐 것이다. 삶을 쟁취하기 위해 죽음의 모든 권세를 짓밟고 생명의 땅으로 ‘다시개벽’의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한 것일 것이다. 이때 적어도 30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당시 서울에 와 있었던 영국 왕립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 여사는 동학혁명에 대해 이렇게 썼다. “동학군은 너무도 확고하고 이성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어서, 나는 그들의 지도자들을 ‘반란자들’이라기보다는 ‘무장한 개혁자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들은 외국인인 내가 봐도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을 주장했다. 그 모든 것이 구구절절 옳은 말들이었다.”
『동학』은 19세기 중엽 경주 용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란 최수운이라는 한 청년의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된 사회운동이지만, 그것은 결코 단순한 종교운동이 아니라, 고조선으로부터 내려오던 광활한 조선대륙 민중의 삶의 총체가 응축된 정신문화가 폭발하여 만들어 낸 새로운 결정태다. 유·불·선의 전통이 융합된 토양 위에서 합리적 정신을 우주의 신비와 결합시킨 신유학의 심성론을 고수하며 그것을 해탈하는 정신의 열정이었다. 그 열정이 서학과 맞닥뜨리면서 보국안민 속에 자각과 자생, 자주를 외칠 수밖에 없었던 포효(咆哮-사자후)였다.
수운 최제우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하는 천주사상을 알면서 자신의 우수한 유학 선배들이 서학에 매료된 이유를 알게 되었고, 그러한 평등관의 배면에 변함없이 초월적 독재자 천주가 엄존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 이념이 곧 ‘야훼’혹은 ‘데우스’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군림할 것을 간파했다. 그래서 수운은 “인간의 평등은 오로지 인간이 하느님과 평등할 때 달성되는 것이다.”고 했다. 이에 대해 그리스찬들은 “기독교는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겸손을 가르친다.”라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수운은 “겸손해야 할 주체는 우리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사람 앞에 겸손해야 한다.”고 했다. 야훼는 민족신이고 전쟁신이며, 질투하는 하느님이고, 호오(好惡)가 확실한 하느님이며, 인간집단을 도륙하는데 하등 가책을 느끼지 않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이 정의를 결하면 그것은 하찮은 우상에 불과하다. 민족에 대한 호오가 있는 하느님은 특정한 문명권 밖으로 수출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이러한 하느님을 거부했다. 야훼는 하느님의 자격이 없는 우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는 예루살렘의 성전을 뒤엎었다. 다윗왕의 보디가드나 하는 야훼를 축출한 것이었다. 예수는 다윗왕권을 거부했다. 그런데도 초대교회는 예수를 다윗의 후계자로 만들고, 그를 메시아로 조작했다. 수운은 이런 조작을 꿰뚫고 있었다. “서양 사람들은 천주의 뜻을 빙자하여 좋은 일을 베푸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천하를 공취(攻取)하려 한다.”고 했다.
수운은 깨달음을 얻은 뒤 자기 검증 시간을 갖고 초월적 인격체로서의 하느님을 만났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하느님은 인격성을 초월하는 존재(Sein) 그 자체이어야 한다. 어찌 하늘 꼭대기에 상제님이 옥경대에 계시다고 보는 듯이 말을 할꼬?”라고 하였다. 인격성이 거부된다는 것은 인간세의 호오에 좌우되지 않는 정의로운 공평한 존재라는 뜻이다. 그런 하느님은 무위이화(無爲而化-애써 공들이지 않아도 스스로 잘됨)하다고 했다. 노자가 말한 도법자연(道法自然)과 같은 뜻이다.
동학농민운동을 전라도에서 궐기한 정치·사회적 맥락의 항거로만 분석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전라도 나름대로 역사환경이 있었지만, 이미 전국민의 신념체계로 보편화되어 있었고, 보편적 조직을 관장한 사람이 『동학』의 제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었다. “일체의 사람을 하느님으로 대하라. 손님이 오거든 하느님이 오셨다 하라. 타인과 시비를 말하지 마라. 이는 천주를 시비함이라. 네가 먹는 밥 한 숟가락 그것이 곧 하느님이고, 온 생명의 근원이니라. 제사상은 청수 한 그릇으로 족하니라. 청수 한 그릇이야말로 하느님이기 때문이다.”수 많은 해월의 설법은 너무나 쉽게 민중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녹두장군 전봉준* 또한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 및 빈부계급이 무無하고 일체 평등하다’이것들은 임시정부의 헌법 제1조의 내용이다. 이것은 외래사상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동학정신을 개화한 것이다. 3.1만세 운동을 주관한 것도 동학으로 공주 우금치 전투의 리서 손병희, 상해임시정부를 이끈 김구는 황해도 팔봉접주였고, 건준을 이끈 몽양 여운형 선생의 큰할아버지는 동학경전을 만든 사람이고, 상해홍구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터뜨린 윤봉길도 충청도 동학의 리더 배성선의 훈도를 받고 그는 윤봉길의 장인이었다. 33인의 대표 가운데 15명이 동학과 관련이 있으며, 그중 9명은 직접 일본군과 싸웠던 이들이다. 『동학』을 돌아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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