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역사와 문학이 어떤 관계로 존재해야 하며, 역사소설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어렵게 푸는 것은 삼가겠습니다. 다만, 그런 이야기들을 실제 문학 작품들을 이야기하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우리 역사라고 하면 무조건 반만 년으로 헤아리는 단군조선 때부터의 우리네 ‘유구한 역사’를 머리에 떠올릴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요. 그러나 사료에 기초한 상상력의 산물인 역사소설은 기회가 있으면 따로 논의하기로 할까 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자 하는 것은 오늘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우리의 현대사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러므로 대개 이를 제재로 한 작품은 실제로 역사소설이라는 인식을 갖지 않습니다. 그만큼 현대사는 우리가 통상 의식하는 역사와 구별되게 인식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의식에 대해서 나는 잘못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그러한 현실적 인식에 대하여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인식에 따르는 문학 인식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합니다. 따라서 현대사의 증언을 다룬 문학 작품-특히 동화 문학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학계에서 우리 현대의 기점은 여러 가지 논의가 있지만 여기서는 현재 살아서 우리와 함께 숨쉬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세대가 살아온 시대로 일단 한정지어 보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20세기의 우리 겨레와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 20세기는 대한제국으로부터 일제의 강점기를 거쳐 광복후 혼란기까지의 전반세기와 이른바 통상 ‘육이오’로 일컬어지는 한국전쟁과 전후 세상의 50년대, 사일구와 오일륙으로 시작되는 개발 독재와 산업화 시대로 일컬어지던 60년대, 그리고 유신 체재에 저항하던 70년대, 광주 사태로 비롯된 80년대, 그리고 그 이후 - 우리의 20세기는 그야말로 숨 가쁘게 이어져 왔습니다.
오늘의 어린이들에게 일제 강점기가 수백 년 전의 역사나 마찬가지로 그저 가마득한 신화처럼 들려서 도무지 현실로서의 실감으로 다가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어머니들조차도 그런 생각이 들지 모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일제 강점기가 시작될 무렵에 태어난 분 중에 많은 분들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숨쉬면서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그분들에게 직접 당한 35년간의 고초를 증언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겪은 분의 증언과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역사적 사실은 듣거나 읽는 이에게 전혀 다른 느낌으로 전해옵니다. 그것은 살아서 생동하는 것과 죽은 미이라를 보는 것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분의 증언은 오늘 나의 현실로 인식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일제 말기, 1940년대 초, 그때는 일제가 연합국을 상대로 세계제2차대전을 일으킨 때입니다. 따라서, 일제는 단말마의 군국 정책으로써 국력의 마지막까지도 전쟁터로 몰아넣던 시절이었으니 식민지 대우야 이루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시절에 소학교, 중학교 다니던 분들이 지금 70세 전후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십니다. 바로 지금 우리의 가족이요, 우리 아이들의 할아버지이며 우리 어머니들의 부모 세대에 해당할 것입니다. 바로 그 분들 중에 정신대에 끌려가 죽음보다 못한 수모를 당한 할머니들이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어찌 바로 오늘의 우리 현실이 아니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광복 이후의 일이야 그야말로 ‘일러 무삼 하리오’.
그럼에도 우리 아이들에게는 신화 같은 역사로 여기도록 방치해 두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기성인의 잘못입니다. 비록 일제 강점기에 살아본 적은커녕 태어나지도 않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때 그 시절이 주는 의미와 그 시절이 오늘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면 그것은 부모로서, 또는 교사로서, 그리고 문학인으로서 직무유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아동문학가는 분단의 현실에 대한 그 진실된 모습을 어린이들에게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보여줌’에 있어서 결코 의도적인 과장, 은폐, 조작 따위를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리얼리즘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옷깃을 여미고 신념에 의한 진실만을 말할 수밖에 없다는 열정에 의하여서만 우리의 한이 선명해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권정생 작가는 한국 아동문학계엔 보기 드문, 우리 민족이 당한 비통하고 굴욕적인 역사의 피해자를 내세워 증언하는 서정적 작가입니다.
권정생의 『몽실 언니』는 민족 분단의 비극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소년소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진실된 모습’과 ‘적나라한 모습’을 혼동하기도 합니다. ‘적나라한 것’은 ‘사실’이지만 때때로 과격성을 드러내는 것일 뿐 아니라 오히려 ‘진실’에 대한 본질을 그릇되게 할 우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해 지려면 적나라해질 수도 있다는 각오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몽실 언니』는 작가가 끊임없이 펼쳐 보인 의식 세계가 집대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의식 세계는 미천하고 구박 받는 존재에 대한 가긍심(可矜心)과, 우리 겨레의 불행이 분단과 전쟁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애절한 붓끝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작가 정신이라거나 의식이라고 하기보다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소설은 6.25 때 시골에서 자란 신체불구의 여인인 몽실언니가 주인공입니다. 불구자와 결손 상태의 인물은 권정생이 다루는 인물의 가장 중요한 대상입니다. 그의 작품에는 거의라고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많은 작품에 이런 형의 사람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절름발이 막돌이(‘무명저고리와 엄마’에서), 앉음방이 탑이 아주머니(‘보리 이삭 팰 때’에서), 짝짝이 뿔을 가진 늙은 암소(‘들국화 고갯길’에서), 정신이상자인 어머니(‘사과나무밭 달님’에서), 절를발이 수산나 아주머니(‘나사렛 아이’에서) 같은 이들이 나타납니다. 뿐 아니지요. 비록 신체적 불구자는 아니라 할지라도 정신적으로나 환경적인 결손 상태의 인물들이 같은 맥락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달래 아가씨, 공 아저씨, 똬리골댁 할머니 들을 비롯해서 ‘별똥별’이나 ‘해룡이’에 나타나는 고아들이 바로 그런 인물들입니다. 문제는 하나같이 비극의 사연을 안고 있는 불우한 사람들이며, 그 비극의 씨앗은 결국 겨레가 공동으로 당한 재난 속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물들은 곧 우리 모두의 모습임을 확인하게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절름발이 몽실언니의 모습’을 하고 비원 속에 살아가는 한 겨레입니다. 그것은 남쪽이나 북쪽의 어느 한 쪽만의 사람이 아닙니다. 반도 삼천리에 터 잡아 사는 우리 모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권정생 작품 배경의 대부분은 6.25 전쟁이라고 하는 민족의 비극, 바로 그 현장이거나 이와 직간접으로 연결된 상황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해방이 되자 이 땅에 그어진 분단의 금과, 일제가 남긴 빈곤의 유산과 자립적 의지를 잃고 외세 의존적이었던 불행한 겨레의 의식이 빚어낸 필연적 비극이었음을 그의 작품 도처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론가 최지훈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