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지도 속에 있는 지명들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글씨가 선명하지 않아서 판독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따라서 지도에 한글로 병기하는 작업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방위도 정확하지 않아서 현재의 위치를 찾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특히 물길의 경우 1930~40년대 큰 변화가 있었고, 강경포의 위치를 당시 옮긴 것을 보더라도 이 지도만으로는 찾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지명의 어원까지 찾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지식 및 많은 자료가 필요하기 때문에 틈틈히 보완해서 완성하려고 합니다. 이 게시물의 내용이 알고 계신 내용과 다르다거나 제보하실 내용이 있으시다면 댓글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1871년 여산부 지명 1. 가산리(加山里, 서삼면)
이두의 더메가 변형된 단어, 더뫼, 둔덕. 지형이 두두룩해서 유래된 지명.
이 지도에서 강경포는 선리에서 황산강(금강) 건너편의 월포리 인근에 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고 또 월포리는 여산의 관할 지역임을 알 수 있는데, 나중에 어떤 경로로 충청도에 이관되었는지는 찾지 못했으나 1912년 4월 17일자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의 내용에 의하면 월포는 다시 여산군 북일면에 편입되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忠淸南道 및 全羅北道의 管轄區域을 다음과 같이 變更하다.
객사는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궐패가 봉안되어 있어 각 고을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고, 수령들은 한 달에 두 차례씩 망궐례를 행했다.
고내곡을 통해 고산(화산)으로 가는 성재는 산적들이 웅거하고 있는 길목이었다. 성재라는 지명은 오래된 산성이 있어서인데 삼국시대 이전의 성으로 추정된다.
삼남대로는 송화리와 승지리 동쪽의 길을 통과 수교를 건너 남산 마을~신막~연명으로 이어졌다.
마을 앞까지 금강 물이 들어왔으며 돌기둥에 배의 밧줄을 묶었다고 한다. 마을 역사가 150년 됐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좀 더 북쪽 동네인지?
역(驛)의 유래 역(驛)은 일종의 정거장과 숙박시설이 함께 운영되던 곳이다. 다시 말한다면,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든 도로를 따라 여행을 하다가 쉬는 곳이 바로 역이다. 단지 공무 여행자에게만 쉼터가 제공된다는 것이다. 일반인들 여행객을 위해서는 원(院)이나 주막 같은 것을 따로 운영하기도 했다. 아무튼 전근대 국가에서 역이란 교통과 통신망의 근간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군사적 목적으로 많이 쓰였기 때문에 국방을 담당하는 병조(兵曹)에서 관할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 전통시대의 제도들이 거의 중국에서 들어왔는데, 역제(驛制) 역시 중국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 땅에 기차가 들어 온 지 한 세기가 더 흘러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역이라 하면 으레 기차역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옛길을 다니며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것은 기차가 아니라 말이었다. 이에 따라 기차가 처음 들어왔을 때 우리 선조들은 철마(鐵馬)라 불렀던 것이다. 따라서 옛길을 따라 조성되어 있는 역은 말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기도 하다. 몽고가 대 제국을 건설했을 당시 역참(驛站)제도를 통해 그 넓은 영토를 잘 다스렸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참적(站赤; 잠치 Jamchi)가 바로 그것이다. 오고타이 칸의 치세 원년(1229)에 이 제도를 정비하여 각 역에 거마·인부·숙소·음식물을 갖추고 관리·사자(使者)를 호송하거나 물자를 수송하는 데 이용하였다. 이 때문에 수도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한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교류가 활발해 질 수 있었다. 원나라 수도 대도(大都;北京)를 중심으로 소·배[船]·개 등 각 지역에 편리한 운송수단도 채용되었다. 이용허가증인 '패자(牌子)' '포마성지'를 가진 자는 그 증명내용에 해당하는 역을 이용할 수 있었다. 우리의 마패(馬牌)와 같은 것들이다. 마패는 암행어사 신분을 나타내주는 증명서가 아니라 역에 비치된 말을 징발할 수 있는 숫자를 표기한 것이란 것쯤은 이제는 상식에 속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대국가에서부터 역(驛)이 매우 중요시되었던 것은 틀림없다. 나라의 체제가 갖추어가지 시작하면서부터 인간의 역사가 투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 군사적 목적으로 매우 중요시될 수밖에 없던 것이 바로 역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공무상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교통편을 제공하는 기능은 매우 컸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렇듯 옛길 문화의 요체인 역과 그 역을 오간 수많은 사람과 사연들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즐거운 문화체험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전통시대에 가장 흔하게 부르던 것이 역(驛) 혹은 역참(驛站)이었다. 그밖에 우역(郵驛)·역관(驛館)·합배(合排)·우정(郵亭) 등 다양한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역참의 관아와 군현의 관아 차이점 역참에는 공적인 임무를 띠고 왕래하는 사신이나 관리들에게 역마와 숙박을 제공하기 위해서 많은 역사(驛舍) 건물을 지어 관리하였다. 흔히 지방 관아의 건축물을 공해라 하는데 역의 건물은 역사(驛舍)라 한다. 조선후기에 남아있는 역사는 여러 역지(驛誌)자료에 의하면 대체적으로 동헌,내동헌,작청,사령청,관노청,통인청,창고,문루,마당, 연못 그리고 마굿간과 양마청,마부청 등으로 구성되어 각각의 기능을 맡았다. 동헌(東軒)은 찰방이 역무를 총괄하는 행정관서이며, 내동헌(內東軒)은 찰방의 침소로 생각된다. 작청(作廳)은 역리들이 실무를 보는 곳이며 역에 따라서는 인리청(人吏廳) 혹은 질청(秩廳)이라고도 하였다. 사령청(使令廳)은 사령(使令)이, 통인청(通引廳)은 통인(通引)이, 관노청(官奴廳)은 역노비(驛奴婢)가 잡무를 보는 곳이다. 또한 외삼문(外三門), 내삼문(內三門)이 있어 외삼문은 문위에 문루(門樓)로서 누정(樓亭)을 세웠으며, 마단(馬壇)은 말을 제사지내는 사당으로 마당(馬堂)이라고도 한다. 마굿간은 마구(馬廐), 마랑(馬廊) 또는 외양간(畏養間)으로 표기되어 역마에게 마초(馬草)를 먹이는 곳간이다. 문경 유곡역의 경우 동헌(東軒 6칸), 내동헌(內東軒 4칸), 천교정(外三門:遷喬亭 6칸), 전명청(傳命廳 8칸), 내삼문(內三門 6칸), 문루(門樓 6칸), 사환고(社還庫 4칸), 진휼창(賑恤倉 20칸), 수직간(守直間 6칸), 작청(作廳 10칸), 형리청(刑吏廳 6칸), 통인청(通引廳 4칸), 관노청(官奴廳 8칸), 사령청(使令廳 6칸), 마단(馬壇 5칸), 포청(砲廳 6칸) 등이 있었다. 장성 청암역의 경우에는 (청암도역지급사례성책 《靑巖道驛誌及事例成冊》)에 따르면 동헌(東軒 4칸),내동헌(內東軒 4칸),작청(作廳 5칸), 공고(工庫 3칸), 형방청(刑房廳 3칸), 서자청(書者廳 4칸),급창청(及唱廳 4칸), 사령청(使令廳 4칸), 창고(倉庫 9칸),하관청(6칸),내삼문(內三門 3칸), 외삼문으로서의 진남루(鎭南樓 3칸)등 12개동의 역사건물이 세워져 각각의 기능을 맡았다. 이와같은 역의 건물구조상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말을 제사지내는 마당 또는 마단이 있는 점이고, 또하나는 마구나 마방이 있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건물은 주로 역참을 이용하는 사신들의 숙박이나 역정(驛政) 업무를 보기 위하여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일반 군현의 관아와는 기능상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일반 지방 군현의 관아는 구조와 기능상 역참의 공해 건물과 다소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군현의 관아구조는 읍성(邑城)안에 공해 또는 관해로서 지방의 백성을 다스리는 공무집행 건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장성의 경우 장성부읍지(長城府邑誌)의 공해조에 따르면 객사(客舍)인 오산관, 아사(衙舍)의 하나인 동각(東閣), 향사당(鄕射堂), 연무청(鍊武廳), 또는 훈련청(訓鍊廳) 그리고 창고로서 사창(司倉),영창(營倉),대동고(大同庫),진휼고(賑恤庫),관청고(官廳庫), 군기고(軍器庫)등이 있었으며 외곽에는 사직단(社稷壇),여제단이나 향교(鄕校), 산창(笠巖山城 창고),북창(北倉) 등이 배치되었다. 이와 같은 관아건축의 특징은 대체적으로 동헌(東軒)은 관아의 중앙,북쪽의 중요지점에 위치하여 내아(內衙)와 연결되어 유기적 기능을 가지며, 동헌 근처에는 반드시 객사(客舍)가 위치,솟을 지붕의 본채와 양쪽에 익사(翼舍)가 있는 점이며, 동헌,내아 외에 육방의 아전들이 집무를 보던 작청(作廳), 회계보던 공수청(公須廳), 지방 장교(將校)의 장청(將廳), 죄를 다스리던 형방청(刑房廳),노복이 거처하는 관노청(官奴廳), 죄인 가두는 형옥(刑獄)외에 군기고,훈련청, 창고 등의 건물이 유기적으로 배치되었다. 특히 유교문화적 전통에 따라 반드시 사직단과 향교 및 사우(祠宇)등이 배치된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일반군현의 관아는 중앙의 행정업무를 대행하는 지방 말단의 행정을 본다는 점에서 육방(六房)체제에 의하여 지방 수령의 지휘아래 이방,형방,호방 등의 향리(鄕吏;衙前)들이 역할을 분담하여 지방행정을 맡은 곳이라는 점에서 역정(驛政)을 담당한 역의 관아와는 기능상,구조상 차이가 있다고 본다.
현재 입석 마을이 있다. 타 지역의 선돌들은 청동기 유적으로 보는 것 같은데? 이 선돌이 쓰러지거나 마을에 궂은 일이 생기면 마을에서 추렴한 돈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뭔가를 나타내기 위해 세운 것은 분명할 터인데... 고인돌? 장묘와 관련된 것은 아닌지? 방축리의 설매 마을은 매봉 앞에 있는 마을로 ‘매화낙지’의 명당이라고 하며, 방죽말 북동쪽에 있는 한샛 마을은 황새가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의 지형이라 하여 한새실이라고 하던 것이 변하여 한샛 또는 대조곡 이라고 했는데 대조곡면의 지명 유래이다.
현재 남아있는 지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 논산훈련소 자리인 것 같음. 1911년 박동렬(朴東烈)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의 내용은 충남 은진군 구자곡면 무두리에 사는 박성관이 전북 여산군 합선면 황화정리에 사는 박동열에게 합선면 점막리에 있는 논 3마지기를 팔면서 작성해준 문기이다. 이 문건으로 보면 무두리는 이미 은진군으로 넘어간 뒤였다.
수교에서 양재점 넘어가는 고개. 내 건너기 전에 있음. 하월곡과 상월곡 사이에 제아무고개가 있음. 쟁목고개라고도 함. ※ 임진왜란 때 함정을 빠서 왜군들을 빠트렸다고 해서 ‘지함이고개’라는 지명이 유래됐다고 함.
향사당의 임원으로는 좌수 1인과 별감 3인이 있었으며, 이후 지방의 자치기관인 향청(鄕廳)의 기능을 갖게 되면서 고을 주민들의 여러 가지 일을 자치적으로 의논하여 처리하기도 하였다. 향사당은 처음에는 유향소(留鄕所)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1475년(성종 6) 유향소가 다시 설립될 때 중국 주(周)나라의 제도를 따라 풍속을 교화하되, 특히 예악과 덕행을 세우는데 제일인 ‘향사음례(鄕射飮禮)를 행하는 유향소’라는 뜻으로 향사당(鄕射堂)이라 개칭하였다. 사(射)는 공자가 “확상(矍相 : 땅 이름)의 들판에서 활을 쏘아 어진 이를 얻는다.”고 말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옛날 어진 임금들이 몸소 인의를 실행하여 백성을 인도한 것을 모방한 것이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 피제면 신리, 북삼면 교항ㆍ포변ㆍ반리, 합선명 죽평을 구자곡면으로 편입 공촌면 ① 현재 연무읍 봉동리는 여산군 공촌면 지역으로 상봉리, 하봉리, 칠전리, 두화리, 장항리 각 일부와 북삼면 교항리, 포변리 각 일부를 병합해서 봉동리로 만들어 황화면에 편입시켰다. 봉동리 자연마을 공촌, 남두, 내송, 독상자리, 두아리, 봉동, 북두, 상봉, 서당골, 서칠, 소로지, 안소로지, 옻나무골, 작은소로지, 원칠, 하봉 등 ※ 공촌부곡이 있어 공골, 또는 공촌이라 했는데 변하여 뷩골 또는 봉동이라 함 ② 현재 연무읍 마전리는 여산군 공촌면 지역으로 야등리, 승지리, 진량리, 구량리, 장항리, 송화리, 고합리를 병합해 황화면으로 편입시켰다. 마전리 자연마을 구량리, 난바람, 노루목, 도화동, 주초, 밧들, 사기동, 삼밭내, 새터, 승지리, 양재, 옥골, 왜가리터 ※ 삼밭과 내가 있는 마을 합선면 ① 현재 연무읍 고내리는 여산군 합선면 지역으로 옹점리, 보성리, 외평리, 신평리, 신기리, 고분리의 각 일부를 병합해 고내리로 만들어서 황화면으로 편입시켰다. 고내리 자연마을 고내골, 고내리, 고분장승이, 원터, 새터, 솟대배기, 신그니, 옹점, 외평리 등 ② 현재 연무읍 황화정리는 여산군 합선면 지역으로 피제면 신리 일부, 은진군 구자곡면 무동리 일부를 병합해서 황화정리로 만들어 황화면에 편입시켰다. 황화정리 자연마을 구합선, 길리, 반월로, 수철, 신내, 원황, 죽림동, 황화정 등 피제면 ① 현재 연무읍 안심리는 여산군 피제면 지역이며, 구상리, 삼거리, 신리, 죽산리, 산천리, 신기리, 신화리를 병합해서 안심리로 만들고 황화면에 편입시켰다. 안심리 자연마을 구상동, 까치마루, 대메, 모래내, 소안심, 차돌배기, 안심리, 작은안심동, 원안심 등 ② 현재 연무읍 신화리는 여산군 피제면의 관연리, 입석리, 산화리, 죽산리, 신기리의 각 일부와 북삼면의 반리, 포변리 일부, 은진군 도곡면 상동리 일부를 병합해서 황화면 신화리로 편입시켰다. 신화리 자연마을 갓못, 매곶이, 서방골, 선들, 신우지, 신화, 원신화 등 ※ 채운들과 함께 오화지지(五華之地)로 불리는 곳으로 신화(莘華)의 고장. 족두리풀 신, 긴 모양, 많다, 땅이름 신, 빛날 화, 꽃 화, 아름답다, 맛이 좋다는 뜻 등 읍지엔 花로 표기 ③ 금곡리는 은진군 구자곡면의 서촌리, 무동리, 화석리 각 일부와 여산군 피제면 신리 일부를 병합 논산군 구자곡면으로 편입시킴. 피제면 일부는 황화면 황화정리에 편입시킴. 금곡리 자연마을 동촌, 모청이, 무데기, 서촌, 신촌, 화석 등 두여리 동 月谷里 新基里 龍機里 金谷리 군내면 營前里 서이면 馬山里 북삼면 坪村里 橋項里 只長里 각 일부 천서면 斗余里 臺城里 동 磚洞里 玄川里 新寺里 德谷里 花山里 ?洞里 台城里 冠洞里 漏洞里 여산리 군내면 酒幕里 倉前里 把淸里 北邊里 路上里 華柳里 營前里 川東면 신리 校洞리 각 일부 西城里 원수리
천서면 延命里 眞絲里 內唐里 하양리 상양리 신막리 남산리 천동면 외唐리 일부
제남리 동 남邊리 外相里 社峴里 내상리 옥금동 남산리 진사리 천동면 교동리 금곡리 각 일부
호산리 동 鍮店里 壺月리 新村리 外沙里 천동면 書堂里 新坪里 富興리 校洞里 外店里 新里 각 일부
|
첫댓글 여제단: 전국에서 큰규모인데 인조때 의병청이 창설되고 삼남지방의 의병이 황화정 주변에 많은 의병이훈련하였고 질병과 전쟁 사상자은 여제단에 모셔 제사지냄
사직단: 닥작골에서 천호산으로 가는길 있었음 관료가 국가제사
연신당 : 당제산 정상 흉년들고 비가 오지않을때 하늘에 제사
조선 숙종때 천동면에서 호랑이가 사람을 해처서 호랑이을 잡아달아고 상소 올림
효종 1640년대 여산에 지진이 발생 상소 올림
댓글 고맙습니다!
몇 년 전 조선왕조실록에서 여산과 관련된 모든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고 특이한 내용은 메모를 했었는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기준으로 보면 조선시대 약 15차례 여산에서 지진이 발생했고, 황룡이 나타나고 건물이 부서졌다고 하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볼 때 토네이도급의 회오리바람(용오름 현상)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의하면 기우제는 천호산에서 있었다고 하는데 기우제와 관련된 당제산의 기록은 찾을 수 없었고, 당치산성의 개축에 관한 기록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귀한 지도군요. 동서남북 방위와 강경미내다리 위치 등 대부분 잘 맞게 그려 진것같습니다. 합선면의 한자가 이지도에는 먼저선자이나 다른 자료에는 신선선자로 표기되고 황화정 및 역사가 현재 위치가 아닌 양재역으로 표기된게 발견됩니다. 황화(장고뜸)와 신그니가 없는것으로 보아 옹점에 있던 옹기 가마들이가 교통이 좋은 신그니로 오면서 외부에서 많은 인구가 유입되어 신그니와 장고뜸(황화)이 번성하게 된거 같습니다.
위 지도는 1872년에 제작된 지방지도 중 여산부지도입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에서 내려받은 지도에 제가 한글로 지명을 병기했습니다.
몇년 전에 처음 작업했던 것은 쉽게 작업을 하려고 지도를 축소했었는데 더 선명하게 보시라고 최근에 다시 원본 크기의 지도에 재작업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