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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깨달음의 핵심인 연기법은 모든 고통과 갈등의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연기법이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고 표현되지만,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다. 모든 것을 이것 아니면 저것, 나와 너, 자아와 세계로 분리해서 사고하는 인간의 착오를 깨뜨려 세상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관계의 논리로 설파한 것이다.
이중표 교수가 최근 양자역학 책을 번역한 것도 모든 것은 앞에서 진행되어온 원인의 결과일 뿐이라는 자연과학의 결정론을 최첨단 양자역학이 뒤집고 있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은 같은 대상도 인식에 따라 입자도 파동도 될 수 있다는 ‘일체유심조’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는 “이 세상과 나도 신이 만들었거나, 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부속물이 아니다.”라고 한다.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상대도 사회도 나라도 세상도, 나쁘게도 좋게도 변화될 수 있음을 깨달아 노예가 아닌 삶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신이 결정했다며 인간들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책임조차 신과 남 탓으로 돌리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고,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연기’(연이어 생겨남)하므로, 좋은 마음과 실천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사주팔자나 관상 같은 운명론에 목매지 말고, 자기 삶을 스스로 디자인해서 우리의 운명을 개척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코로나19 사태 같은 상황을 놓고도, 결과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자세에 따라 더 나빠질 수도, 자신과 세상이 더 좋아질 수도 있는 것”이라며 희망을 전했다.
◼코로나시대에 배워야할 것은 무엇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가 있고. 욕망을 다 성취하는 게 행복한 세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욕망을 다 성취할 수는 없다. 코로나는 맹목적으로 욕망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코로나는 예고편에 지나지 않다. 더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런데 백신만 이야기하지 그 원인을 없앨 생각 안한다. 못 견디고 옛날처럼 돌아가려고만 한다. 그런 식으로 해서는 더 큰 재앙을 맞이할 수 있다. 우리들의 삶의 구조가 문제다. 대도시로 인구집중이 문제다. 사람들이 욕망을 추구해 도시로 모여들어 시골은 빈집으로 공동화가 되고 있다. 시골은 코로나로 인해 별 문제가 없지않은가. 코로나 때문에 돌아다닐 수 없으니, 자기 성찰의 호기다. 수행자들이 아무도 없는 깊은 산에 들어가 사색하듯이 욕망을 잠시 내려 놓고, 암자에 혼자 독거하는 심정으로 타인과 접촉을 줄이면서 성찰할 때다.”
◼현대 한국인들에게서 살렸으면 하는 장점 및 특성은 무엇이며, 고쳐야할 점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혜가 있다. 영특하다고 할까. 미국과 유럽은 외적인 화려함은 있지만 정신문화는 우리보다 못하다. 저녁에 되면 치안조차 안돼 있어 해넘어 가면 돌아다니기도 어렵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깊은 철학과 종교를 가지고 있어서 서로가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 것이 좋은지 모른다. 서구에서 인정해주면 그때서야 우리 것이 좋은 줄 안다. 한국인들은 깊은 역사와 전통 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가치를 모르고, 자존감을 상실하고 있다는 게 안타깝다.”
◼이 몸은 태어나서 늙고 죽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진짜 나, 「참나」가 아니라고 한다. 선가에선 보고 듣고 아는 자는 누군가. ‘이 뭣꼬’라고 화두를 탐구하기도 한다. 부처님이 말하는 「참나」는 무엇인가.
“부처님은 「참나」라는 말을 쓴 적이 없다. 나라고 할 만 한 게 없다. 진아니 참나니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런 말이 대승불교에서 출현했다.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를 포용하기 위해 받아들인 교리가 불교 당시를 왜곡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보고 듣고, 그 자리에 있는 놈이 나다. 보고 듣고 깨닫고 느끼고 안다는 것은 명사인가, 동사인가. 동사다. 살아있는 그 상황이 나다. 내가 본다는 현실은 주관과 객관이 분리된 현상이 아니다.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면 보이는 놈이 없어도 안에서 보는 놈이 있어야 된다. 우리는 항상 밖에 있는 대상에 대해 애착심을 가지고 삶을 영위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밖에 있는 좋은 것을 쫓아다니지 않았나.”
◼개인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가 부딪쳐 갈등과 투쟁이 생기기도 한다. 개인주의적 자유와 해탈은 어떻게 다른가.
“개인의 자유가 욕망 추구의 자유가 되었다. 전제 정치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사회적 자유라면, 해탈은 내면에서 행복을 저해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탐진치(탐냄,성냄,어리석음)로 봤다. 그 고통으로 벗어나려면 탐진치로부터 벗어나야한다. 해탈도 사회적인 구조에서 논의되어야한다. 그러려면 사회 전체가 평등한 관계를 가져야한다. 자유의 핵심이자 불교의 핵심은 모든 것은 상호 연관되어있다는 것이다. 개인주의는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망각한데서 나온 것이다.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방해할 수 밖에 없다. 진정한 자유로운 삶을 가지려면 평등해야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저 사람도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살은 자리이타, 즉 자신과 남을 동시에 이롭게 한다. 그런 보살행이 사회적 해탈을 위한 중요한 덕목이다.”
◼세상의 존재원리를 각 종교들이 달리 설명하고 있다. 조물주가 이 세상을 만들어 우리의 인생과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기독교의 종교관이나, 인간과 세계의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있다는 결정론을 부처님께서는 뭐라고 했는가.
“불교에서는 바른 견해가 아닌 사견으로 본다. 특히 자연과학도 양자역학이 나오기 이전 원자물리학에선 결정론이었다. 모든 것은 앞에 진행해온 어떤 운동의 힘에 의해 미래가 결정되어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운명이 결정되어있다면 우리도 결정론적인 존재밖에 될 수 없다. 모든 것이 신의 뜻에 따라 결정되었고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내가 어찌 할 도리가 없이 모든 게 결정되어있다면, 내 행위를 내가 책임지려 하겠는가.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부처님은 모든 존재는 상호 관계 속에 있다고 보았다. 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을 연기법이라고 한다. 연기법을 깨달은 사람은 마음을 어떻게 쓰게 되는가.
“우리가 연기라고 말할 때 조건에 의해 발생한다고 본다.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의 핵심에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음은 살아있는 생명이다. 이것은 정보와 에너지를 교환하는 시스템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먹고, 싸며 생명은 순환한다. 개체적이 아니다. 그걸 대승불교는 일심법계라고 한다. 하나의 마음으로 구성된 상호관계의 세계다. 정보시스템을 받아들여서 처리하는 과정에 지혜 반야가 작용한다. 그게 무지의 상태가 되면 하나의 패턴이 반복돼 원수가 원수를 낳는다. 따라서 인연을 잘못 지으면 나쁜 업이 되고, 나쁜 것도 좋은 인연으로 바꾸면 좋은 업이 된다, 마음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일체의 근본이 된다. 모든 것은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마음의 선택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발전되어간다.”
◼기독교는 여호와가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고, 힌두교는 일체는 브라만이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창조는 신도 나도 아니고, 보는 순간 안식이 생긴다고 하다. 그럼 이 컵을 보고, 교수님과 제가 공통으로 인지하고 있는데도 객관적인 대상이 아닌가.
컵이 있다 없다는, 우리의 언어적 판단은 명사, 즉 개념을 통해서 하게 되어있다. 개념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없는 것을 본다는 것도, 있는 것을 본다는 것도 아니다. 연기설은 컵이 내가 알고 있는 식으로 있는 게 아니라, 상호 관계 속에서 있다는 것이다. 이 사유의 패턴을 변화시키는 게 굉장히 중요다. 거기서 정견과 사견으로 갈린다. 연기적으로 사고를 할 수 있는 사고체계를 갖고 있는 것을 정견이라고 한다. 양자역학에서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은 입자로 지각되면 입자고, 파동으로 지각되는 파동이다. 컵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인연으로 나타난 것이다. 영어로 ‘홧’,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우’라고 어떻게 지각했는지를 물어야한다. 그러려면. 명사적으로 보지 말고, 동사적으로 봐야한다.”
◼불교는 우리가 아는 객관적이라는 것, 보편적이라는 것, 당연한 것,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불교는 객관대상을 탐구하는 과학과는 반대되는 것인가.
“반대될 수가 없다. 불교도 있는 그대로를 여실지견이라고 한다. 과학은 뭔가를 전제하고 있다. 과학은 실재론을 전제하고 있다. 과학은 신체 밖에 물리적 공간이 있고, 물리적 시간이 있고. 그것은 무엇인지 탐구한다. 쪼개보고, 분석해 원자까지도 쪼개보면 다 된 줄 알았는데, 미시물리학에 가서는 주관과 객관이 나뉘어지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보는 자에 의해 존재 형태의 변화가 일어난다. 객관적이지 않다. 하이젠부르크는 분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체의 관계를 탐구하는 쪽으로 과학의 방향이 전환되어야한다고 했다. 불교적으로는 그물망처럼 하나를 전체를 본다. 실체를 찾지 않고 관계를 찾는 것이다. 여실지견이라는 측면에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과학적 실재론을 버리고, 주객을 이분화시키지 않는 종합적인 과학의 세계가 열리고 있다. 생물학, 물리학도, 과학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 옛날엔 원인과 결과를 시간적 종속관계로 봤다. 그런데 지금은 원인과 결과를 상호적으로 본다. 그것이 시스템이론이다.. 현대과학에서 상호인과율이 이르렀다.”
◼불교에서 ‘중도(中道)’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쓴다. 중도란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도가 뭔지 이해가 안 돼 있고, 말도 못한다. 중도가 중요하다고 하는 사람조차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을 거의 본적이 없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그게 공이다. 공의 자리를 중도라고 한다. 중도실상을 통해. 동사적으로, 관계로 보는 것이 중도이고,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유와 무의 모순 대립으로 보면 사견이다. 이걸 떠나는 것이 중도다.
여기에 우리 둘이 꽃을 보고 있다. 조 기자는 정상인데 나는 색맹이라면, 우리는 같은 꽃을 볼까, 다른 꽃을 볼까. 조 기자가 있다고 하는 것과 내가 있다고 하는 것이 동일한 대상이지만, 내가 보는 것은 내가 본 것일 뿐이다. 이를 인지과학에선 ‘유폐적 인식’이라고 한다, 모든 인식은 개별적이어서 동일하지 않다. 다만 동일하게, 언어구조를 통해 기호를 붙여놓고 그것을 공유할 뿐이다. 삶의 구조가 틀리면 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근원적으로. 틀려진다. 일수삼견(一水四見)이란 말이 있다. 똑같은 물을 보고도 천상에선 유리보석으로 보고, 물고기는 집으로 보고, 인간은 물로 보나 아귀들은 피고름으로 본다. 이건 피고름인가 물인가 집인가 유리인가. 다 맞다. 그게 일체체유심조다. 똑같은 하나의 현상도 어떤 마음상태이냐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코로나에 대해서도 우리가 두려워하지만, 코로나도 새로운 차원에서 받아들이면 다행스럽게 볼 수도 있다. 양자역학도 없는데 뭔가를 보는 게 아니라,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그것이 어떻게 드러나 있느냐를 살핀다.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할 때는 개가 볼 때와 사람이 볼 때. 개는 개의 마음으로 개의 세계가 드러나고. 사람이 볼 때는 사람의 마음으로 사람의 세계가 드러난다. 많은 이들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반대는 없다고 생각한다. 존재가 있냐 없냐부터 의견이 갈린다. 그러나 부처님은 있고 없고가 아니라, 어떤 관계 속에서 있고, 어떤 관계 속에서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있다 없다라는 양견을 떠나서, 대립적인 견해에서 보지 말고, 어떨 때는 있고, 어떨 때는 없는지를 봐야한다고 했다. 이것이 중도다.”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는 죽음을 벗어났는가?
“부처님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다. 죽음이란 죽는 놈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죽는 놈이 없다. 죽을려면 태어난 놈이 죽어야하는데 몸둥아리를 보면 태어난 놈과 죽는 놈은 같은가, 다른가, 다르니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그 놈이 내가 아닌 것을 알고 있다. 우리들의 모든 고통이 생사 때문에 생기는 갈등이다. 모든 괴로움의 뿌리는 무명이고, 무명의 근본 뿌리는 죽음과 연관돼 있다. 왜 이렇게 발버둥치고 사는가. 안 죽으려고 그런 것이다. 밥 안 먹어도 살수 있다면 먹고사니즘 때문에, 직업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겠는가. 살고자하는 욕망은 알지도 못하면서 맹목적이다 그 속에서 매몰되어서 살려고 투쟁과 고통 받는 현실을 부처님은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하고 고뇌했다. 전륜성왕과 붓다라는 두길이 있었다. 그러나 불교는 개인적인 성취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개인이 없으니, 차별적 존재로서 아라한을 묘사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부처님은 일체는 십이입처라고 했다. 그리고 욕탐이라는 번뇌에 묶여 있는 우리의 마음, 즉 망상이 바로 십이입처라고 했다. 즉 십이입처는 우리의 마음인데, 그 마음이라고 하는 게 욕탐이라는 사슬에 묶여 있다는 것이다. 그럼 욕탐이 없다면 나와 세계에 대한 분별은 사라지는 것인가.
“눈앞의 잔도 물을 마실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으니 컵으로 부르지만 뭔가를 계량하려고 한다면 됫박으로도 부를 수 있다. 자재로운 사람은 목이마를 때 컵으로도 쓰고, 크기를 잴 때는 됫박으로 쓰고, 강도가 들면 무기로도 쓴다. 산을 보고도 처음엔 밖에 있는 산인 줄 알았더니,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라고 할 때는 6입처의 망상과 욕탐으로 볼 때다. 그러나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했을 때는 망상과 욕탐을 떠나 6근이 청정해져서 본 산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이 대상을 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광화문에서 누군가 시위하는 장면을 보고나서도 10명이 각기 달리 말한다. 그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탐이 다르기 때문인가.
“욕탐도 다르고, 우리 안에 형성되어있는 의식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봐도 다른 것은 명색이 다른 때문이다. 명색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 안에 쌓여있다. 자라한테 물린 경험이 있는 사람은 솥뚜껑보고도 놀란다. 용봉탕을 맛있게 먹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군침을 흘린다. 누가 맞냐. 다 맞고, 다 틀리다, 맞는 것도 없고 틀린 것도 없다. 부처님은 그 사실을 알라는 것이다. 심리치료 하는 것을 보면,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 그런 심리작용이 일어났는지 그 역사를 본다. 과거의 일을 알면 명색의 원인을 알 수 있다. 그걸 해소해주면 된다. 그러면 그 일을 계기로 일어난 느낌이 사라진다. 불교의 연기법을 잘 이해하면 심리적 치료도 잘 할 수 있다. 잘 통찰하는 사람의 눈에는 무엇 때문에 저런 심리적 상태가 일어나는구나. 저 사람은 저것 때문에 고통이 일어나구나를 알기에 부처님은 방편을 써서, 처방을 통해서 상대방도 모르게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불교는 분별을 넘어서는 해탈을 추구하면서, 옳고 그름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는데 소극적이다. 독재시대에서 미얀마의 폭력사태에도 그렇다. 시시비비에 약해 세상을 좀 더 진보케하기보다는 보수적이게 하는 불교가 본래 부처님이 지향하는 것인가.
“민주화의 과정에서 불교계는 부끄러운 점이 많다. 민주화 투쟁에 앞장선 스님도 계시지만 민족종교로서 민주화 도정에 적극적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화합이라는 명분으로 두루뭉술 넘어가야하는 게 불교가 아니다. 오히려 파사현정의 정신으로 바르게 서도록 하는 것이 불교전통이다. 부처님은 위대한 혁명가다. 당시 불평등 억압 사회에서 투쟁적인 운동이 아니라 왕을 만나 평등과 비폭력으로 정치하도록 이끌었다.”
◼ 부처님은 우리와 같은 사견에 빠져있다가 자신이 사견에 빠져 있다는 깨달음을 통해 정견을 얻었다고 한다. 부처님은 사견이 무명과 욕탐에 가려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며, 모든 사견은 촉 인연에서 비롯됐다고 했는데 어떻게 촉이 사견을 낳는가.
“사실은 촉은 단순히 밖에 있는 물체를 내가 눈으로 보는 현상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내가 컵을 본다고 할 때 밖에 컵이라는 이름이 있는가. 없다. 컵이라는 이름을 물체가 가지고 있는가, 내 안에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어느 동네에서는 컵으로 불리지만, 다른 고을에서는 됫박으로 볼 수 있다. (접)촉은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심리적 현상이다. 모든 사견은 촉을 통해 밖에 무엇이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같은 것을 보고도 컵으로 보는 사람은 밖에 컵이 있다고 하고, 됫박으로 보는 사람은 밖에 됫박이 있다고 한다. 촉 인연으로 식이 그렇게 증장한다. 사견의 핵심은 나와 세계가 분리되어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들이 실체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생각들이, 세계가 영원하냐? 영원하지 않느냐? 나는 그 세계 속에서 태어나 죽는데, 생사를 반복할까, 죽으면 끝일까. 촉을 통해서 생겨난 주객의 이분이 그것을 통해서 세상이 있냐 없느냐 누가 윤회를 하느냐 마느냐. 죽은 뒤에도 계속 사느냐 마느냐를 놓고, 촉을 통해서 생겨난 의식구조가 사견을 낳는다.”
◼욕탐을 놓으면 해탈이 되는 것인가.
“해탈이라는 말 자체가 벗어난다, 풀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러면 묶여있는데서 풀린다는 말이다. 해탈을 추구한다고 하면, 무엇으로부터 해탈할 것인가 알아야한다. 흰 소와 검은 소가 밧줄이 묶여 있다면 흰 소가 묶은 것인가. 검은 소가 묶은 것인가. 흰 소도 아니고, 검은 소도 아니다. 밧줄이 결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안(눈)과 색을 묶고 있는 놈이 욕탐이다.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다. 욕탐이 없이 보면 여실하게 본다. 욕탐에 물들어 보기에, 남이 보는 것보다 내가 본 내 자식이 특별히 예쁜 것이다. 여실지견(如實知見)하게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욕탐으로 보기에, 그 욕심에 반하면 불편하고 괴로운 것이다. 그 욕탐을 떠나면 모든 것이 평등하게 보여서 평정한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욕탐을 취할 때, 욕망의 주체로서 자아의식이 강화되어 에고이즘으로 발전한다. 반면 나라고 하는 집착이 사라짐과 동시에 아상이 사라져 자타가 분리되지 않고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의식이 변화될 것이다. 그것이 해탈이다. 따라서 수행을 통해 어떻게 할 것인가 알고 가야지 호흡만 바라보고 있다고 해탈이 된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것이다. 부처님은 경전 속에서 바르게 수행하고 해탈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줬다. 욕탐이 안과 색을 묶고 있다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성취를 위해 무한히 욕망을 극대화하며 성취하도록 독려한다. 자기가 원하는 바를 해가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불교적으로 보면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인가.
“욕망을 버리면 안 되고, 욕망을 더 키워야한다. 조그만한 욕망을 가지고 사니까 괴롭다. 부처님은 가장 큰 욕망을 가졌다. 중생들은 처자식만 건사하겠다고 하지만, 부처님은 일체 중생을 건지겠다고 나섰다. 그러면 내 것 네 것이 없어진다. 그것이 무소유다. 부처님이 욕망이 사라진 뒤 우울증에 걸렸냐. 아니다. 그 때부터 진짜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보리수 아래서 일어나서 수백킬로를 걸어다니며 45년 동안을 하루도 쉬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고 법을 설했다. 탐진치를 버리면 큰일 나는 줄 아는데, 탐심을 키워 원력이 되게 하면 된다. 진심(분노)과 미움은 사랑하는 마음이 바뀐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 따라서 그걸 키워버리면 자비심이 된다. 탐심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큰 원을 세워야한다. 그렇게 자기 삶을 디자인해야한다.”
◼원치 않는 삶의 장애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경우가 많다. 부처님께서도 괴로움의 원인을 전생에 지은 업 때문이라고 했나.
“아니다. 현재 삶은 이전의 삶의 연장선상에 있고, 인과적으로 연결되어있지만 결정되어 있지않다. 어떤 것도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만약 두 차가 부딪혀 교통사고가 났다면 자기 혼자 사고를 낸 게 아니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고통을 개인의 고통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만들어낸 것이라고 봐야한다. 그것이 무아설(無我設)이다. 다 네가 지은 업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무자비하냐. 그렇다면 자기 업보를 받은 것이니 죽든 살든 자기 일이라고 치부하고, 굉장히 비인간적인 행태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 부처님이 말한 것은 모든 생명은 얽혀있어서 어느 누구의 고통도 내 고통이 아닌 것이 없다. 따라서 자리이타고 동체대비다. 만약 세월호 희생자나 소아암환자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면 정신적인 고통까지 주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불교가 사람의 고통을 해소해 줘야하는데 오히려 발길질을 하면 되겠는가. 그것은 당위론이어서가 아니라 사실이 아니기에 그래서는 안 된다. 소아암은 개인적 잘못이 아니다. 폐기물 옆에 있는 사람은 암에 많이 걸린다고도 한다. 쓰레기는 누가 만들었냐. 쓰레기를 버린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업을 광범위하게 바라보면 내 자신의 업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따라서 같이 치유하고, 극복하는 게 불자의 삶이다.”
◼사람이 죽으면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일까. 죽으면 그만일까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금하다. 부처님께서는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단견이라고 배척했고, 그렇다고 해서 영혼이 죽지 않고 다음 세상에 가서 태어난다는 생각을 올바른 생각이라고 하지도 않았다. 왜 이 둘을 모두 거부했나.
“상견이 있을려면 영혼이 있어야 된다. 영혼이라는 놈이 있는데, 한 시간 뒤에 사라지건 백년 뒤에 사라지견 끊어지면 단견이라고 한다. 그런데 계속 해서 천년만년 시간적으로 제약 없이 존재한다는 것이 상견이다. 영혼이라는 놈은 단 일초, 찰라라도 실재할 수 있는가. 보고 듣는 삶 속에서 나타난 현상을 관심을 가지고 집착하고 그것을 영혼이라고도 부른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수상행식이라고 부른다. 느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한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다. 유가 멸한 상태에서 본다면 상견도 단견도 취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생명은 개체적이지 않고 의존적이다. 공존하는 생명에서 본다면 단견은 나만 죽으면 그만이다. 어떻게 살든,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져올 수 있다. 많은 현대인들이 그렇다. 환경이 오염되어 몇 십 년 뒤면 지구에 큰 재앙이 초래될 수 있다고 해도 그때는 내가 죽고 난 뒷일 텐데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대로 상견을 지닌 이들은 천당 가느냐 지옥가느냐로 걱정한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상견이다. 과학은 단견이다. 불교는 양쪽 모두 아니다. 삶은 이어져있다. 어머니한테 태어난 뒤에만 사는 게 아니다. 생물학에서 보면 생명의 탄생부터 내 삶이 이어져왔다. 내 삶은 사라질지 모르지만, 다음을 이어서 계속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 세상 모든 괴로움을 한마디로 오취온이라고 했다. 색,수,상,행,식이 바로 오온이고, 오취온이란 ‘오온을 붙들고 있기가 괴롭다’는 말이다. 왜 인간은 오온을 붙들고 놓지 못하는 것인가.
“나는 대머리에, 외모는 이렇게 생겼고, 내 특징이 있다. 이런 자기 형태를 자아라고 취하고, 그걸 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이 놈이 태어나서 죽는다고 한다. 왜 온(덩어리)이라고 하나. 내 의식 속에서는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형태를 나라고, 어려서 사진도, 젊어서 사진도, 늙어서 사진도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라는 놈을 잡고 있는 것을 취라고한다. 그래서 괴로운 것이다. 어려서는 예뻤는데, 요즘은 몸도 아프고 이도 아파 내가 변했다고 괴로워한다. 내가 가졌던 감정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쌓여있는데. 그것을 집이라고 한다, 이 오취온을 자아로 취해서 생노병사가 있다.”
◼부부간에도 같은 이야기를 하다가도 ‘왜 그렇게 말해’,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하고 싸우기도 한다. 같은 장소에서도 왜 딴소리가 나오는가.
“우리가 이런 인지활동을 할 때 기계적으로 인지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인지활동을 한다. 그 때 의도와 더불어 나타나는 현상을 욕탐이라고 한다. 같은 것을 경험하면서도, 그 안에 형성된 식이 달라서 다르게 이해한다. 연기법에서 보면 18계가 사람마다 같지 않다. 식이 다르게 형성되니. 그 구조 속에서 촉을 일으킨다. 촉 속에서 각자 다른 느낌이나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촉을 연하여 수상사(느낌 생각)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이걸 객관적 사실이라고 본다. 내가 보고 들었으니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툼이 벌어진다. 의식구조가 다르다는 것을 알면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면 다툴 일이 없다. 그런 느낌이 일어났겠구나.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를 알면 삶 자체가 부드러워지고, 주변관계도 좋아지고, 행복해진다.”
◼연기법에 따르면, 보이는 세계란 존재가 아니라 우리에게 인식된 것이다. 불교가 진취적인 서구사회에 비해 수구적이고 보수적인 것은 모든 것은 마음으로만 치환한 한계 때문은 아닌가.
“사실은 서양 사람들이 자연을 변형시켜서 개발케 한 것도 마음이 한 작용이다. 마음을 떠나서 있을 수 없다.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다. 동서양 막론하고 삶의 핵심엔 마음이 있다. 진취와 발전엔 기준점이 있어야 한다. 과학이 진실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과학은 이전의 과학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과정 아니었는가. 학문에선 가설을 세우고. 지금까지 객관적 사실을 인식하는 인지적 구조가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카메라처럼 그대로 찍어내리라 생각하지만, 양자역학에서는 찍어내는 게 아니라 상호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조건에 의해 다르게 나타나고, 다르게 존재하는 것이다. 과학도 다양한 시행착오를 통해 변화하고 있다. 무엇을 가지고 발전이라고 보는가.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이고, 항구적으로 존속할 수 있는 것인가. 학자들이 인류가 지구상에 언제까지 존속 할 수 있을지 장담못하는 데도 여전히 발전 타령만 해야하는가. 과학 발전으로 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능이 누출돼 오염수가 생겨 골치가 아프지 않은가. 진정한 발전은 인간의 행복이라는 목적을 두고, 그 목적에 얼마나 접근해가냐를 봐야한다.”
◼연기법에서 볼 때 생사에서 해탈되는 열쇠인, 무명이 어떻게 사라지는 것인가.
“무명이 있으면 사라질 수 없고, 무명이 없으면 사라질게 없다. 무명이 뭐냐면, 내가 몰랐던 사실이다. 모르고 있으면 무명이라고 한다. 유를 넣어서 존재가 있어서 시간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시간 공간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과거라는 것은 현존하는 게 아니다. 시간은 흐르고 있을 뿐 잡힐 수 없다. 따라서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없는 것 사이에 있는 것이 있을 리 없다. 이것은 사실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공이다. 무명이 사라지면 시간도 공간도 사라져 버린다. 모르고 살면 무명이고, 깨달으면 무명이 타파됐다고 한다. 정견은 무명이 사라진 자리다. 정견이 서면 팔정도에 의해 살아간다. 불교의 열반은 딴세상을 말하는게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이다.”
◼중생들은 괴로움의 원인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다고 생각한다. 저 원수만 없으면 내 삶이 괜찮을 텐데. 멋진 집이 있다면, 멋진 외모라면 내 삶이 행복할 텐데라고 생각한다. 불교적으로는 어떻게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
“고통의 실상을 알아야한다. 즉 왜 괴로운지도 알아야한다. 우리는 괴로운 것을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괴로움을 직시하려고 하지않는 게 문제다. 이게 진짜 괴로움인지 실제로 바라보면 괴로움이 아니다. 착각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오취온이다. 나는 실체가 없지 않다. 체상용에서 말하는 체라고 한다. 그건 실체론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작용하는 구조가 있다는 말이다. 오취온이다. 자기 감정, 자기 생각, 자기 욕심, 인식 때문에 괴롭다. 일체 괴로움이 오취온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몸이 나인가. 옆 사람이 병든다고 내가 괴롭지는 않다. 그런데도 나라거나 내 것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오온도 내가 아니고 내 것도 아니고, 오온 속에 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속에 오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통찰하라는 것이다. 붙잡고 있으니 괴로운 것이다.”
◼<맛지마 니까야>에 보면 세존께서 수도원에 다른 비구들이 범담을 하고 있을 때,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문밖에 서 계셨다는 대목이 나온다. 세존께서 이야기가 끝난 것을 아시고, 헛기침해선 문빗장을 두드리자 그 비구들이 세존께 문을 열어 그제서야 세존이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통상 교주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안하무인을 연상하기 쉬운데, 부처님의 태도는 어땟나.
“성불하면 멋대로 한 것처럼 오해하기 쉽다. 불경 어디를 봐도 그런 게 없다. 어느 날은 돌아다니다가 도공의 집에 들어가. 자고 싶다니, 도공이 ‘어떤 스님이 먼저 와 있는데. 먼저 허락을 받으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이 ‘옆에 하룻밤 잘 수 있겠는가’라고 양해를 구하니, 비구가 ‘방이 넓으니 옆에 주무시오.’라고 했다. 부처님이 비구에게 ‘누구한테 출가했냐?’고 물으니, ‘부처님께 출가했다’고 답했다. 부처님이 간적이 없는 절에서 출가한 것이다. 그런데도 부처님은 ‘내가 부처’라고 하지도 않은 채 하룻밤을 지냈다, 비구가 이분이 부처님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 물으니, 그때서야 자기가 부처을 밝힌다. 만약 아상이 있다면 다른 사람이 존경해야한다며, 사람을 몰라본다고 호통을 쳤을 것이다. 부처님은 울력을 할 때도 같이 했다. 어느 경에 보면 그날은 옷을 깊는 날인데 부처님도 함께 옷을 깊다가 눈이 먼 아나율 존자가 바늘귀를 못 끼자 부처님이 끼어주는 대목이 나온다. 부처님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바라보셨다. 그러니 부처노릇을 할려는 순간 부처가 아니다. 공부를 해도 금강경에도 수보리가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하는 것도 다른 게 아니다. 그날도 걸식해서 해서 자기가 탁발한 음식을 먹는 것이다. 부처님도 말죽 밖에 탁발을 못한 날은 말죽을 드신다. 불경을 볼 때도 부처님 말씀만 볼게 아니라 행실도 봐야한다. 그런데도 한국불교엔 잘못된 풍토가 많다. 한국불교는 스님에게 3배 큰절을 하라고 하지만 불경엔 부처님한테도 3배 했다는 이야기가 없다. 당시 풍습대로 오른쪽으로 3바퀴를 돌거나 발에 절을 하는 대목이 나올 뿐이다.”
◼현대인은 인간관계에서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 사회적, 정치적 갈등도 심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반목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했나.
“사실 우리가 싸우고 다투는 데는 근본적으로 언어적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들은 먹이로 싸우다가도 다 먹고 나면 언제 다퉜느냐는 듯이 평화롭게 지냈다. 그러나 인간은 감정이 자란다. 개념을 가지고 모든 것을 언어적으로 구성해 스토리를 만들어 분쟁을 일으킨다. 부처님은 ‘당신은 무엇을 가르치냐?’는 물음에 ‘다투지 않고 사는 법을 가르친다.’고 했다.”
◼현대인들은 감각적 즐거움에 많은 것을 건다. 연애와 섹스는 물론이고, 짜릿한 즐거움을 위해 게임을 하고, 모험을 즐기고, 맛의 즐거움을 위해 커피와 술을 마시고, 먹방을 한다. 왜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을 멀리하라고 한 것인가.
“감각적 쾌락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즐거움을 준다면 부처님이 멀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즐겁지만 뒤에 괴로움을 주기 때문에 멀리하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예술이나 음악을 다 부정하고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감각적 쾌락이 욕계에서는 욕계중생의 자아의식의 뿌리이기 때문에 경계한 것이다. 사실은 나라고 할 때 욕망의 주체를 나라고. 욕망의 중심의 축을 나라고 집착하니, 그런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오욕락이 감각적 쾌락을 가져오고, 지각구조에 들어온 것에 빠져들면 고통으로 이어진다. 불교는 염세주의가 아니라 더 큰 행복을 찾아라는 것이다. 오욕락을 행복으로 알지만 사실은 불행을 가져온다. 한센씨병자가 상처를 숯불에 지지면 당장은 시원해 한다. 그러나 익어버리면 상처를 더 커지고 고통이 가중된다. 감각적 욕망은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한다. 처음엔 설탕을 조금만 먹어도 달았는데 뒤엔 그 양으로는 안 된다. 마약에 빠지는 것도 그런 중독성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자살자가 많다. 정치인들도 자살을 해 큰 충격을 주고 있다. 부처님 당시 찬나비구가 불치병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다가 자살한 내용이 나온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했는가. 그리고 이를 통해 안락사에 대한 불교의 견해를 유추해볼 수 있는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살인은 타인 살해고, 자살은 자기 살해다. 둘 다 죽여야 할 놈이 있다. 자살은 자기가 고통스러운 존재였다는 말이다. 살기보다 고통스러웠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살려고 하는 게 본능인데 그걸 뛰어넘을 만큼 고통이 큰 것이다.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 현실이 되어있는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불교적 시각에서 본다면 그런 고통의 사회 구조가 문제다. 핵심은 교육의 문제라고 본다. 삶이 행복하다는 행복체험이 있어야하는데 어려서부터 극심한 경쟁으로 고통을 준다. 또 교육의 목표가 자아 성취라고 해서 자아를 키운다. 무아를 깨닫게 되면 죽일 놈도 없다. 찬나비구는 불치병에 걸려 자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자신을 간호하느라고 고통 받는 것을 보고, 무의미한 수명의 연장이 진정한 수행자의 삶이냐. 가야될 때가 되면 가는 게 나으냐를 놓고 고뇌하다가 끝내기로 결정하고 간 것이다. 부처님은 찬나비구는 아라한이기 때문에, 허물이 없이 열반했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통적으로 ‘그 어른이 곡기를 끊었데’라는 말을 듣곤 한다.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서, 자기가 결정하고 가는 것이다. 살기보다 괴로워서 자기 자신을 죽이는 현대의 자살문제는 사회가 만든 비극임을 공감하고, 사회적 억압의 해소책을 마련해야한다.”
◼불교의 무아설이나 양자역학에서 독립적인 본질이 없다고 하지만, 불교와 양자역학으로 본다면, 자아 정체성, 자아의 성격, 사주, 체질도 모두 실제로는 없다는 것인가
“사주팔자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태어나면서 삶이 사주로 결정되지 않는다. 부처님은 관상도 허망하니 보지 말라고 했다. 정말 보고 싶으면 가만히 앉아서 내가 뭘 하고 있고, 뭘 하고 싶은지. 스스로 자기 통찰을 해야한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자기 밖에 없다. 어디가서 성격 검사 할 것도 없다. 불교 사념처 수행을 해보면 고요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해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잘못된 생각을 알아차릴 수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자기 운명을 디자인을 해야한다. 스스로 원을 세우고 살면 된다. 정해진 운명이 있을까하고 기웃거리는 것은 자기 회피다. 왜 사주팔자에 목줄을 달고 사나. 그런 비참한 삶을 살지 말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야한다. 양자역학은 모든 존재는 보는 자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은 자기를 규정하는 존재다. 개나 돼지는 유전자에 의해 살아가지만 인간은 다르다. 우리가 부처라는 것을 알고, 부처로서 살려고 해라. 나는 운명에 갇혀있는 존재라면 갇혀서 살수 밖에 없다. 하지만 원을 자지고 살아가는 것, 원력과 자비와 지혜가 충만한 삶이 붓다의 삶이다.
출처 : 한겨레 신문 <조현 종교전문기자>
■ 이중표 교수 : 이중표 교수는 붓다의 원음으로 사견을 혁파했다. 그는 어떤 책을 봐도, 어떤 학자와 스님의 말을 들어도 붓다의 깨달음의 핵심인 연기법(緣起法)과 중도가 명확히 이해되지 않아 붓다 당시의 언어인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를 독학으로 공부해 초기경전을 독파했다. 그래서 <정선 디가 니까야> <정선 맛지마 니까야>에 이은 최근작 <정선 쌍윳따 니까야> 등 ‘니까야’ 시리즈(불광출판사 펴냄)를 통해 부처의 원음을 살려냈다. 그는 이런 초기경전 이해를 통해 <불교란 무엇인가>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 <붓다의 철학>도 펴냈다. 또 불교생태학자 조애나 메이시의 <붓다의 연기법과 인공지능>에 이어 최근엔 미국의 과학자이자 수행자인 빅 맨스필드의 <불교와 양자역학>을 번역한 열정적인 불교저술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