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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탐구 스크랩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삶의 도화지 - 농경문 청동기
울산 추천 0 조회 241 13.06.25 10: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삶의 도화지 - 농경문 청동기

 

 

  국립중앙박물관 '청동기실'에 전시된 유물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꼽자면 바로 '농경문 청동기(農耕文 靑銅器)'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말 그대로 '농사를 짓고 밭을 가는 사람 무늬가 새겨진 청동기'인 이 유물은, 어디서 출토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은 채 1969년 국립중앙박물관이 대전 고물상으로부터 당시 가격 28,000 원에 구입한 것입니다.

 

  집 같기도 하고 방패 같기도 한 이 유물은 그 생김새만이 좀 특이했을 뿐, 크기도 작고 아래쪽 일부도 파손된 상태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한병삼 씨에 의해 이 청동기에 어렴풋이 그림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고는, 한 달 여 동안 표면의 녹을 벗겨내는 작업을 한 끝에 드디어 그 무늬가 완연히 드러나게 되었죠. 청동기에 그림을 새겼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특이한데, 그 그림의 대상이 농사와 관련한 것들이었으니 당시 학계는 곧 흥분의 도가니에 빠지게 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농경문 청동기에 새겨진 무늬들에 대해 간략히 다뤄보겠습니다.

 

 

1. 농사와 관련한 것들 - 밭 가는 사람, 밭, 토기

 

 

 

  농경문 청동기의 뒷면 우측을 보시면, 밭을 갈고 있는 사람 두 명이 보입니다. 위쪽에 있는 사람은 따비로 밭을 갈고 있고, 아래쪽에 있는 사람은 괭이질을 하고 있네요. 그리고 이 사람들의 왼쪽에는 가로선들이 그어져 있는 네모난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밭을 표현한 것입니다. 파손된 부분 바로 위에는 격자무늬가 새겨진 토기와, 이 토기에 무언가를 담는 듯한 행동을 취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네요. 마치 평화로운 농촌의 일상을 이 청동기에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합니다. 2천여 년 전의 사람들이 농사짓는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도 느껴지고 말이죠.
   
  그렇다면 이 청동기에 새겨진 그림들이 그저 당시 사람들의 상상화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놀랍게도, 농경문 청동기에 표현된 그림들 상당수가 물적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는 따비의 실물이 출토되었고, 진주 대평리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밭이 발굴되었으니까요. 또한 청동기시대 유적들 곳곳에서는 탄화된 곡식이 발견되고 있기에, 우리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실제로도 농사를 짓고 살았다는 사실을 믿어도 좋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2. 새

 

 

 

  농경문 청동기의 앞면에는 새가 새겨져 있습니다.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새의 모습은 지금도 농촌 마을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솟대를 연상케 하네요. 선사시대 사람들은 새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중 농사와 관련해서는, 새가 하늘의 곡식을 물어다가 땅의 인간들에게 전달해 준다고 믿었죠. 즉 선사시대 사람들은 새를 '풍요를 가져다주는 존재'로 인식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 시대 사람들은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 때 사용하는 의례용 물건에 새를 새겨놓는다거나, 혹은 곡식을 담는 토기를 새 모양으로 만들기도 했죠.
      
  사후 세계에 있어서도 새는 중요한 존재로 대접받았습니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새가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해 준다고도 믿었던 거죠. 그 당시 축조된 무덤이나 관 안에 새 모양 토기들이 발견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로서의 새에 대한 신앙을 '조령신앙'이라고 부릅니다.

 

 

3.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농경문 청동기를 보노라면, 이게 도대체 무엇에 쓰던 물건이었는지 종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냥 단순한 장신구 같아 보이기도 하고, 고리가 달려 있는 걸로 봐서 문고리 같아 보이기도 하고 말이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농경문 청동기는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 때 사용한 의례용 물건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농경문 청동기의 윗부분에는 네모난 구멍 6개가 뚫려 있는데, 바로 저 구멍들로 실을 통과시킨 뒤 이를 제사장의 허리춤 같은 곳에 매달았다는 얘기죠. 농사짓는 모습이 새겨진 농경문 청동기를 매단 채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으세요?
      
  농경문 청동기 뒷면에 그려져 있는 '따비로 밭은 가는 사람'을 자세히 보시면 성기가 크게 튀어나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남자가 벌거벗은 채 밭을 가는 모습이라는 얘기죠. 왜 농경문 청동기에 벌거벗은 사람을 새겨 놓았는지에 대해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조선 중기의 문인 유희춘의 저서 '미암선생집'에는 이 의문을 해결할 실마리로 보이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이 책에서 유희춘은 함경도 및 평안도 주민들이 매년 입춘 아침에 벌거벗은 채 그해 풍년을 기원하는 풍습인 '나경(裸耕)'을 소개하면서, 이런 야만적인 풍속은 속히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죠. 물론 청동기시대와 조선시대 간에는 엄청난 시대적 간극이 있기는 하지만, '나경'이란 풍습이 있었음을 고려해 볼 때 농경문 청동기에 벌거벗은 사람을 새겨 놓은 이유도 바로 풍요를 기원하는 데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하게끔 합니다.
                  
  다른 청동기 유물들과 비교해 볼 때 농경문 청동기의 크기는 상대적으로 매우 작은 축에 속하지만, 이 유물의 의의는 자못 깊습니다. 과거 한반도에 살았던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다는 증거를 제시해 준 이 농경문 청동기는, 청소년들의 역사 교과서에도 실려 있을 만큼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죠. 일부가 훼손된 채 크기도 작아서 겉으로는 볼품없어 보이지만, 한반도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이 유물의 비중을 생각해 본다면 농경문 청동기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꼭 봐야 할 유물들 중 하나로 손꼽힐 만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 블로그 기자 한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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