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의 마지막 질문? - 한 줄 인문학
“인생을 살면서 원하는 상황과 때를 만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자꾸만 약해지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내 끝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는 질문을 품을 수 있다면 언제든지 더 나은 삶을 선택할 수 있다.”
20년간 릴케, 칸트, 니체, 톨스토이, 쇼펜하우어, 괴테 같은 세기의 철학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사색을 통해 새롭게 깨달음을 얻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김종원 선생이 『마지막 질문』이라고 제목을 붙인 책 머리말에서 한 말이다. 그는 ‘삶이 힘들고 괴로워서 평생 사색하고 그것을 글로 쓴 니체를 존경한다.’면서 니체의 시를 소개하고는 ‘마치 마지막 영혼의 음성’과도 같다고 했다. 그 시를 보자.
읽고 배웠음에도
당신이 언제까지나
제자로서만 머물러 있음은
사랑하는 스승에 대한
좋은 보답이 아니다.
배워서 아는 것은 남을 위해서 써야 한다는 말 같은데, 일찍이 맹자도 천하의 인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인생삼락 중 하나라고 했던 것을 보면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세상을 함께 살아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것처럼 내 편만 좋아하고, 나누는 세상이 근사하게 보일 리는 없다. 살아가기 위해 무기를 만들고 자신이 사라지는 것도 모른 채 평생 남만 따라 하거나, 닮아 가면 결국은 자신을 지우고 아프게 하고, 죽을 때가 되어서 자신과 조우할 때는 후회하게 된다고 한다. 죽을 때가 되어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자신이 바로 서야 하고, 주변을 좋게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너무 거창하게 시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철학자라는 사람들은 세상을 넓고 깊게 바라보는 눈을 가진 모양이다.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가장 가치 있는 죽음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죽어 가고 있는 겁니까?”무엇이든 스스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치지 못하면 아무리 겪어도 겼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말로만 외치고 늘 다른 생각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 많은 돈을 언제 쓰고 죽나”“내가 죽으면 나오는 이자와 월세, 연금은 누가 쓰나?”이런 것을 생각하느라 정작 인생에서 가장 큰 행사인 죽음이 앞에 있는대도 죽음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고.
지금도 매일 수많은 사람이 죽지만 정작 정말로 죽은 사람은 없다. 다른 생각을 하다가 사라졌을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표정으로 “아, 바로 이게 죽음이구나!”라는 말로 마지막을 맞을 수 있다면 그는 아프지도 힘들지도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지만, 죽음에게 “너는 무엇이냐?”라고 질문하고 죽은 사람은 별로 없다. 실제 죽음과 진실한 대화를 나눈 사람은 별로 없다. “내가 이걸 마무리하지 못하면 누가 처리할 수 있을까? 이번의 프로젝트를 끝내지 못하면 어쩌지?”이런 죽음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을 생각하고 걱정하느라 정작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바라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가끔은 나의 죽음에 대해 집중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고 또 뭐든 듣고 배우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인생을 사는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배운다는 것은 모든 것과 통하는 법칙이 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방향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문학은 경청과 공부로 시작하고 거기서 인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인생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릴케는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아니라고 한다.
무작정 다 듣는 것이 아니라
들어야 할 것과 스쳐야 할 것을
구분해서 귀에 담는 것이 경청이고
무작정 다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배워야 할 것과 스쳐야 할 것을
구분해서 영혼에 담는 것이 공부다.
들리는 모든 소리를 다 듣고
세상이 추천하는
모든 것을 다 배운다는 것은
아직 그가 삶의 방향을
제대로 설정하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자신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결코
귀와 영혼에 아무거나 허락하지 않는다.
배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자신을 아는 삶의 시작이고 모른다는 것, 알기 위해 분투하는 것은 생명을 가장 가치 있게 쓰는 삶의 시작이다. 올라가야 할 한 계단, 들어야 할 한 마디, 써야 할 한 줄, 인생은 어떤 하나를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느냐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가장 지적인 게임이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확신이 든다면 그걸 선택하고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이룬 모든 창조도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명심하자.
모두가 걷는 길은 무작정 걸어가도 최소한 외롭진 않다. 하지만 모두가 걸어가는 그 길에는 당신의 삶이 없다. 고통과 아픔을 순결하도록 견딘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한 스승 로뎅과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응원했다. “당신을 괴롭히는 문제를 안고 오늘 하루를 살게 된다면 당신은 그리 멀지 않은 어느 날 현명한 대답을 지니고 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을 괴롭힌 가장 힘들었던 나날이 당신을 웃게 할 가장 아름다운 내일을 만들테니까요.”이런 응원을 들으면 힘이 날 것이다. 달콤한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겉핥기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다음은 칸트를 만날 차례다. 그는 인생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칸트에 대해 저자는 “20년간 그를 겪어 봤으나 그는 귀에 듣기 좋은 말한 하는 사람이 아니다. 끝을 완벽히 소화해야 모든 과정이 빛난다는 것을 실제 몸소 보여주었다.”라고 했다. 칸트는 ‘행복의 원칙 3가지’를 조언하고는 그것을 일상에서 실천하라고 하고 하기도 했다. 보통 그의 말에는 공감하지만, 그의 삶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데 그는 155㎝의 작은 키에 몸도 허약했으나 80살까지 살았다. 그가 당시로서는 장수라 할 수 있는 나이까지 산 것은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규칙적이고 단련되었기 때문으로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하고 열정과 기품에 감동해서 눈물이 흐르는지도 모른 채 인생의 방향을 끝까지 처음 마음 그대로 하면 가장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행복의 3원칙이란 것도 별것이 아니다.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
세상의 평화가 무너지면 폭탄이 난무하고 결국 멸망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반복해서 싸우고 이기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승자가 될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도 알지만 패배 속에서라도 이기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칸트는 이런 질문에 관심이 없으면서도 조언은 했다.
우리는 왜 성장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어제보다 오늘 나아져야 하는가?
혁신이 점차 늦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칸트의 대표작이 《순수이성비판》인데 순수하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지키기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순수성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칸트가 묻고 답했다. “인간에게 가장 훌륭한 탐구가 뭐하고 생각하나? 내가 알기로는 바로 인간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탐구라네.”칸트는 과학에 있는 탐구를 인간 삶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저자가 덧붙였다.
“한국 사회를 보니 요즘 일시적인 식이요법과 운동을 통해 가장 예쁜 몸을 만들고 사진으로 찍어 남기는 사람이 많던데, 물론 다 의미가 있는 일이야. 그러나 이런 질문이 필요해 ‘조금 중요한 일을 하느라 우리는 가장 귀한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바로 ‘생각을 장식하는 일’을 말하는 거야. 육체가 아닌 생각이 바로 그 사람의 삶을 증명하는 ‘영혼의 지문’이거든.”
나이가 들면 육체는 생기를 잃고 점점 옛 기억을 잊지만, 생각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영혼이 지나온 그 길을 지문처럼 기억하고 남긴다. 소크라테스도 영혼의 지문이 곧 사람의 훗날 얼굴을 결정한다면서 몸의 장식보다 생각의 장식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의 외모가 훌륭하지 않아서 반대파의 비난과 조롱을 받곤 했다. 제자들이 스승님은 추남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항변하거나 다른 말로 포장하지 않았다. 다만 “제자들아, 거짓말은 하지 말자. 나는 악인처럼 생겼지. 앞으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 좋겠구나.‘우리 스승님은 악인으로 태어났지만, 온갖 수양을 통해서 그 육체를 극복하고 있다. 이제는 누구보다도 선한 사람이 되었다. 선한 얼굴로 태어난 사람보다 수십 배나 더 고생했으니 더 위대하지 않겠어?’라고 말이다.”
생각하라! 생각하는 자만이 성장할 수 있고 성장이 더딘 시간을 견딜 용기도 낼 수 있다.
기계가 발달하고 인공지능이 우리 삶을 파고들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은 인간이다.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더욱 자신의 감각을 끌어올리고 단련하는 데 힘을 써야 한다. 결국 내 힘이 내 삶을 결정한다. 모든 것이 희미해지고 본래 가지고 있던 고유의 힘을 잃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태어난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하고 묻고 보면 세상이 아니라 인간의 시선이 빠뀐 것임을 금방 알게 된다. 죽음에 다가갈수록 인간은 점점 더 아이가 된다고 한다. 점점 나약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더 순수해지며 오염되지 않게 사물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세상이 정한 규칙과 정의, 인간이 설정한 습관과 기능에서 벗어나 사물의 본질과 만난다면 우리는 세상의 가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진정한 자유는 모든 것을 스스로 이끌어 나가는 능동적인 사람에게만 선물처럼 다가온다. 힘들어도 한 가지 뜻을 세우고 가야 한다. 잘못과 실패가 있더라도 그것만이 빛을 보는 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누구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시선을 잃지 말자.
‘이것이 바로 내 인생이다!’라고 외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시간을 살아 있다고 부를 수 있다. 그런 삶을 살고 싶다면 성장과 평안, 느낌표와 물음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처럼 스스로 삶을 제어해야만 한다. 타인이 아닌 나를 움직이고 또 멈출 수 있을 때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거니까. 이에 대해 임마누엘 칸트는 완벽하고 위대한 결론을 내렸다. “공들인 삶은 죽음이 다가올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를 만난다 해도 그의 심오한 경지에 도달하기는 참 어렵다. 그는 높은 차원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좋은 책을 읽고 강연을 접하면서 우리는 그들이 가진 지식을 잠시 빌릴 수 있지만,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는 못해. 지식을 지혜로 만들지 못한다는 말이야. 이유가 뭔지 알아? 늘 상식적인 시선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관찰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이게 무슨 말인가 싶기도 한데 세상의 ‘지식’은 잠시 빌릴 수는 있어도 ‘자기만의 지혜’로 쌓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치열한 관찰의 부재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관찰이 대단하고 중요하단 말인가. 그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고 그저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소한 것들에서 출발하라고 한다. “우리는 왜 하루에 3번 식사를 하는가? 부모는 왜 아이를 사랑하는가? 새는 왜 자꾸 둥지룰 옮기는가?”그냥 보고 스치는 이것들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며 관찰해보라고 한다. 아무리 질문하고 관찰해도 풀리지 않는다면 거기서 멈출 게 아니라, 답을 찾을 때까지 계속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남에게 빌린 지식을 나만의 지혜로 바꾸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여기 덧붙여 “세상이 알려주는 지식을 맹목적으로 외워서 대체 어디에 써먹을 수 있겠어? 거기에서 무슨 새로운 지식인이 나오고 혁신을 통해 성장할 수 있겠어? 그래서 사색이 중요하지. 그걸 가능하게 하니까.”라고 저자가 말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배울 시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과 같다. 살아 있을 때,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어디든 갈 수 있을 때 조금 더 사색하고 오래된 관점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접속하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게 하나 있더군. 바로 스스로 자신의 색을 지우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존재가 있다는 거지.”이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수천 명이 단 하나의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건 수천 명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각이다. 존재의 이유 자체가 없는 것과 같다. 수많은 사람과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고독한 일상을 추구해야 한다. 말처럼 쉽지 않지만, 통렬하게 질문해 보라. ‘나는 언제 고독한가?’라고. 사업에 실패했거나 실연했을 때 가장 고독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자기 몸이 아플 때 가장 고독하다. 남이 알지 못하면 공감할 수가 없다. 세상에는 나를 대신해 죽어줄 사람은 없다. 그것은 허락되지도 않는다.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한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혼자다. 그래서 고독하다.
죽음을 앞에 두고 철저하게 고독한 시간을 보내던 니체가 마지막 깨달은 삶의 진리는 바로 “나를 죽이지 못하는 모든 고통은 오히려 나를 더 강하게 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모든 고독을 견딜 용기가 필요한 거야. 그래야 더욱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것의 구체적 방법을 제시했는데, “수천 명이 모두 나를 버리고 떠나도 혼자 남을 용기, 반대로 수천 명이 다 남아 있어도 나는 혼자 길을 떠날 용기가 필요하지. 남는 것, 떠나는 것 그 방향은 다르지만 모두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니까. 자신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삶이기 때문이야.”또한 배워서 아는 것은 바로 실천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래야 배웠다고 할 수 있다고도 했다.
“사람은 높이 올라갈수록, 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작아 보이는 법이다. 우리는 자신이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를 용감하게 실천하고 주장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내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극소수만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 거야. 용기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덕목이 아니니까.”
[레프 톨스토이]
톨스토이는 『부활』, 『전쟁과 평화』등 걸작을 쓴 러시아 대문호로 알고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위대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자도 그 반열에 올린 모양이다. 톨스토이가 새벽에 잠이 깼다. 그는 늘 그렇듯 아무 말 없이 사색하다 글을 썼다. 지난 30년간 반복하는 이 루틴(판에 박은)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나를 보고 있다. 좋은 일을 반복해서 꾸준히 하라는 마음의 명령이다’고 생각한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톨스토이는 자신을 소개하며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내가 추구했던 것들과 하나하나 만든 콘텐츠는 순수한 내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그걸 나는 ‘내장이 없는 욕망’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저 현재의 삶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모두가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생각하지만, 정작 스스로 변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나는 후자가 되고 싶을 뿐이다.”라고 했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쓴 책이 잘 팔린다는 이유로 자신의 욕망을 순수한 것이 아니라고 하며 “네가 뭘 그렇게 많이 안다고 자꾸 글을 쓰냐? 얼마나 안다고 여기저기 강연을 하고 다니냐?”하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그것은 글 쓰고 생각을 말하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내장이 없는 욕망을 갖고 살았음을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욕망은 이익만을 위해 무엇을 하거나 이기기 위해,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억지로 줄을 선 삶은 아니었다. 사색과 창조, 글쓰기가 톨스토이의 삶이었다. 그는 공자의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아는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를 자주 인용하였는데 “내가 술을 마셔야지 반대로 술이 나를 마시면 안 된다. 진실로 술을 즐기는 자는 시끄럽게 떠드는 분위기에서,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마시는 사람이 아닌 혼자만의 공간에서도 즐기는 사람을 말한다. 무언가를 즐긴다는 것은 서로 교감하고 서로 좋아하는 거니까. 술이 나를 이기지도 않고 반대로 내가 술을 이기지도 않게 할 것이다.”라고 했다.
지금도 인터넷 댓글로 인해 종종 문제가 발생하지만, 톨스토이가 살던 때도 그랬던가 보다. “나의 사생활과 과거를 들먹이며 비판하는 사람도 참 많았지.”라고 한 것을 보면 그냥 웃어넘길 상황은 아니었던가 보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은 하나의 에피소드로 보고 “사람의 마음이란 언제든 변하고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마음이 편안하지. 세상에 좋기만 한 건 별로 없어. 나를 위해 가장 내게 좋은 것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거지.”라면서 위안하기도 했다. 여와 야, 진보와 보수, 세대 간, 이성 간 갈등의 극과 극 사이에 서 있는 사람들일수록 나를 아끼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요한 상태에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나를 한결같이 지켜봐 주는 사람이 가장 귀하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과 사람을 보는 마음이 조금은 고요해진다.
이런 생각을 한번 해보자. 누군가 자꾸만 당신의 호주머니에 쓰레기를 넣어 준다면 당신은 뭐라고 할까? 아마 가만히 있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불쾌한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의 우리 머리는 그런 취급을 받고 있는지 모른다. 무언가 열광적으로 옹호하고 지지하는 것도 소중한 일이다. 그러나 그 안에 나만의 생각이 없다면 아무리 열광적으로 뛰어도 그 시간은 자기만의 것으로 남지는 않는다.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생각을 멈춰서는 안 된다. 그게 바로 타인이 넣어 준 쓰레기를 정기적으로 비우고, 거기에 자신의 것을 채울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다. 여유를 찾지 못하면 사람은 죽는 날까지 사는 것만 걱정하게 된다. ‘걱정하며 살아지는 삶’그리고 ‘사색하며 더해지는 삶’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능력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책 한 권을 읽어도 그 책이 나의 의식 흐름의 방향을 결정하고 그렇게 읽어서 쌓인 책이 나의 의식 수준을 결정한다. 늘 기본과 순리를 기억하며 책 한 권도 쉽게 선택하지 말라. 그것이 세상을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자신의 의식 수준을 결정하는 일이니까. 깊은 강물에는 돌을 집어 던져도 흐려지거나 파문이 일지 않는다. 모욕을 받고 이내 발칵하는 인간은 작은 웅덩이에 불과하다.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가치 있는 것은 깊어서 쉽게 움직이거나 흐려지지 않는다. 끝까지 쉬지 않고 계속 뛰어갈 수 있는 인생은 없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열정 속에서도 휴식을 허락하는 것이 좋다. 중간에 멈추고 빈칸을 남겨 두는 것은 삶의 목적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선택이다.”톨스토이가 전하는 삶의 진리가 녹아 있는 조언이다. 그러면서 톨스토이는 마지막으로 삶의 균형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을 위해 당부도 잊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면 할수록
죽음으로 인한 슬픔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인생의 목적과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을
자기 삶에서 깨닫는 것이 바로 지혜이다.
진정한 사랑은 말에 있지 않고 행동에 있으며,
그런 사랑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지혜를 준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 「지식백과」에서 그에 대해 자그마치 26쪽이나 설명이 돼 석과는 너무 다르다. 한때 우리도 “죽기 전에 무엇을 하고 싶나?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비킷리스트’라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다. 여기에 답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가 녹아 있어서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태도가 바뀌고 태도가 바뀌면 해석도 달라지듯이 “당신의 비킷리스트가 무엇인가요?”하고 물었을 때, 살아 있을 동안에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 대답한다면, 그것은 현재는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다. 이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단호하게 “인생의 저녁은 당신이 오전에 만든 등잔을 들고 찾아온다. 다시 말해 당신 인생의 처음 사십 년은 본문이고, 나머지 삽십년 혹은 사십 년은 주석에 불과하다. 그러니 나중을 생각하지 말고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에 집중하라.”고 한다.
참으로 근사한 조언인 것 같다. 앞으로 남은 여생 동안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지금은 하고 있지 않다는 말로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이라면 지금 당장 하란다. 누구에게나 삶은 치열하고 새벽은 깊고 두껍고 어두우며, 보이지 않아 측정이 불가능하다. 보이지 않을수록 두려움은 더 깊어진다. 인생도 그렇다. 어느 시대에나 그랬다. 그렇지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명쾌하고 지혜로운 답을 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흐릿하거나 손에 잡히지 않는 언어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통의 삶에서 나온 진정한 언어라야 도움 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두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내게는 두 가지 삶의 원칙이 있다네. 하나는 아침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지. 늦게 일어나면 아침 시간이 사라지는 거잖아. 아침 시간을 삶의 본질이자 신성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네. 또 하나는 고통을 삶의 양념이라고 생각한다네. 약간의 근심, 걱정, 고통과 고난은 삶에 반드시 필요한 양념이지. ‘배의 바닥에 적절한 무게가 없으면 배는 불안정하여 마음대로 앞으로 나갈 수가 없는 것처럼…’피할 수 없다면 그걸 인생에 적절히 활용해야 하는 거야.”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거나,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는 말이 맞는 말일까? “독서한 내용을 모두 잊지 않으려는 것은 먹은 음식을 모두 체내에 간직하려는 것과 같다. 또한 책을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나 책을 살 때는 포함해야 할 것이 있다네.‘책을 읽는 시간까지 살 수는 없다.’라는 사실이지. 읽을 수 있는 여유까지 스스로 생각해서 마련해야 하네. 그것까지가 독서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책을 산 것만으로 책의 내용까지 알게 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그리고 “나는 책을 서문부터 차례대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지는 않아. 집에 수많은 책이 있지만 모두 다 읽었다고 말할 수는 없네. 다만 내 시선을 모두 거쳤다고 할 수는 있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목숨 걸고 일하고 있나?”라고 물으면, “굳이 그래야 하나? 너나 그렇게 살아라.”같은 대답이 돌아올지 모른다. 삶이 힘드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이다. 그러나 같은 질문에 쇼펜하우어는 저자의 입을 통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명성이 다가오기 시작했을 때 죽음이란 녀석도 함께 찾아오더군. 세상에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나다니! 나는 심장마비로 죽었고, 모든 재산은 미리 작성한 유언에 따라 자선단체에 기증되었지. 그런데 내가 명성을 얻자마자 죽을 운명이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더라도 철학을 탐구하고 글을 썼을까? 내 대답은 물론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나는 목숨을 걸고 글을 썼고, 죽는 순간까지 글을 썼으니까 말일세.”
그리고는 마지막 조언의 말도 잊지 않았다.
“죽는다는 생각은 태어날 때부터 하는 거지. 꼭 암에 걸려야 죽는 건 아니야. 늘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아 봐. 그러면 인생이 더 농밀해지지.”그러면 남은 건 실천이겠는데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하는 질문을 계속해 보는 거란다.
“내게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해야 할 일이 있는가?
만약 그게 없다면 왜 당장 찾지 않는가?
있다면 그걸 왜 맹렬하게 실천하지 않는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괴테는 80을 살면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등 걸작을 발표해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사상가로 남다른 식견을 가졌던 것은 그 시절에는 종교개혁을 비롯해 시대상이 새로움을 향해 식견을 내보이고 문화를 창조하고자 한 욕구가 팽만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살펴본 릴케, 칸트, 니체, 톨스토이, 쇼펜하우어도 모두 비슷한 시기에 살았고, 맹렬하게 살았던 인물이라는 것이 그런 생각을 갖게 한다.
“삶의 방식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행복과 기쁨을 추구하는 방식에도,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에도 모두에게 통용되는 절대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한 괴테는 오직 나만의 방식, 자신에 대한 믿음의 강도가 남과 다른 삶을 살게 된다고 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약한 마음이 혼자서 오해를 하게 되고 남들이 자신을 적으로 돌렸다고 착각하게 되고, 그런 불안한 마음이 정신을 지배하게 된다고 한다. 삶이 힘들 때마다 고정관념이 움직이지 못하게 막을 때마다, 자연을 보고 생명이 왜 아름다운지 깨닫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옥죄는 틀에서 벗어나 자유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지만 젊었을 때는 역할과 책임을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무엇이 사라지는 과정과 의미를 고민한 경우는 드물다. 그것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가 나이 들어서 ‘무엇을 남길 것인가?’라고 고민하게 될지 모르겠으나, 그런 시대는 지났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의미를 두지 않고 어떻게 하면 깨끗하게 사라질지 고민하는 것이 죽음을 앞둔 세대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자신의 쓸모를 다 쓰고 가겠다는 것이 좋은 태도다. 과거에는 세상을 떠나면 당연히 땅에 묻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제 아무리 돈과 땅이 많아도 화장을 하고 최대한 압축해서 납골당으로 간다. 인류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까지 쌓아가는 삶을 살았다.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면서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 당장 쓸모 있는 것만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남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쓰고 활용한 후에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 큰 배려인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괴테가 비유했듯이 건축에서 가설(假設)이 매우 중요하지만, 건축이 완성된 후에는 헐리고 마는 발판에 불과한 가설이 아니라 실용성으로서의 가설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진실한 것은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본질을 감싸고 있는 온갖 포장지를 벗겨 내면 결국은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진리를 만나게 된다. 그 안에 모든 쓸모가 집중되어 있다. “확실한 일을 실행할 힘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러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확실한 가치를 보는 눈’과 그것을 담을 ‘내면의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게 무엇이든 쓸모를 모두 활용하면 대상에 숨겨진 가치를 볼 수 있고, 가장 가볍고 가장 단순한 형태로 아름답다. 그것이 가장 진실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뒤에 가는 사람은 먼저 간 사람의 경험을 이용해야 한다. 그래야 같은 실패와 시간 낭비를 되풀이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선배들의 경험을 활용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단점이 아닌 장점을, 비난할 부분이 아니라 칭찬할 부분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더 나은 생각을 할 수가 있다. 흔히 돼지를 보고 무시하거나, 얕잡아 보거나, 비유해서 ‘욕심이 많아 살이 찐 돼지’라고 하지만, 관점을 조금만 바꾸면 입장이 달라지듯이 돼지는 유독 다리가 짧다는 단점 때문에 뚱뚱해 보이지만, 하마에 비하면 그리 뚱뚱한 편도 아니다.
볼 수 있다면 찾을 수 있고 찾을 수 있다면 바꿀 수 있다. 본다는 것은 곧 바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이 아무리 곁에 있어도 변화와 가치를 볼 수 없다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변화의 시작은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자연을 믿어야 하고 그걸 보려면 눈을 뜬 인간이 되어야 한다. ‘눈을 뜬 인간?’관찰력을 가진 인간을 말한다. 그렇게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고독이다. 혼자서도 고독을 즐길 용기 말이다.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 고독은 풀리지 않는 문제를 찾기 위해 스스로 나서서 맞이하는 것이지만, 외로움은 스스로 나서야 할 용기를 내지 못한 자에게 찾아오는 벌이다. 우리는 때때로 고독에 잠겨야 한다. 그래야 외로움의 벌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은 이유는 우리 사회가 개인을 혼자 두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고독하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혼자 걸어갈 용기, 혼자 다른 것을 선택할 용기, 혼자 남아서 사색할 용기 말이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속에서 자신만의 색을 가질 수 있고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고독의 길로 가는 과정이 쉽지 않다. 하지만 포기하기는 아직 이르다.
일시적인 것에서 벗어나 영원한 것을 보자.
가치 있는 것들은 언제나
영원한 것들 속에만 존재하니까.
늘 기억하자.
생명은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발명이며,
죽음은 더 많은 생명을 얻기 위한 기교다.
노력하는 한 우리에게는 늘 기회가 있다.
정진하여 달려가자.
서두르지 말고, 쉬지도 말고.
저자인 김종원 선생은 평생 멘토로 생각한 이어령 교수가 타개한 것을 매우 애통해하면서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을 소개했다. “젊은이는 늙고, 늙으면 죽는다.”마치 어떤 소망과 같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말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는 날이 다가올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죽음을 친구처럼 만나 살다가 죽게 될 것이다. 죽음을 친구로 맞이한 경험을 통해서 나의 생명의 신비와 가능성을 배웠던 것을 기억하게도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