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꿈은 현실이라는 실물과 충돌을 한다.
우리가 가진 꿈이 모두 구체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금씩 가슴에 들어있는 바람을 뺀다.
우리가 살면서 내내 한숨을 쉬는 것은 꿈으로 채워놓은,
가슴에 든 헛바람을 뽑는 일이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제로섬의 법칙을 배운다.
차지하는 공간이 사람마다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재화는 무한정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배당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때로는 친구를 이겨야 하고 동료를 밟고 넘어가기도 한다.
그리고 슬픈 일이지만 계층과 계급이 이 사회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된다.
인간의 생존 프로그램은 죽음에 대한 공포로 방어망을 이루고 있다.
어떤 절대자로부터 직접적인 간섭을 받지 않지만
삶과 죽음이라는 틀속에 갇혀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재물에 집착하는 것도 삶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며
자식을 생산하는 것도 죽음으로부터 생명의 연장을 희구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대리충족인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본능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애써 잊는다.
그 모든 생존을 위한 행위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며
그러한 빛으로 본태적인 어두운 그림자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재물을 이루고, 사회적 신분을 만들고, 자식을 가르치고 키워간다.
행복이라는 개별적 가치에 매달려 인생의 여름을 뙤약볕 밑에서 보낸다.
그런데 어느날 거울 앞에 선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내 인생에도 어김없이 가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난 여름 숨차게 달려온 시간들 속에서
지치고 병들어버린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아이들은 품안에서 멀어지고 또 다른 개체가 되어
나름대로 저들의 인생을 준비한다.
앞서 달리던 발걸음이 무디어지고 세상이 달리는 속도에 숨이 가빠진다.
우리가 힘들게 이룬 모든 것이 향상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필연적으로 상실감에 부닥친다.
우리에게 남은 것이 겨울이라는 노년의 시간 뿐이라는 사실이 암담해 진다.
그리고 자문을 한다.
나는 이제껏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젊음이거나 재물이거나 지난 날의 영화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잃은 것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시간이다.
모든 것은 그 시간속에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우리에게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흘러가버린 안타까운 시간들을 자꾸 뒤돌아본다.
그 어떤 노력도 시간의 불가역성을 어쩔 수 없다는 사실 앞에 무력해진다.
시간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게 아니었다.
시간은 그저 손을 흔들고 떠나간 게 아니었다.
시간은 너무나 많은 것을 가져가 버렸다.
시간이 남겨둔 것이란 고작 내 안에 쌓아둘 수 없는 잡동사니에 지나지 않았다.
육체의 기계적인 기능도 떨어진다.
싱그럽던 피부는 탄력을 잃고 까칠해져 간다.
표피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도 메말라 간다.
어느새 웃음은 밋밋해지고 울음도 목이 메여 잘 터지지 않는다.
허무감으로 꼿꼿하게 가슴을 펴기가 힘들다.
중심에서 외곽으로 밀려나는 자화상을 지켜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젊음은 아무렇게나 던져 놓아도 저토록 아름다운 것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가을에 접어들고서야 생존 프로그램에 세팅이 된 삶을
살아오는 데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겨우 알게 된다.
그러나 세월의 강은 거슬러 흐를 수 없는 것이다.
중년의 고독은 잃어버린 시간에서 시작된다.
그러기에 그 어떤 것도 고갯마루에 선
중년의 허전한 가슴을 채워주지 못한다.
공간을 붙잡는 것으로 시간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래서 주름살을 제거하고 값비싼 옷으로 치장한다.
더 깊은 환락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가슴은 더욱 허무하고 초라해질 뿐이다.
그것은 시간만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끝내 자기 자신마저 잃어버리는 것이다.
한번 시간이 나면 둘러보시라.
화려했던 유흥가의 아침이 밝아오면
더할 나위 없이 비루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난 시간을 아쉬워할 까닭은 없다.
가까이서 바라보는 세상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혼란과 갈등에 쌓여있을 뿐이다.
젊음이란 그 혼돈의 중심을 지나온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분석적이고 해체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배우고 탐지했을 뿐이다.
갈등의 한 축이 되어 살아왔던 시간들을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언젠가는 버려야 할 시간이었다.
우리에게 젊음이 다시 온다면 우리는 시간만 되돌려 받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갈등까지 한몫으로 받아야 한다.
지난 시간이란 누구에게나 소모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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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거울에 비쳐진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라.
그러면 늙은게 아니라 잘 익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은 결코 늙어가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서 한알의 밀알이 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눈이 침침해지는 것처럼
사람은 익어갈수록 미시적으로 바라보던 일을 멈추게 된다.
혼잡한 도시의 아우성마저도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답다.
사람들은 그래서 한사코 산에 오르는 것인지 모른다.
중년이란 이 세상을 멀찌감치서 넉넉하게 바라보기 위해
그 힘든 세월을 뒤로하고 머나먼 산에 오른 것과 같다.
중년이여, 그만 가슴을 펴라.
인생은 생장수장(生長收藏)이다.
시간을 잃어가면서 나를 완성해 가는 것이다.
가을볕이 곡식을 여물게 하듯이
중년의 세월은 당신을 마치맞게 삭히고 있다.
스스로 아름답고자 헤매던 젊음의 세월은 개울물과 같다.
아름다운 눈으로 저 넓은 세상을 가슴에 담는 중년이야 말로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익어서 하나의 열매가 되고,
그 열매는 어딘가에서 또 다시 따뜻한 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