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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눅 5:36-39
한해가 가고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면서 흔히들 송구영신이라는 말을 한다. 예것은 보내고 새것을 환영한다는 말이다. 정말 지난 해의 코로나바이러스를 영원히 보내고 올해는 마스크 안쓰고 백신을 접종안해는 해를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 어찌 나혼자만의 생각일까? 지난해는 이 코로나를 막겠다고 백신접종을 시작하였는데 백신약효는 떨어져서 1차 2차 3차까지 접종하라고 강요하면서 이제는 백신맞은 사람들만 살아가는 세상이 된 것 같다. 백신패스라는 말은 백신맞지 않은 사람은 생활에 제약을 받는데 백화점에도 대형마트에도 실내체육관도 대중목욕탕도 가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무엇보다 백신을 맞으면 코로나 확진률을 단번에 낮춘다고 하였지만 확진자는 60만명이 넘었고 죽음사람만 6천명이 넘었다고 하니 무엇이 진실인지 헷갈리는 한 해였다고 할 수 있는데 해가 바뀌어도 이러한 정책은 조금도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새해를 맞이하여도 기분이 침울하다. 이처럼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을 경험하면서 시간은 흘러서 어느덧 2022년 임인년을 맞이하면서 새해에 복많이 받으시라고 새해인사를 합니다.
올해 에는 3월 9일 치러지는 대선과 6월1일 전국동시 지방선거인 시장 도지사 군수 구청장이 치러지는 해이므로 여기에 나오는 후보들이 진짜 복을 받아야 될 것 같다.새해를 맞이할 적 마다 새해 복많이 받으라는 말을 할 때나 들을 때 좀 괴로운 것은 과연 내가 복받으라고 해서 상대방이 복을 받을 수도 없는 것이고 내가 복을 받으라고 해서 받는 것도 아니면서도 이런 겉치례 인사를 하게 된다. 복이란 복을 주는 주체자가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어찌 나같은 인간이 복받으라고 한다고 복을 받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인사를 받는 사람도 그렇게 생각한다, 복은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만이 복을 주실 주도 있고 뺏어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각자 꿈과 소원이 있어서 올해에는 뭐가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성경은 해아래서 하나님 없이 사는 모든 인생들이란 결국 헛된 일에 분요하다고 하면서 새해를 맞이한들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정말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기 전까지는 새것이라는 말이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떴던 해가 내일 다시 떠오르고 지난해 왔던 계절이 올해에도 다시 오리니 무엇을 가리켜 새것이라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새것이란 그리스도안에서 죄사함을 받고 죽었던 자가 부활하여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만이 진짜 복받은 것임을 말씀드리면서 지금까지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올 한해에도 우리들에게 새로운 한 해를 허락하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어떻게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알프스 산맥에는 풀이 풍부하여 목동들이 그곳에서 양을 치는데 목동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아름다운 습관이 있는데 하루 종일 목동들이 양을 이리 저리 끌고 다니며 풀을 뜯어 먹게 합니다. 한낮에는 양들을 풀을 뜯는 동안에 목동들은 낮잠을 자기도 하고 피리를 불기도 합니다. 때로는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양들을 급히 나무 아래로 피신시키기도 하며 어떤 때는 갑자기 나타난 맹수와 싸우기도 합니다. 때로는 낭떨어지기에 떨어진 양을 구하기 위하여 많은 고생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동안 갖가지 일들이 일어나는데 해질 무렵이면 산 위에 있는 목동은 산밑에 있는 목동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친다고 합니다. “주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으니 주님을 찬양합시다” 이 소리는 조용한 공기를 타고 산 아래로 널리 퍼지게 되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다른 목동들도 그 소리를 듣고 “주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주께 감사합시다” 화답하면서 하산을 한다고 합니다. 알프스 목동들에게 하루를 마감하는 구호는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입니다. 목동들이 하루를 마감하는 것이나 우리들이 한해를 마감하는 것이나 어쩌면 비슷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오늘 하루를 도와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목동들을 생각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렇다면 우리들도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들을 도우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감사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1. 새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지난 2년동안은 코로나로 인하여 전 인류가 코로나방역을 위하여 지난 한해는 마스크 없이는 외출도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학교나 교회예배도 원격으로 비대면 수업이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일상화된지도 벌써 두 해가 지났다. 교회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야 큰 소리로 기도도 할 수 있고 찬양도 부를 수 있고 예배 후 식사도 같이 할 수 있을 수 있다. 학교도 원격수업대신 전처럼 학생들이 매일 학교가서 교실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멈춘 것이 지난 해였다. 우리사회는 정부가 개인의 전월세까지 간섭하면서 부동산 값은 폭등하게 되었으니 문대통령이 취임식 때 말한대로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대한민국을 우리는 코로나와 함께 경험하지 아니했던가! 그럼에도 우주만물을 운행하시고 한나라를 세우기도 하시고 파멸케도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런 험한 풍랑에서도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을 우리는 히브리어로 에벤에셀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삼상7:12).
(1)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BC 1050년 경 즉 다윗왕조 이전만 하여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사람들로부터 많은 위협을 받았습니다. 블레셋이란 지금의 팔레스타인 땅에 거하는 사람들인데 지금은 그들이 약해도 사무엘 선지자 이전은 블레셋이 너무 강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게 땅도 뺏기고 농사지으면 곡식도 뺏기고 늘 불안한 상태에 있었는데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겠는가?
(삼상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마음을 다해 주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주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으로부터 고난받는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이 유일하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는 바알이나 아스다롯(아세라) 같은 신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바알은 농사의 풍요를 보장해 준다고 믿었던 남신이며 아스다롯 즉 아세라는 다산을 보장해 준다고 믿었던 여신이다. 유일하신 주 하나님만이 농사도 풍요롭게 해 주시고 자녀의 생산도 주관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족속들이 믿던 신들인 태양신 바알과 달신 아세라를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택하여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깨닫게 하기 이해 불레셋을 일으켜 징계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가 된 사무엘은 제일 먼저 한 일이 우상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20:2-5)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주 하나님이니라 3 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곧 네 주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 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사무엘 선지자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미스바성회를 열고 이제부터는 그동안 은밀하게 섬겨왔던 남신 바알과 여신 아스다롯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단하는 미스바성회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식기도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삶에서 우상을 제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서 성회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쳐들어 왔으나 이번에는 그들이 전처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사무엘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주 우리 하나님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삼상 7:8). 사무엘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며 기도하였더니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가 오는 데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치면서 우박이 떨어졌습니다. 테니스공 만한 우박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강한 블레셋 군대라 하더라도 혼비백산하여 도망갈 수밖에 없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을 추격하니 그들은 쫓겨갔습니다. 사무엘은 추격한 그 곳에 기념비를 세웠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불렀는데 에벤에셀이라는 뜻은 “주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삼상 7:12)는 뜻입니다. 그후 블레셋은 사무엘이 사사로 있는 동안은 다시는 쳐들어오지 못하였고 그 후에는 빼앗겼던 에그론에서부터 가드까지 회복하였습니다(삼상7:14) 우상숭배를 제거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시대는 우상을 얼마나 숭배할까요? 새해 아침엔 언제부터인지 수많은 사람들이 해돋이 관광을 하고자 몇 달 전에 예약을 한다고 합니다. 시간이나 물질이 없는 사람들은 근교의 산으로 가서 해돋이를 보면서 금년 한해에도 잘되게 해달라고 빌고 있는 문화가 지금은 아예 대세로 자리 잡은지 꽤나 오래된 것 같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공식적인 해돋이 행사를 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돋이 구경을 하러 산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들이 바로 현대판 태양신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틀림없는 말입니다. 만약 교회다니면서 새해 첫날에 일출구경을 한다면 그는 정말 하나님을 떠나 태양신을 숭배하는 것이며 이런 자 말고도 눈에 보이는 우상은 섬기지 않더라도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요일2:15) 하셨는데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보다 쾌락이나 돈이나 자식을 더 사랑하면 쾌락이 우상이 되고 돈이 우상이고 자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성도들이 예수님보다 그 무엇을 더 좋아하면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속에 위와 같은 우상들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나와 관계된다는 것이니 우상들은 결국 “나” 인 셈이다. 즉 하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나를 더 기쁘게 하면 결국 내가 우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알고보면 오늘날 교회 안에 “나”라는 우상들이 얼마나 많을까? 이런 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것이다.
(고전6:9-10)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토색(속여서 빼앗는)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 날 한국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하나님보다 자기들을 더 사랑하는 우상숭배자들일 뿐만 아니라, 모든 교인들도 거의 다 자기 자신들을 위해 살아가는 우상숭배자들로 만들어 주님의 교회가 마치 막장 드라마 보다 더 못한 강도의 소굴, 범죄의 집단으로 타락했다는 해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결국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간다고 주구장창 외치는 그 목사나 그 교인들은 이제 자신들은 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는 날마다 주여 주여 할지라도 빛 좋은 개살구처럼 막상 그들의 삶속엔 주님을 위한 삶은 온데 간데 없고, 모두 하나같이 주님보다 자신들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었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중 시내산 밑에서 아론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해 낸 하나님이다 하고 금송아지 앞에서 먹고 마시고 춤추고 즐기는 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6:19-20)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자나 깨나 먹으나 마시나 죽으나 사나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지금 한국교회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기는 이런 우상숭배자들이 교회들 마다 가득차서 교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불신자들조차 교회가 이렇게 타락한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주님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나를 살리고자 하늘나라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멸시천대를 받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선물로 주셨는데 이런 망극한 은혜를 잊고서 우리가 그 분을 위해 살지 않고, 멸망 받을 불신자들과 같이 산다면 우리들은 금수보다 못한 자요 배은망덕한 자요 그 분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만들고 망령되게 하는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가장 큰 죄인이 아닐 수 없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나를 구원해 주신 그 분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늘 울어도 그분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므로 이제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데 그런 성도들에겐 조심할 것이 몇가지 있다.
(2) 불순종했던 것들을 반복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기업으로 삼고 하나님의 선민으로 특별한 축복을 받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동안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였고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애굽의 군대가 추격을 하였을 때에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추격하는 애굽의 군대들을 홍해에 수장을 시켰습니다. 광야에서 목 말라서 불만하였을 지라도 하나님은 마라의 쓴물을 달게 하여서 먹게 하셨고 또 르비딤에서 물이 없어 원망했을 때는 반석에서도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게 하였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날마다 만나를 내려 주어서 그 많은 사람들이 하루도 굶지 않고 먹도록 해 주셨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가 불만인지 입에서 나왔다하면 원망과 불평이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는 저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여서 하나님은 저들에게 38년의 가나안 입성을 연장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광야 40년 생활은 감사할 줄 모르고 원망만을 반복하던 세월이었다는 말은 우리 마음에서 원망과 불평을 제거하는데만 40년이 걸렸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40년동안 기사와 이적을 베푸셔서 그 백성들은 인도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대신 원망하는데만 세월을 보냈다는 것인데 한번 그들이 불만을 들어보실까요.
(민14:2-3)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랴! 우리가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랴! 3 어찌하여 주께서 우리를 이 땅으로 데려와 칼에 쓰러지게 하는가? 우리 아내와 자녀들이 탈취물이 되리니 우리가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하고
우리는 이런 불순종을 보면서 우리들은 무슨 일이 있든지 하나님 앞에 원망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이와 같은 불평과 불순종으로 얼룩진 40년의 세월을 싯딤 땅에 묻어 버리고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이와 같은 과거의 옛 구습을 그대로 가지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면 역시 똑같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주 배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요단강 물속에 있던 돌들을 취하여 길갈 땅에 기념비를 세우게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2022년의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모든 불신앙적인 언어나 행동을 깨긋이 청산하고 다시는 지난날의 죄악과 잘못된 것들을 반복하여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각오하고 요단강돌을 가져다 마음속에 탑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우리들도 지난해의 모든 죄악된 것을 묻어버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로 시작하는 한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에벤에셀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던 것을 감사하며 이 해를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지난해에는 코로나로 인하여 또 백신접종으로 인하여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을 지켜주셨고 가정을 지켜주셨고 믿음을 지켜주셨고 또 각종 사고로부터 보호해 주신 것에 감사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할 때도 도우셨고 광야에서도 도우셨습니다. 낮에 더울 때는 구름기둥으로 밤에 추울 때는 불기둥으로 도와 주셨습니다. 블레셋이 쳐들어 올 때 여기까지 도우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이 택한 자녀들을 도와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들어보세요.
(마28:20)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보다 더 큰 위로의 말씀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내일도 도우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때 미스바에서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은 그 후 에그론, 가드까지 땅을 빼앗게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미스바까지는 사막지대입니다. 그러나 에그론, 가드는 곡창지대입니다. 이스라엘 땅 중에 가장 기름진 땅에 속하는 땅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도우시고 오늘도 도우시더니 내일은 더 좋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상 두 사람의 잊지 못할 사건을 늘 마음속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는 가시나무 불꽃속에서 모세를 만나주신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는 고래뱃속에서 요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두 사건은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실화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에 가시떨기나무 불꽃속에 있었지만 가시나무가 타서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불이 이스라엘에 떨어져도 이스라엘을 태워 없애버리지는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누구도 이스라엘을 재로 만들 수는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는 요나가 고래뱃속에 3일 3야 있었으나 고래는 요나를 소화시키지 못하고 결국 토해놓고 말았듯이 누가 이스라엘을 삼켜도 토해내고 말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굳건한 신앙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모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역사나 요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믿는 자들이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반드시 구출된다는 확신을 갖게 만듭니다. 모세와 요나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올 한 해에도 세상의 재앙으로부터 우리들을 보호해주실 것이며 우리를 삼키려는 자들로부터 막아주실 것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을 돕고 내일도 도울 것이고 영원토록 도우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하루의 소중함을 알고 지내자
올 한해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선 매일 하루 하루를 선물로 주시는 분이시다. 1년은 365일 이고 하루는 24시간이고 1시간은 3600초이다. 하루 24시간은 남녀노소나 빈부귀천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인데 이 하루를 초로 환산하면 86400초인데 이 하루를 돈으로 환산하면 86400원이다. 하나님께서 매일 이 돈은 자기의 통장계좌로 입금시켜준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기쁠까? 그러나 그 돈은 저축할 수 없으며 그날 밤 자정이 지나면 남은 돈은 자동적으로 소멸된다고 생각하자. 이런 마음을 가진다면 누구든지 그날 선물로 받은 그 하루를 함부로 낭비하지는 않을 것이고 매우 소중하게 사용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말이 나와서 그렇지 시간보다 더 귀한 선물은 없을 것이다. 지금 이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present)이므로 현재(present)를 선물로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의 소중함은 사람에 따라서 다 다를 것이다.
누가 일년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까? 재수하는 학생에게 물어본다면 일년의 소중함을 알 것이다. 누가 한달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까? 미숙아를 낳았던 산모에게 물어보면 한달이 소중함을 알 것이다. 누가 한주간의 소중함을 알까? 선데이 주간지를 내는 편집자에 물어보면 한주간의 소중함을 말하여 줄 것이다. 누가 하루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까? 일용근로자에게 물어보면 하루의 소중함을 알 것이다. 누가 한시간의 소중함을 알 것인가? 이별을 하는 연인들에게 물어보면 그 한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일분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까? 방금 출발하는 기차를 놓친 그 할아버지에게 물어보시라 누가 1초의 소중함을 알까? 스피드스케이트에서 은메달 딴 선수에게 물어보라. 이처럼 사람마다 시간의 소중함이 다 다를 것이다. 그 귀한 시간을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처럼 시간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찬양과 기도를 드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요?
지난 한해도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금년 한해에도 해와 달이 우리를 해치 못하게 하고 재앙이 우리들을 넘어지지 못하도록 도와주실 것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내가 변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기대할 수 있단말입니까? 나의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 전제조건입니다. 잠언 4장 23절에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이는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거짓없이 주님께 드리는 마음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를 가리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새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해를 맞이하여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 말씀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바리새인들의 왜 금식하지 않고 이런 저질들과 먹느냐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우선 이말씀의 유래를 돌아본다면 당시 유대인들은 포도주를 만들 때 양가죽 부대에 담아서 자연적으로 발효시켰는데 발효가 끝난 포도주는 헌 가죽 부대에 담아두어도 괜찮지만 새 포도주는 발효 과정에서 가스를 내뿜고 팽창하기 때문에 신축성이 없는 낡은 가죽 부대로는 포도주를 발효시킬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발효중인 새 술을 헌 가죽부대에 담아두면 부대가 찢어지게 되고 술도 쏟아지게 되어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양가죽의 기름기를 제거하고 일정기간 손질을 하고 나면 물이나 술 같은 것을 보관하기에 적합한 도구가 됩니다. 새 포도주는 발효되는 과정에 가스가 발생되는데 그 때 새 부대는 신축성과 탄력성이 있기 때문에 팽창하면서 그 가스를 견디어 내지만, 낡은 부대는 딱딱해서 그 가스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반드시 새 부대에 담는 다는 말은 나의 마음이 새롭게 변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훈, 새 언약을 가리키는 말이며, '낡은 부대'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대표로 하는 당시의 유대교의 형식주의와 위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형식주의의 길로 빠져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온 선민으로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받았고 남자들은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택하셨다는 선민의식이나 교만심이 바로 낡은 부대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많은 이스라엘인 중에 주님을 메시야로 만난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던 시몬과 84년 동안 과부로 살아오던 안나뿐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전통에 사로잡힌 낡은 마음으로는 그 누구도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된다는 말씀을 하신 배경은 자신들을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대하는 사람들은 매국노와 다름없는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으며 마태의 집에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다. 바리새인들이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의인을 위해서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하셨습니다(눅5:32). 신앙생활의 본질은 예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시고 나는 죄인이라는 전제하에 예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받아야 된다고 예수님은 의미있는 말씀을 하시면서 새 술은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새로운 교훈을 주셨습니다. 낡은 가죽부대가 새 술의 발효력을 감당치 못해 터지는 것처럼, 유대교의 율법적 의식은 예수님의 새로운 복음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율법 준수나 도덕적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새 부대는 무엇일까요?
첫째, 새 부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잠언 4장 23에서 무롯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고 하였는데 이는 마음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지켜야하는 이유가 마음에서 생명의 근원이 나오기 때문인데 새 부대는 주님을 믿고자 하는 마음이며 죄인이 구세주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변화가 없는 즉 복음을 거부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낡은 부대'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받아들이는 새부대를 지닌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과 그분의 말씀이 곧 새 언약이요 새 포도주이니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 계셔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시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의 마음이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새부대에 담은 주님의 말씀은 계명인데 계명은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인데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한다고 하지만 이웃사랑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이웃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내 부모를, 내 식솔들을,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을...사랑해야 하고 또 우리의 삶 자체를 사랑하다보면 감사가 저절로 나옵니다. 매일 아침마다 눈을 뜨고 밝은 태양을 볼 수 있다는데 감사해야 하고, 일용할 양식이 있음에 감사하고, 많은 이웃과 친구들이 있음에 감사해야 하며, 오늘도 내가 일을 할 수 있다는데 감사해야 하며,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2022년엔 우리 더욱 서로 사랑하고 우리의 공간을 아름답고 소중하게 꾸며 나가는 뜻있는 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3. 새해에는 영육간 건강하기를 기도합니다
지금은 코로나역병이 온세상에 맹위를 떨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보면 누가 이 병에 걸려 고통을 받고 사망에 이르는가요? 폐에 기저질환이 있다면 이런 병에 걸렸을 때 회복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 건강한 습관으로 폐가 건강하다면 코로나병균은 몸에 들어오더라도 곧 낫게 될 것입니다. 폐를 건강하게 위해서는 한방에서 말하기를 은행이나 무우를 먹으면 폐가 튼튼해 진다고 하니 이럴 때일수록 건강관리를 잘해서 건강한 삶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몸은 영과 육과 혼이 한 몸으로 되어 있으므로 육이라는 것은 우리 몸을 보호하는 외형이고 실은 영혼이 우리 몸의 실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영혼이 건강하기 위해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전하고 지킬 때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건강한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현대인에게 건강을 해치는 것이 스트레스라고 하지만 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왔다고 해도 스트레스에 압박받지 말고 믿음으로 찬송과 기도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방법중의 하나가 예배생활을 통하여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시고 말씀과 기도로 호흡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더하시고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지난해도 건강주셨으니 올해에도 건강주실 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류조상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모든 사람들 속에는‘죄악의 쓴물’이 들어 왔습니다. 죄악의 쓴물로 인한 고통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죄악의 쓴물을 해결하지 않으면 사망의 독이 가득하여 크게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죄의 쓴물을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서운 죄악도 해결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사59:1-2) 1 주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죄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므로 인간들이 죄로 인하여 쓴물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의 쓴물은 인간의 힘이나 지식이나 수고로 달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보혈로만 쓴물을 달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예표가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변하기 위하여 한 나무를 던지라 하셨고, 모세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한 나무를 쓴물에 던지자, 쓴물이 단물로 변하였습니다(출15:25).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이 나무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가 짊어지신 나무의 십자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만이 우리의 죄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만이 인생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시는 유일한 분이다.
인간의 죄악은 인간에게만 쓴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동일하게 고통을 받으신 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에도 (사53: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예수는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믿어야만 구원을 얻습니다. 인생의 쓴물을 단물로 만드는 비결이 곧 예수를 믿는 것 이외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어떤 쓴 물들도 단물로 바꾸어 놓는 능력이 있습니다. 쓴물인 미움과 분노는 자기를 파괴하고 다른 사람도 파괴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움과 분노의 쓴물이 사람 마음속에 항상 있어, 그 미움과 분노의 쓴물을 토해내며 자신도 죽어가고 다른 사람들도 내가 토해낸 독이 퍼지면서 죽게 만듭니다. 미움과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다음의 글을 읽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19살에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 토스카니니는 음악적 재능으로 위대한 지휘자로서 명성을 얻었습니니다. 그는 음악적 재능뿐만 아니라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오케스트라 연습을 할 때 어떤 연주자가 실수하면,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변에 있는 물건을 마구 집어 던지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합주 연습을 할 때 한 연주자가 눈에 띄는 실수를 하자 즉시 얼굴이 분노로 굳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지휘대에 놓아두었던 자신의 비싼 시계를 집어서 바닥에 던져버렸습니다. 그 시계는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으로 깨뜨려지고 말았습니다. 지휘자인 토스카니니의 분노는 자기의 값비싼 시계를 망가뜨리게 하여도 고쳐질 수 없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의 분노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잃어버리게 하기도 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해부학자인 존 헌튼은 말하기를 “분을 내는 자는 자살하는 사람이다. 분과 노는 남을 괴롭히기 전에 자기를 죽인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해부학회의에 참석했다가 다른 의사가 존 헌튼 박사를 비평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존 헌튼 박사가 분노해서 상대에 대항하다가 그만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죽고 말았습니다. 분을 내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누누이 가르쳤던 그가 스스로는 분을 품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엡4:26에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는데도“화를 내는 것도 죄가 되나요?”라고 질문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화를 내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를 내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기 때문이죠. 화를 내고 있을 때, 우리의 마음 속에 사랑이 있습니까? 인내와 온유가 있습니까? 성령의 열매는 화, 격노, 신경질과 같은 감정과 함께 맺힐 수 없습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이런 실험을 했답니다. 개를 묶어놓고 개를 . 4시간 동안을 마구 때렸답니다. 개는 바짝 독이 올랐습니다. 만약 그 개를 풀어 놓으면 누구든 죽일 듯이 결사적으로 덤벼들 정도로 약을 올렸습니다. 그때 주사기를 꽂아 그 순간 피를 빼보니 피 속에 ‘시안’이라는 독이 생겼는데 한 마리 개에서 나온 독은 보통 개 80마리를 죽일 양의 독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사람이 독이 오르면 개보다 시안이라는 독이 1.3배나 더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혈기를 부리고 미움을 품으면 몸에 독이 생겨 일찍 죽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말하기를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고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움을 십자가에서 극복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죄 없으신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눅 23:34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미움과 분노를 이기신 것처럼 우리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갈 때만이 우리속에서 나오는 미움과 분노를 이길 수 있습니다. 새해에는 이런 미움과 분노를 극복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 죄악의 잠에서 깨어나야 영육간이 건강합니다
육신의 건강은 운동을 꾸준히 하여야 얻게 됩니다. 하루 밥 세끼를 잘 먹고 소화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운동을 생활화하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를 즐기고 각자 취미생활을 하는 것도 육체적 체력을 위하여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먹고 보약먹더라도 운동부족이면 육체적 건강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은 너무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일도 신앙생활도 내 몸이 건강하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신앙생활도 무조건 기도만한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말씀을 읽고 생각하고 적용하고 암송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감사의 제물입니다. 찬양은 이땅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히 부를 것인데 한 주에 한곡씩이라도 외우며 부른다면 일년이면 적어도 오십여곡은 머릿속에 입력시킬 수 있다. 이러한 말씀 암송과 찬양 외우기는 뇌의 운동을 촉진하는 것이므로 실제로 치매 예방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또 이웃사랑은 그들에게 작은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오늘 작은 관심을 가진 실화를 전하고 오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학자요 정치가요 목사요 주한 미국대사(1993-1997)였던 제임스 레이니는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여 에모리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건강을 위해서 매일 걸어서 출퇴근 하던 어느 날 쓸슬하게 혼자있는 노인을 만났다. 레이니교수는 그 노인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고 말벗이 되어 주었다. 그 후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외로워 보이는 노인을 찾아가 잔디를 깍아 주거나 커피를 함께 마시면서 2년여 동안 교제를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날 출근길에서 노인을 만나지 못하자 그는 노인 집을 방문하였고 노인이 전날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곧바로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을 하면서 그 노인이 바로 코카골라 회장을 지낸 분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 때 한 유족이 “회장님께서 당신에게 남긴 한 유서가 있습니다.”라며 봉투를 건넸다. 유서의 내용을 본 그는 더욱 놀라고 말았다
“2년여를 내 집앞을 지나면서 나의 말벗이 되어주고 우리 집 뜰의 잔디도 함께 깍아 주며 커피도 함께 마셨던 나의 친구 레이니, 정말 고마웠어요. 나는 당신에게 25억 달라(2조7천억원)와 코카골라 주식 5%를 유산으로 남깁니다” 너무 뜻밖의 유산을 받은 레이니 교수는
1) 전 세계적인 부자가 그렇게 검소하게 살았다는 것과
2) 자신이 코카골라 회장이었음에도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과
3) 아무도 연고도 없는 사람에게 잠시 친절을 베풀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큰 돈을 주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레이니 교수는 받은 유산을 에모리 대학의 발전기금으로 내 놓았다. 제임스 레이니 교수가 노인에게 베푼 따뜻한 베품으로 엄청난 부가 굴러 들어 왔지만 그는 그 부에 도취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부를 학교와 학생을 위한 기금으로 내 놓았을 때 그에게는 에모리 대학의 총장이라는 명예가 주어졌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한 전설같은 얘기이지만 겨우 몇십년전에 일어난 실화이며 주한미국대사를 역임한 인물이 겪은 꿈같은 실화라 더욱 실감이 간다. 작은 친절 작은 배려 작은 도움 하나 하나가 사회를 윤택하게 하고 서로간 우의와 신뢰를 돈독하게 한다는 것을 금년에는 내가 그런 사랑을 베푸는 주인공이 되었으면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지금은 코로나로 전세계가 비상사태나 다름없습니다. 건강을 지키는 것은 내 몫이니 각자가 건강관리를 잘하여 하루 하루 죄로 만연된 이 세상을 선으로 싸우면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사회학자들이나 경제 전문가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금년에는 코로나의 스트레스와 함께 부동산정책 실패로 인한 상대적인 박탈감, 지나치게 높은 세금으로 인하여 자산을 강탈당하는 시대이더라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세상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서 미지의 2022년을 살아가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40년 광야생활을 마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족속들과 싸워야 가나안에서 살 수 있었듯이 오늘 우리들은 2022년을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심정으로 죄악의 가나안 일곱족족을 내마음에서 몰아내야 내가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신앙생활은 결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 노력하고 마귀세력과 싸워서 승리하였을 때 오는 결실입니다.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면 약속하신 대로 생명의 면류관을 누릴 날이 올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암송하면서 그리고 영혼에서 나오는 찬송을 통해 우리 속에 있는 죄악의 쓴물, 미움과 분노의 쓴물, 불안과 공포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줄 원동력으로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세가 가까워지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서 기도함으로 2022년에는 이러한 영적 자산을 소유하는 한해가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