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묻겠느냐?
무당, 신접한 자가 불러내는 영(귀신)들은 신통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겐 초월적인 힘과 예지의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려움이 있거나 불길한 예감(이 또한 미래를 알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에 비롯한 막연한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지만)이 들면 인간 이상의 어떤 영적 존재를 통해서 해결함을 받고자 하는 일을 한다. 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육적인 존재인 동시에 지극히 영적인 존재이다.
모든
인간의 초점은 삶에 맞추어져 있다. 죽음은 삶의 실패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나약을 의미한다. 죽음의 힘은 강력하지만 그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 편에서는 죽음이란 무능력, 나약, 어찌할 수 없는, 전적
포기의 의미로 밖에 이해 될 수 밖에 없다. 만약 인간이 죽음을 이길 능력이나 지혜나 무엇인가가 있었다면
절대 인간은 죽음을 그냥 내 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아마 인류 모두가 이것을 이기기 위한 가장 많은
투자와 수고와 노력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력하게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죽음에 매여 있는
것은 이것이 인간 삶에서 해결 할 수 없는 한계 이상의 것이라고 믿기 떄문이다. 실제 그렇다.
그러므로 죽음의 문에 들어가는 모든 인간은 나약하며, 무능하며, 힘이 없다. 근데 사람들은 이 무능력하고 나약하기 짝이 없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그 존재들에게 묻는다. 그들은 마치 죽음 이후에 존재가 대단한 지혜를 가진 것처럼, 신통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따라 다닌다.
신접한 자들이 죽은 자의 혼에 빙의(憑依) 되어 이 땅에서 볼 수 없는 무엇인가를 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는 것이 어리석다고 단연코 말한다.
죽음이란 시작이며 끝이다. 시작이란 영생을 얻는 자에게 한해
국한 된 말이며, 끝이란 영생을 얻지 못하는 자에게 국한된 말이다. 그
중간에 이 땅을 돌아다니는 혼과 영은 없다. 현시대는 이런 영적 존재,
귀신의 존재에 대해 굉장히 친근하며, 이런 존재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마치 그런 영들이 존재나 하는 것처럼 또 그런 존재가 무슨 힘과 능력을 가진 것처럼, 더욱이 그런 존재가 따뜻한 감정과 의를 가진 것처럼 우리에게 수 많은 틀린 정보를 주입한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를 이 땅과 분리하게 하고, 영원한
이별을 맞이하게 한다. 산 자가 죽은 자 보다 나은 이유는 죽음의 굴레가 그만큼 깊고도 어둡다는 것이다. 하지만 삶에 대한 극도의 집착이 있는 인간은 죽어서라도 살아 있을 때와 같은 현상을 유지하고픈 욕망이 있기에
계속적으로 그런 영적 존재와 귀신의 존재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가 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하기를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동시에 영원과 행복의 결정은 산 자에게 있다. 죽은 자가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