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이리농림학교 장형두 나무
난세의 영웅이자, 풍운아는 주로 무인, 정치인 등이지만, 그들 대부분은 전쟁이나 내란에서 백성을 많이 죽여서 위대해진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화해와 협력으로 평화를 추구한, 외교가와 학자가 더 우러러지는 진정한 영웅, 풍운아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조선 최고의 천재 식물학자이자, 한글 사랑을 실천한 민족의 선구자, 전 재산을 아낌없이 식물학 연구에 바쳐 후세를 연 장형두는 영웅이자, 풍운아가 맞다.
장형두는 1906년 광주 누문동에서 5천석 부자의 유복자로 태어나, 계림동에서 살았다. 1918년 도쿄원예학교 연구과에 입학하였고, 1920년 일본부립원예학교에 다녔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의 뒤따른 화재를 ‘조선인의 방화다’며 관동 자경단의 ‘조선인 사냥’이 자행되었고 일본 민중과 일부 관헌은 조선인 수천 명, 중국인 300여 명을 살해했다.
이를 피해 9월 15일, 장형두는 피란선을 타고 귀국하여 이리농림학교에 다녔다.
이듬해인 1824년 학교를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가 1928년 동경제국대학 고등조원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조선일보 문화부, 숭실전문학교, 경성약학전문학교 생약학 교수 도봉섭 식물학교실, 경성제국대학 강사 석호곡(石戶谷) 등의 연구실을 전전하다가 연구비 조달이 어려워지자, 고향인 광주에 내려와 연구를 계속하였다.
1933년 27살 때이다. 선친에게 물려받은 가산을 처분한 거금 2만여 원으로 10여 년에 걸쳐 채집한 7천여 점의 식물석엽표본을 정리하여 연희전문학교에 기증하고 1년여에 걸쳐 정리하였다. 당시 ‘동양 제일의 표본실 창설’이 그것이다. 또 이해 5월에 ‘조선박물연구회’를 설립하였다. 또 조선인으로는 처음 일본 문부성 중등박물교원 자격시험을 통과하였다.
1940년이다. 조선인 식물학자 중에서 유일하게 라틴어로 종(種) 기재를 할 수 있었던 장형두는 전라남도교육회 주최로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남도 모든 지역의 식물을 조사하여 출간한 ‘전라남도식물’의 제작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책자 출판을 앞두고 의견차이로 탈퇴하였다. 창씨 개명도 거부하였던 장형두는 ‘조선 식물상은 조선인 손으로 규명되어야 한다’가 신념이었다. 그러기에 일본어로 기록되는 책자 출판에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우국식물학자 장형두의 가장 큰 업적은 동물은 옮겨 사는 옮사리. 식물은 땅에 묻혀 사는 묻사리라고 아름다운 한글로 표현한 것이다.
또 아가풀, 애기똥풀, 괴불주머니, 긴잎별꽃, 큰별꽃, 놋젓가락나물, 들바람꽃, 그늘바람꽃, 매발톱꽃, 꿩의바람꽃, 바람꽃, 꿩의다리, 눈빛승마(升麻·미나리아재빗과의 여러해살이풀) 등도 다 한글학자 최현배의 도움을 받아 그가 불러준 이름이다.
그러던 1949년 10월 23일이다. 좌익으로 몰려 검거된 이종 조카에 대한 연루 혐의로 서울 중부서에 연행되어 인천경찰국으로 이송된 장형두는 3일 뒤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좌익이란 아무런 증거가 없었으니 사인은 강압에 의한 고문치사일 뿐이다. 이 장형두를 기리는 식물이 있다. 1964년 후배 식물학자 이영로가 경기도 가평에서 새로운 종의 억새를 발견한 뒤 ‘장억새’라 하였다. 학명 ‘미스칸투스 캉기’의 ‘미스칸투스’는 억새, ‘캉기’는 바로 ‘장형두’이다. 장형두가 다니던 이리 농림학교는 현재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이다. 이곳을 찾아 소년 장형두의 모습을 지켜보았을 은목서 등 아름드리나무를 둘러보며 장형두를 그린다.
장형두가 이름 지은 우리말 꽃 이름은 알아도 정작 장형두는 잘 모르는 세태에서 그를 고문치사한 망나니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노를 애써 달래며 평안한 영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