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輓詞) [ 계동 전경창 선생을 애도하며 ]
병조정랑(兵曹正郎) 정광적(鄭光績)
天縱奇男子
人推間世才
名聲垂竹帛
義氣薄崔嵬
膠恭浮生樂
幽明永訣哀
嚴程空執紼
殘月獨徘徊
하늘이 기남자(奇男子)를 내자
사람들이 간세(間世)의 재능으로 추숭하였네.
명성은 죽백에 드리우고
의기는 높이도 치솟았네.
우리 아교와 옻처럼 함께 있어 즐거웠고
유명(幽明)으로 영결하니 슬프구나.
이 엄혹한 길에 만장의 깃대 헛되이 잡으니
새벽달이 홀로 배회하네.
[출처] 국역 계동선생문집 [國譯 溪東先生文集]
● 정광적 [ 鄭光績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임진왜란 때 호조의 일을 맡으면서 명나라 군대의 군량을 조달하였다. 광해군과 인조 때에도 중용되어 여러 벼슬을 두루 역임하였다.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자는 경훈(景勛)이고, 호는 남파(南坡)·서간(西澗)이며, 시호는 익정(翼正)이다. 1567년 생원진사시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고, 1579년(선조 12) 식년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1583년 병조좌랑으로 있을 때 병조정랑 홍종록(洪宗祿)과 함께 무과 초시 합격자 가운데 일부를 명단에서 삭제한 죄로 벌을 받았다.
1586년 헌납을 거쳐 1591년 지평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거쳐 1593년 호조참의로 있으면서 일본군과 싸우러 온 명나라 군대에게 군량을 수급하였다. 이듬해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1595년(선조 28)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가 우승지·병조참의 등을 지냈다. 1596년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고, 이듬해 좌승지와 승정원 도승지를 지낸 후 호조참판에 올랐다.
1598년에는 병조참판을 거쳐 예조참판에 임명되고 다시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이후 대사헌·동지중추부사·성균관대사성·이조참판·공조참판·대사성·호조참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광해군 때는 첨지중추부사·대사헌·전주부윤·담양부윤 등을 지내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로 내려갔다.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대사간·우참찬·공조판서·좌참찬·예조판서·판중추부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광적 [鄭光績]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