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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관이 굴원의 제사를 지내다.(貪官“祭”屈)
중한번역:김충실(愚魯).원문출처: 굴원의전설(屈原的傳說),중국 후난성 창사 인민출판사.
전설에 의하면 굴원이 강물에 투신한 후, 어민들은 재빨리 작은 배를 타고나와 인양작업을 시작하고 인근에 사는 백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집에서 쌀이나 밥을 가지고 나와 강물에 뿌리면서 빌고 또 빌었다. “물고기와 새우들아, 쌀과 밥을 먹고 제발 충량한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고 굴원을 뜯어 먹지 말아다오.”
세월이 흘러 풍속과 습관이 변해, 후세 사람들은 매년 오월 단오날에는 얼룩조릿대 잎으로 찹쌀을 싸고 종자(粽子)를 만들어 강물 속으로 던졌다. 멱라강 연안 일대는 오월 초부터 집집마다 얼룩조릿대 잎을 채취하고 찹쌀을 빻아 각양각색의 종자를 만들어 얼룩조릿대 잎으로 종자를 쌌다. 양(羊)뿔 같이 생긴 것은 “양각종”(羊角粽), 보탑(寶塔)처럼 뾰쪽하게 생긴 것은 “보탑종”(寶塔粽), 자루 없는 도끼 같이 생긴 것은 “부두종”(斧斗粽)이라 불렀다. 영리하고 손재주 좋은 낭자들은 향료를 천 조각에다 종자처럼 싸매고 오색 명주실로 무늬를 휘감아 놓았는데, 그런 것은 “향하포”(香荷包)라 불렀다. 초닷샛날에는 집집마다 종자를 먹은 후 남녀를 불문하고 손에, 손에 종자 꾸러미를 들고 아이들은 가슴에 향하포를 달고 모두들 멱라강변으로 나와 용주(龍舟)시합을 구경했다. 시합이 시작되면 가지고온 종자 꿰미를 강물 속으로 던지며 굴원대부를 추모했다.
청조 말기 상음현(湘陰縣)에 성이 굴 씨인 신임 지사가 부임해 왔다. 그는 사십대 초반 나이에도, 세상물정에 훤해 보였으며,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는 굴원의 99대(代) 적손(嫡孫)이라고 했다. 부임한 첫날, 깃발과 징, 북, 양산이 출동하고 한 무리의 관속을 데리고 옥사산으로 가, 굴원을 모신 사당 안에서 종을 치고 북을 두드리는가하면 지전도 불사르며, 한나절이 넘도록 행사를 하는 바람에 사당을 관리하는 노인들을 바빠서 쩔쩔 매개했다.
굴지사가 삼월에 취임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오월 단오가 코앞에 다가왔다. 사월 중순 어느 날, 관아 문 입구에 포고문 한 장이 붙어있었는데 상단에는 “현의 모든 백성들께 알림. 각 호당 찹쌀 석 되를 현으로 납부할 것. 단오날 종자를 만들어 굴원의 충혼을 제사 지낼 것임.” 이라고 써져 있었다. 백성들이 포고문을 읽어보고 어떤 사람은 “굴지사는 아무래도 굴대부의 후예라서 그런지 아직도 오래된 선조를 잊지 아니했구나.”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손가락을 꼽아가며 매호당 석 되면, 십호면 서말이고 백호면 석 섬이고..현에 사는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데..현 나리께서 종자를 만드는데 필요한 사람들을 다 구하지 못할까봐 걱정이구만!” 이라고 말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상음현 사람치고 누가 삼려대부 굴원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포고문이 나붙은 후,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은 하루 이틀 배가 고프더라도 먹을 것을 아껴, 석 되의 쌀을 모아 찹쌀로 바꾸어 관아로 납부하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이리하여 열흘도 채 되지 않아 관아의 크고 작은 곡물 창고와 통가리들이 가득 가득 채워지고, 심지어 굴지사의 집무실까지도 절반가량이 찹쌀로 점령당하고 말았다.
단오절이 점점 다가왔다. 오월 초하룻날 이른 아침, 관아 문 입구에는 또 하나의 팻말이 걸어졌다. 팻말에는 “금일부터 단오절까지 민사업무는 보지 않음.” 이라고 적혀 있었다.
관아 문 입구에는 표범처럼 생긴 네 명의 사나이들이 등에다 큰칼을 메고 꼿꼿이 서 있는데 검정 칠을 한 대문에는 세근쯤 되어 보이는 철 자물쇠가 단단히 걸려 있었다. 관아 후원에 있는 상강(湘江)강변으로 통하는 후문 근처에는 세 걸음마다 망루가 있고 다섯 걸음마다 초소가 있는데, 삼엄하게 경비를 하고 있는 것이 꼭 강도들이 침입하여 찹쌀을 훔치고 있는 것만 같아 겁이 덜컥 났다. 한편 굴원의 사당을 지키는 사람 중에는 용충(龍忠)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나이가 50여세로 30년간이나 굴원의 사당을 지킨 사람으로 매우 성실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며 용아저씨라고 불렀다. 용아저씨에게는 용비(龍飛)라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는 어렸을 때부터 권법과 봉술을 좋아하고 무예를 열심히 익히며 아버지를 도와 옥사산에서 수목과 화초를 관리했다.
오월 초하룻날, 용 아저씨가 생각해보니 단오까지는 불과 사흘 밖에 남지 않았는데 새로 온 굴지사가 금년에는 옥사산에 와서 굴대부의 사당에 제사를 지낼지 말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아침식사를 마친 후 짚신을 신고 60리가 넘는 길을 힘겹게 걸어와, 관아 문전에 도착하여 안으로 들어가 굴지사를 뵙고자했다. 용아저씨는 문을 지키는 사병 앞으로 다다가 기가 질린 목소리로 “안으로 들어가서 현관님을 좀 뵙고 싶습니다만……” 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문을 지키는 사병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신은 문에 걸려있는 푯말도 못 보았소? 누구를 막론하고 들어갈 수 없소이다!” “저는 굴원사에서 온 사람인데 현감님께 좀 물어 볼 것이 있어서……” “굴원사에서 왔으니 뭐가 어쨌단 말이요? 총독청이나 순무청에서 왔다고 해도 들어갈 수 없어요! 이 양반이 지금이 어느 때인 줄도 모르고! 가요, 가, 빨리 가요!” 용아저씨는 그래도 몇 마디 더 하고 싶었으나 병사들이 달려들어 밀쳐버리는 바람에 저만치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용아저씨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꾹 참고 옥사산으로 돌아와 아들 용비와 사당을 지키는 노인들에게 겪었던 일을 말하자, 모두들 부아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용비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것이 어느 나라 법이란 말입니까? 말인즉 굴원대부 제사를 모신다는 핑계로, 백성들로부터 그렇게나 많은 쌀을 거두어 들여놓고, 백성이 관아 안으로 들어가서 한마디 물어보겠다는데, 안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막다니!” 장노인 이라는 사람도 한 마디 거들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속에 반드시 뭔가가 있어! 그것이 우리들을 못 들어가게 해도 기어코 들어가려면, 오직 총명하고 재능이 있는 인재가 들어가 보아야 해!” 용비가 일어서서 “제가 가겠습니다. 지금 떠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모두들 찬성하자, 용비는 손으로 엉덩이를 한번 털더니 바로 출발하려고 했다. 그러자 용아저씨는 아들을 붙잡고, 몇 마디 더 일러준 후 “빨리 갔다, 빨리 오너라.” 라고 말하자, 그는 즉시 출발 했다. 때는 태양이 막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려는 참 이였다.
용비는 옥사산을 떠난 후 현청을 향해 발에서 땀이 나도록 달리고 또 달렸다. 그는 그날 밤 이 경(二更)이 조금 넘어서 관아 뒤에 있는 숲 속에 도착했다. 용비는 빙 둘러 쳐진 벽을 더듬어가며 조심조심 강변으로 통하는 후문 쪽으로 접근했다. 그곳에는 낮에 근무했던 보초들은 이미 철수했지만 문은 단단히 잠겨져있었다. 문틈사이로 안을 들여다보니 공무를 처리하는 방안은 훤히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손으로 나뭇가지를 붙잡고 올라가 훌쩍 몸을 날려 가볍게 두 발로 담당위에 선 후, 담장을 뛰어내려 공무를 보는 방 외벽에 신속히 달라붙었다.
그가 살금살금 창문가에 접근하여 내부를 들여다보니 엄청난 모레가 산처럼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모레 더미 곁에서 손에는 조릿대나무 잎을 들고, 무엇인가 바삐 움직이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조릿대 잎으로 모래를 “종자”처럼 싸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화가 치밀어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 개 같은 관리 들을 꽁꽁 묶어놓고 납작하게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그러나 자기의 힘이 보잘 것 없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하는 수 없이 울분을 삼키며 공무를 보는 방을 떠나, 들어올 때 했던 것처럼 담장을 뛰어 넘어 서둘러 옥사산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식사를 마친 후, 용비는 지난밤 자기가 보았던 상황을 아버지와 사당을 관리하는 노인들에게 상세히 말씀드리자, 모두들 주먹을 불끈 쥐며 굴씨 성의 개 같은 관리를 징벌해야 한다고 성토했다. 용비는 강경한 어조로 “그 패거리들에게 일거에 돌진하여 속임수를 폭로하고 흠씬 두들겨 패 줍시다!” 라고 주장했다. 용아저씨는 고개를 저으며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도마 위에 오른 고기나 마찬 가지야. 겨우 몇 사람이 쫓아가서 그들과 대적한다는 것은 바위에다 계란을 던지는 꼴이지! 그들은 병력도 많고, 총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대포도 가지고 있어요!” 라고 말했다. 장노인은 상부에 보고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소장을 써달라고 부탁하여 주정부 관아로 보내자.”고 주장했다. 용아저씨는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노형, 노형은 ‘관아 문이 여덟팔자로 활짝 열려 있고 합당한 이유가 있다 해도 돈이 없으면 들어가지 못 한다.’ 는 말을 아직 못 들어 보셨군요. 현청과 주정부는 개구멍바지처럼 서로 한통속 이어서, 아마 주 청사 문에서도 현 청사 문에서 한 것처럼 하려고 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장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용아저씨께 반문했다. “맞붙을래야 맞붙을 수도 없고, 고발할래야 고발할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씀해 보시죠.”
용아저씨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마침내 방법을 생각해내, 이렇게 저렇게 하자고 말하자 모두들 좋다고 찬성했다. 그들은 그날 오후에 각각 산을 내려갔다. 저녁이 되어 산 아래 살고 있는 백여 명이 넘는 농민들과 어민들이 굴원사에 모여 회의를 시작하여, 닭이 두 번째 울 때서야 회의를 끝냈다. 용아저씨는 사람들을 하산 시킨 후 “모두들 각별히 조심하여 절대로 아무에게나 이야기하지 말고, 개 같은 관리들이 눈치 채지 않도록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오월 초닷새 날, 멱라 강변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멀고 가까운 백성들이 모두 와서, 새로 온 굴지사가 어떻게 굴원의 제사를 지내는지 보려고 했다. 백성들은 오랫동안 땡볕 아래 서있었기에, 허리도 시큰시큰하고 등도 따끔따끔하며 다리도 뻑적지근한데, 정오가 다 되어서야 저 멀리서 “딩 딩 딩 딩” 징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징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큰길에서는 흙먼지가 뿌옇게 일고, 일렬로 늘어선 길고 긴 마차 대열은 강변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가까이 가서 보니 굴지사가 백마위에 높다랗게 앉아있는데, 그 양쪽에는 수행원들이 따르고, 굴지사가 탄 백마 뒤에는 가마와 말이 따르는 것이 보였다. 또 가마와 말 뒤에는 대바구니를 멘 수십 명의 인부들이 따랐는데, 대바구니 상단 뚜껑에는 모두 붉은색의 커다란 관인이 찍힌 봉인 종이가 붙어 있었다. 또한 모든 대바구니 측면에는 눈에 잘 보이도록 “종”(粽)자가 써져 있었다.
거마(車馬) 대오(隊伍)가 점점 가까워지자 백성들은 재빨리 길을 비켜 주었다. 굴지사와 그 수행원들은 옥사산 아래에 도착 했는데도, 가마나 말에서 내리지 않고 굴원의 사당으로 들어가 “조묘”(朝廟)도 하지 않은 채, 곧 바로 강변으로 가서 서둘러 제단위로 올라갔다. 제단은 강변으로부터 석장(丈)이 넘게 떨어져 있어, 커다란 배를 몇 척 연결시켜 임시로 발판을 만들었다. 수십 개의 대바구니는 제단부근의 강변에 놓여있고, 각 바구니 앞에는 보초가 한명씩 서서 백성들이 일절 접근하지 못 하도록 했다. 굴지사와 수행한 관리들이 제단위로 올라가자, 목소리가 우렁찬 관리 한명이 즉각 제단 앞으로 나가더니 백성들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드립니다. 제사가 곧 시작될 예정이오니, 여러분들께서는 다 같이 강가로부터 뒤로 두 장(丈) 물러나 똑바로 서 주시기 바랍니다. 제사가 시작되면 앞으로 나아가 돌아다니거나 귓속말을 하거나 큰소리로 떠들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바구니를 열고 종자를 강물 속으로 던질 때는 다 같이 무릎을 꿇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가차 없이 체포하여 그 죄를 엄히 물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 말을 듣고 앞 사람으로부터 밀려, 슬금슬금 뒤로 몇 걸음 씩 밀려났으나, 얼굴에는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굴원대부를 제사지내며 추모하는 일에, 왜 이렇게 썩어빠진 규정들이 많단 말인가?
드디어 제사가 시작 되었다. 제단위에는 제물로 바쳐진 소 양 돼지와 과일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향과 초에 불을 붙였다. 관리들이 일제히 제단위에서 무릎을 꿇자, 굴지사가 지접 굴원의 제문을 낭독했다. 슬픈 부분을 읽을 때는 백성들의 눈도 붉어지고, 굴지사의 눈도 붉어진 것 같았다. 제문을 다 읽자, 관리들이 일어나 바구니를 열고 종자를 던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제단위에서는 일제히 징을 치고 북을 두드리며 폭죽을 터뜨렸다. 강변에 있던 백성들도 덩달아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용비와 굴원의 사당을 지키는 노인들은 굴지사가 강변에 와서 굴원을 제사지낼 때는 응당 먼저 굴원사로 올라가 “조묘”를 할 것이라 생각하고 옥사산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들은 굴원사로 가지 않고 곧장 제단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용비와 노인들은 급히 계획을 바꾸어 그저께 저녁부터 집결시켜놓았던 백성들에게 조용히 군중들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각자 제단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으라고 단단히 일러놓았다.
마침내 제단위에서 “지금부터 종자를 강물 속으로 던지겠습니다.” 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용비가 벌떡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는 황급히 앞으로 몇 걸음 뛰쳐나가더니 호위병의 손에서 막 강물 속으로 던지려고 하는 종자를 한 꿰미 빼앗아 단번에 양손으로 쭉 잡아당겨 끊었다. 그런 다음, 위에 걸려있는 새끼줄에 둘둘 감아놓고 종자를 싼 대나무 잎을 풀어헤치고 높이 쳐들었다. 땅 바닥에 꿇어 앉아있던 백성들이 고개를 들고 보니, 종자를 싼 대 잎 속에서 흘러내린 것은 전부 모래가 아닌가!, 그것을 본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 했다. 용비가 손을 흔들자, 그저께 저녁부터 굴원사에 모여 있었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뛰어 올라와, 팔소매를 걷어 부치고 바구니를 지키는 호위병에게 달려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보고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한꺼번에 밀어닥치자, 수십 명의 호위병들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얼굴이 사색이 되어, 아래로 굴러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더니, 할 수 없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종자를 짊어진 인부들은 길을 걸어오면서 “이렇게 조그마한 바구니에 담겨진 종자가 왜 이토록 무거운지 알 수가 없구나!” 라고 중얼거렸었는데 이제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다. 저 개 같은 관리들이 수작을 부린 것을 알고는 다들 욕설을 퍼 부으며, 어떤 이는 가짜 종자를 움켜쥐고 제단위의 관리들을 향해 내던졌다. 백성들이 보고, 땅에서 흙을 한 움큼 씩 쥐고 던지는가 하면, 자갈이나 물컹물컹한 소똥을 제단위로 어지럽게 던졌다.
임시 발판으로 만들어 사용했던 커다란 배들은 벌써 백성들에 의해 강가로 끌려 왔다. 제단위에 있던 개 같은 관리들은 막다른 곳 까지 몰려 도망칠 수가 없어서, 모두들 얻어터져 코가 시퍼렇게 멍들고 몸이며, 머리며, 얼굴이며, 입속이며, 눈 속이며, 할 것 없이 온통 모래 천지였다. 어떤 사람들은 놀란 나머지 물속에 빠져 뒹굴며, 큰 소리로 어미 아비를 부르면서 살려 달라 하고, 어떤 이는 식탁 밑으로 숨어들어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다.
굴지사도 하는 수 없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굽실거리며 용서를 빌었다. 용비와 백성들 대표 몇 사람은 제단위로 뛰어 올라가, 굴지사에게 백성들이 낸 찹쌀을 돌려 줄 것과 현청에서 직접 종자 스무 짐을 준비하여 오월 십오일 “대단양절”에 다시 굴대부의 제사를 모실 것을, 그 자리에서 서명날인 받은 후 백성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개 같은 관리들의 가마는 박살 난지 오래였고, 몇 마리의 말도 어디로 달아났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많은 병사들은 대도나 창, 방패를 강변에 집어 던진 채 집으로 달려가고 말았다. 굴지사도 하는 수 없이 발을 절룩거리며, 잔유 병력을 이끌고 풀이 죽고 기가 꺾인 채, 도망치 듯 청사로 돌아왔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후로 관리들이 다시는 굴원을 기념한다는 미명하에, 감히 백성들을 협박하여 제물을 강탈하지 못 했다고 한다.
첫댓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중국이나 한국이나...
못 된 무리들은 상존(常存)하기 마련..가려내야함.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중국이나 한국이나...
못 된 무리들은 상존(常存)하기 마련..가려내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