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마디로 정의되는 시가서의 주된 목적이라면, 뒤이어 나오는 이사야서의 임마누엘을 노래한다고 보아야 한다. |
욥의 인내와 고난,
시편의 각양 각 사람의 노래들,
그리고 잠언의 숱한 교훈들,
또한, 헛된 것을 좇으려는 인생들을 향한 전도자의 외침,
아가서의 지극히 고귀하고 아름다운 나의 사랑의 대상은,
다름 아닌 임마누엘이신 그 분을 향함이었다.
어찌 욥이 그 같은 극한의 고통과 환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가!
각양 악기와 각양 부류의 인생들이 그처럼 아름다운 노래를 지어 부르며,
다짐하고 또 거듭 당부하여 교훈으로 일러 새겨듣게 하며,
이처럼 아름다운 일을 행하실 여호와를 인생들에게 알리는 전도자의 모습,
그리고 그 숭고하고 거룩한 사랑을 노래하는 아가서는 성경속의 백미다.
너무나 가슴 벅차고 감동과 감격을 안겨준다.
그렇다. 시가서는 온전히 임마누엘을 노래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그 임마누엘의 때를 보며 인내하며, 노래하고, 새겨들으며 그리고, 인생들을 깨우치며 그 사랑에 탄복해마지 않는다. |
시가서의 벅찬 감동은 예언서 중에서도 학자적 선지자들의 모습을 띤 에스라부터 에스더로부터 비롯된다.
흔히,
예언자와 예언서라 할 때 개인적 사견을 전제로,
학자적 예언자와 계시적 예언자로 분류하고 싶다.
에스라서부터 시작되는 부흥운동과 이사야의 예언적 성격은 그 차이가 너무나 극명해진다.
실상, 에스라부터 시작되는 성령부흥운동은 바벨론 포로이후부터의 역사적 배경을 담는다. 일반적 상식처럼 여호와 하나님, 곧 성령의 역사가 표면적으로는 드러내어 놓고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회개를 바탕으로 한 영적부흥운동은 대개 이제껏 등한시하고 소홀히 여겨왔던 율법, 곧 기록된 성경의 낭독과 강론에 치우친다. 여호와의 임재함이나 계시가 없었다는 말이다.
회개의 가장 큰 수확과 결실의 모습은 네가 여호와를 사랑하기 시작했던 그 처음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보여준다.
회개와 참회, 그리고 뼈저린 돌이킴의 결과로 다시 주어지고 얻게 된 여호와의 구원, 곧 임마누엘의 약속을 시가서를 통해 감사해하고 노래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자기백성의 간절한 회개와 돌이킴, 그리고 부르짖음과 감사의 노래는 욥부터 이어지는 아가서에서 극치를 이룬다. |
가령,
베냐민 사람 아비하일의 딸인 에스더서를 들여다보면 이렇다.
즉, 에스더가 엿보았던 임마누엘이었다.
에스더란, 이름은 “도금양의 꽃”, 화석나무의 꽃이다. 베들레헴과 헤브론, 갈멜산과 다볼산에 많이 자생한다.
이것은 에스더의 별명이었다. 하닷사로 불리웠던 그녀는 바르고, 정숙한 사람의 표상이었다.
모두가 칭송하고 인정한 바르고 정숙한 여인 에스더였다.
그런 여인을 아내로 취한 페르시아(바사 왕) 아하수에로 왕은 수산 궁에서 큰 연회를 베푼다.
에스더서의 시작은 이렇다.
-1장 아하수에로 왕의 수산 궁 잔치(180일
-10장 유다인의 부림절 잔치(이틀)
첫 번째는 바사 왕 아하수에로의 180일 동안의 잔치였고,
구 번째는 포로였던 유다인의 부림절 이틀 동안의 잔치로 이루어져있다.
두 잔치는 상당한 의미를 감추고 있다.
왕의 잔치라 함은 성경에서 많은 비중을 두고 다룬다. 즉, 청함과 예복, 그리 택함의 과정으로 이어진다. |
아하수에로 왕의 화려하고 성대한 잔치와 비견되는 초라한 유다인들만의 부림절 찬치는 시사하는 바가 아주 많다고 할 수 있다.
청함을 받은 이와 그 즐거워하는 자의 모습은 복음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비유다.
아하수에로 왕의 잔치와 여호와의 그 남겨진 백성들인 유다인의 부림절 잔치, 이는 흔히 다니엘이 거절했던 느부갓네살 왕의 기름지고 풍성한 상을 거절하는 것과 비교된다. |
이뿐만이 아니다.
아에수로 왕이 어여쁜 에스더를 향해 내 나라의 절반이라도 부겠다고 말하는 대목은 헤롯의 생일을 맞이한 잔치에서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워 헤롯을 기쁘게 하여 그의 입에서 나온 말과 동일하다(눅6장 23절).
또한,
하만이 결국 장대에 달리운 것은 저주받은 자의 상징이 된 암시적 비유였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신21장 23절)
이처럼 모든 성경 무의미한 사건과 기록은 없다.
에스더의 마음은 아하수에로 왕의 180일 동안 이어지는 흥겨운 잔치에 있지 않았다.
포로생활의 절망과 고통 속에서 여호와의 구원의 때를 기다리는 자기백성 이스라엘의 간절함과 맞닿아 있다.
자기의 공로와 업적을 과시하고 자랑하며 치장하기 위한 180일 동안 계속된 아하수에로의 성대하고 흥겨운 잔치를 거절하고 고작 이틀 동안 행해진 부림절, 형제의 구원과 구제에 자기 목숨과 모든 것을 쏟는다.
참된 구제의 모습을 보여준다.
* 단 12:3절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그래서 에스더의 본래 이름은 별이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동방박사들이 좇던 별, 새벽별이다.
그러므로,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는 포로였던 자기 백성, 곧 형제들을 위한 이스라엘을 귀환(이는 단순한 유대 땅으로의 돌아옴이 아닌 여호와께로 마음이 돌아오는 것)을 위한 세 부분을 담당한다. |
주목할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표현이 형제들로 바뀐다는데 있다.
형제란 용어는 사실 교회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고 정착된다.
대체적으로 이스라엘의 다른 이름의 형태 변화는 다음과 같다.
-아들들(창세기),
-지파들(출애굽기),
-자손들(사사기),
-백성들(열왕시대),
-형제들(바벨론),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가 담당했던 형제에 대한 세 부분의 구원의 역할은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한 중보자의 역할을 띤다. 이는 다음기회에 세밀하게 다루어볼 참이다.
부림절은,
율법에서 규정한 절기가 아닌 탓에 자칫 소홀히 다루어진다.
본토에 남아있던 이스라엘인들은 알 수 없고 지켜지지 않았던 포로 된 자들만이 의미부여를 찾았던 절기다.
하만의 계략으로부터 건짐을 받은 형제들을 위한 절기였다. 특이하게도 유월절 바로 직전달인 14일-15일 이틀간에 행해진다.
이처럼,
시가서는 성경의 배치 상 후반부에 놓여 있어야 할 에스라와 에스더서 다음에 자리를 잡는다.
전체가 부림절의 의미를 담는 셈이다.
유월절이 이르기 전, 형제들을 위해 해야 할 세 부분의 역할이 강조된다. |
유월절을 지키기 위한,
유월절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며 예비하고 준비케 하기 위한 자기 형제들을 향한 에스라와 느헤미야, 그리고 에스더의 세 가지 수고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어쩌면, 유월절의 어린 양의 구속을 예비하며 기다리는 형제들의 회개와 돌이킴의 마지막 분주한 그들의 움직임들이 고귀하고 애처롭다. |
이렇게 임마누엘의 맞이함의 준비는 이루어진다.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서에 담고 있는 형제들을 향한 목숨을 건 회개와 참회의 돌이킴(영적부흥운동으로 이해됨)의 바탕위에 시가서의 장대한 여호와의 향한 감사의 노래가 펼쳐진다.
임마누엘을 노래하는 것이다.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를 통한 참된 회개와 돌이킴에서 나온 노래들이었다.
까닭에 그 노래들이 아름답다.
너무나 숭고하고 환희에 벅찬 기쁨으로 가득하다.
어찌 여호와께서도 기쁘지 아니할까! 아멘.
성경은 이 노래를 새 노래라 하였다.
자고로 노래라 함은 이러한 바탕위에서 불려져야 했다.
그 흥겨웠던 노래와 찬송의 끝자락에 잠언서가 있는 것이다.
이제야 잠언서를 새롭게 대할 준비가 갖추어진 셈이다.
이처럼 웅장하고 스펙타클한 여호와의 구원의 여정을 인생들은 고작 삶의 지침서격인 교훈서로 풀어낸다.
잠언서는,
그대가 잠이 오지 않을 때 읽는 책이 아니다.
회개와 참회의 바탕위에 여호와를 노래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담당한다. |
여호와를 노래하는 이유를 가르치는 것이 잠언서이다.
신약성경으로 풀이하면 “비유”인 셈이다. 모든 것을 비유하며 설명하고 가르치는 책이 잠언서이다. 임마누엘을 맞이하기 위한 비유적 교훈들이다.
그래서 잠언서는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잠언(비유, 속담)
1장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의 잠언 -아들에게 주는 아비의 교훈 31장 르무엘 왕의 어머니의 교훈 -아들에게 주는 어미의 교훈 |
아들에게 주는 아비와 어미의 교훈이 잠언서이다.
그 모든 것은 비유다.
예수께서는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이는 자기 백성에게만 허락된 깨달아 알게 되는 예언의과 계시의 한 부분에 속한다.
에베소서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바울의 심정은 그 형제들을 향한 자녀를 둔 아비의 마음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잠언서가,
읽으면 도통 비슷하고 같은 말과 같아서 잠이 들게 하는 교훈서 정도로 읽게 되고 이해되는 것은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감추어진 비유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금 에스라와 느헤미야, 그리고 에스더를 통해 참된 회개와 돌이킴의 여정을 거쳐 시가서를 지나와야 한다.
그가 임마누엘의 소중한 의미를 안다면 잠언서를 포함한 시가서를 단순한 책으로 치부하지 않을 것이다.
아비가 아들을 앉혀두고 무슨 말, 어떤 말을 들려주어야 할까!
어미가 그 아들을 앉혀두고 무슨 말, 어떤 말을 들려주어야 할까!
그래서 잠언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향한 아비와 어미의 심정을 가지지 않는다면 결코 이해되거나 풀이될 수 없는 비유의 책이다. |
다음 강해-잠언서(2)
아비 된 자와 어미 된 자의 교훈, 잠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