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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는 영혼』
제목부터가 영적(靈的)이다. 제목의 고상함 때문인지 2012년 뉴욕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고 아마존의 심리학 판매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로이트’이후 심리학 교과서로 불릴 만큼 유명해진 이 책을 만난 것은 ‘나도 영혼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저자 ‘마이클 싱어’(Michael A Singer)는 1970년대 플로리다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에 우연히 깊은 내면의 세계를 체험하게 되고, 이후 세속적 생활을 접고 은둔해 요가와 명상에 몰두하고 있다. 1975년에는 명상 요가 센터 ‘Temple of the Universe’를 세우고 내적 평화의 체험을 전하고 있다.
스스로 만든 마음의 감옥 속에 방치 해두었던 참 자아를 찾는 여정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이 책은 여전히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독자들은 이 책을 불안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지친 영혼을 위한 ‘마음 사용 설명서(아마존 서평)’로 받아들인다. 이 시대 뛰어난 성취자들인 스티브 잡스와 오프라 윈프리가 자신의 성공 비결로 명상을 꼽았고, 내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흐름도 이 책의 성공과 무관하지는 않다. 국경을 초월해 공감을 이끈 주역(周易)은 동서양의 종교와 영적 전통들을 자유롭게 인용하면서 어두운 내면을 일상의 언어로 밝게 비춘 것에서 내용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지 모른다.
프로이트는 마음을 「이드」와 「에고」와 「수퍼에고」로 나누고 이드는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본성, 수퍼에고는 사회가 마음 안에 주입시켜 놓은 분별적인 반응체계, 에고는 이 두 가지 강력한 힘의 균형을 유지 시키려고 애쓰는 외부세계에 대한 강력한 대변자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매사가 겉보기와 달리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용기를 내 그 속을 들여다보면 ‘내 존재의 많은 측면이 모두 나의 자아인가, 아니면 그중 하나만이 나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중 어느 것이 언제, 어디서부터 어떻게, 왜 그런가?’하는 의문을 갖게 될지 모른다.
【파트1 : 잠든 의식 일깨우기】
세상은 ‘나’라는 존재로 가능하고 또 나로 인해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 어떤 사물이나 사람도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지금 일어나는 일, 과거에 일어났던 일, 아니면 앞으로 일어날지 모를 일에 대해서 오직 내가 기분이 좋아지거나 아니면 나빠지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내일은 비가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시간을 낭비한다면 헛일을 하는 것이다. 당신의 생각은 비를 그치게 하지 못한다. 언젠가는 당신의 마음속에서 끊임없는 지껄임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알게 되면서 마침내 문제의 원인이 삶 자체가 아니라 삶을 놓고 벌이는 마음의 온갖 소동(작용)인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세속적’이라는 말은 돈이 많다거나 신분이 높은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 문제의 해결책이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외부의 조건을 바꾸면 문제가 없어지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지금까지 누구도 외부 조건을 바꾸어 문제를 해결한 적은 없다. 언제나 그다음에 문제가 일어났다. 진정하고 유일한 해결책은 ‘지켜보는 의식’으로 관점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내면의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문제에다 넋을 빼앗기지 않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문제에 빠져 있는 동안에는 어떤 해결책도 찾을 수 없다. 문제에 대해 초조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화를 내서는 상황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영혼의 자유’를 당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것을 도와줄 영적 수련의 전통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자신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스스로 시간을 내서 하는 수행법이다. 마음으로부터 자신을 멀찍이 떼어 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정신이 맑을 때 삶의 목표를 정하고, 마음의 변덕으로 그것을 훼방 놓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다만 마음의 소리에 귀를 빼앗기는 습관보다 의지가 더 강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은 없다. 의지는 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다스린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한 말이다. 사전에는 생각을 ‘생각을 형성하고 마음을 사용하여 개념을 숙고하고 판단을 내림’이라고 정의하는데, 문제는? ‘누가 마음을 사용해서 생각을 형성하고 그것을 개념화하고 판단하는가?’이다. 생각을 경험하는 그것은 생각이 없을 때도 존재할까? 다행히 자기 존재의 느낌은 생각의 도움 없이도 잘 인식한다. 예컨대 깊은 명상에 들어가면 생각이 멎는다. ‘생각이 멎는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생각은 멈출 수 있다. 좋아하지 않는 생각이 자꾸 떠오르기 시작하면 그것이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나 생각과 씨름한다.
우리는 늘 뭔가를 의식하지만 ‘의식을 의식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이 명상이다. 진정한 명상은 ‘일념집중’이상의 것이다. 명상에 들려면 의식을 하나의 대상에다 모으는 집중력이 있어야 하고, 인식 그 자체를 대상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참 나의 본성을 들여다볼 때 명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높은 경지다. 의식 자체를 의식하게 되면 전혀 다른 상태를 경험하는데, 자신이 깨어난 상태가 된다. 그것은 소파에서 TV쇼를 보고 있는데, 거기에 빠져서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잊어버린 것과 같다. 형상들 대신 의식을 탐사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오직 작고 한정된 대상에 집중할 때만 의식이 작고 한정된 것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파트2 : 에너지 경험하기】
의식이 삶의 미스터리라면, 내면의 에너지도 미스터리다. 외부 에너지는 연구하고 그 자원을 매우 중요시하면서 내부의 에너지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 우리들이다. 몸의 움직임, 감정, 마음을 스치는 생각들이 모두 에너지를 소비한다. 물질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에너지가 필요하듯이,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기분이 업(UP)되기도 하고 녹초가 되기도 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감정을 다루는데도 에너지가 쓰인다. 어떨 때는 기운이 넘치고, 어떨 때는 왜 녹초가 되는가? 정신과 감정이 고갈되었을 때 음식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신에너지는 음식을 태워서 내는 칼로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부에서 끌어낼 수 있는 정신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인가? 우리가 좌절했을 때 기운이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몸에는 에너지가 흐르는 통로와 중추가 있는데, 그것이 닫히면 에너지가 사라지고 그것을 열리면 에너지가 생긴다.
요가 수행자들은 에너지 통로를 차크라(바퀴라는 뜻의 산스크리스트어, 에너지 샘, 관문이라는 뜻)라고 한다. 가슴의 중추를 닫아버리면 에너지가 들어오지 못하고 어둠이 생긴다. 얼마나 단단히 닫혔는가에 따라 엄청난 혼란과 무기력에 빠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상태를 오고 간다. 만족하면 에너지가 넘치는 것이다. 그것을 고대 중국에서는 기(氣), 인도철학에서는 삭터(shalti), 서양에서는 영(spirit)이라고 한다. 어떻게 부르던 모든 위대한 영적인 전통에는 영적 에너지가 있다.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좋아하지 않는지를 분별하고 있는 한 마음은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한다. 이것은 자신의 한계선을 제 손으로 긋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마음이 에너지를 여닫는 스위치를 만들어내는 것을 방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분별을 놓아 버려라. 변신의 모험을 감행하라. 삶의 모든 것을 즐겨라. 삶을 사랑한다면 닫아걸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음을 닫아야 할 대상은 아무 데도 없다.’고.
여러 번 ‘에너지’라는 말이 나오는데 에너지란? 창조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역학적으로 제자리를 맴돎으로써 고정된 단위체를 형성해야 한다. 이것이 원자의 모습으로 그 에너지가 우주를 이루는 기본적 벽돌의 역할을 하게 된다. 원자에 담겨 있는 에너지가 풀려나면 세계가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에너지는 자체 평형상태로 인해 재갈이 채워진 채 한곳에서 머문다. 우울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세월이 갈수록 가슴이 막히고 그것은 ‘저장된 과거 에너지 패턴의 맴돌이로 상대적 평형상태에 있다’는 ‘삼스카라’의 작용 때문이다. 삼스카라는 계속 쌓여 간다. 그러나 늘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의 경험에 따라 자주 열렸다 막혔다를 반복한다. 저장된 에너지 패턴은 실재하기도 하고, 과거로부터 각인된 인상은 아주 해묵은 것조차 자극을 받으면 일깨워질 수도 있다. 그것이 결국 삶을 좌지우지 하게 된다.
중요한 싸움은 자신의 내적 두려움, 불안감, 파괴적인 행동 습관과의 싸움이지 외부 힘과의 싸움이 아니다. 우리는 새 차에 난 흠집, 사람들 앞에서 트림을 한 일 따위에 고민하고 그런 것도 병이라고 고민할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 정도의 심리적 과민은 정상으로 생각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음식과 옷과 집 때문에 걱정할 일이 없어져 바지의 얼룩이나 너무 크게 웃을 일이나 뭔가를 잘못 말한 일로 고민에 빠지는 그런 사치를 누리고 있다. 이런 과민한 마음이 자기 주위에 에너지를 둘러치고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 이는 문제를 감춰 놓을 뿐, 해결해 주지 않는다. 병을 자기 안에 가둬 두고 있는 것이다. 병은 가둬둘수록 깊어진다.
산책을 하고 있는데 아주 좋은 - 갖고 싶은 차가 지나간다면, 예사롭게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대신 심기가 불편해진다. 나도 저런 차를 갖고 싶다. 그러나 월급이 너무 적다. 어떻게 하면 월급을 더 받을 수 있을지 아니면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을지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은 할 필요가 없었다. 생각도 차처럼 그냥 지나갈 수도 있었다. 내가 따라가지 않으면 그저 사라진다. 중심을 잡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중심을 잡지 못하면 의식은 주의를 끄는 것에 딸려가기 마련이다. 자동차 다음에는 배를 또 비행기를 갖고 싶을지 모른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간다. 일도 잘 안 되고, 인간관계도 잘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마음이 산만하고 에너지도 사방에 흩어져 있다.
‘내가 아직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믿을 수가 없어, 자동차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했는데 말이야’라고 말하지는 마라. 그러면 당신은 자동차 대신 이번에는 자책하는 생각에 딸려가고 말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놓아 보내야 한다. 의식의 대상과 의식의 차이가 마치 낮과 밤의 차이만큼이나 뚜렷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인데, 그것은 서로 완전히 별개다. 대상은 왔다가 사라진다. 의식은 그것이 왔다 가는 것을 지켜본다. 의식이 지켜보는 눈앞에서 다음 대상이 왔다 간다. 대상들은 왔다가 지나가지만, 의식은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모든 것을 지켜본다. 외부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눈을 통해 힘들이지 않고 보듯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도 힘들이지 않고 본다. 참 나는 내부의 에너지가 외부의 힘에 따라 변하는 것을 지켜본다. 에너지는 당신이 의식의 중심을 잃고 말려들지 않는 한 그저 왔다 사라진다.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일상 속의 하찮고 사소한 일들 때문에 괴로워하곤 한다. 예컨대 신호등 앞에서 누군가 빨리 가라고 경적을 울린다면 이런 작은 일에 당신은 속에서 에너지가 움직이는 것을 감지한다. 그 변화를 감지하는 순간 어깨에 힘을 빼고 가슴을 이완하라. 약이 오르는 느낌을 놓아 보내고 뒤로 떨어져 나오는 것이 놀이(명상)를 즐기는 방법이다. 삶에서는 그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마음을 닦는 것보다는 놓아 보내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마침내 거기에 머무는 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여러 해 동안 실천해 아무리 깊은 고통에도 놓아 보내기를 터득한다면 당신은 위대한 경지에 이를 것이다. 궁극의 습관, 저급한 자아의 끊임없는 끌어당김을 박차고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파트3 : 자기를 놓아 보내기】
삶에서 일어나기 마련인 모든 굴곡은 개인의 성장을 가져오거나 아니면 두려움을 일으킨다. 어느 쪽이 지배적일지는 변화를 대하는 태도에 달려있다. 변화는 기대와 흥분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끔찍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두려움이 생기지 않고 자극받지 않는 환경을 만들려고 한다. 두려움은 별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마음을 써서 조작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두려움도 하나의 대상으로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아차린다면 ‘놓아 보내기’를 하거나, 계속 품고서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숨기고 ‘도망 다니기’를 해야 한다. 이러다 보면 세상은 갈수록 험한 곳이 된다. 삶이 내부 문제를 건드리는 방향으로 흐른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를 귀찮게 하는 것은 대부분 문제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은 문제가 없다. 우리는 외부의 모든 경험을 자기 내부 문제에 비추어 재단하려고 한다. 자신의 존재가 엉망인 부분에 비추어 세상을 정의하면 그것은 끔찍한 난장판으로 보일 것이다.
삶은 몸부림이고 하루하루가 괴롭다. 모든 것과 싸우고 모든 것을 통제해야 만 하기 때문이다. 경쟁과 질서와 두려움, 걱정이 이토록 많아 마음속에서는 지껄임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런 일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 중이거나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고, 세상과 싸우고 있고, 그것이 삶에 끔찍한 것이 되고 있다면, 삶과 싸우지 않기를 결심해야 한다. 삶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받아들여라.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라. 두려움 없이 사는 것이 가능할까 하고 생각한다면, 그 두려움 자체를 더 깊이 이해해야 한다. 물에다 돌을 던지는 것처럼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두려움의 뿌리는 내 안에 걸려 있다. 두려움은 에너지의 흐름이 막히면 생긴다. 에너지 흐름이 막히면 에너지가 가슴으로 올라와 양분을 공급하지 못한다. 가슴이 약해지고, 약간의 파동에도 민감해진다. 파동 중에 가장 낮은 것이 두려움이다. 선입견, 분노, 시기, 소유욕…, 이런 부정적 감정의 뿌리가 그것이다. 두려움만 없다면 그래도 세상과 삶이 행복해질 것이다. 당신을 혼란시킬 그것들이 없어졌기 때문에.
“세상을 살면서 어디까지 떨어져 본 적이 있는가?”
이제, 앞으로는 그 경지의 최고봉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혼란된 에너지에 말려들었을 때 마음이 시키는 일 중에서 몇 가지를 실제로 감행한다고 상상해 보라. 실제로 직장을 때려치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 오늘은 본때를 보여줘야지. 안 되겠어’하고 나섰다고 상상해 보라. 그것이 얼마나 깊이 떨어지는 나락인지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에너지가 당신 몸을 허용하는 순간 당신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하강하게 될 것이다. 이제 그것은 ‘놓아 보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에너지를 이렇게 외면화하고 나면 자신의 행동을 방어하고 정당화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것이 결코 정당하다고 생각해 주지 않는다.
가다가 떨어진다면 그저 일어나서 툭툭 털어 버려라. 그것을 교훈 삼아 각오를 더욱 다져라. 그것을 따져보거나 남 탓으로 돌리거나 합리화하려 하지 말라.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저 그 자리에서 놓아 보내라. 에너지가 이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의식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라. 혹시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놓아 보내라. 그것이 바야흐로 정화되고 있는 것이며, 막힌 에너지 찌꺼기들이다. 놓아 보내기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깨닫는 즉시 놓아 보내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상승을 위해 에너지를 이용하라. 놓아 보내던지 아니면 추락하는 것이다. 중간은 없다.
‘작은 일부터 시작하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말을 하거나, 심하게 무시한다면, 예를 들어 길을 가다 친구를 만났는데 인사를 해도 아는 척도 안 한다. 그가 당신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정말 당신을 무시했는지 모르겠고, 그가 당신에게 화가 난 것인지.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당신은 모른다. 점검을 해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구상에는 수십억의 인구가 산다. 그리고 그중의 한 사람이 당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것을 못 참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이성적인 행위인가부터 생각해 보면,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자신을 해방시키는 훈련이라고 생각하라. 그저 마음의 짓거리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마음먹어라. 그저 지켜보아라. 마음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궁리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라. 처음 누군가 당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힘을 빼고 놓아 보내라.
【파트4 : 그 너머로 가기】
불교에서도 영적 수련에서도 ‘깨달음’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깨달음이라고 할 때 그것에 대해 확실히 아는 유일한 것은 ‘거기에 내가 있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다. 생각과 감정과 감각의 대상은 의식 앞을 지나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의식이 지각한 경험에 국한되어야 하는 것일까 하고 의문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끌어 모은 것들에서 본능적으로 피하게 만드는 어떤 한계를 만들어 놓기 마련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고, 그것이 바로 벽의 역할이다. 우리는 벽으로 달려가 부딪치려고 하지 않는다. 거기로 달려가지 않기에 그것이 오히려 감옥이 된다. 거기에 다가가기를 피하므로 그 너머를 볼 수도 없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벽을 주목해야 한다. 깨달음을 얻겠다고 발버둥 치면서 깨달음의 빛을 가리는 벽을 쌓아 올리는 것은 무슨 짓인가? 그저 나날의 삶을 붙들고 있는 벽이 허물어지도록 내버려 두면 된다. 삶을 지키는 일에 팔을 걷고 나서면 된다. 무수한 별빛 속에 대양 한가운데 서 있는 생각의 집을 상상해 보라. 그 집에서 어둠 속에 갇혀 있는 당신 의식이 한정된 경험의 인조광을 벗어나고자 날마다 몸부림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벽이 허물어지고, 의식이 스스로를 내려놓고 언제나 있어 왔던 그 바깥의 빛 속으로 퍼져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 경험이 바로 ‘깨달음’이다.
경계와 한계는 넘어가기를 멈추는 자리에만 존재한다. 멈추지 않으면 경계와 한계를 넘어갈 수 있고 한정된 자아의 느낌을 뛰어넘을 수 있다. 무엇이든 인공적인 경계를 만들어 놓지 않는 한 그것은 무한히 뻗어간다. 경계는 유한성을 만든다. 우주가 무한하듯이 모든 것은 무한하다. 우리는 관점, 견해, 기호, 관념, 목표, 믿음 이런 것들이 항상 손아귀 속에 들어온 느낌이 들도록 만들려고 한다. 분석적인 마음은 무한을 다룰 능력이 없으므로 유한한 생각으로 현실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마음속에서 주물려고 한다. 마음속 틀이 현실이 되어 있으므로 세상의 틀에 맞추어 밤낮으로 애써야 하고 거기에 맞지 않은 것은 모두 틀린 것, 나쁜 것, 부적당한 것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틀을 넘어가려면 그것을 불신하는 모험을 감수해야 한다. 현실에 저항할 것인지, 자신의 틀의 한계를 넘어갈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아름다운 추억과 희망찬 꿈으로 철창을 장식하는 것은 그 너머로 가는 것과는 다르다. 철창은 철창일 뿐이다. 넘어갈 의지를 가져야하고 날마다, 온종일 철창의 창살과 부딪칠 때는 물러서거나 아니면 편안해지기 위해 뭔가를 바꿔 놓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은 영리함을 이용해 안전지대에 머물 방법을 궁리하게 될 것이다. 철창 속에서 머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골똘히 잠 못 자고 궁리하게 될 것이다. 한계를 극복하고 넘어가고 싶다면 운동선수처럼 숙달시켜 부딪힐 때마다 곧장 힘을 풀고 지나가면 된다. 그것이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해방으로 가는 길이다. 해야 할 일은 단지 힘을 빼고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날 전혀 예기치 않은 무한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것이 너머로 간다는 의미다.
우리는 지금 허공 속을 돌고 있는 한 행성 위에 서 있다. 여기서 단지 몇십 년 머물다 떠날 것이다. 어떻게 매사에 열을 올리고 살아야 하는가? 매사에 불편을 느낀다면 당신이 만든 틀이 모든 일과 부딪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멋대로 정의해 놓은 현실을 통제하기 위해서 당신이 지어낸 그릇된 부분이 모든 일과 마찰을 일으키고 있음을 뜻한다. 심리적 혼란 속에서 평화로울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음이 분주히 움직이면 그것을 주시하라.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면 거쳐 가게 하라. 마음이 바빠지고 가슴이 뜨거워지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음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라. 그 부분이 당신의 탈출구다. 틀이나 벽을 만들면 탈출할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혼란을 지켜보고 있는 그 중심 자리는 태풍의 눈처럼 결코 혼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혼란이 계속된다면 그 혼란을 알아차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느껴보라. 그러면 혼란이 멈출 것이다. 당신 존재의 깊은 곳으로 느긋이 물러앉아 마음과 가슴이 최후의 혼란을 일으키는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있게 된다면 당신은 초월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의식은 자신이 인식하는 대상을 초월해 있다. 빛이 대상을 무심히 비추듯이, 의식은 대상을 무심히 인식할 뿐 대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당신이 곧 의식이다. 모든 것에서 느긋이 머물러 있음으로써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
【파트5 : 삶을 살기】
‘당신은 누구인가? 왜 사는가?’많이 들어 본 질문이다. ‘산다는 것’자체가 영성의 길이다. 나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안다면, 그것이 해탈의 경험이 될 것이다. 혼란에 헤매지 않으려면 올바른 방법으로 삶에 접근해야 한다. 선택은 한 가지다. 그것은 신을 섬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떤 배우자를 선택해야 할지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행복하기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다. 이 결정을 내리고 나면 인생길이 분명해진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행복하고 싶지만, 아내가 집을 나가고 없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느냐? 아이들이 애를 먹이는데 행복이 다 뭐냐? 돈이 없는데 행복할 수 있겠느냐? 라고 말한다. 아내가 집을 나가거나 남편이 죽거나, 주가가 폭락하거나, 자동차가 밤중에 고장 날지도 모른다는 것은 삶이 끝날 때까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진심으로 행복을 원한다면, ‘만일’이나 ‘그리고’,‘하지만’이런 것은 있을 수 없다. 행복에 조건을 달기 때문에 행복은 당신 손에 달려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만들어낸 조건이 행복을 제약하게 되고, 원하는 대로 풀려가게 할 힘을 잃는다. 조건이 없어야 한다. 조건 없는 행복은 가장 수준 높은 기술이다. 경전을 읽을 필요도, 출가수행을 할 필요도 없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이 진정으로 삶을 행복하게 살겠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 영적인 길이고, 가장 직접적이고 확실한 깨달음의 길이다.
만사 잘 풀릴 때는 행복하기가 쉽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 생기는 순간에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라고 핑계를 댄다. 하지만 아직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들이 앞으로 일어날지 모른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당신은 스스로 생각해야 하고 결정해야 한다. ‘당신은 고생하려고 지구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비참해지는 것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당신은 사상적 신조와는 상관없이 태어났고 또 죽을 것임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사이 경험을 즐길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해야 하고, 그사이 일어나는 사건들은 당신이 행복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한다.’행복할지 말지는 사건이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의지는 존재로부터 나오는 실질적인 힘이다. 그 힘이 팔과 다리를 움직이게 한다. 사지는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혹은 저렇게 움직이도록 의지를 행사하기 때문이다. 만일에 당신이 라일락이 활짝 핀 모습을 보면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지만, 라일락을 좋아했던 당신 애인이 하필 라일락이 만발했을 때 떠나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이런 개인적인 일들이 마음과 가슴속에 각인된다. 이것은 저항 아니면 집착하기 위해 의지를 발동시키게 하는 근거가 된다. 어린 시절이나 어른이 되어 일어난 사건일 수도 있고, 과거 인상에 근거하여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저항하게 되는 이유다.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그저 사건일 뿐이다. 그것에 대한 당신의 저항이야말로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다.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일에 대처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그것을 개인적 문제로서가 아니라 지구 행성에서 일어난 무수한 사건들 중의 하나로 대처한다. 대부분 상황에서 자신의 두려움과 욕망 외에는 대처해야 할 것이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두려움과 욕망이 매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두려움과 욕망이 없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그저 자연스러운 태도로 그에 임하고, 그저 삶이 펼쳐지도록 놓아두면 된다. 문제가 없는 상태, 긴장과 스트레스가 없는 상태, 기진맥진하지 않는 상태로 세상의 모든 일이 유유히 지나갈 수 있게 된다면 당신은 깊은 영적 경지에 이른 것이다. 삶이 당신에게 선물을 주고 있으며, 그 선물이란 당신의 탄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동안 일어나는 사건들의 흐름임을 깨닫게 할 것이다. 사건들은 당신을 흥분시키고 엄청난 성장을 가져오게 할 것이다.
멀쩡하게 살고 있는 당신에게 어느 날 밤 저승사자가 찾아와서 ‘짐을 챙겨놓게, 오늘 밤에 잠을 자다가 깨면 나와 같이 가야 하네.’라고 말한다면 그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어떤 기분이 들까? 그들과 어떤 이야기를 주고 받을까? 평소에 그들에게 품고 있던 자잘한 시기나 불평 따위에도 신경을 쓰게 될까? 그것이 그들과 보낸 마지막 시간임을 안다면 당신의 삶은 정말 달라 보일 것이다. 죽음은 음침한 것이 아니다. 죽음이야말로 삶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스승이다. 일주일, 혹은 한 달 후에 당신이 죽을 것임을 상상해 보라. 당신이 중요하게 생각한 일들의 우선순위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 이 얼마나 훌륭한 질문인가. 이런 삶을 가지고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죽음이 당신에게 묻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죽음은 위대한 스승이다. 나이는 문제가 아니다. 어느 순간 숨이 넘어갈 수 있다. 그것은 노인만이 아니라 갓난아이도, 십대에도, 중년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한 호흡 사이에 사라진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이것이 죽음이다. 그러니 일주일마다 그 마지막 일주일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숙고해 보지 않을 텐가? 죽음이 일 년 후에 찾아오든 한 달 후에 찾아오든 한 시간 후에 찾아오든 지금 살고 있는 것과 똑같이 살아갈 것이다. 타협하거나 자신과 싸우지도 않는다. ‘매 순간 머리 위 거미줄에 칼을 매달아 놓은 것처럼 살았다.’고 하는 위대한 오기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죽음을 그처럼 가깝게 의식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의 지척에 있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뭔가를 먹을 때마다 그것이 당신의 마지막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는 저녁을 먹다가 죽었어요. 그는 자동차 사고로 죽었어요. 그는 잠들었는데 일어나지 않았어요….’이것은 누군가에게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죽음 앞에 긴장하지 말고 오히려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 매 순간을 충만하게 한다. 살날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음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 마지막 주일은 모든 것이 수백 배나 의미 있을 것이다. 남은 날들은 마지막 주일처럼 살아야 한다. 또 그렇게 살고 싶다.
여기서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면, 나와 당신은 언젠가 죽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언제인지만 모를 뿐이다. 죽음은 모든 것을 앗아 간다. 소유물과 사랑하는 사람과 삶의 희망과 꿈을 남겨두고 떠날 것이다. 있던 곳으로부터 들려 나갈 것이다. 죽음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어버린다. 실제적이지 않은 이것에 저항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이 깊은 진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도 삶을 온통 바꿔야 할 필요는 없다. 단지 살아가는 태도를 바꾸면 된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온전히 자신을 바쳐서 그것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항상 죽음을 대면하고 있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그러면 더 대담해지고 가슴이 열릴 것이다. 삶이란 얻어내는 무엇이 아니라 경험하는 무엇이다. 삶의 경험은 저마다 다른데 그것을 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죽음이므로 죽음은 삶에 의미를 가져다준다. 매순간을 온전히 살면 삶은 충만해지고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삶에 집착하기 때문에 죽음을 겁낸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무엇을 얻어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다. 죽음은 삶에 의미를 준다. 우리는 삶의 매순간을 아무렇게나 버리고 낭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살아있는 동안에 생각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우리를 심판하는 것이 신이라는 관념을 버려야 한다. 신은 햇빛과 같이 언제나 공평하다. 당신은 사랑 깊은 신을 가졌다. 사실 사랑 자체가 신이다. 당신은 언제나 신의 환희 속에 있으며, 신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