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의열사 논개 석류나무
진주성의 촉석루는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이다. 평양의 부벽루가 웅장하며 단정하다면, 영남루는 웅장하고 우아하고, 강낭콩보다 푸르른 남강 언덕의 진주 촉석루는 웅장하며 장엄하다. 그뿐인가? 서슴지 않고 죽음과 입맞춤한 논개의 절의는 곧 애민의 기개이니 촉석루의 웅장, 장엄함에다 끝 모르는 사랑을 더한다.
촉석루 서쪽에 숨은 듯 자리 잡은 논개의 사당 이름은 ‘의기사’이다. 하지만 논개의 의충과 열정을 뜻하는 ‘의열사’로 읽는다.
논개는 기녀가 아니다. 다만 기녀로 위장했을 뿐이다. 이는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온 나라를 분탕칠한 왜적에 대한 응징과 복수를 하기 위함이었다. 논개가 기녀로 위장하지 않았다면, 어찌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쉽게 죽일 수 있었겠는가? 논개를 관기라고 기록한 ‘어우야담’은 유몽인이 사실을 바르게 알지 못했음이다.
논개가 진주에 온 것은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앞두고 남편인 최경회가 입성할 때였다. 당시 왜와의 2차 진주성 전투는 처절함과 허망함이었다. 진주성은 왜에게 포위되어 백 리 안에는 단 한 명의 아군도 없었다. 왜가 몰려오자 도원수 권율은 남원으로 피하고, 정암진의 경상도 의병들도 퇴군했다. 수만의 피난민은 굶주렸고, 군량미도 바닥이었다. 더욱 수성군은 3천여 명이고 왜는 정예병만 9만 3천 명이었다. 싸우기 전부터 결과가 뻔한 전투였다. 그렇게 1593년 6월 22일부터 29일까지의 치열한 전투가 끝나고, 최경회는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성을 장악한 왜병은 살아 있으면 사람이건 짐승이건 모조리 죽였다. 서 있는 것이 성벽이면 허물고, 나무이면 도끼로 찍었다. 우물에는 독을 풀었다. 성 곳곳에 젖먹이들 시신까지 나뒹굴고 남강은 핏빛이었다. 그래도 분풀이를 못 한 왜는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제1대는 단성, 산청, 제2대는 섬진강을 따라 구례, 곡성까지 약탈과 살상의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진주로 돌아와 7월 9일 전승 축하연을 가졌다. 바로 이날 논개는 기녀 대열에 끼어 촉석루로 갔다. 촉석루의 전승 축하연이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상황을 살피던 논개는 남편인 최경회가 몸을 던진 곳으로 갔다. 섬처럼 보이는 위암으로 훌쩍 건너갔다. 이를 보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가 뒤따라 건너왔다. 잠시 뒤 위암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일로 위험하다는 ‘위암’은 의로운 바위 ‘의암’이 되었다. 논개의 의열을 기리기 위함이다.
며칠 후 왜군은 울산과 부산 쪽으로 철수했다. 논개의 순절 소식이 퍼졌다. 이에 화순과 능주, 장수가 고향인 최경회의 전라의병이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찾아 나섰다. 처음엔 800여 명이던 최경회의 의병은 겨우 80여 명만 남았다. 이들은 남강을 따라가며 시신을 찾다가 ‘지수(智水)목’에 이르렀다. 그리고 운 좋게도 주민들이 건져서 가매장 해놓은 시신에서 최경회와 논개를 찾았다.
최경회는 화순, 논개는 장수로 모셔야 하나 삼복더위에 시신은 곧 부패했다. 의병들은 논의 끝에 논개의 선조와 일족이 사는 함양군 서상면 방지마을 산비탈에 두 사람을 묻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장수의 논개 사당이 ‘의암사’임은 당연함, 맞음이고 진주의 ‘의기사’도 이제는 ‘의열사’라 함이 예의와 도리이며 역사 바로 세움이다.
한더위에 찾은 진주 의열사 담 곁 석류나무에 석류가 아름답다. 이제 논개 사당 이름만 바로 잡으면 석류는 더 아름다울 것이다. 그나마 친일파가 그린 영정을 치우고 새 영정을 모셨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부끄러운 마음으로 사당에서 물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