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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항상 그렇게 우리와 함께였던 여호수아(은혜와 진리)는 모세(율법)의 위대한 그늘에 가려져 있을 뿐이었다. 여호수아(예수)의 기름부음은 모세, 즉 내게서 율법이 죽고 없어질 때이다. 내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는 때가 곧 모세(율법)가 싯딤에서 죽어 장사지내는 순간이다. |
내게서 예수그리스도가 살아나는 때는 곧 율법이 그 효력을 상실할 때이다.
여호수아(예수)의 진가는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 비로써 발휘되기 시작한다.
가나안, 그 약속의 땅에서의 기업을 얻게 하기위해 중보자의 역할을 다한다.
제 몸을 불사른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우리들을 위해 기름 부으심을 입는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가나안에서의 안식과 쉼을 얻게 한다.
이것이 길갈에서 추억해야 할 일이었다.
미가가 경고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음행과 우상숭배의 악행을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들을 추억하는 것과 연관시키는 이유는 이렇다.
싯딤에서의 우상 신,
광야에서의 신앙적 추억을 단지 애굽에서의 종살이로부터 해방하여 먹고 배부름을 위한 기사와 표적을 찾고 구하는 자들이 섬기며 경배하는 신, 그들이 만들어 낸 신, 여호와로 불리 우는 다른 신 우상을 말함이었다.
길갈에서의 우상 신,
율법, 육신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로는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만들어 낸 신, 예수라 이름 하는 다른 신 우상이다.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없는 자들임에도 여호와라 이름 하는 그들만의 우상 신, 다른 신을 만들어 세워 들어가려 하는 자들이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실체와 대면하던 때에 아론과 더불어 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이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하여 낸 신, 여호와라 이름 한 다른 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낸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들에게서의 신의 모양과 형태, 그리고 존재의 이유였다.
이스라엘의 역사, 여호와의 말씀 안에서 살았던 신앙의 여정에서 반드시 맞이하게 될 두려움의 때요, 또한 이겨내고 극복해야 할 위기의 순간이다.
진리를 내는 자가 가진 자가 왕 노릇하는 시대다.
또한 왕 노릇 하는 자에게 음행과 우상숭배의 일은 일반화 된 현상이다.
죄(아직도 율법의 영향력아래 놓여있는 나:죄의 심판과 저주의 두려움)의 법에게 종노릇하였던 나를 구원(해방)하여 자유자(지성소를 드나들며 하나님을 만나 저 먹을 것을 먹는 자)가 되게 하였다.
자유자는 곧, 지성소를 드나들어 진리를 알게 되어 그로 인해 왕 노릇하는 자를 말함이다.
율법사와 선지자와 그리고 예언자들의 기록하고 전한 글을 손에 쥐고 주무른다. 지성소를 드나들어 알게 된 것으로 인해 이제는 그 자신이 율법사요, 선지자며 예언자가 된다. 왕이 된 것이다.
하지만 저가 자신 스스로를 진리에 어거하지 못한 섣부른 자유자가 되어 왕 노릇한 때의 결말은 자신과 더불어 그 백성들을 음행과 우상숭배에 방임하고 만다.
자기 영광에 도취된 왕 노릇은 여호와까지도 부리는 자로 군림한다. 자기를 위한 신을 만들어낸다. 여호와라 불리워지는 숱한 우상을 만들어낸다.
왕 노릇의 때란,
진리를 빙자하여 각자가 각각의 다른 신을 만들어내어 여호와라 이름 하여 섬기며 경배하는 때를 말함이다.
그러한 한 때의 찬란했던 왕 노릇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있다.
그에게서 가슴 뛰게 할 진리의 계시가 사라진다는 말이다.
이러한 암울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미가는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추억할 것을 권고한다.
성경은 이 시대를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한다.
미가서가 다루는 주제, 곧 이스라엘의 멸망 직전의 상황은 한마디로 우상숭배의 만연이었다. 여호와의 전 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우상숭배로 물들어 있다.
이스라엘을 여호와께로 돌이키게 하기 위한 히스기야의 마지막 몸부림은 15년 더 이어지는 그의 생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미 삶의 일부분이 된 온 유다의 산당과 전에 가득한 우상, 그리고 우상숭배를 부추키며 그들에게 빌붙어 기생하는 복술과 점장이들(3장 5절), 또한, 거짓 예언자들(5장 12절)은 삶의 한 축이 되어 톱니바퀴처럼 돌아간다.
주문처럼 되어 읊조리는 예언의 구절들로 사람을 호린다. 흉과 화, 저주는 덮고 축복만을 들추어 듣는 자들을 만족케 한다.
그들을 향한 미가서의 외침은 이렇다.
미가서 7장 6절(마10장 21절)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사람이리로다
우상 숭배케 하여 멸망에 이르게 하는 원수가 곧, 자기 집안 식구란다. 미가는 이 세대를 향하여 자기 원수가 다름 아닌 집안 식구라 경고한다. 여호와를 배반하여 버리고 복술자들의 섬기는 신, 곧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 우상 신을 경배하게 하는 원수가 집안 식구라 한다. |
자신과 집, 그리고 온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끄집어 들어갈 원수가 집안 식구였다.
미가는 다시 묻는다.
지금 너희들이 절하며 경배하여 섬기는 신들, 그 우상이 무엇이냐?
여호와의 전과 유다의 산당들에 세워져 있는 그 우상의 실상과 실체를 아느냐? 묻는다.
유다의 산당과 전에 있는 우상이 무엇이냐?
너희들이 섬기는 그 우상,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서 있는, 여호와의 이름을 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모양과 형태를 가진 그것이 여호와가 맞느냐? 의 다른 표현이다. 미가는 그 우상의 실체를 아는 야곱의 자손들에게 이렇게 구원의 길을 제시한다.
미 4:2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에서의 낯을 피하여 라반 집에서 21년을 종노릇하였던 야곱, 그가 때를 만나 그 아비 집을 향한다.
여호와의 복,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상속자가 되기 위한 다툼을 벌였던 형제 에서와 야곱,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얻기 위한 내 속에 도사린 두 욕망의 다툼을 빗댄다.
한 낱 배부름을 위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여호와의 복을 갈구하는 겉 사람의 표상인 에서, 그리고 좋은 길 얻기를 구하지 않은 거짓과 속임으로 하나님의 복을 취하려는 완숙하지 못한 속사람의 표상인 야곱이다.
언제나 겉 사람을 속이고 넘어지게 하는 것은 내 속에 감추어진 죄(속사람)이다. 나의 겉 사람과 속사람이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의 원리가 원함은 자기에게 있으되 자기의 원(자기방식)대로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에서(겉 사람:속는 자)와 야곱(속사람:속이는 자)은 하나님 나라의 복에 관한 원함은 간절하였으되 아직 그 자질과 자격을 갖추지 못하였다.
거듭나지 않았던 탓이다. 이스라엘이 되지 않았다.
겉 사람을 실족케 하여 넘어지게 하는 것은 속사람의 행위다. 육신으로 죄에게 져서 죄의 종노릇하게 하는 것은 속사람의 행위다.
에서와 야곱은 나의 겉 사람과 속사람의 자람과 장성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다툼과 미움, 화해와 용서, 하나 됨의 과정을 다룬다.
아비 집에서의 장성하지 못하였을 때의 다툼과 미움, 속임과 실족케 함은 겉 사람과 속사람의 화해(화목)를 위한 당연한 수순이다.
라반,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상속할 자, 속사람인 야곱의 자람과 장성, 그리고 훈련하여 연단하게 하심을 위한 또 다른 법의 세계다. 원수인 집안 식구다.
야곱은 그 라반의 법(드라빔:우상이 가져다 주는 복) 아래에서 종살이 21년을 보낸다.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지 않고서는 그 법에서 놓여날 수 없다.
야곱은 그렇게 라반의 법(드라빔)의 체계 속에서 여호와의 법을 하나씩 적용하여 배우며 자라고 장성한다.
때의 도래,
라반의 법(복)으로도 야곱(여호와의 법)의 복을 감당하지 못하여 어찌하지 못할 때, 야곱의 장성함(부요함)은 극에 달한다. 때가 도래한 것이다.
야곱의 많은 양과 약대, 그리고 네 아내와 아들들은 하나님의 부요였다.
속사람이 결실하여 얻은 씨의 열매들을 이끌고 그가 이른 곳은 육신의 아비인 이삭의 집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본향 집(벧엘), 여호와의 전을 향한 거룩케 됨의 여정에 오른다.
육신의 아비 집을 떠나올 때 여호와를 만났던 그 벧엘,
여호와의 전에 오른다.
그 여호와의 전에 올라 모든 우상을 불태우고 묻으며 언약을 확인한다.
여호와 집, 여호와의 전에 오를 때 반드시 청산해야 할 문제였던 우상과 우상숭배의 행위와의 단절이었다.
미가는 이스라엘을 향해 야곱의 전, 곧 그 엘 벧엘을 향할 것을 종용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기와 자지 집을 이롭게 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신, 드라빔 모든 우상을 땅에 묻고 여호와의 경배한다.
어느 때에 야곱과 그 집 사람들이 우상과 음행하여 짝하였던가!
야곱이 라반 집으로 가는 여정에서 대면했던 벧엘의 여호와는 벧엘에 묻었다.
여호와를 잊고 살았던 야곱의 생애,
드라빔은 여호와의 이름을 한 다른 신, 우상이었다.
벧엘, 여호와의 전에 묻어둔 신과 라빈 집에서의 다른 신이 존재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벧엘의 신 여호와와 라반 집에서의 신 드라빔을 섬긴다.
그렇게 여호와라는 신은 전에서만 섬겨지고 경배되는 대상에 불과할 뿐 야곱의 집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한 다른 신, 드리빔이 우상이 된다.
미가는,
그런 그들에게 도대체 너희의 섬기는 신은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이냐? 라고 항변한다. 또한 여호와는 어디에 있느냐? 라며 반문한다.
미가서를 통해 현재 내가 섬기고 경배하는 신이 무엇이며? 누구인지에 관한 신의 정체성을 묻는다.
신에 관한 진지한 정체성을 묻는 것이 미가서이다.
유다의 산당과 전에 있는 너희들의 신, 그 신은 우상이며 만들어지고 조작된 신이라는 통렬한 질책이었다. 또한, 여호와야말로 상고의 태초부터 계신 분, 즉, 영원한 날들의 계보에서 오신분이라는 일깨움이었다. |
그러므로 미가서에서의 여호와는 영원한 날들의 계보에서 오신 여호와를 말한다.
영원한 날들의 계보에서 오신 여호와이시다.
지금, 이 세대, 티끌 같이 짧은 날들의 계보를 살고 있는 인생들이 조작하여 만들어낸 여호와가 아니라는 강력한 어필이다.
우상이란, 찰나 같은 순간을 사는 인생들이 만들어 낸 신이다. 불투명한 앞날을 보장받기 위해 덧칠하고 꾸며낸 그럴싸한 신의 형태와 모양을 가진다.
미가서에 들어서기 전, 요나서를 마주한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다. 비둘기와 진리라는 말의 뜻을 가진 요나의 삶이다.
요나서는 니느웨를 향해가는 여정을 주님의 부활과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중요한 가교역할을 하는 굵직한 대목들을 가진다.
하지만,
주님의 부활과의 연관성에 우리의 시선을 빼앗긴 탓에 오히려 간과되는 요나와 니느웨 사람들이 보인 신앙적 행태였다.
요나를 통해서는 부활(거듭남)을 니느웨 사람들을 통해서는 회개를 보아야 했다.
-요나 : 부활,
-니느웨 사람들 : 회개,
요나는 부활한 자였으나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한 자들에 불과하다.
요나의 외침에 니느웨 사람들이 보인 행위는 단지 여호와의 진노(재앙)로부터의 순간적인 모면을 위한 단편적인 회개에 불과하다.
회개의 목적이 눈앞에 닥쳐올 멸망과 재앙을 피하고자 함에 근거한다.
결국, 후에 니느웨가 다시 멸망당한 것은 순간의 화를 모면하기 위한 회개의 행위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회개의 한계란, 좌우를 분별하는 것, 곧,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하여 당하게 될 화로부터 자신의 목숨과 소유를 지키기 위한 일시적 선을 택한 꼼수에 불과할 뿐이다.
회개한 이유는 다름 아닌 재앙이 두렵기 때문이다.
반면, 선과 악의 분별과 상관없는 행위가 의요, 부활한 자의 모습이다.
회개와 부활의 가장 극명한 차이는 부활에 있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말씀의 임재가 없다는 사실이다. |
요나는 그 자신이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이다. 선악을 분별하여 아는 자이다. 여호와 앞에 자칭 의인인 셈이다.
그 자신이 선악을 분별하여 아는 자가 되어 여호와께로부터 오는 화를 피하는 대상으로 여겼다는데 있다.
심판하는 자리에 앉은 자이다.
니느웨 사람들과 여호와 하나님의 처사를 향해 분내며 판단하며 그 옳고 그름을 시비한다.
그런 그에게 말씀이 임한다.
-1장 첫 번째 말씀 - 피하여(진리)
-3장 두 번째 말씀 - 분내어(진리)
첫 번째 임한 말씀에 보인 대부분의 행위는 피한다.
그리고 두 번째 임한 말씀에 관한 태도는 분내어 한다.
그리고 도망한다.
대개,
말씀이 임하면 아멘하고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내게 임한 말씀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이라면 피하고, 분내어 도망하는 것이 일반적 원칙이다.
말씀을 순순히 아멘으로 영접하는 자는 없다는 말이다.
심한 갈등과 번민, 고뇌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까닭에 부활이란, 여호와께로부터 내게 오는 말씀 곧, 여호와의 임재로 대변되는 말씀의 영접에 있어 진리에 대적하는 자기적 요소가 없어지는 것을 부활이라 한다 |
.
내게 선악을 넘나드는 경계의 틀이 남아있는 이상 진리의 수용은 요원하게 된다.
진리의 말씀에 대한 자기 방어적 요소가 없어지는 것이 부활에 이른 자이다.
단순히 회개에 이른 자들은 선악의 유무에 따라 의의 행위가 결정된다. 악의 편(악한 일)에서 선의 편으로 돌아선 것을 구원이라 여긴다.
요나 역시 사람의 구원을 선악의 분별을 아는 가에 기준을 두었다.
선악의 경계를 넘어가는 것, 그것이 부활을 향한 요나의 나아감이다. 니느웨를 심판하려 함이 아니었다. |
그 선악의 경계를 넘어선 자에게 비로써 보이는 것이 회개를 부활로 착각한 사람들을 향한 불쌍히 여김이다.
그 부활의 시점에 이르러서야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다.
그러한 긍휼의 마음에서 나온 여호와의 말씀이 효력을 나타낸다.
선악의 세계에서 진리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인도자가 된다.
진리의 속성이란, 보는 대로 듣는 대로 사람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다.
요나서를 예시로 하여 미가는 자기백성 이스라엘 앞에 선다.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해 새롭게 거듭남을 요구한다.
결코 이스라엘을 심판하려함이 아니다.
미가는 여호와의 백성을 향해 다시 한 번 싯딤에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추억하라한다.
미가서6장5절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의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추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추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의 의롭게 행한 것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아멘
부제,
싯딤(모압평야)에서부터 길갈(여리고 평야)까지.
두 장소에서의 벌어졌던 일들에 관하여 이제껏 들어왔고 읽어왔던 대표적 사건들인 발락에 의한 발람의 저주나 모압 여인들과의 음행으로 바알브올을 섬기게 되어 여호와께로부터 재앙을 당하게 되는 일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으나 다른 관점에서 크게 두 가지를 언급하면 이렇다.
집안 식구가 원수라는 시각을 형제인 모압에게서 유추해보는 뻔 한 시도를 접어두고 다음과 같은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싶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의 마지막 숙영지임과 동시에 요단강을 건넌 후의 첫 숙영지가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이다.
-이제부터 이스라엘의 인도자가 모세가 아닌 여호수아로 대체되었다.
이것으로 음행과 우상숭배가 만연하여 미가를 통한 이스라엘의 심판과 멸망을 경고했던 여호와께서 추억하라 하신 이유가 설명될까!
광야생활의 종지부를 찍는 곳이 싯딤이었다면 요단강을 건너 꿈에 그리던 가나안 생활을 시작하는 감격의 장소가 길갈이었다.
어떤 생활이 더 추억에 남을까!
모세와 더불어 살았던 그 험난했던 40년의 광야생활을 회상하며 추억할까!
아니면 여호수아와 더불어 다시 새롭게 시작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생활을 추억할까!
광야와 가나안의 두 시대를 살았던 나는 어느 쪽을 더 추억하고 있을까.
과거 지나온 광야생활을 그리워하는 자가 있을까?
또한 그 때 만난 위대한 인도자 모세를 더 추억하는 자가 있을까?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구원의 여정을 정리해보면,
실상,
모세의 역할은 이스라엘을 시내 산까지 이끄는 것이 옳았다. 모세 자신이 대면한 여호와 외에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대개 인도자가 하는 실수는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에 들어가게 할 자를 시내 산에 머무르게 하는 경우다. 상대를 자기의 만난 하나님 외에는 더 이끌지 못한다.
그러나 모세의 인도는 시내 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싯딤에까지 이어진다.
율법은 광야에서 생명의 길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을 여호와께로 나아가는 길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은 여호와께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생명으로 나아가는 또 다른 길이었다.
율법이 말하는 길을 통해 여호와를 만나게 하는 것, 그것이 모세의 역할이다.
그러나 싯딤에서 이스라엘은 음행과 더불어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바알브올)을 알게 된다.
음행을 미끼로 바알브올을 경배하기 위한 자리에 청함을 받는다.
그토록 억압적이며 강력한 처벌 조항을 가졌던 그 율법이 효력을 상실하고야만다.
이러한 때를 노려 다른 신, 우상이 등장한다.
이는 율법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의 바로의 법, 곧 종노릇에서 해방된 그들은 광야에서의 또 다른 법인 하나님의 법을 만난다.
종노릇의 법 아래에서 행사하거나 누려보지 못한 온갖 욕구와 욕망을 더욱 더 억제하는 하나님의 법은 그들에게 또 다른 억압으로 인식된다.
광야40년,
더위와 추위와 주림과 기갈, 온갖 해충과 전쟁에 지치고 시달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법, 율법은 종노릇으로부터 해방되어 맛보고 누려보고자 하였던 인생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 욕구를 죄로 정죄하며 억압하고 간섭하였다.
참았던 그 욕망이 마지막 숙영지였던 싯딤에서 표출된다.
모세의 죽음과 더불어...
음행이란, 먹고 배부름에서 오는 안도감이 주는 가장 억제하기 위한 욕망의 표출이다.
내게서 율법의 기운과 영향력이 쇠퇴하고 감소할 때를 노린다.
모세의 죽음과 장사됨의 때를 기다린다.
그렇게 우상에 대한 인생들의 또 다른 요구는 광야의 싯딤에서부터 율법(모세)의 영향력이 쇠락해져가는 틈을 타 가나안의 길갈까지 진리에 이르기 전, 여호수아(예수)의 인도함을 받기 직전까지 다 왔다는(싯딤), 이제 되었다는(길갈) 안도와 만족에 의해 음행과 더불어 만들어지고 숭배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한 인생들의 욕망의 대상이다. |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
여호와 외의 다른 신을 찾아 음행과 우상숭배가 시작되는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라 함은,
광야, 모세의 법이었던 율법 아래에서 숨죽이고 감추어졌던 욕망이 내게서 율법의 영향력이 그 효력을 상실할 즈음에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가나안 땅, 곧 길갈(안식)까지 이끌어 갈 여호수아(예수)를 만나기 직전까지 육체의 욕망을 채워줄 또 다른 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한 우상이었다.
까닭에, 미가는
광야에서 육체의 욕망(죄)을 짐승에게 덧 씌워 죽은 것처럼 하였던 자들이 그 영향력을 행사했던 모세(율법)가 죽게 되어 장사지낸 즈음에 다시 육체의 욕망이 되살아 나, 율법의 영향력이 쇠퇴한 것(모세의 죽음과 장사)은 여호수아(예수)의 기름부음을 위한 것임을 알지 못하여 죄의 욕망, 자기 욕심을 충족케 할 또 다른 신과 음행, 그리고 만들어냄과 경배, 우상숭배를 경고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