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8:6-11 칼을 칼집에 꽂으라
18: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18: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18: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18: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18: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8: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나?
그들에게는 로마로부터의 해방이지만 하나님은 구원이 그들에게 필요해서 예수님을 보대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거부한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는 로마로부터 해방을 위한 것이기에 강력한 힘을 가진 용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초라하고 힘없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어린 양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0-11절을 중심으로 말씀 나누고자 하는데
이 부분은 사복음서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각기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칼을 도로 집에 꽂으라고 하시면서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고 말씀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천사들을 불러서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붙들려 죽으시는 것은, 그렇게 해서 성경을 응하게 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칼로, 즉 힘으로 세우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 즉 희생과 섬김으로 세워지는 나라임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의 행위에 대해 다른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린 자가 베드로라는 이름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칼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을 책망하실 뿐입니다.
결국 이 말씀이 어떻게 보면 칼과 몽치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과 베드로를 같은 속성을 가진 자로 일치시키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세상의 힘에 의해 죽으셨음을 말함으로써 예수님과 힘을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힘을 가지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며 오히려 힘을 버리는 것이 믿음이며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라는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것까지 참으로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22:51)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다른 장면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누가는 예수님을 용서하시고 치료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신의 대적을 위해 죽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용서하시고 희생과 섬김으로써 고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묘사하는 것이 누가복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에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예수님이 담겨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붙잡혀 죽으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붙들리고 죽으시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요한은 예수님을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순순히 붙잡혀 가시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자신의 힘도 포기하고 그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칼이 있으되 칼집에 칼을 꽂고 사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힘이 있다고, 돈이 있다고,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요즘 복음을 전할 때 돈과 힘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내게는 은과 금은 없지만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역하는 것을 봅니다.
베드로는 과거에는 칼로서 무엇인가를 이루어 보려고 했지만 성령을 받고 난 후에는 이처럼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하지 않았음을 봅니다.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사람, 복음을 전하는 자는 다른 힘이 필요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본문에서 예수님을 칼로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는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칼을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칼로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며 힘을 과시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는 칼이 있으되 칼을 휘두르는 자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칼 자체가 자신의 힘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자로서 세상에서 해야 하는 일이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신령한 것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하늘의 복된 것에 모든 마음을 두십시오.
그럴 때 칼을 원하고 칼을 휘두른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과 어긋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또한 세상 것이 아닌 하늘의 신령한 것을 구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교회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칼을 휘둘러 다른 형제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한 자신도 지지 않기 위해서 칼을 구하는 모습이 보여진다면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모습을 잃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하다는 말씀처럼, 교회가 힘을 추구하면 그 교회는 망하는 교회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외형적으로 거대하다 할지라도 그 심령이 하나님에게서 떠나있다면, 십자가의 정신이 상실되어 있다면 그 교회는 망하는 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쇠약해져 있고 피폐해져 있는 교회라 일컬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신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칼로써 눈 앞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혈기가 아니라 죽는 것임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칼을 빼어서 남을 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칼이 있으되 칼을 칼집에 꽂은 자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길이며 우리를 향하신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