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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1/ 믿음의 실체/히11:1, 말씀:하용조 목사님
이 번주 부터는 히브리서 11장을 통해서 [믿음시리즈]를 설교하려고 합니다.
성경에 있는 단어 중에서 아주 특이한 단어가 [믿음]입니다.
그럼,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한가지 방법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즉, 이성이나 지성, 그리고 합리성이나 경험등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런 방법을 동원하지만, 사물은 알수 있어도 하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있어서 [믿음]은 신앙의 기본이고, 핵심역할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어 그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2:8)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이 [은혜]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을 갖게 하지만, 은혜는 [믿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
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인데,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이라고 다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가 믿는 믿음이 가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은 내 머리나 나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믿음]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자기 것을 개발하는 것이 많이 있는데, 모두 다 가짜입니다.
그것이 가짜인 것은 [참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은 아주 비슷합니다.
내 생각과 내 지식, 그리고 내 신념에서 나온 것은 [진짜 믿음]이 아닙니다.
[진짜 믿음]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믿음이어야 [진짜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나온 믿음이 [진짜 믿음]이고, 이런 [믿음]이 능력이 있
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능력과 내 지성에서 나온 것은 인간의 믿음이기 때문에 아무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내 믿음의 강도는 [순도 몇퍼센트]가 포함된 [믿음]일까요?
우리의 믿음이 순도 100%의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자주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확신]입니다.
우리는 믿기는 믿는데, 적당히 믿으니까 낭패를 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 17절에서 22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배가 고파하던 차에, 마침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았습니다. 가까이 가
서 보니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다시는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니, 나무가 곧 말라 버렸습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놀라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으니, 예수님은 "내가 분명히 말하
지만, 너희가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내가 그 무화과 나무에게 한 일을 너희도 할 수 있
다. 그 뿐만아니라 <이 산을 향하여 땅에서 들려 바다에 빠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
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을 것이다."(마21:17~22)
이 말씀은 열매가 없는 사람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을 우리는 이해 할 수 없지만, 믿음의 순도가 100%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
가 되는 거예요.
이 말씀은 하용조 목사의 얘기가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즉, "믿음의 순도가 100%이면 아무것도 않해도 기적이 일어나고, 믿음의 순도가 50%
이면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런 기적도 일어 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성도여러분
설교를 들을 때에는 은혜스러운데, 왜 우리는 자꾸 당황하나요?
그것은 내 믿음이 [가짜 믿음]이기 때문이예요. 겉으로는 믿는 것 같은데, 진짜로는
의심하며 믿지 않는 거예요.
우리는성경을 읽으면서 100%믿지 않고, 좀 의심하면서 믿는 버릇이 있어요.
그것은 우리가 믿음 안에 사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불신앙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병을 고쳐 주면서 그냥 병을 고치시지 않고, 반드시 상대편의 믿음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고 반드시 되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내가 네 병을 고쳐줄 수 있다고 믿느냐?”라고 믿음을 확인하신 후에
야, “네 믿음 대로 될지어다”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내 믿음= 예수님의 믿음>이 아니고, <네 믿음= 병든 사람의 믿음>입니다.
둘째로,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찌라도 "긍정적인 생각과 희망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
다"는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능력을 베푸실 때에 자신의 능력만 쓰지 않고, 상대편의 능력(= 네
능력)도 원하셨습니다.
그럼, 오늘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장 1절을 보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이 말씀에 <믿음>에 대한 두가지 설명이 나옵니다.
첫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믿음>은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앞으로 이루어질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고, 미완성된 것을 얘기합니다.
<믿음>은 이미 자신이 소유한 것이 아니고, 앞으로 소유 할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우리의 미래는 아직 아무도 가 본 사람이 없어요.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내 생각이 <내 미래>를 막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땅은 아직 한사람도 그곳에 가보지 못한 처녀지입니다.
<믿음>의 땅은 미래에 내가 가 보아야 할 장소입니다.
두 번째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계란을 쳐다 보면서 “병아리의 울음소리를 들을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의 예에 불가하지만,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이것은 느끼지 못했어도 느껴야 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네가 나를 본 고로 믿느냐?"라고 물으면서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더
복 되다”고 했어요.
여러분? 천국을 가보신 분이 있으세요?
여기에 계신 어느 누구도 천국을 가보신 분은 없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왜? 우리는 믿을 수 있나요?
그것은 보지는 않했지만, 여러 가지 증거를 보아서 느낄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바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이기 때문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지혜로운 과학자들은 망원경과 현미경을 사용합니다.
이것을 이용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육안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었지요.
천체 망원경을 이용해서 육안으로 보지 못하는 별들을 보고 있고요.
또 아주 가까운 초미립자의 현미경을 개발하여 미생물을 보면서 연구를 하지요.
미생물의 세계를 아십니까?
사람들이 모르는 어마 어마한 무한한 세계가 있지만, 우리들은 잘 모르고 지내요.
식물과 동물의 세계도 우리가 모르는 신비한 세계가 있어요.
이렇게 어마 어마하게 광활한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아는 것은 [믿음]뿐이예요.
그래서 <믿음 >이란 안 보이는 것을 보고, 보지 못하는 미래를 예측하는 거예요.
이렇게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느끼게 하는 것과 같
이, <믿음>은 가질수 없는 것들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믿음이 있는사람>을 일반사람들이 보면, 약간 “미쳤다”고 얘기 하기도 하고,, 좀
황당한 사람 같이 행동 하기도 해요. 그래서 순교도 할수 있는 거예요 .
<믿음>으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으며,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천지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한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이것을 <이성>으로 판단하여 아는게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 드리십시오!
<믿음>은 천지창조를 믿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창세기1장 1절은 <믿음>의 시작이지요.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을 믿으면, 성경 전체를 다 믿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 가면서 이성으로 살아야 하지만, 이성을 넘어서서 <믿음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믿음>의 세계는 상식을 초월합니다.
이런 <믿음>의 세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미래가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길을 흔들림 없이 계속 가는 거예요.
성경는 여러분들이 그 길을 묵묵히 갈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 하십시오! 그리고 그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믿음2/ 아벨과 에녹의 믿음/히11: 4~6, 말씀:하용조 목사님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성경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믿음에도 [진짜믿음]과 [가짜믿음]이 있습니다.
[가짜믿음]은 나로부터 나온 믿음이고, [진짜믿음]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믿음을 말합니다.
이 두가지 믿음은 90% 이상 서로 비슷해서 혼동이 생기고, [가짜]를 [진짜]로 우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믿음의 열매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 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절을 보십시오.
"옛날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히11:2)
믿음의 보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게 인정받는것]입니다.
남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조직의 보스에게서 인정받는 사람이나, 선생님으로 부터 인정받는 학생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럼, [인정]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거절]입니다.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바로 [거절]입니다.
그래서 [거절]은 상처중에서 가장 큰 상처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압니다."(히11:3)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을 어찌 인간이 그 크고, 위대함을 알수 있겠어요?
천지창조는 [믿음]으로 밖에 알수 없어요.
오늘은, 아벨과 에녹을 통해서 두 사람의 [믿음]을 비교하며 공부를 하겠습니다.
첫째는, [아벨의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 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로써 <그는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에 대해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믿음으로 여전히 말하고 있습니다."(히11:4)
이 말씀은 <아벨과 가인의 이야기> 입니다.
[아벨의 믿음]이 4절에 나오고, [에녹의 믿음]이 5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믿음으로 드린 제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그를 <의로
운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창세기를 읽다보면 약간 당황스러운 대목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은 아벨을 축복했을까요?
아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셨고, 가인의 믿음은 왜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셨을까요?
우리가 성경을 그냥 읽어내려 가면,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지나가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성경의 말씀
중에서 보석같은 내용이 발견됩니다.
2절에서 [믿음의 축복]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라고 배웠어요.
그럼, 어떻게 인정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너는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여 너를 의인으로 삼았다" 는 거예요.
성도 여러분!
"믿음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믿음의 핵심은 과연 무엇입니까?
[믿음]은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맨 처음 우리에게 가르쳐 준 사람이 [아벨]이예요.
그렇지만,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아들이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을까요?
창세기 4장 1~8절을 보면, "아담의 아내 이브가 가인을 낳고(큰 아들), 그후에 아벨을 낳았는데(둘째 아들),
<아벨은 양치는 목자이고, 가인은 농사 짓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가인은 추수하여 농산물을 예물로 드렸고, 아벨은 자기 집에 있는 양을 잡아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벨이 드린 제사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랬을까요?
첫째로, 두 사람의 직업에는 귀천이 없어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직업이 양을 치는 목축업이든, 농사를 짓는 농부이든 상관이 없어요.
직업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준은 "누가 올바른 제사를 드렸느냐?"에 비중을 둔 것입니다.
둘째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고, 제사를 받는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달린 것입니다. 제사드리는 사람의 옷이 "무슨 옷을 입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제사를 받는 하나님의 목적이 중요해요.
하나님이 제사를 받는 목적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제사를 받는 거예요.
아벨은 <어린 양의 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 거예요.
즉,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는 어린 양의 피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벨은 하나님의 요구에 맞게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모르고 곡물을 제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제사는 [우상]이고,
하나님이 원하는 제사가 [믿음]이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물만이 제사의 전부가 아닙니다.
제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제물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헌신하는 사람의 [자세]가 중요한 거예요.
우리도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알고, 그렇게 [헌신]해야 해요.
성도여러분! 사회생활을 너무 바쁘게 하다보면, 교회에 오지 못해요.
교회에 오기 위해 어떤 때는 친구도 버려야 하고, 사업의 일부를 포기해야 할 때도 있어요.
여기에 나오는 아벨은 [믿음]도 있지만, 순종도 있는 [의로운 사람]이예요.
그러나 반대로 가인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 생각으로 가인은 제 멋대로, 제 맘대로 살았던 사람 같아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제사를 받지 않는 거예요.
4절에 나오는 [더 나은 제사]는 어떤 제사일까요?
피를 뿌리고, 제물을 드렸기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거예요.
이와같이 [믿음]은 아벨이 죽었어도 계속해서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은 돌아가신 우리 부모님이 예전에 하던 그 기도가 <살아서 전해 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4절에 "믿음은 대대로 이어지고 말을 한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믿음은 대대로 계승하고>, 아벨을 통해서 <믿음은 의롭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럼, 두번째로 [에녹의 믿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고 인정을 받았어요.
히브리서 11장 5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에녹은 죽지않고, 하늘로 들림받아 옮겨갔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들려가지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히11:5)
하나님은 에녹을 죽이지 않고, 하늘로 들림받아 올라가게 하셨는데, ( = 이것이 휴거)
그 이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이 여러분을 의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부터 칭찬을 받는 믿음이 있어야 해요.
믿음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사실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녹을 사용할 때 <그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라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당신을 인정 하고 계십니까? 이 물음에 자신있게 대답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에녹은 어떻게 인정을 받았습니까? 그 대답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동행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동행]이라는 말은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동행]은 "함께 같이 있다"는 말로, "언제나 같이 생활하고, 같이 대화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안에,그가 내 안에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에녹은 3년동안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했어요.
그러면 그렇게 함께 있는 기간동안에 그에게 어둠이 있었을까요? 행복이 있었을까요?
에녹에게는 언제나 행복만 있었을 거예요.
이게 [동행]이예요.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나와 함께 먹고 마시는 [영적교제]가 매일 매일 나에게 일어나야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예요.
어떤 목사님이 예화를 하나 들었는데, 들어 보세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하고 길을 떠나고 있었는데, 해가 뜰때부터 해가 질때까지 걷고 있었어요.
매우 친밀한 교제로 한 300년쯤 지났는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 때가 어디쯤 와 있을까?" 생각해 보니,
<내 집보다 하늘이 더 가까이 있었다>고 표현했어요.
이것은 그만큼 하나님하고 오래동안 동행을 하다보니, <하늘 끝까지 왔다>는 의미이지요.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았고, 그냥 하늘로 들림 받았어요.
우리들도 <내가 애쓴다>고, 하나님한테 가지 않아요.
내가 들림받으려면 <하나님이 나를 끌고 올라가야 해요>.( = 이게 휴거예요)
우리는 신비스런 이런 [동행의 비밀]을 알아야 해요.
우리는 이런 신비스런 사건을 꿈꾸며, 사모하고, 생각해야 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벨의 믿음과 에녹의 믿음이 여러분의 믿음으로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3/노아의 믿음/히11:7, 말씀:하용조 목사님
<믿음>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는데, 3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1. 첫째로,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에 카메라에 필름을 넣고 찍게 됩니다.
그러면 사물은 찍은대로 영상이 맺혀서 나옵니다.
그러나 필림이 없다면 아무 것도 영상이 맺히지 않습니다.
<믿음>은 바로 이와같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기대하고, 내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 그 자체이고 그 실체입니다.
어떤 물체에 빛이 닿으면, 그대로 <실상이 맺히듯이> 찍혀 나옵니다.
그런데 만약에 필림없이 찍었다면, 아무런 상이 맺히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소용없는 짓(행동)을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은 필림과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은 실상입니다.
2. 두 번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부동산을 사고 팔 때에 계약서를 쓰고서, 땅문서( = 등기권리증)를 받습니다. 이 땅문서 하나만 있으면, 그 땅은 [내 땅]이 됩니다.
아무리 힘이 쎈 사람이라도 자기가 산 땅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땅문서 하나만 손에 쥐면, 그 땅 전체를 내가 산 것과 같은 이치지요.
이것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그 <증거>입니다.
이렇게 쉽게 설명을 해도 이해가 안가십니까?
그러면 또 다른 세 번째 예를 하나 더 들지요.
3. 은행에 가면 현금을 수표로 바꿀 수 있어요.
<믿음>은 은행에서 발행하는 수표와 같은 것입니다.
현금 1억이 들어있는 상자를 힘들게 움직이면서 들고 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수표 1장만 들고 다니면, 바로 현금 1억을 들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돈=수표1장]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즉, 1억원 짜리 수표 1장이 곧 현금 1억 이란 생각을 하지요.
두 번째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라고 했어요.
믿음이 좋은 사람은 계란을 쳐다 보면서 “병아리의 울음소리를 들을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느끼지 못했어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네가 나를 본 고로 믿느냐?"라고 도마에게 말했을 때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더 복 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천국을 가 보신 분이 있으세요?
여기에 계신 누구도 천국을 가 보신 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왜? 믿을 수 있나요?
그것은 보지는 못했지만, 여러 가지 증거들을 보아서 느낄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바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이기 때문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지혜로운 과학자들은 망원경과 현미경을 사용합니다.
이것을 이용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육안으로 볼 수 있도록 하지요.
천체 망원경을 이용해서 육안으로 보지 못하는 별들을 보고 있고요.
또 아주 가까운 초미립자의 현미경을 개발하여 미생물을 보면서 연구를 하지요.
그래서 <믿음 >이란 안 보이는 것을 보고, 보지 못하는 미래를 예측하는 거예요.
이렇게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느끼게 하는 것과 같
이, <믿음>은 가질수 없는 것들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일반 사람하고 달라요.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요.
다시말해서 <믿음이 있는사람>을 일반사람들이 보면, 약간 “미쳤다”고 얘기 하기도 하고, 좀 황
당한 사람 같이 행동 하기도 해요. 그래서 순교도 할수 있는 거예요 .
세 번째로, <믿음>은 나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갖게 된것이 아니라, 선조들에 의해 계승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절을 보면,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2)
<믿음>은 믿음의 조상들에 의해 검증된 것입니다.
<믿음>은 역사적인 맥락을 갖고 있습니다. 구약을 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나옵니다.
이들은 일생동안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았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들은 감옥에 들어가도, 아
기를 낳지 못해도, 땅을 빼앗겨도, <하나님께서 약속한 말씀을 신실하게 이어 간다>고 믿었습니
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삭을 통해서 전해지며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다니엘은 불속에 들어가도 그 믿음을 지켰고, 요셉은 감옥에서도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황당한 사건들이 아니고, 현실로 그런 일들이 실제로 있었고,
우리의 믿음은 이런 조상들의 믿음을 통해서 사실로 전해 내려오며 계승된 것입니다.
오늘은 믿음의 조상중에서 [노아의 믿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경고를 받고, 자기 집안의 구원을 위해 경외함으로 방주를 지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은 세상을 단죄했습니다. 또한 그는 믿음으로 인해 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히11:7)
노아는 어떤 사람입니까?
"노아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창세기를 되집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이 온통 죄악으로 가득차 있어서 세상을 보면서 후회 하셨습니다. 그렇게 괴로워 하시는 하나님은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작정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의도를 의로운 노아에게 미리 알려주시고, 노아와 그 가족들이 구원을 받도록 “방주를 예비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창6:5~22)
또한 그는 모든 종류의 동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각각 한 쌍씩 방주에 태우라"는 지시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방주를 지었고, 그 후에 대 홍수가 나서 그의 가족과 동물들이 모두 그 속으로 안전하게 대피했습니다.
홍수가 끝난후, 방주가 아라랏산에 정박하자 노아와 가족과 동물들은 모두 안전하게 살아났습니다.
노아는 홍수에서 구원해 주심에 감사하여 즉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그 응답으로 “다시는 사람때문에 땅을 저주하거나 생물들을 전멸시키지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8:20~22)
이 새 언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과 "모든 동물을 지배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노아와 그 후손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창세기 6장 9절을 보면 “노아는 의로운 사람으로 당대에 완전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창6:9)
여기를 보면,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그런 노아에게 하나님은 “산꼭대기에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방주의 용도는 항해용이 아니라, 그냥 물에 떠 있는 용도입니다.
방주의 히브리어 어원은 <궤짝이나 상자를 뜻한다>고 합니다.
방주의 규모는 대략 길이가 135m이고, 넓이가 22m, 높이가 13.4m로 "보통 3층 건물
의 높이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런 방주를 짓는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일 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노아가 “125년 동안 방주를 만들고, 기다렸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성도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산으로 가라”고 말씀 하십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산은 [하나님의 산]입니다.
모새가 시내산에 올라가는 것이나, 엘리야가 호렙산에 올라가는 것이
모두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모습이 아닙니다.
"애굽사람들은 우상을 만들어서 절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들은 그 문화를 뛰어 넘어 산으로 올
라가야 합니다.
산으로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왜? 산으로 갈까요? 방주를 만들기 위해서 가지요.
여기서 방주는 무엇입니까? 방주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영적인 체험]을 시키기 위해서 "산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산으로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높은 산에 오르라"는 명령은 공간적으로 높이 있는 산이 아니고,
<영적인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방주의 길이만 해도 135m 로 큰 배인데, 문은 단 1개 뿐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기 위해 잣나무를 깎고, 그 나무를 산 꼭대기 까지 올려야 했습니다.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낮은 곳에서만 삽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암수 한쌍씩 동물을 방주안으로 들여 보내고 그 씨를 보존하라"고 했어요.
배의 안팎은 역청으로 칠하여, 물이 새어 들어오지 않도록 했어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노아는 상식과 지식을 뛰어 넘어, 120년 동안 기다렸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렇게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천지창조를 믿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창세기1장 1절은 <믿음>의 시작이지요.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을 믿으면, 성경 전체를 다 믿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 가면서 이성으로 살아야 하지만, 이성을 넘어서서 <믿음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믿음>의 세계는 상식을 초월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미래가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길을 흔들림 없이 계속 가는 거예요.
성경는 여러분들이 그 길을 묵묵히 갈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시간이 올 것인데, 우리도 노아처럼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이 있습니까?
그런 복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신뢰 하십시오! 그리고 그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믿음4/아브라함의 믿음/히11:8-12/말씀:하용조 목사님
오늘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공부합시다.
8절을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해 장차 유업으로 받을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히11:8)
8절에서 12절까지 5가지 사실이 나타납니다.
그는 순종으로 장차 유업으로 받을 곳으로 나아갔지만, 그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역시 조건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집밖으로 나가라고 하니까 일단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을 통해 보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1. 첫째, [믿음]은 <가라고 할 때,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노아의 믿음과 비슷합니다.
<방주를 지으라>고 하니 무조건 산꼭대기에 방주를 짓고, 수많은 세월을 사람들의 비난의 소리를 들어가면서 순종한 사람이 노아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믿음은 <부름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이 부르면 대답하셔야 합니다. <못들은 척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설교 가운데, 기도 가운데, 성경을 읽는 가운데 [찔림]을 주십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에 어떤 사람이 "누가 내 얘기를 목사님에게 다 일러 바쳤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특정한 누구를 두고 설교하거나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성령의 감동>이 되니까, 설교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인간이 하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에 토를 달지 마십시오.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냥 받아 들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축복이 됩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아브라함이 떠나야 할 곳은 <어떤 곳>입니까?
부모와 친척들이 사는 익숙하고 편안한 고향이 아닙니다.
방향도 모르지만, 그냥 믿음으로 <떠나서 가는> 것입니다.
내가 잘 아는 곳이나, 내가 익숙한 곳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곳으로 떠나야 믿음은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여러분이 잘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나님을 부를 이유가 없습니다.
그 때에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이 지시하는 <미지의 곳>으로 가십시오. 믿음은 이런 의미에서 순종입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모험이고, 도전이고, 시험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있듯이,
그들의 얼굴에는 도전의식과 모험의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2. 둘째, [믿음]은 외국에서 <나그네처럼 사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약속의 땅에서 다른 나라에 사는 이방 사람처럼 잠시 머물렀는데 그는 동일한 약속을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했습니다.” (히11:9)
[믿음]은 벽돌집이 아니라, 장막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걷고 떠나는 것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왕국을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가볍게 떠날 수 있도록, 그저 하룻밤 자고 떠나는 나그네처럼, 내가 지니고 다니는 개나리 봇짐을 가볍게 만들어야 합니다.
금은보화와 세상의 것으로 무장하면, 나는 떠나지 못합니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다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여러분, 집에 불이 나면, 뭐부터 가지고 나가겠습니까? 장롱을 들고 가겠습니까?
그런 것들은 다 불타게 나둬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 그것을 딱 붙잡고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믿음의 생활]이라는 것은 내가 익숙한 곳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외국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외국에서 10년, 20년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하면서 살아도 외국은 어차피 남의 나라입니다.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선교사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최초로 이방인으로 사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천국에 계시다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을 때 에수님은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곳도 머무르지 않고, 공생애동안 계속해서 움직이셨습니다.
“내가 여기 살고 싶다”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목적 지향적인 삶>을 사신 사람이었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대로 사셨습니다.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외롭고 처량하고 고독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익숙한 고향의 땅, 친척들이 사는 땅, 가족들이 사는 땅을 떠나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믿음은 여행입니다. 땅도 다르고 사람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곳으로의 여행입니다.
그렇지만 그 땅은 약속의 땅이요, 축복의 땅이요, <하나님이 지시한 땅>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방인들이 다 살고 있는 <그런 땅>으로 갔습니다. 처음에는 불안했을 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 불안함 가운데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발견하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이방나라 땅, 내일 죽을지 모르는 그런 불편한 땅에 살면서도 <마음에 평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3. 셋째, [믿음]은 <약속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친히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견고한 터 위에 세워진 도시를 고대했기 때문입니다.”(10절)
믿음은 막연한 것 같지만 막연하지 않고, 맹목적인 것 같지만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약속이요, 미래요, 축복입니다.
현재는 내 손에 아무 것도 쥔 것이 없지만, 믿음으로 나가면 약속은 성취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고 나가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다면 희망도 없고, 꿈도 없고, 미래도 없고, 비전도 없는 것입니다.
절망과 고독과 외로움뿐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인생의 허무함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이 없다는 것은 <알맹이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4. 넷째, 아브라함의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믿음>입니다.
11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비록 그 자신이 너무 늙고 사라도 단산됐지만, 임신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이는 그가 약속하신 분을 신실한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히11:11)
믿음은 언제나 불가능 앞에 휩싸여 있으며, 믿음은 절망의 한복판에 존재합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이고, 사라는 경수가 끊어진 90세인데, 어떻게 임신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왜 여기까지 그들을 끌고 오셨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절대로 아기를 못 낳는다>라고 말하고, 사라 자신도 <이제는 포기하자>라고 하는 나이,
즉 <자타가 불가능을 인정하는 때까지> 하나님이 끌고 가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포기하고, <완전히 불가능>이라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이 [일]을 하십니다.
이삭을 낳았을 때,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의 능력이 좋아서>입니까? 아니면, <사라의 건강이 좋아서 낳았다>고 했겠습니까?
둘 다 모두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아이를 특별히 주신 이유가 있다>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수많은 남자 중 한 사람인 내 아버지와 수많은 여자 중 한 사람인 내 어머니가 만나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나는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입니다. 나는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독특하고 변할 수 없는, 바꿀 수 없는 [미션]이 있는 것입니다.
<약속이 있는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약속이 있다면, 죽은 사람이라도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만 입이 내게 있어도 하나님의 하신 일들 어찌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약속과 축복들을 어찌 다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새해에는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5/믿음을 따라간 사람/히11:13~16/ 말씀:하용조 목사님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가지고, 험한 세상에 나가서 사는데, [힘]으로 작용합니다.
지난 번에 제가 [믿음 씨리즈]를 진행하면서 잠시 중단했던 설교를 계속하겠습니다.
우선 히브리서 8절~11절까지의 말씀을 기억하는 뜻으로 다시 한번 복습을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4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1. 믿음은 가라고 할 때 가는 <순종>입니다. (8절)
아브라함은 순종하면서 장차 유업을 받을 곳으로 갔지만, 그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조건 없는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고, 순종을 해야 진짜 <믿음>인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해 장차 유업으로 받을 곳으로 나아 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히11:8)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동안 했어도 나에게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진짜 믿음이 있으면 절망에서 희망이 보이고, 갈등에서 화해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돈이나 부유한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나 혼자서 가질래야 가질 수 없어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내가 믿음을 가지려고 한다"고 가질수 있는게 아니예요.
우리가 예수를 믿다보면, 자연히 <믿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거기에서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믿음>은 지식으로 이해하지 말고, 어린아이가 성장하는 생명력으로 이해해야 돼요.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에서 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아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의 마음 밭에 믿음의 씨앗이 뿌려져요.
아브라함이 “갈대아의 우르를 떠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이 한 행동은 <순종>입니다.
누구나 내고향, 내친척, 내 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을 떠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완벽한 믿음>은 처음부터 생기지 않아요.
어린 아이가 처음에는 말을 잘하지 못하더라도, 점점 자라면서 말을 배워서 말을 하듯이,
<믿음>은 그와 같이 점점 자라나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을 가지다 보면, 믿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괘도 수정>이 되어서,
드디어 나중에는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점점 같아 지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믿음에는 <부름의 응답>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부르면, 즉시 응답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다가, 아니면 설교를 듣다가 내 마음에 감동이 오면, 그때 바로 <행동>해야 합니다.
<믿음>에는 ”부르심의 약속이 있다“는 거예요.
<믿음>에는 조건 없는 약속이 있는데, 그 약속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장차 유업으로 얻게 될 약속을 말합니다.
2. 믿음은 외국에서 사는 <나그네와 같은 삶>입니다. (9절)
믿음은 편안한 집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떠나는 <나그네와 같은 삶>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영원히 살 것 같이 왕국을 만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저 하룻밤을 자고 떠나는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9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그는 약속의 땅에서 다른 나라에 사는 이방인 처럼 잠시 머물렀는데, 그는 동일한 약속을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했습니다”(히11:9)
<믿음>은 같은 동료끼리만 사는게 아니고, 이방인과 나그네 처럼 사는게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외국인과 같이,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같이 사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갈대아의 우르를 떠나서 천국으로 간 것이 아니고, 가나안에서 믿음의 삶을 살았어요.
<약속의 땅>에 가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섞여서 살아야 해요.
그러나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교회에서 다니면, 금방 천국으로 들어가서 사는 줄로 알아요.
물론 죽으면 천국으로 가지만, 그 전에 살아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가는 거예요.
교회에 다니더라도 <약속의 땅>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안다니는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하고,
외국인과 같이, 또는 나그네와 같이,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해요.
이런 사실을 미리 알고 있으면, 험한 세상에 살 때에도 <험한 세상 탓>을 하지 않아요.
3. 믿음은 <약속을 받는 것>입니다. (10절)
믿음은 막연한 것 같지만 막연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따라 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결국, 믿음은 <약속>이고, 믿음은 <미래의 축복>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친히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견고한 터 위에 세워진 도시를 고대했기 때문입니다”(히11:10)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설계한 도시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찬의 삶은 예수를 믿으면 죽어서 천국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 마음 속에서 천국을 이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환경이 갑자기 바뀌는 것이 아니예요.
[믿음의 삶]이라는 것은 <예수 믿으면 내 마음이 천국이 되는 것>이지,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이 내 빚을 갚아 준다" 고 믿거나,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이 나의 어려움을 즉시 해결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돼요.
<믿음>은 견고한 터 위에 세워진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는 것을 믿고,
<내 마음 속에 천국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해요.
이런 <새하늘과 새 땅>은 우리가 죽으면 갈수 있는 <하늘나라가 있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즐거워 하는 거예요.
4.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해 줍니다. (11절)
세상사람이 다 이해하지 못해도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비록 그 자신이 너무 늙고, 사라도 단산 됐지만, 임신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이는 그가 약속하신 분을 신실한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히11:11)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불가능이 없어요.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가 되어도 “하나님이 준다”고 했으면, 반드시 주십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그 [약속]을 100살까지 끌고 갔을까요?
그것은 일찍 아이를 주었으면, “아브라함 자신이 낳았다”고 생각을 하지만,
100살이 되어서 주니까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원리를 깨달음으로, 하나님이 바라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원리를 진작에, 얼른 깨달으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하고, 일을 당해야 알게 되고, 어리석어서 맞아야 알게 되지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당황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깨닫게 하시려고 이런 시련과 어려움을 주시는 구나!”라고 생각하세요.
그런 어려움이 닥치면 이번 기회에 “하나님이 나에게 믿음을 요구하시는 구나!”
아니면, “하나님이 나에게 믿음으로 이끄시는 구나!” 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100세까지 자식이 없었으므로 아브라함은 더욱 더 초조해 졌지요.
아브라함에게 아이는 없고, <축복은 주겠다>고 했는데, <그럼 누구를 보고 축복을 전수 시키느냐?>를 가지고 아브라함은 고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내 당대에는 물론이고, "내 자식에게도 그 약속이 이루어 지도록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는 메세지이고, 교훈입니다.
성도여러분?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복습했구요, 오늘은 그 다음에 나오는 13절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 모든 사람들은 믿음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 못했지만,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으며, 세상에서는 외국사람이며 나그네임을 고백했습니다.(히11:13)
<믿음>은 현재를 보고 사는게 아니고,
<믿음>은 미래를 보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사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은 죽을 때까지 이루어 지지 읺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당대가 아니더라도, 그 자손에게 까지도 그 약속을 이루게 하십니다.
학문은 이성과 합리성으로 이루어 지지만, 그런 학문과 이성은 우리가 받아 드리고 있지만,
그렇다고 학문은 기적을 만들어 내지는 못해요.
그러나 <믿음>으로 얘기하면 사람들이 못 알아 듣지만, <믿음>은 기적을 만들어 내요.
<신앙>이란 가장 비 합리적인 것 같지만,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기적을 만들어 내요.
<이성>은 합리적인 것 같지만, 이성으로는 희망도, 기적도, 변화도, 일어나지 못해요.
<이성>은 인간을 이해시키는데 좋지만, <믿음>은 하나님을 이해시키는데 좋아요.
우리가 몰라서 못하나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비전>이 없기 때문이지요.
저에게 어떤 사람이 그림 하나를 주었어요.
몽골의 선교사의 그림인데, 몰아치는 사막의 흣뿌연한 먼지 속에서 <노인 한 분이 멀리서 무엇인가를 응시하며 쳐다보고 있는 그림> 이었어요.
그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저 <본향>을 멀리서 바라보듯이.......
비 바람이 몰아치고, 가뭄이 심한, 풀 한포기 없는 맨땅에서 한 노인이 멀리 무엇인가를 바라보며...
미래의 비젼을 기대하며.... 무엇인가를 끝없이 쳐다보고 있어요.
그 노인의 마음 속에는 무슨 생각을 할까요?
그러나 거기서 <희망>을 본다면...., 그 노인의 마음 속에 <미래>를 본다면.....
거기에는 포기하지 않고...., 일어날 수 있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을 꺼예요.
14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 <본향을 찾는 사람들>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히11:14)
믿음의 사람들은 [본향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본향>이란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말합니다.
사할린의 우리 동포들은 고향을 보라보며 “언제나 고국에서 우리를 불러주나!”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고향은 <생각 속의 고향>이지, 가 보면 별거 없어요.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고향은 천국에 따로 마련되어 있어요.
CGN TV에서 <철새와 텃새>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어요.
<철새>는 계절을 따라 옮겨 다니는 새를 말하고,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남쪽 나라로 이동을 하고, 계절이 바뀌면 다시 고향으로 이동하는 새입니다.
그러나 구만리 먼 거리를 떼를 지어 나르는 피나는 고통을 싫어 하거나, 철새가 사고로 나르지 못하면,
그저 그 땅에 주저 앉아서 살게 되면, 그것이 바로 <텃새가 된다>고 해요.
힘들어도 <본향>을 향하여 떠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을 향하여 수만리 먼 땅을 찾아가는 것이 <믿음> 이예요.
15절을 보십시오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히11:15)
병들어 죽던지, 교통사고로 죽던지, 우리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음은 무엇입니까? <죽음>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죽는 건 <내 육체>가 죽는 것이고, 그러나 <내 영혼>은 죽는게 아니예요.
우리는 흔히들 “이 세상은 지옥과 같다”고 자기가 말해요.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구원은 천국으로 가기 위한 방법이지요.
그러므로 살아 생전에 회개를 못하면, 죽고 나서는 회개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숨을 쉬고 있을 때에 회개하세요.
천국과 지옥은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왔다갔다 하는게 아니예요.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죽는 순간에 천사들이 나타나서 심판대에 서게 되고, 그 때에 천국과 지옥이 결정돼요.
<천국>은 예수믿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고, <지옥>은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죽는 순간에 <천국>에 가시기 바랍니다.
내가 살아있던 [영]이 하늘로 올라가면, <천국>으로 가는 것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으면, <지옥>으로 가는 거예요.
여러분? 천국에 가면, "3가지를 보고 놀란다"고 해요.
첫째, 어떻게 저 사람이 천국에 왔는가?
둘째, 아니! 그 사람이 왜 안보이느냐?
셋째, 내가 천국에 와 있는 것을 보고 "스스로 놀란다"고 합니다.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이지 못해요. 그러므로 더 낳은 <본향>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 들은 이제 더 나은 곳을 사모하는데 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한 도시를 예비하셨습니다”(히11:16)
이것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준 <믿음>입니다.
이것을 묵상하면, 내가 가야할 곳, 내 <본향>이 더욱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새로운 <믿음>을 가지십시오.
우리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갖고, 날마다 내 마음 속에 <천국>을 이루며 사시기 바랍니다.
믿음6/ 죽은 자를 살리는 믿음/ 히11:17~22, 말씀:하용조 목사님
우리는 오래동안 교회에 다니고, 봉사도 하고, 성경도 읽고, 주일예배도 빠지지 않고, 선하고 착하게 살지만, 이상하게도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평소에는 믿음이 있는것 같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평소에 <믿음>에 대해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심도 깊고, 믿음도 있는데, 평소에 불안과 회의를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음]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의 오해]는 자기만의 생각과 율법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오해]는 자기 내면에 두꺼운 벽이 생겨서 율법적인 생활이 습관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오해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믿음은 내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믿음은 종교적인 활동의 결과가 아니고, 하나님이 공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종교적인 활동의 결과가 아니고, 하나님이 거져 주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내가 가지려고 노력한다”고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 율법적인 생각을 가지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자라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나로 부터 만들어진 믿음 = 즉, <내가 만든 믿음>에 무슨 생명력이 있겠습니까?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기적도 일어나지 않고, 성장도 없기에, 자라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에 말씀이 들어가면, 그 믿음은 성장하고 쑥쑥 자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에 감사하고, 그런 믿음을 가진다면 <하나님이 성장을 시켜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만 가졌다”고 다 해결됩니까? 그건 아니예요.
그렇다면, [믿음]과 [믿음의 행위]는 무슨 관계가 있나요?
이런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에 "죽은 나무와 살아있는 나무가 있다“고 가정해 보세요.
죽은 나무에 <물은 주고, 관리한다>고 성장을 합니까? 아니예요.
그러나 살아있는 나무에 물을 주고, 가지를 쳐주고, 거름을 주면, 점점 더 성장을 하여, 내가 믿는 그 믿음대로 나중에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나무 중에서 살아있는 나무가 <하나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집을 지어서 입주하게 되었다면, 새로운 집에 들어가서 청소하고 관리하는 책임은 <우리가 해야 할 몫>입니다.
하나님이 “새 집을 주었다”고 해도, 그 집을 잘 청소하고 관리하지 않고 비워두면, 그 집은 폐가와 같이 변합니다.
이와같이 그 집을 잘 관리하려는 마음이 [믿음의 행위]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할 때 봉사하는 그 자체가 믿음이 아니고, 믿음이 있으니까 봉사하는 거예요.
그런 믿음이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믿음>인 거예요.
그렇게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얼굴에서 빛이나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믿음씨리즈 3번째 시간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무엇입니까?
1. 첫째는, 하나님은 이삭을 선물로 주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아들을 “다시 돌려 달라”고 합니다.
그것도 내가 가장 아끼는 소중한 것을 “되돌려 달라”고 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때에 말할 수 없는 고민과 갈등을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도 오랫동안 고민을 했을꺼예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기꺼이 바치려 했다”고 했어요.
17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때 이삭을 바쳤습니다. 그는 약속들을 받은 사람이면서도 자기 외아들을 기꺼이 바치려 했습니다.”(히11:17)
우리가 믿음을 지키려고 해도 시험을 받습니다.
믿음이 위기에 부딪쳤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어려운 시련입니다.
쇠붙이를 불속에 넣어서 녹이고, 담금질을 하고, 연단하는 것은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바라는 순수한 것으로 정제 되는 것입니다.
그냥 쇠붙이를 녹여봐야 아무소용이 없어요.
쇠떵이를 불에 넣고, 풀무질로 녹이고, 연산을 시켜서 도구로 만들어야 쓸모가 있는 유용한 물건이 되는 거예요.
그럴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쇠를 <무자비하게 두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쇠떵이는 무자비하게 얻어 맞아야 모든 불순물이 빠지는 거예요.
그것은 쇠붙이가 겪어야 하는 <시련>입니다.
그런 시련을 겪고 나서야 제대로된 물건이 나오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시련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가장 소중하고 <귀중한 것을 달라>고 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00살이 되어 어렵게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했어요.
이런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얼마나 갈등을 했을까요?, 아니면 그냥 선뜻 응했을까요?
제 생각으로는 아브라함도 인간인지라 심하게 갈등했을꺼예요.
<아들을 바치라>는 말을 한편으로 해석하면, “제물로 바치라”는 <예배의 의미>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살인을 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어요.
그러므로 <예배와 살인>에 관해서 아브라함은 심하게 갈등을 느꼈을 거예요.
그래서 17절의 후반부에서 보면 ”기꺼이 바치려 했다고“고 했어요.
3. 세번째, 아브라함의 갈등은 무엇일까요?
1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께서 전에 말씀 하시기를 ” 네 자손이라고 불릴 사람은 이삭으로 말미암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히11:18)
하나님의 약속은 ”이삭을 통해 축복해 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늘의 별처럼 자손을 번성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삭이 죽으면, "어떻게 자손이 축복을 받겠다"는 얘기입니까?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더욱 더 갈등을 했을 꺼예요.
이럴 때에 하나님의 약속은 뭐가 되나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기꺼이> 순종을 했어요.
그렇게 기꺼이 순종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순종은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어요.
아브라함에게는 과거에 슬픈기억이 또 하나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듣고도 10년이 지나도록 사라는 임신이 되지 않았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반응이 없자, 자기들 끼리 <해괴한 일>이 벌어 집니다.
여자는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사라는 하갈이란 종을 통해 <아들을 얻으라>고 허락을 해 줬어요.
남자는 또 조금은 어리석은 행동을 따라서 하지요.
그래서 자기 아내의 말을 듣고, 자기의 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낳았어요.
이것은 후에 생각지도 못했던 <역사적인 싸움>의 불씨가 되어, 지금까지 중동이 시쓰러워요.
그 결과 이스마엘의 자손(= 팔레스타인)과 이삭의 자손(=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싸우는 중동의 화약고가 된 것입니다.
이런 <인간적인 생각>이 들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기도를 해야 해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인간의 생각인지(?)를 먼저 기도를 해서,
<아니다>라고 판단되면 하지말아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진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기다렸다면, 이런 슬픈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미래에 반드시 이루어 집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네 아들은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믿음이 있었던 거예요.
성도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시련도 있고, 어려움도 있고, 방황도 하고, 의심도 하지요.
그러나 이런 것이 전혀 없이,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우리 모두 다들 그만 그만한 시련을 겪으므로 현실은 답답하고, 길이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꿋꿋이 살아 나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입니다.
과거에 조용기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할 때에 저는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 분은 평소에도 하나님을 말씀하시며, <죽은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분이고, <불가능을 가능께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자주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제는 그 말씀이 <맞는 말씀이라>고 느껴지기 시작해요.
[믿음]은 약속을 현실화 시켜서 가난에서 벗어나고, 갈등에서도 벗어나고, 죽음에서도 벗어나요.
그것은 마치 뱀이 허물을 벗고 새로 태어나듯이,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현재의 나는 절망스럽지만, 내일과 미래를 내다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집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해 주는 성경구절이 로마서 4장 13~14절에 나와요.
“아브라함이나 그의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약속은 율법으로 인해 된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의로 인해된 것입니다. 만일 율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무효가 되고 약속은 파기 됐을 것입니다(롬4:13~14)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온 세상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그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그가 믿고 의롭다>는 것은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세상을 얻을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면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환경을 보고, 사정을 보고, 결과를 보고 믿는게 아니고, [믿음]을 보고 하는 거예요.
여기에 계시는 분중에서 혹시나 하나님의 연단을 받으시는 분이 계신다면 흔들리지 말고, 기다리세요. 기다리면 반드시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6~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 약속이 아브라함의 후손들 뿐만 아니라,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이 조상으로 세우겠다”고 기록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가 믿은 하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분입니다(롬4:16~17)
여러분은 죽을 때가 되면, 그냥 죽으세요.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갈등하는 것은 <믿음의 결과>를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2장을 쭉 읽어보면, 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했다.
②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했다.
③ 아브라함은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이 지시한 땅을 향해 떠났다.
④ 아들을 데리고 갈 모리아 산을 멀리서 눈을 들어 바라 보았다.
⑤ 나는 믿음을 갖고 그곳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내 아들과 함께 돌아온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떠났습니다.
왜 그러냐구요?
하나님은 당신을 천국으로 보내 주실 것을 믿으니까, 그렇게 편히 가도 되는 거예요.
그러나 죽기 전에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것은 후손들(자손들)을 축복해 주는 아버지가 반드시 되어야 해요.
아버지의 그 축복은 자손 만대에 영향력을 끼쳐 축복한 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세 번에 걸쳐서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드리기에 앞서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두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죽은 자식도 살리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미리 알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천국에 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몸은 죽고나면 흙으로 돌아가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늘나라에 올라 가 <부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드리기 바랍니다.
[내일]이 확실한 사람은 [오늘]이 분명해 집니다.
그러나 [내일]이 불확실한 사람은 [오늘]이 걱정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오늘의 삶이 자신이 없고, 염려가 많고, 불안해 집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고, 없는 것을 있는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고,
안보이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핵심은 <부활의 믿음>이었어요.
이삭을 죽이려고 마음 속으로 결심을 하고, 그 아들의 심장에 칼을 찌르려고 하는 순간에,
갑자기 칼을 찌르려는 순간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삭이 아니고, 옆에 준비된 <어린 양을 제물로 바치라>는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네 믿음을 내가 보았노라>라고 말씀하시며, 그렇게 이삭을 살리셨어요.
이게 <제사>이고, <예배>입니다.
두 번째로, 아브라함의 믿음의 크라이맥스는 약속의 자녀를 축복해 주고, <믿음을 유산으로 남겨 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축복해 주었고, 이삭은 야곱을 축복해 주었고, 야곱은 요셉을 축복해 주었고,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해 준 이야기가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고 있어요.
<믿음>은 자기 자녀를 축복해 줍니다.
그러나 평소에 자녀와 관계가 나쁘면, 자녀가 “축복을 받지 않겠다”고 말하므로 축복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결국은 [져] 주어야 합니다.
대부분 부모 자식간에 소통이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버지의 입장>에서만 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들과 아버지를 비교해 보세요.
나와 아들의 수준이 맞을까요? 내 경험과 아들의 경험이 맞을까요?
아버지와 자식과의 관계는 수준도 맞지 않고, 경험도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아버지는 불만스러운 거예요.
또 아들은 경험도 없고, 철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이걸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 때 아버지는 <아들의 입장>으로 내려와야 해결됩니다.
좀 기분은 나쁘겠지만, 아버지가 좀 양보해서 물러나야 해결됩니다.
부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예요.
남편이 아내의 입장을 이해하고, <아내의 수준>으로 내려와서 생각하면, 금방 다 해결돼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부부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해요.
두 사람은 처음에 만나서 <나와 다르다>는 매력 때문에 서로 좋아서 연애를 했는데,
막상 결혼을 하고 나면 그렇게 좋게 느껴 졌던 <서로 다르다>는 것이 <지옥이 라는 것>을 알게 돼요.
밥을 먹는 방법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취미도 달라요.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며,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결혼생활의 <기술>이예요.
이제 오늘은 <모세의 믿음>에 대해서 공부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3절을 보기 전에 성도여러분에게 부탁이 있어요.
요즘 우리교회의 성도님들이 성경 책을 들고 다니지 않아요.
성경 구절이 자막으로 준비하여 읽도록 하니까, 설교 도중에 성경 책을 펼치질 않아요.
찬송가의 가사에도 나오지만,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
그렇게 어머님이 들려 주시던 [그런 성경책]을 반드시 본인이 가지고 다니면서,
본문을 자기가 찾고,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야 <은혜>가 됩니다.
그래서 제가 앞으로 설교할 때에 첫 번째 읽을 때는 자막이 나오지 않게 하여 자기의 성경 책을 찾아서 읽고,
두 번째 읽을 때에는 자막을 보고 읽도록 하겠어요.
왜 그렇게 두 번을 읽을 까요?
첫 번째는 성경은 두 번 읽는 것이 좋고,
두 번째 이유는 성경을 안 가져온 사람이 쑥스러워 할까봐 제가 그 수준으로 내려간 결정이예요.
자기의 <손때>가 묻어 있는 성경 책을 가지고, 자기의 <눈물>이 베어있는 성경 책을 자기가 찾아야 하고,
그 성경 책에 <기름부으심>이 있어야 합니다.
23절을 읽으십시오.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출생했을 때, 그 아이를 석달동안 숨겼습니다. 이는 그 아이가 남다른 것을 보고, 왕의 명령을 무서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히11:23)3절을 읽어 보세요.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출생을 했을 때, 그 아이를 석달동안 숨겼습니다. 이는 그 아이가 남다른 것을여기서 모세가 태어 날 그 당시의 상황을 잠시 살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의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애굽의 바로 왕의 지시는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즉시 죽이라>“고 명령했어요.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아이를 죽이지 않고 석달동안 몰래 집에서 키우다가 어쩔수 없이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 강 갈대 숲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강가로 목욕을 나왔던 바로 왕의 딸이 우연히 히브리 아이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 모세를 왕궁으로 데려가 40년을 같이 살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세의 부모가 바로 왕의 명령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이를 키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부모가 알았기 때문이지요.
결국, <모세의 믿음>은 "부모로 부터 왔다"는 거예요.
옛날에 우리의 조상들은 아이가 씩씩하고 튼튼하게 자라라는 뜻에서 "<개똥이>라는 이름을 지어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험하게 키워야 한다“는 뜻은 이해하지만, 그건 아니예요.
자기 자녀는 귀한 존재이고, 아주 소중한 아이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석 달을 키운 다음, 역청과 송진을 바른 <갈대상자>에 넣어서 나일 강에 띄워서 보냈어요.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세의 부모와 같이 [믿음]으로 나가면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미래가 불안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럴 때에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미래를 맡기고, [믿음]으로 나가세요.
그러나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나일 강가로 목욕하러 나온 공주가 갈대상자를 발견한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예요.
하필이면, 그 때, 그 시간에, 그 공주가, 거기로, <목욕을 나왔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공주의 마음에 그 때, <긍휼한 마음>이 생겼어요.
그것은 하나님이 그 공주에게 <긍휼한 마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공주는 "젖을 먹여 줄 유모를 데려오라"고 하여, 모세의 어머니를 연결시켜 줍니다.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 지고, <하나님이 조정하고 있다>는 거예요.
성도여러분?
가난하면 가난한 데로, 부유하면 부유한 대로, 아프면 아픈대로 사세요.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것이고, 죽다가 살아나면 <아멘! 할렐루야! >하고 다시 살면되는 거예요.
로마서 8장 28절에는 ”우리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 분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룬다“(롬8:28) 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면, 모든 문제가 <하나님의 셈법>으로 다 풀리는 것입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자라 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히11:24)
"그는 일시적인 죄의 쾌락을 누리는 것 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통 당하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히11:25)
드디어 모세는 왕궁에서 40년을 살았으나, 이집트 공주의 아들 되는 것을 거절하는 <용기>가 생깁니다.
믿음으로 자란 모세는 자기 동족을 구하려다 실패하고, 결국은 왕궁을 떠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거절하는 용기가 생깁니다.
[믿음으로] 나가니까 모세도 존재의 <정체성>을 알게 되고, 스스로 깨닫게 만듭니다.
모세는 바로 왕의 도움으로 왕궁에서 성장하고 공부를 했지만, <공주의 아들이 아니다>는 것을 선포했고,
이는 자기의 정체성을 선언할수 있는 <용기>가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요셉의 아들>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이와같이 존재의 뿌리가 확실하면,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을 갖을 수 있어요.
그래서 왕의 아들로 살지 않고, <왕자의 영광을 버린다>고 결정한 거예요.
[믿음]은 순간이 아니고, <영원>이예요.
[믿음]은 즐기는 것보다, <고난 받기>를 더 좋아 해요.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다 거절하고, <포기하는 용기>가 생기는 거예요.
소유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정체성을 아는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해요.
26절을 보세요.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수모를 아집트의 보화보다 더 가치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는 그가 장차 받을 상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히11:26)
모세는 약속된 메시아를 위해 받는 고난을 이집트의 왕자보다도 더 값진 것으로 생각했어요.
히브리서 저자는 여기서 재미있는 말을 해요.
구약의 <출애굽 사건>을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같다>고 연결시킨 거예요.
명예와 권력과 부 보다 더 가치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과 수난을 받는 것이다>고 했어요.
그러면 구약 당시에는 예수그리스도가 없었지만, 이 저자는 구약의 사건이 시간이 지나도 <예수 사건= 십자가>라고 말하고 있어요.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든 사건은 <예수사건 = 십자가 사건>과 연결이 됩니다.
그럼 모세가 어째서 그것을 알았을까요?
모세가 예수를 본적도 없었고 들은 적도 없지만, 모세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것은 모세가 <저 본향>을 바라다 보았고, 그 본향을 상상하는 <안목>이 있었던 거예요.
더 낳은 본향, 더 낳은 세계, 우리에게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을 꺼예요..
[믿음]은 미래를 보는 능력이고, 영원을 볼수 있는 능력이예요.
이것은 [믿음]이 있기에 [믿음]으로 아는 거예요.
믿음은 <미래>를 보는 능력이고, <영원>을 보는 능력이예요.
27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는 왕의 진노를 두려워 하지 않고,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꾸준히 참으며 인내했습니다. (히11:27)
지구상에는 1달러를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입]을 만드신 것을 보면, 반드시 먹을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굶어 죽지 않아요.
인간적인 방법으로 어느 정도는 통할지 몰라도, 결국은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모든 것이 해결 돼요.
[믿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사기치지 말고, 믿고 나가세요.
그러면 반드시 응답이 올 것입니다.
모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애굽을 떠났어요.
이것이 믿음의 <방향>이고, 믿음의 <힘>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믿음을 가지신 분>들은 그 하나님의 임재를 볼수 있어요.
어떤 분은 그 것을 볼수 있고, 또 다른 어떤 분들은 그것을 몰라요.
28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는 유월절과 피뿌리는 의식을 행하여, 처음 난 것들을 죽이는 자가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를 건드리지 못하게 햇습니다.” (히11:28)
모세가 어떻게 이것을 알았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본 적도 없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라는 것을...,
<십자가>도 들은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을까요?
유월절 의식이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을 의미한다>는 것을 [믿음의 영감]으로 알았던 거예요.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멀리서 천국을 사모하고 바라 보았듯이......
내 마음의 고향은 분명히 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내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의 조상들은 단순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약속을 믿고 나갔같지만.....,
그 당시는 전혀 몰랐지만....., 먼 훗날< 예수그리스도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게된 거예요.
그러나 이런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과 친밀해 지고, 예수를 이해하고, 천국을 이해된다>는 거예요.
이게 <성령받은 사람>이고, <성령받은 사람>이 느끼는 현상 이예요.
믿음으로 천국을 보고, 믿음으로 예수의 고난을 보고, 믿음으로 유월절과 씨뿌리는 의식도 보고,
이 모든 것이 <십자가 사건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사건>이 없는 [믿음]은 공허한 믿음이고, <인간적인 믿음>입니다.
그래서 봉사도 [믿음]을 가지고 해야 해요.
사람을 보면서 봉사하면 안되고, 시켜서 하는 봉사는 봉사가 아니예요.
성도여러분 ?
참된 믿음의 뿌리가 내려지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믿음>이 여러분의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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