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편 강해-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시편2편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이전에 살펴본 것과 같이 시가서는 “임마누엘”을 노래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는 그 약속에 관한 소망과 그 기쁨을 노래한다.
장차 우리에게 오실 왕, 그리스도를 노래하고 찬송하는 것이 시가서의 전체적 내용이며 그러한 관점에서만 시가서는 읽혀져야 했다.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이 보여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것은 우리에게 약속되어진 즉, 기름부음을 받아 시온에 세우실 아들, 왕 되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찾고 구하는 지극히 개인적 의로움의 행위였다.
1편이 각자 개인이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할 말씀 안에 사는 것의 일상적 삶을 말한다면,
2편은 온 나라와 민족이 해야 할 기름부음 받으신 그리스도의 영접에 있다.
그러므로,
즐거움(삶의 의미)의 원천이 된 여호와의 율법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접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1편은 아들을 영접한 하기위한 행위요, 이들을 복 있는 사람이라 한다.
반면,
시편 1편의 악인은, 시편 2편에서 언급하고 있는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자들을 일컫는다.
1편에 등장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
악인-그 처음의 목적과 의도가 하나님과 다른 자,
죄인-자기의 방법과 방식대로 하는 자,
오만한 자-자신을 하나님화 만든 자,
2편에서는 더 구체적이고 집단화된다.
열방과 민족-한 덩어리가 된 이방 민족과 족속들,
군왕들-땅에서의 주인 노릇하는 자들,
관원들-사람들의 우두머리 된 자들,
즉, 그가 악인인 것은 본래부터 그 처음의 의도와 목적이 자신이 많은 백성과 사람들의 우두머리요, 주인이 되고자 함이었다.
반드시,
악인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였다면,
그는 결단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 위에 군림하여 섬김을 받으며 주인 노릇과 우두머리가 될 수 없게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 자신이 여호와의 율법을 아는 자라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한 자라면 스스로를 높여 오만한 자의 자리, 곧 그리스도께서 앉아야 할 자리에서 앉아 많은 백성의 주인노릇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그 자신의 정욕의 욕심으로 인해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고 자기(악인) 꾀를 선택하고 말았다. 처음의 의도와 목적이 깨끗하고 순수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이 주인 노릇하기 위해 꾀를 내어 결국 오만한자의 자리에 앉게된 것이다.
그러므로,
1편의 1절,“악인의 꾀”와 2편 2절, “군왕들과 관원들의 꾀”는 같은 맥락에 있다.
자기의 꾀를 내어 스스로를 높여 여호와의 백성의 우두머리요, 주인 노릇하는 자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먼저 2편을 덧붙여 해석하고 볼 필요가 있다.
1절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어찌하여(무엇 때문에) 많은 무리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북적대며 떠들며
백성(족속)들이 헛된 일을 생각하느냐,
2절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
적하며
-땅의 왕들이 나서며(자신들이 왕이라며) 우두머리들이 하나가 되어 의논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그리스도)받은 자를 대적하기 위하여.
3절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우리가 그의 교훈(징계)들을 깨뜨리고 우리에게 얽매인 것들을 벗어던져버리자.
4절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하늘 안에 앉으신 자가 저희를 조롱하며 주께서 멸시하시는 도다.
5절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그 때에 그들을 향해 격노하시며 불같이 놀라 낙담케 하여(떨게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6절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나의 왕을 기름부어 내 거룩한 시온 산 위에 임명하였다.
7절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가 여호와의 명으로 선포하였다 또한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아 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2편은,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의 즉위를 담는 내용이다.
내 백성의 우두머리가 되어 주인 노릇하는 자들을 위한 경고다.
비록,
자기의 수단과 방법으로 우두머리가 되어 백성의 주인 노릇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경고였으나 그 아래에서 압제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스라엘의 주, 임금으로 오시는 이에 대한 호산나의 찬송소리다.
2편은, 1편에서의 악인에 대한 심판의 계속적인 연장선에 있다고 보여 진다.
자기 꾀를 내어 스스로 높아진 자들, 그 아래에서 압제와 고통 속에 있는 자기백성들을 위한 구원자가 오신다.
1편의 악인(열방), 죄인(왕들), 오만한 자(관원들)는 그 왕으로 오신 자를 대적한다.
왜냐하면,
그 기름부음 받은 자가 오시면 더 이상 백성의 우두머리가 되어 주인 노릇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상석에 앉아 섬김을 받을 수 없게 되고, 그 입고 있던 화려한 옷과 기름진 상의 진미와 아름다운 거처도 빼앗기게 된다.
내가 어찌하여 악인의 꾀에 빠졌던고..
그리하여 나의 입은 옷과 먹고 마시는 것의 화려함과 배부름, 부요함은 어찜인고..
말씀을 내는 자가 여호와의 말씀들 듣지 못한 기갈에 시달린 백성들의 부르짖음엔 귀를 닫고 육체의 안락과 유희에 빠져 세월을 탕진하고 있음은 어찜인고..
그 즐거움의 날이 탄식과 절망으로 바뀌려한다.
밖에 내어 쫒김을 받아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날이 속히 이르게 된다하신다.
바로 여호와께서 그 아들을 시온 산에 왕으로 세우신 오늘날이다.
여호와의 율법 안에서는 스스로 높아질 수 없다.
백성의 우두머리가 되어 주인노릇을 할 수 없다.
오만한자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높아진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아는 자가 아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여호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왕, 그리스도께서 오심에도 회개가 없다.
돌이키고 그분 앞에 머리를 조아려 엎드림이 없다. 오히려 대적하는 자가 된다.
1편의 악인은,
2편의 왕 되신 그리스도 앞에 회개하며 뉘우쳐야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그가 악하기 때문이다.
돌이켜야 할 그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시끄럽게 떠들며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서로들 모여 신중하게 계획하는 일들은 무엇인가!
그 아들을 죽이고자 함이다.
먼 타국에서 왕위를 받으려고 오는 아들을 죽이고자 함이다.
이러한 악인들의 불법적 악행이 오늘날 계속된다.
7절에서의 오늘날은,
과거의 시간을 말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시간인 욤(날)은 시간의 개념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그 오늘이다. 현재의 시간이며 과거와 미래의 시간이 지금이 되는 그날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내게서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되시는 그날, 오늘날이다.
그분이 내게서 왕, 주인이 되시는 그 날, 오늘날이 아니면 내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날이 된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그 자신 스스로가 주인이 된 날, 그 날은 여호와 하나님의 날인 오늘날이 아니다. 나의 날이다.
내게서 나의 날들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아들, 왕으로 세움을 입은 날, 낳음을 입은 날이 오늘날이다.
구원은 과거의 의로운 행위를 적금인양 하여 보장받은 보험이 아니다.
현재의 열정적인 믿음이 내일까지 계속될지 장담하지 못한다.
오늘날,
내게서 그리스도께서 낳음을 입어,
내게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그 날이 욤,오늘날이라 한다. 오늘날이 아니면 나의 구원은 보장받을 수 없다.
그 오늘날이 내게서 계속되지 않으면 나는 그날에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로 서 있게 된다. 내게서 그리스도의 날, 오늘날이 계속되지 않는 것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 오늘날은 복 있는 사람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날 속에서 왕으로 세움을 입는 그날이 바로 오늘날이다. 이 날의 계속됨을 성경은 영원한 날이라 한다. 주의 날이다.
이러한 오늘날, 곧 주의 영원한 날에 사는 자는 몸 밖에 있던지 몸 안에 있던 지의 구별이 의미가 없다. 살고 죽는 것의 두려움이 없다. 데려가고 남겨둠의 불안과 염려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날, 곧 내게서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께서 왕 되시는 날이 아닌 내가 오만한자의 자리에 앉아 주인노릇을 하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오늘날이 달갑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반기지 않는다.
온 세상과 민족들이 이렇게까지 대적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자기 백성에게 나아왔으나 저희들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한탄하신다.
아직,
악인의 꾀를 생각하지 아니했거든,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았거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였거든,
속히 여호와의 율법을 다시 펴 그 안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말하여졌는가를 살펴야 한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깊이 통곡하며, 탄식하여 부르짖어 찾는)하는 그 복 있는 자의 행위가 즐겁지 아니하다면,
어쩌면 그대는 그대를 심판하려 하심이 아닌 구원하시려 오시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오히려 자기의 악행을 회개치 아니하고 많은 무리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대적하는 자로 설까 두려워해야 하리니...
아직,
오늘날, 그날에 곧, 주의 날에 그리스도가 아들로 낳음을 입었듯이,
악인이었던 내가 아들로 낳음을 입는 그 오늘날, 그리스도의 날을 간절히 소망하며 기다려야 할 것이다.
다음 글(2)-오늘 날의 전후,
오늘날은 그리스도께서 아들로 낳음을 입는 날이다.
고로 내게도 그 오늘날은 아들로 거듭나는 날이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오시는 날이며 그분을 영접하는 날이 오늘날이다.
또한 그 오늘날은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세우심을 입는 날이다.
아들로 낳음을 입은 그 오늘날 안에 있으면 우리 또한 역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는 날이 이르게 된다.
히브리서는 이 오늘날을 말한다.(히3장 13절-14절)
그러나 이 오늘날의 전엔,
내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의 자리에 섰다.
내게 구원의 때요, 은혜 받을 만한 오늘날이 이르렀음에도 알지 악인의 꾀를 쫒던 이전 사람인 내가 회개치 아니한 까닭에,
오늘날의 후엔,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에 찬 심판을 당한다.
이러한 분노에 찬 여호와의 심판을 두고 시편3편은,
다윗의 입을 빌려 압살롬의 원수와 대적으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다윗이 스스로 높아져 오만한자가 되어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였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그 구원의 날. 오늘날을 다시 찾는다, 간절하게 구한다.
그리고 여호와를 대적하였던 그 오늘날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회개한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그리스도께 왕의 자리를 내어준다.
까닭에 오늘날의 전후는 온통 절망뿐이다.
모든 것이 지났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날을 사는 자들은 여호와를 노래한다, 찬송하며 경배한다.
시편은 그 오늘날의 기다리며 소망하며 그 날을 만나 사는 자들의 즐거움을 담은 책이다.
나여 오늘날이 내게서 지났던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으면 계속 오늘날을 살았던가!
나여, 그대여, 복 있는 사람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