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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부활절 설교: <보지않고 믿는 믿음> 요한복음 20 :24~29, 말씀:하용조 목사님
믿음에는 두가지의 믿음이 있습니다.
한가지는 <희망의 믿음>이고, 또 다른 한가지는 <약속의 믿음>입니다.
그럼 두가지 믿음이 어떻게 다를까요?
<희망의 믿음>은 겉으로 그렇듯하고, 우리가 바라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단순한 희망이기 때문에 결국 내용이 없습니다.
다시말하면 내가 <꿈꾸는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꿈꾸는 믿음은 내가 바라는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결국 자기가 바라는 희망이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원한다\\"고,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두번째로 <약속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약속>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말합니다.
<약속>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고, 하나님의 예언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 집니다.
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여러분들이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럼, <부활>은 어떤 사건일까요?
그것은 <희망의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사건>입니다.
이런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일입니다.
이런 <부활>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합리성>을 따지자면 말도 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이성의 판단이나 상식의 테두리 안에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냐?>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것이냐?>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어지지 않는 <부활>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기적의 사건으로 받아 드립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집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는 사건>으로 여겼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도 그것을 믿지 못하였으니까요.
그는 도마입니다.
그럼, 도마가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는 현장에 없었습니다.
말이 많은 어떤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꼭 빠지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이성을 더 신뢰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아요.
자기의 생각을 앞세우니까 믿음이 생기지 않는 거예요.
셋째로, 다른 사람의 증언도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생각이 좀 헷갈리면, 다른 사람의 증언도 참고 해야 하는데 도마는 그것도 무시했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도 이와같이 3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어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 안믿으면 어떤 일이 벌어 집니까?
그 사람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변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태양의 존재를 거부하면서, 태양의 혜택을 바란다면 그것은 말이 안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받아드려야, 하나님의 축복이 자기에게 오는 거예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그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욕하고, 단점을 지적하면,
그사람 곁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아요.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에요.
매일 아내를 사랑하고, 이뻐하면, 아내가 곁에서 지극 정성으로 대하지만,
매일 아내를 구박하면, 아내는 남편 옆에 있기를 싫어 해요.
당신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에 대해 긍정적으로 받아 드리면, 당신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찾아 오십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않고 의심하던 도마의 마음에 예수님이 다시 찾아 오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십니까?
도마가 그렇게 거부해도 \\"예수님은 도마를 찾아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왜? 예수님이 다시 찾아 왔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려는 것 보다, 도마에게 촛점을 맞추려고 다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은 <한 영혼이라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 배울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배신이 <하나님의 사랑보다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배신이 크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더 커요>
그것은 내가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의심하는 도마에게 \\"네 손을 내 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말씀하시며,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고 말씀하십니다.
성도여러분?
우리의 이성보다도, 우리의 지식 보다도 더 위대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의 생각보다도 더 위대한 것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희망과 신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기가 열심히 한다>고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진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28절을 보면, 드디어 도마가 깨졌습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이와같이 여러분들도 이성의 벽이 무너지고, 상식의 틀이 깨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자가 되라\\"(요20;27)고 말합니다.
이것은 도마에게 새로운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을 보십시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20:29)
여기를 자세히 보면 두사람이 나옵니다.
한사람은 <보고 믿는자>이고, 또 한사람은 <보지 않고 믿는자>입니다.
이 두 사람 중에서 누가 진정한 믿음을 가졌을까요?
이성적인 믿음이나, 상식적인 믿음은 다 믿음이 아니예요.
사람의 머리로 이해 되거나, 경험에 미루어 <진정한 믿음>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믿음은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없는 거예요.
믿음은 <성령충만> 해야 생겨요.
그래서 29절과 같이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더 신실한 믿음>이고,
<약속의 믿음>이고, <성령 충만한 믿음>이지요.
그런 믿음은 성령충만한 눈이 있어야 보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보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가지면, 미래가 보이고, 마음의 평화가 생겨서 기쁨이 찿아 옵니다.
믿음이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즐겁게 지내므로 얼굴이 환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는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주시는 이러한 약속을 믿으신다면, 우리의 미래는 희망차고 즐겁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믿음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믿음이 점점 식어간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믿음이 있기는 있는데 그 믿음이 열정적이지 못하고,
<과거의 믿음보다 점점 더 식어간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혹시 여러분의 믿음도 식어 가지는 않습니까?
예수 믿고 착한 일을 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진짜 기독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살아있는 <예수님을 우리가 만나는 것>입니다.
혹시 잘못 아시는 분들은 기독교가 사회정의를 세우고, 선한 일을 하는 종교로 착각하시지 않습니까?
기독교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믿을 것이냐? 안 믿을 것이냐?> 는 것은 자신의 결정사항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믿음의 선택>을 하도록 제가 도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행동입니다.
믿음은 관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삶의 결단입니다.
믿음은 자기의 의지 입니다.
믿음은 그 길로 가기로 본인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선택할 권리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그 선택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하나님>쪽을 선택하길 바랍니다.
당신의 선택이 생과 사를 가르는 중요한 결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선택할 때 객관적인 조건만 가지고 선택하지 않습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긍정적인 것>을 선택하십시오.
안되는 것보다 <되는 것>을 선택하십시오.
그렇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믿음>을 선택하십시오.
오늘의 결론은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믿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믿음씨리즈2 <약속에 기초한 믿음>창세기12:1~3, 말씀:하용조목사님
지난 부활주일에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부터 몇 주간 동안 <믿음>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세상에 사는동안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에 대한 오해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믿음을 진짜 믿음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혹시 잘못된 믿음으로 혼란스러워 하고 당황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나 자기 자신의 <믿음>이 정리되면, 신앙생활에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럼, 믿음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2장 8~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2:8~9)
첫째, 믿음은 나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은 내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노력하면 믿음을 얻을 수 있다\\"고 오해를 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기 보다는,
내가 먼저 인간적인 방법이나 생각으로 <믿음>을 얻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생각보다 내 생각을 먼저 결정하고 매사를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이상한 믿음으로 굳어져 버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진짜 믿음인줄 알고 붙잡았는데, 나중에 보니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엉터리 믿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진짜 믿음으로부터 멀어져 버립니다.
그러니까 <진짜 믿음>은 내가 가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둘째, 믿음의 본질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단순히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파생된 영향력일 뿐 본질은 아닙니다.
믿음의 핵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내가 이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어떤 혜택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좋아야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좋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제쳐두고, 자꾸 \\"복만 달라\\"고 합니다.
셋째, 믿음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희망과 기대를 줍니다.
그러나 희망과 기대가 믿음은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열정과 헌신을 줍니다.
그러나 열정과 헌신이 곧 믿음은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기적과 능력을 베풀어 줍니다.
그러나 기적과 능력이 믿음은 아닙니다.
믿음에 접근할수록 1. 우리에게 나 자신을 깨우치게 하고, 2. 오만의 옷을 벗어 버리고,
3. 이성의 옷을 벗고, 4. 순간순간 겸손해 지도록 만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의 믿음은 행함으로 믿음이 커지지 않습니다.
다만, 믿음이 믿음을 낳습니다.
한번 믿으면 두 번 믿게 되고, 두 번 믿으면, 세 번 믿게 됩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믿음이 나의 믿음을 더 깊고 크게 만듭니다.
믿음을 가지면 고난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인해 위기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에 \\"믿음이 있으면 만사형통한다\\"고 오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병들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병에 걸리고, 죽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율법적인 믿음에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내 안에 있는 이런 생각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그것을 온전히 버려 버릴 때에 보배로운 <믿음>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런 진정한 <믿음>이 기적과 축복을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으로 돌아가,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택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이유는 먼 훗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놀랍고 결정적인 사건을 보여 주십니다.
여기서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내가 구원을 받기위해서 내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나는 실제로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실제로 어떤 행위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실제로 아무런 대가(값)도 치르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나는 그냥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이 얼마나 유치합니까?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그냥 믿으면 된다\\"는 말이 여러분의 가슴에 와 닿으십니까?
저는 우리의 가슴에 \\"쉽게 와 닿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기 위해 고생한 사람이 성경 속의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택하여 가르치십니다.
<아브라함>은 한 이방인이고, 그 사람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없던 사람, 처음에는 전혀 믿음이 없던 사람이었고, 상식과 경험과 이성으로만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이런 평범한 <아브라함>을 택하고, 믿음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믿음의 비밀>을 보여 주십니다.
따라서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잘 이해한다면,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유치하고 단순한 입놀림이 아니라,
그 속에 상상할 수 없는 우주의 비밀과 심오함을 알게 되고,
그 속에서 무궁한 하나님의 능력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느껴져야 예수의 능력이 내안에 오기 시작합니다.
구원의 능력이 오기 시작합니다.
용서의 능력이 오기 시작합니다.
보혈의 능력이 내안에 임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가 나를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나를 설득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에게 확신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고 나중에 순교까지 합니다.
내가 받는 보상이 없고, 내가 받는 대가도 없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화려하지 않고, 광야 같은 길일지라도,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갑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부르셨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믿음을 주셨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실 때까지 25년이 걸렸습니다.
막벨라 굴에 장사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삭을 통해 주셨습니다.
이삭의 믿음은 야곱을 통해 주셨고, 야곱의 믿음은 열 두 지파를 통해 계속 흘러가게 하셨습니다.
그 믿음은 결국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전해와서 놀랍고, 감동적이고, 심오하고, 상상할 수 없는 믿음으로 축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 1)
여기서 아브라함에게서 발견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첫째,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도를 닦아서 하나님께 간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인의 자세는 <하나님을 겸손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이것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 긍휼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돌보시지 않으면 제가 어디로 갑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시지 않으면 누가 저를 보호하겠습니까?\\"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니까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나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둘째, 믿음은 <하나님이 말씀함으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의 시작부분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하면 빛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창조의 원리>입니다.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빛도 있고, 태양도 있고, 하늘도 있고, 땅도 있고, 공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없으면 믿음도 없습니다.
말씀 없는 믿음은 허공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 없는 믿음은 허공을 가르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믿음은 내 생각, 내 비전, 내 묵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에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때는 무조건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이삭이지, 이스마엘이 아닙니다.
\\"이삭이 태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이스마엘을 만들면 안 됩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은 그런 의미에서 <기다림>입니다.
기다릴 수 없으면,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를 임신하면, 엄마는 열 달 동안 기다려야 합니다.
\\"급하다\\"고 열 달이 되기 전에 아이를 낳는 엄마는 없습니다.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뜻은 <의인은 기다림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부활절에 말씀드린 <약속의 믿음>과 <희망의 믿음>의 차이가 이것입니다.
말씀이 없는 것은 희망입니다.------> 우리들 생각
말씀이 있는 것은 약속입니다.------> 하나님 생각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떠나라>이고
둘째는, <가라>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내용입니다.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집착>에서 떠나야 합니다.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익숙한 곳>을 떠나야 합니다.
<자아>에서 떠나야 합니다.
<과거>에서 떠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모두 다 끊어야 합니다.
그래서 힘듭니다.
누구든지 변화는 원하지만 실제로 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실수와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하고, 자기를 부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본토, 고향,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본토는 고향입니다.
친척은 가족들입니다.
아비는 부모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이 친하고, 익숙하고, 가장 영향력을 주고 있는 것에서
훌쩍 떠날 때에 <하나님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더러운 유리창은 닦아야 밖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눈에 백태가 끼어 있는 것이 백내장입니다.
백내장은 수술로 제거 해야 밖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변화는 근본적인 혁명입니다.
나와 익숙한 것, 나를 버리는 것이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자기 집착>을 버리는 것이 근본적 변화입니다.
옛사람이 변하여 새사람이 되고,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철저한 <자기 부정>과 철저한 <자기 포기>가 믿음의 시작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익숙한 것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자꾸 붙잡으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더 많이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돈도, 재산도, 지식도 더 많이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욕심>이 너무 많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기를 보호하려고 하고, 더 보완하려고 하고, 더 놓기를 싫어 합니다.
주변의 사람을 자꾸 끌어 들여서 보호막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막상 보면 뚜껑을 열어보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모든 것은 다 있지만, 그 속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전한 거예요.
믿음은 소유가 아니라 포기입니다.
집착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안주가 아니라 떠남입니다.
그래도 막상 떠나려면 불안합니다.
낭떠러지에 빠지는 것 같고 죽는 것 같습니다.
내가 뭔가 끈이라도 붙잡아야 살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보루까지 놓게 되면 굉장히 당황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마지막까지 붙잡는 것이 <우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식을 <우상>으로 붙잡고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자식이 장성하면 결혼을 시키고, 새 가정으로 새 출발하도록 하는것이 하나님의 원리인데,
그 자식이 자기의 소유물인 것 처럼 자기가 끼고 놓아 주지 않아요.
그래서 일일이 간섭을 하고, 뭔가를 기대하고 있으니까, 고부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는 거예요.
그러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그때서야 하나님을 찾게 되고, 그 때 이 원리를 깨닫게 됩니다.
둘째, <가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가는 것입니다.
목적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방황이 아닙니다. 우연도 아닙니다. 실수도 아닙니다.
믿음은 목적이 이끄는 삶입니다.
어떤 사람은 실수로, 우연히 잘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로또가 아닙니다.
믿음은 약속입니다.
믿음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고 험하고 좁더라도 그곳이 약속의 땅이기에 가는 것입니다.
비바람이 쳐도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비바람도 있고 폭풍도 있습니다.
위기도 있고 죽음도 있습니다.
진짜 믿음 있는 사람은 죽을 때를 압니다.
자기의 손해를 감수하고, 그 일을 감당합니다.
성도 여러분,
현실보다는 현실저편에 있는 <약속의 땅>을 바라볼 때 우리는 더 힘을 얻습니다.
더 의욕이 넘치고, 말할 수 없는 내적인 힘이 생깁니다.
이것이 영적인 힘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이 힘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셋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2절, 3절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2~3)
이 말씀을 보면 네 가지 약속이 나옵니다.
첫째, 큰 민족을 이룰 것이다,
둘째, 네 이름을 창대케 할 것이다,
셋째, 내가 너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다,
넷째, 내가 너를 절대적으로 보호할 것이다. 입니다.
약속은 성취형이 아니라, 미래형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것은 <약속>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으십시오.
아브라함은 죽을 때까지 그 약속이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약속을 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약속이 성취되지 않을지라도 상관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니면 여러분의 자녀가 약속을 이룰 것이요, 자녀가 안 되면 그 자녀의 자녀들이 이룰 것입니다.
이것이 약속입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일차적인 믿음이 생기는 것이 25년이 걸렸습니다.
25년이 아니라, 일생이 걸린다 할지라도 방향만 맞으면 상관 없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인생의 방향이 잘 가고 있으십니까?\\"
\\"가고자 하는 방향을 잘 잡으셨습니까?\\"
\\"이대로 계속가게 되면, 잘 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을 단순한 피상적인 말로 이해하지 마십시오.
여기에는 우주적인 심오한 능력과 비밀이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늘부터 계속해서 믿음에 대한 묵상이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믿음이 아름답게 열매 맺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시리즈3 <큰 믿음과 작은 믿음> 마태복음 8:5~13, 말씀: 하용조 목사님
저는 요즘 <믿음>에 관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시간은 부활절날 <보고 믿는 믿음 과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말씀드렸고,
두번째 시간은 <약속의 믿음 과 희망의 믿음>
오늘은 그 세번째 시간으로 <작은 믿음 과 큰 믿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14장 22절에 \\"물위로 걷는 예수님\\"의 얘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새벽4시쯤 바다에 풍랑이 일어 \\"제자들이 곤경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산에 올라가 기도하시다가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 산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그 때 시간이 너무 이른지라 배가 없어서 예수님은 물위를 걸어 오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있는 베드로가 \\"유령이다\\"(마14:26)라고 소리지르면서 놀랍니다
그때 예수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마14:27)고 대답하고,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걸어오라\\"(마14:28)고 하십시오.
이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자신을 얻어, 잠시 물위를 걸었으나,
곧 바로 다시 물 속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아 주시며,
\\"믿음이 적은자여, 왜 의심을 하였느냐?\\"(마14:31)라고 말씀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셨습니다.
이 때에 베드로는 절하고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마14:33)\\"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작은 믿음>을 나타낸 말입니다.
여기를 자세히 보면, 베드로도 한때는 물위를 잠시 걸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 의심이 생기다 보니, 다시 물 속에 빠졌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물에 빠지는 것이예요.
우리의 실체는 물위를 걸으면 빠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는 두가지 <힘>이 생깁니다.
첫째는, 영생하는것( = 예수와 늘 함께 하는것) >이고,
둘째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도록 해 줍니다.
신앙은 이렇게 불가능을 가능하도록 해주는 힘(POWER)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런 힘(POWER)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렇게 능력이 잠시 있다가도, 또다시 현실로 돌아오는것이 인생입니다.
믿음이 잠시 생기다가도 현실로 돌아와 또다시 옛날과 같은 상태가 되는것이 인생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큰 믿음>은 무엇입니까?
<큰 믿음>은 위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큰 믿음>은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백부장은 재판관입니다.
즉, 로마 군사를 지휘하는 군사 지도자입니다.
이런 백부장이 자기 부하의 병을 낫게하기 위하여 예수님에게 간청하려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예수님은 \\"병자를 잘 고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습니다.
그 소문의 내용은 예수님이 병자에게 손을 대고 \\"나으라\\"고 말씀하시면,
\\"그 병이 깨끗이 낫는다\\"는 소식입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 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 진지라\\"(마8:3)
이런 소식을 백부장도 이미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면 \\"자기 부하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럼 백부장은 왜 예수님을 찾았을까요?
첫째, 자기 부하의 중풍병을 고쳐주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둘째, \\"예수님은 확실히 부하의 병을 고쳐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거예요.
바로 이렇게 \\"믿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믿음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믿기 시작한 것\\"이 <믿음의 싹>입니다.
성도여러분?
\\"내가 하나님을 믿으면, 병도 고쳐지겠구나\\"라는 믿음이 먼저 생겨야 합니다.
백부장은 군대의 지휘관(장교)이지만, 자기 부하의 병때문에 안달을 합니다.
이것은 자기의 병도 아니고, 자기 부하의 병때문에 예수님에게 간청을 하려고 합니다.
이런 백부장의 얘기는 누가복음 7장 6절에도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기 집까지 오시는것이 너무나 황송하여, 다른 사람을 미리 보내서
\\"주님, 저는 주님을 저희 집에까지 오시게 할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나으라>는 말씀만, 한마디 해 주시면, 제 부하가 나을 것입니다.\\"
\\"저도 지휘관이므로 제 부하에게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이일을 하라하면 합니다.\\"
이 말을 예수님이 들으시고, 따라온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다\\"(눅 7:9)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장교가 보낸 그 사람이 집에 돌아가보니, 부하의 병은 이미 나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큰 믿음>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작음 믿음>을 가진 베드로는 자신이 믿음이 있는 줄 알고,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라\\"고 했을때, 그는 한순간 물위를 걸을 수있었으나,
그러다가 한 순간에 의심하다보니 또다시 물에 빠졌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얼핏보면 화려하지만, 뚜껑을 자세히 열어놓고 보면 우리의 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입니다.
우리의 <큰 믿음>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큰 믿음>은 큰 일을 하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큰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할 때 생깁니다.
우리는 \\"믿음이 크다\\"고 얘기 할때,
그 사람의 믿음이 좋거나 큰일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착각을 합니다.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 만리장성을 쌓았다던지, 히말라야를 정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또 교회가 크다 던지(?) 사회사업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열정이 크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사람은 \\"야망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크다\\"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믿음>을 이런 외형적인 것이거나,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야망과 믿음은 다릅니다.
열정과 믿음은 다릅니다.
마태복음 8장 5절에 나오는 <백부장의 믿음>은 큰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기 부하의 병을 예수님에게 간청하여 고쳐준 일입니다.
아무 가치도 없는 부하의 병을 예수님에게 매달리면
\\"그 분이 고쳐 줄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진것 뿐입니다.
이런 확실한 믿음이 <큰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두 번씩 사람을 보내서, 순수하고 진솔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대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두 번째로, <큰 믿음>은 어려운 때에 생깁니다.
우리가 실패했을 때, 우리가 병에 들었을 때, 나의 희망이 완전히 좌절되었을 때,
내가 부도가 나서 도망 다닐 때, 그런 막다른 골목에서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큰 믿음>입니다
이런 어려운 때가 되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매달리면, 그것이 <큰 믿음>입니다
그래서 <진짜 믿음>은 이런 시련을 겪을 때에 나타납니다.
자기 자신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받아 드리고, 우리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매달릴 때에 그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이렇게 가난함속에서도, 이런 어려운 질병가운데에서도, 순결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큰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왜 하나님이 \\"순교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는가?\\"에 의심을 가집니다.
순교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짠!\\" 하고 나타나서 순교자를 구하면, <더 위대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줄거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순교자를 그대로 죽게 하십니다.
그것은 순교자의 몸은 죽었지만, 그 순교자의 영혼은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비록 몸은 죽게 되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키면서 죽어가는 순교자의 정신을 더 값있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간 요셉을 보십시오!
아랍 왕 앞에서 대적하는 엘리야를 보십시오!
다 외로운 고독자입니다.
다 그들을 지탱하는 <큰 믿음>을 가진 사람들 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때에 물론 내면적인 갈등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믿음>은 어떤 업적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신뢰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왜 나에게 \\"이런 환경을 주었느냐?\\"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여러분도 믿을 수 있으십니까?
그러면, 여러분들도 <큰 믿음>을 가지신 분들입니다.
폐허속에서도 다시 살아 나는것이 <믿음>입니다.
절망속에서도 다시 살아나는것이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습니다.
그는 위대하신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은 <큰 믿음>을 가진 소유자입니다.
세 번째로, <큰 믿음>은 \\"끝까지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하실지라도.....\\"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보여도 .....\\" 주님을 신뢰하면서 믿고 따르십시오.
<작은 믿음>을 가진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고도 물에 빠졌고,
<큰 믿음>을 가진 백부장은 예수를 만나보지도 못하고 그를 신뢰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였지만,
백부장은 예수님이 집에 오시는것이 너무나 황송하여, (예수님을 만나보지 않았어도....)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있었어요.
이것은 백부장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경외감, <순도높은 믿음>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말한 \\"사나(?) 죽으나(?) 언제나 똑 같다\\"는 말과 같은 내용입니다.
실제로 이 사실을 믿으면, \\"능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을 하면서 한참을 지나고 나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째서 내가 이렇게 변했지?\\"
\\"내 생각이 어느날 갑자기 바꼇어!\\"
\\"내 가치관의 관점이 180도 달라 졌어!\\" 라고 완전히 바뀐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아무리 변하려고해도 잘 바뀌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바꿔놓은 것>입니다.
나도 변하고....., 너도 변하고....., 우리도 변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문제는 \\"예수님을 얼마나 신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긍정적인 마음>,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면 달라 집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기고 바다를 가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을 보면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지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되돌아 보십시오!
혹시 내 믿음이 바닥나시지는 않으셨습니까?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믿음>은 언제 생깁니까?
첫째, 하나님을 신뢰할 때에 생깁니다.
둘째, 내가 어려움이 처했을 때에 생깁니다
셋째,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입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끝까지 예수님을 신뢰하십시오!
마지막으로 믿음은 성령을 부어 줄 때에 생깁니다.
<믿음>은 내가 갖는게 아니에요.
믿음은 내가 가지고 싶을 때 <네게 생기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부어질 때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령으로 오는 믿음을 <내가 그냥 갖게 되는것>입니다.
이런 순결한 믿음이 여러분에게도 있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시리즈4 <믿음대로 될지어다> 마태복음 9:27~31, 말씀:하용조 목사님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내용을 다시 복습하겠습니다.
<작은 믿음>의 소유자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지냈던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이고,
<큰 믿음>의 소유자는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을 하였느냐?”(마14:31)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백부장에게는 “이스라엘사람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눅7: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 오신다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까요?
그 해답은 지난주일 설교에서
첫째, 믿음의 진정한 가치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생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평가기준은 믿음의 크기가 얼마나 큰가(?)를 보시지 않고,
그 사람이 \\"예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가?\\"를 보신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로, 믿음은 \\"어려움을 당한 때에 생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을 끝까지 바라보아야 믿음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믿음이 외적인 것이 아니고, 양적인 것이 아니고,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믿음은 내적인 것이고, 질적인 것이고, 영적인 것> 입니다.
오늘은 그 네 번째 시간으로, 믿음은 선포해야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은 자기가 믿고, 자기가 선포해야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바로 그때에 그의 부하가 나았다.\\"(마8:13)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이 너무도 좋아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부하를 만나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이 믿음을 축복하며 선포해 주시니까,
그 부하가 그 믿음대로 <병이 낫다>는 얘기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성경의 창세기 1장 3절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1:3)
그때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하고 말씀하시자 \\"빛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대로 될지어다”하니까, 병이 나았습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의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이 이렇게 응답하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인 마태복음 9장 27~3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 집을 떠나실 때 두 소경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큰소리로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9:27)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내가 이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느냐?”라고 물으니까
“예 주님! 우리가 믿습니다”(마9:28)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9:29)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소경들은 \\"눈을 떴다\\"는 <두 소경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사실을 한 가지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눈을 뜨게 해 달라”는 소경들에게 병을 고쳐주는 능력만 사용한 게 아니라,
소경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어 보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내가 병을 고쳐 줄 것을 믿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병을 고쳐주고 싶으면 그냥 고쳐 주면 되지, 왜 그렇게 질문을 했을까요?
그것은 첫째로, 예수님이 병을 고쳐 줄 때는 <고침 받는자의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건들이 다 이런 공통된 공식을 보입니다.
병이든 사람에게 예수님은 병을 그냥 고쳐주지 않고, 반드시 믿음을 점검하십니다.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도 <도와주는 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살고 싶다>는 의지를 갖도록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일>입니다.
그것은 병든 사람에게 먼저 \\"자기가 살고 싶다\\"는 <의지와 결단>이 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단순히 떡하나 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떡을 먹을 수 있는 능력>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이때에 소경은 예수님에게 “주여! 내 병을 고쳐 주실 줄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환자에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어보시면서 환자가 원하는 것을 먼저 분명히 말을 해야 예수님도 행동을 하십니다.
그래야 그 다음에 예수님도 <능력을 보여 주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기적에는 “인간의 의지와 결단이 먼저 요구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의지와 결단이 먼저 정해졌을 때, 그 사람에게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주여! 내가 당신을 믿습니다”라는 자기 자신의 의지와 결단이 먼저 필요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믿음 선포>의 요점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성을 지날 때에 소경 바디매오의 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디매오도 자기의 시력을 확실히 치료해 주실 것을 믿고,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체면불구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뭘 해주길 원하느냐?”라고 물으니, 소경은 “내가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이때에도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믿음의 선포를 하니까, 그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그러니까 첫째로, 본인자신의 결단과 의지가 필요하고,
둘째로, 예수님에게 강하게 <믿음으로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구원받기 위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물을 먹을 때에도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가 물을 먹을 때 물을 먹는 것이지, 그릇을 먹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과정 중에서 <믿음>이 존재하는 것이지,
<믿음>이 기적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다만 <믿음>이 능력을 만들어 줍니다.
<믿음>의 형태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믿음>이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교회에 와서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내면에 예수님만 계시다면, 그는 <믿음있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내가 그걸 믿고, 본인이 그걸 강력히 원해야 그것이 힘(Power)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구원의 수단이지, 도구가 아닙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은혜이지만, 믿음은 우리의 결단과 의지와 행동을 요구합니다.
<믿음>은 미국의 청년 언더우드로 하여금 정든 자기나라인 미국 땅을 버리고, 미국에서의 자기의 삶을 버리고, 미지의
세계인 한국의 땅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그곳으로 떠나 가는(GO) 것입니다.
그렇게 떠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원리입니다.
<믿음>은 본인이 먼저 판단하여 결단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 고귀한 <믿음>을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다>고 느끼시는 분들은 <내가 하나님을 믿겠습니다>라고 본인이 먼저 스스로 선포해야 합니다.
이럴 때 마귀가 당신을 붙잡으며 각종 유혹과 꼬임을 시작하는데 거기에 빠져들면 안 됩니다.
그런 유혹을 떨쳐버리고 결단하는 의지를 보여야, 선포할 수 있습니다.
선포해야 자신이 변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선포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부립니다.
이럴 때 실수를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의 부족한 것을 두려워 하지 마세요.
우리들은 어쨌든 부족한 인간이므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어떤 때는 “나는 믿어야 해!” 하다가도 후회할 것을 염려하여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때에도 과감히 “나는 하나님 편에 서겠습니다”라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90%의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시고, 희망적인 1%의 <믿음> 편에 서세요.
그래야 예수님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얘기해 줍니다.
그런 1%의 가능성을 말로 선포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믿도록 하십니다.
4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이와 같이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7:48~50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누가복음 18:4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누가복음 8:48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5:28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해 주십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행하신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손을 대기도하고, 말만 하시며 “말씀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을 하시지만,
반드시 말만 하지 않고 “그 믿음대로 될 것이다”라고 선포해 주셨습니다.
<알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믿음은 아니고,
<선포하는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믿음시리즈5 <믿음의 실상과 증거>히브리서11:1~6, 말씀:하용조 목사님
어떤 분이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도 \\"응답이 없어서 고민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에게 방향을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더 열심히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이 왔는데, 그 대답은 \\"네 마음 속에 있다\\" 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고, \\"네 마음( = 너의 마음)속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 믿음 대로 하라>가 아니고, <네 믿음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축복도 <내 믿음 대로>가 아니고, 상대편의 믿음을 확인하면서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고 반드시 되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내가 네 병을 고쳐줄 수 있다고 믿느냐?”라고 확인하신 후에,
“네 믿음 대로 될지어다”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내 믿음>이 아니고 ,<네 믿음>입니다.
둘째로,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찌라도 \\"긍정적인 생각과 희망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능력을 베푸실 때에 자신의 능력만 쓰지 않고, 상대편의 능력(= 네 능력)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 그저 아무렇게나 병을 고쳐 주지 않으시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
즉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어 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병을 고쳐 주실 때에 <예수님의 생각>과 <병든자의 요구하는 믿음>,
즉 <병든자의 생각>도 중요시 여겼습니다.
우리가 생활을 하면서 강력본드를 사면, 그 포장속에 두가지가 함께 들어 있어요.
그 이유는 A와B 를 각각 따로 사용하면, 아무런 힘(효과)도 없어요.
그러나 그것을 동시에 사용해야 강력한 본드역활을 하는 거예요.
또 다른 예로, 시멘트는 모래와 자갈이 함께 물과 섞여야 단단한 콩크리트가 됩니다.
시멘트 따로, 물따로 분리되어 있으면, 아무런 힘도 나타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병자를 치료하는데 적용하면,
예수님의 능력에다 병을 고치려고 하는 사람의 <믿음>을 푸러스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인 믿음을 강요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네 믿음 = 병고치는 자의 믿음>이 있을 때에 가능하다\\"는것입니다.
그럼 오늘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장 1절을 보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첫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믿음>은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앞으로 이루어질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고, 미완성된 것을 얘기합니다.
<믿음>은 이미 자신이 소유한 것이 아니고, 앞으로 소유 할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미래에 대해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는 아직 아무도 가 본 사람이 없어요.
<믿음>의 땅은 아직 한사람도 그곳에 가보지 못한 처녀지입니다.
<믿음>의 땅은 미래에 내가 가 보아야 할 곳입니다.
그럼 <믿음>은 무엇입니까?
한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에 카메라에 필름을 넣고 찍게 됩니다.
그러면 사물은 찍은대로 영상이 맺혀서 나옵니다.
<믿음>은 바로 이와같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그 물체에 빛이 닿으면, <그대로 나타나 실상이 맺히듯이>그대로 찍힙니다.
그런데 만약에 필림없이 찍었다면, 아무런 상이 맺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소용없는 것을 한 것이지요.
<믿음>은 필림 과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은 실상입니다.
또 다른 쉬운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부동산을 사고 팔 때에 계약서를 씁니다.
그리고 나서 땅문서( = 등기권리증)를 받습니다.
이 땅문서 하나만 있으면, 그 땅은 내 땅이 됩니다.
아무리 힘이 쎈 사람이라도 자기가 산 땅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땅문서 하나만 손에 쥐면, 그 땅 전체를 내가 산것과 같은 이치지요.
이것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곧 <증거>입니다.
이렇게 쉽게 설명을 해도 이해가 안가십니까?
그러면 또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지요.
은행에 가면 현금을 수표로 바꿀수 있어요.
현금 1억이든 상자를 힘들게 움직이면서 들고 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수표 1장만 들고 다니면, 바로 현금 1억을 들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돈=수표1장]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즉, 1억원 짜리 수표 1장이 곧 현금 1억 이란 생각을 하지요.
두 번째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계란을 쳐다 보면서 “병아리의 울음소리를 들을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느끼지 못했어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보지않고 믿는 것이 더 복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천국을 보신분이 있으세요?
여기 계신 누구도 천국을 보신 분은 없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왜? 믿을 수 있나요?
그것은 보지는 않했지만, 여러 가지를 보아 느낄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바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이기 때문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지혜로운 과학자들은 망원경과 현미경을 만듭니다.
이것을 만들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육안으로 볼 수 있도록 하지요.
천체 망원경을 이용해서 육안으로 보지 못하는 별들을 보고 있고요.
또 아주 가까운 초미립자의 현미경을 개발하여 미생물을 보면서 연구를 하지요.
그래서 <믿음 >이란 안 보이는것을 보고, 보지 못하는 미래를 예측하는 거예요.
이렇게 <믿음>은 보이지 않는것을 보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는 것과 같이,
<믿음>은 가질수 없는 것들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일반 사람하고 달라요.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요.
다시말해서 <믿음이 있는사람>들은 약간 “미쳤다”고 얘기 하기도 하고, 좀 황당한 사람 같이 행동 하기도 해요.
그래서 순교도 할수 있는 거예요 .
세 번째로, <믿음>은 선조들에 의해 계승 됩니다.
히브리서 11장 2절을 보십시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2)
<믿음>은 조상들에 의해 검증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삭을 통해서 전해지며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다니엘은 불속에 들어가도 그 믿음을 지켰고,
요셉은 감옥에서도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황당한 사건들이 아니고, 현실로 그런 일들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 사실들을 선조들을 통하여 계승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교회에 와서 젊잖하게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와 있는 것이 그냥 이렇게 오게 된것이 아니예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고, 박해를 받으면서 선조들이 <믿음의 피>를 뿌렸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여기에 오게된 것이예요.
토마스 선교사가 평양 땅을 밟았기 때문에 이땅에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그런 <순교자의 정신>이 있었기에 한국교회가 이렇게 발전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 ”(히11:3)
<믿음>으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으며,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 졌다\\"는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주의 기원을 얘기할 때에 첫째는 진화론이고, 둘째는 창조론입니다.
대부부의 사람들, 특히 무신론자들은 진화론을 얘기합니다 .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창조론을 믿습니다.
이것은 과학적인 사실과는 달라요.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부하니까 당연히 진화론을 얘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창조론을 믿지 않으니까 아주 혼란에 빠져 있어요.
진화론은 인간의 <이성>에 맞는 코드이고,
창조론은 <믿음>의 코드입니다.
나를 낳으신 부모님을 보십시오.
나는 어디에서 태어난 것입니까?
부모로 부터 태어난 창조물입니다.
나는 박혁거세와 같이 알에서 태어 나지는 않았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여기에 컵(Cup)이란 물체가 하나 있습니다.
이 <컵>도 왜 여기에 있습니까?
그냥 여기에 오래 전에서 부터 진화하여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 젔으니까, 이 <컵>은 창조된 물건 이지요.
바로 이 <컵>이 어떤 목적에 의해서 필요하니까, <컵>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졌고,
그래서 이 <컵>을 누군가가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냥 <컵>으로 진화되어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지요.
이것을 부정하면 혼란에 빠져요.
인간은 짐승같은 존재가 아니예요.
원숭이가 진화하여 사람이 된것이 절대로 아니예요.
우리 인간은 <나를 낳아준 부모님>이라는 존재를 이미 알고 있으니까
나를 만드신 분은 <나의 부모님이다>라고 확실히 인정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두분의 사이에서 “내가 태어났다”는 창조된 사실을 인정해야 해요.
하나님은 <믿음>의 코드이지, <이성>의 코드가 아니예요.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이것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고, <믿음>의 얘기입니다.
그럴 때에 똑똑한 아이는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태어 났어요?”라고 질문을 하지요.
그 대답은 하나님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까 ....\\"하나님은 이미 존재한 거예요\\"
하나님은 기원 이전부터 존재하였으니까, 그 사실을 이정해야 해요.
이미 그를 가지고 “그 이상이니...., 그 이하이니.....\\" 주장하는 것은 논쟁거리가 아니예요.
그 이유로는 하나님은 이성과 과학을 초월한 분이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내가 하나님을 인정할 때,
내 존재의 의미가 확실해 지고,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매사에 중심이 없으면 방황하게 되고, 원리가 없으면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천지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한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이것은 이성으로 판단하여 아는게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 드리십시오!
<믿음>은 천지창조를 믿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창세기1장 1절은 <믿음>의 시작이지요.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을 믿으면, 성경 전체를 다 믿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 가면서 이성으로 살아야 하지만,
이성을 넘어서서 <믿음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믿음>의 세계는 상식을 초월합니다.
이런 <믿음>의 세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미래가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길을 흔들림 없이 계속 가는 거예요.
성경는 여러분들이 그 길을 묵묵히 갈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 하십시오!
그리고 그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믿음시리즈6 <믿음의 영웅들> 히브리서 11:32~40, 말씀: 하용조 목사님
우리들이 사용하는 단어와 하나님이 사용하는 언어는 어떻게 틀릴까요?
먼저 하나님이 사용하는 언어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것은 <은혜>라던가 <긍휼>, <정의>, <거룩>과 같은 단어일 것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엄밀히 따져서 인간이 쓰는 단어가 아니고, 하나님만이 쓰는 단어입니다.
또한 <긍휼>이라는 말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만이 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정의>라든가 <거룩>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인간에게 사용되는 단어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것은 <믿음>, <의지>, <용기>, <결단>과 같은 단어들입니다.
이런 단어는 내가 결심하면 할 수 있는 단어들입니다.
인간이 소유한 단어중에서 가장 축복 받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는 것과 또한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볼 때에 그 사람이 잘 생기고 잘나서 기뻐하지 않고, 그 사람의 믿음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얘기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도마에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더 복 되다”고 말씀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이 있는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너희의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리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빌립보서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4:13)
이런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보더라도·인간에게 하는 말 중에서 <믿음>은 가장 축복된 말입니다.
그럼 <믿음>은 어떻게 가질 수 있습니까?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한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믿음의 영웅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그 이전의 영웅>들과
<그 이후의 영웅>들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전에 나오는 3명의 영웅은
첫째,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를 드린 <아벨>과
둘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에녹>,
셋째, 물의 심판에서 살아난 <노아>입니다.
여기에서 이 세 사람의 믿음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아벨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믿음으로 드린 제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믿음>이란 행위가 아니고, 마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마음의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가?”를 보십니다.
<참된 믿음>은 그 존재가 아니고 태도입니다.
가인은 화려한 제사를 드렸지만 가식적이고 인간이 좋아하는 방법을 동원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는 그 형식과 태도가 프로그램 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나를 내세우면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벨은 진정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내적인 것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판단기준은 외형적인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아니고, 내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의 태도>입니다.
두 번째로, <에녹>입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었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시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 갔기 때문에 아직도 그를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 가신 것입니다.
그는 옮겨가기 전부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에녹의 믿음은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직행했습니다.
에녹은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한마디로 “그이의 삶 자체가 하나님이 보기에 기뻤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삶을 보십시오.
우리의 삶은 죽였다가 데려 가십니다.
그런데 에녹의 삶은 죽음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뭘 해도 예쁜 사람이 있지요.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미운 짓을 해도 예쁜 사람이 있고, 이쁜 짓을 해도 미운사람이 있어요.
에녹은 <하나님 마음의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은 <세상의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지요.
6절을 보세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11:6)
에녹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리고 에녹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에녹은 삶과 죽음이 구분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의 삶은 죽음도 천국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세 번째 인물은 노아입니다.
노아의 믿음은 물의 심판에서 살아난 분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히11:7)
노아의 믿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 보지 않고도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 드렸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경고가 주어지면 받아 드리십시오.
둘째,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노아는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셋째, 노아는 방주를 지으며 심판에 대해 준비했습니다.
“방주를 짓는다”는 생각은 합리성과 이성을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바닷가에 방주를 지으라면 그런대로 이해가 가지만, 산꼭대기에다 “방주를 짓는다”는 것은 이성에 어긋난 일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랐습니다.
넷째, 노아는 자기만 구원받은 게 아니라, 자기의 가족도 구원했습니다.
다섯째, 노아는 세상을 정리하고 의의 투사가 되었습니다.
이상은 아브라함 이전의 사람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아브라함 이후의 영웅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아브라함 자신이 있고, 그의 아내 사라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의 아들 이삭이 있고, 또 야곱과 요셉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아브라함 자신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11:8)
아브라함은 “약속하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야할 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약속받은 낮선 땅에서 이삭과 야곱이 나그네처럼 지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도 너무나 늙어서 아기를 낳을 수 없었으나 믿음으로 임신하게 되었고,
그런 믿음 때문에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수많은 후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했으나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고 있는 고향이 따로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았을 때, 믿음으로 이삭을 바쳤습니다.
그는 “많은 후손을 보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삭을 다시 받은 셈입니다.
또 이삭은 야곱과 에서의 장래에 대해 축복해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이들은 믿음을 따라 살았고,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이 말은 <삶의 원칙이 믿음>이란 말입니다.
둘째, 약속을 받았지만 약속을 성취하지는 못했습니다.
믿음있는 사람의 특징은 약속을 손에 쥐지 못했지만, \\"약속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셋째, 구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은 외국인처럼 나그네와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넷째, 그들이 꿈꾸는 것은 더 나은 본향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들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과거로 회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나은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고, 그곳으로 나아 갑니다.
역시 그들은 <희망>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내 몸이 죽어가고 있어도, 또 다른 <희망의 세계>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특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 이삭을 의심 없이 바친 사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장 아끼고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아낌없이 <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 <믿음>의 클라이막스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포기하는것>입니다.
이걸 주면 <나의 모든 걸 다 주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을 내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이런 것과 같이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는 절박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히11:17)
이것이 아브라함 믿음의 요체입니다.
<믿음>은 자기가 갖고있는것 중에서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삭의 믿음>은 아브라함의 이런 약속과 축복을 믿고 계승한 것입니다.
그 밖에 모세,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다른 여러 사람을 얘기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고, 옳은 일을 하였으며, 약속된 것을 받았고, 불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조롱을 받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였으며,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어찌 이사람들 뿐이겠습니까?
신약을 보면 또 나옵니다.
초대교회를 보면 순교한 성도가 많이 있어요.
우리나라 한국에도 120년 전에 이 나라에 예수를 전하다가 순교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 선교사님들의 시신이 서울의 근교인 양화진에 묻혀 있어요.
오늘의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 고난을 겪었습니다.
고난을 받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적으로 복도 많이 받지만, 고난도 많이 받습니다.
둘째,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약속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고 했어요.
작년에 <팔레스타인 대행진>을 할 때에도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충고해 주었어요.
“그런 위험지역에는 가지를 말라”고 만나는 사람마다 말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 냈습니다.
셋째, 믿음의 사람들은 새 세상을 바라 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더 나은 본향을 바라 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옛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믿음시리즈7 <믿음의 완성이신 예수님>히브리서 12장 1~3, 말씀:하용조 목사님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나요?
은혜는 하나님의 단어이지만, <믿음>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을 보면 \\"믿음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니\\"(히11:6)
인간은 제 아무리 잘 나고 \\"똑똑하다\\"고 해도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키가 크든 작든, 부자든 가난하든, 잘 나든 못나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기뻐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믿음>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내게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외면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한 것 입니다.
<믿음>은 내가 결정하여 믿기 시작하므로 \\"나부터 시작된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 입니다.
참으로 이런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신비스럽습니다.
내가 모든것을 다 알고 깨달아서 믿는것 같지만, 사실로 따지고 보면
<그런 사실을 믿는다>는게 오히려 신비스럽습니다.
<믿음>은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은혜이고, 축복 입니다.
성도 여러분. 당신은 하나님을 믿으세요?
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세요?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으세요?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천국을 어떻게 믿으세요?
그러나 우리는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기독교인은 \\"천국이 있다\\"는 사실 믿어요.
인간의 해석으로 믿는 믿음을 <자연적인 믿음>이라고 한다면,
<성령의 믿음>은 하나님으로 부터 은혜로 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이성적인 믿음이 아니라, 성령이 시켜서 믿게 되는 믿음을 말하지요.
<성령의 믿음>을 원하는 사람은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를 하지요.
그러면 그 사람의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려서 어느날 갑자기 무언가 보이고, 믿어지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그동안 부정하는 것들이 믿어지게 되고, 안 믿어지던 사실이 믿어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얘기만하면, 성질을 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한테서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얘기만 하면, 포근한 아버님의 품을 느끼고 눈물이 저절로 나오고, 가슴 벅찬 감동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 <믿음의 완성>은 무엇일까요? <믿음>의 크라이막스는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음>의 결론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믿음>의 뿌리도 예수님이고, <믿음>의 완성도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자기 자신이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완성자이신 예수님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다가 왔을 때에 사람들은 그 고난을 이기면 모든 사람들에게 다 복이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험한 \\"고난을 이겼다\\"고 해도 모든 사람에게 다 복이 오지 않고,
그리스도안에서 고난을 이기는 자에게만 복이 옵니다.
<믿음>은 신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이 진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믿음의 완성자>는 누구입니까?
그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3절을 보십시요.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 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 12:1)
여기에서 <믿음>은 \\"운동경기와 같다\\"고 했어요.
<믿음>은 믿는 어떤 행위를 말합니다.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십시요.
그들은 최소한의 공기저항을 없애려고 모든것을 다 벗어 버리고, 가볍게 런링과 팬티만 걸치고달립니다.
인생은 <경주하는 사람과 같다>고 했어요.
그것도 단거리 선수가 아니고, 장거리 마라톤 선수와 같습니다.
운동선수는 달리기를 할 때에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도 길거리에서 모여서 응원하는 환호성과 박수소리에 힘을 냅니다.
이와같이 <믿음의 사람>들도 구름같이 둘러 싼 허다한 증인들이 많이 있으니까
모든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참으며 나가야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우리 믿음을 완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 봅시다.
그 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위하여 부끄러움과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으며, 지금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여기서는 믿음의 목표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믿음>의 경주자는 한가지만 생각해야 합니다.
그 한가지는 예수그리스도, 그 분을 <바라보는 것> 입니다.
그 분을 바라보되, 그냥 물끄럼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그냥 힐끔힐끔 쳐다 보는것이 아니고,
그 분을 고정해서 <집중적으로 응시하는 것> 입니다.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우리의 마음을 한가운데로 모아서 예수님에게 내 생각과 내 모든 관념을 집중해야 합니다.
로마서 11장 17절을 보십시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믿음은 듣는데서 생깁니다.
또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들어야 생깁니다.
씨를 뿌려야 열매를 맺지요.
결혼도 하지 않고, 아기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두번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완전하게 해 주십니다.
<믿음>은 그 자체가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우리를 온전케 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 <믿음>의 창시자인 예수님을 바로 알고 그를 바라 보아야 하고,
혹시 \\"내가 좀 부족하다\\"고 해도 그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우리는 완전해 집니다.
세번째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기쁘게 지신 분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뜻은 \\"고난을 참았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십자가는 이해가 좀 되지만, <고난>은 싫어합니다.
십자가의 또 다른 의미는 \\"체면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우리 생활에서도 체면 때문에 많이 고민을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런 체면을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도 이런 체면 문화를 없애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체면을 먼저 버리고 십자가를 택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2장 3절을 보십시요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 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은 참으신자를 생각하라\\" (히 12\\"3)
여러분은 죄인들의 이런 증오를 몸소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낙심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3가지를 부탁합시다.
첫째, 무거운 짐을 버리십시오.
운동하는 사람은 모든 장신구를 벗어 버리고 운동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에도 군더더기를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보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운동 경기에 참가 할 때에는 보석을 빼 버리고 운동에 참가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옷도 다 벗어 버리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벗어 던지는 것처럼 우리의 <죄>도 벗어 버려야 합니다.
둘째로, 얽매이기 싫은 것을 버리십시오.
우리가 운동을 할 때에는 운동에만 집중하여야 합니다.
운동을 할 때에는 공부하는 일도, 사업하는 일도, 사랑하는 것도 다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운동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이와같이 <믿음>의 경주도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딱 한가지 <예수그리스도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승리의 관건은 <오래 버티는 것> 입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쉽게 절망합니다.
한가지 예로 정상을 향해 산에 오를 때에 끊임없이 전진을 하지만 깔딱고개가 있어요.
그곳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좌절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3가지 유형이 나타납니다.
첫째의 유형은 대부분 포기를 합니다.
두번째 유형은 목표를 수정합니다.
세번째 유형은 편법을 써서 법을 위반 하면서도 갑니다.
우리들은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하는데
그 비법은 예수님이 참으신 것과 같이 <인내>하여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들의 믿음생활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와 같이 함께 사는 삶> 입니다.
그 첫번째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고,
두번째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는 삶> 입니다.
히브리서 4장 2절을 보십시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히 4:2)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기쁜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말씀이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했던 것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이 플러스 되어야 능력이 나타나는 것> 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으며 <믿음으로 받아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은 거지요.
이제 <믿음>에 관하여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훌륭해 지는 것이 믿음의 완성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언제나 함께 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을 경험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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