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汝河(5)輓詞
전오륜 (6)
天開東井耀奎精。하늘이 동정에 열려 규성이 빛나더니
孕出三韓蓋世英。삼한에 세상 덮을 영웅이 태어났네
學業文章江海闊。학업과 문장은 강해처럼 넓었으며
危言直筆日星明。직언과 직필은 해와 별처럼 밝았다네
遜荒時旣遺賢輔。재상감을 쓰지 않아 이미 초야에 숨었으니
樂道心何慕宦榮。안빈낙도하는 맘 어찌 벼슬 영화 좋아하리
纔見大來還不壽。큰 인물 겨우 났으나 오래 살지 못하였으니
如公誰復在朝廷。누군들 공 같은 사람 다시 조정에 있으리요
玉佩瓊裾大放辭。훌륭한 모습으로 훌륭한 문장 쏟아내고
陽春不許俗士知。봄날같은 德政 편 것을 속된 선비는 몰랐다네
北天身遠孤忠炳。북쪽⑴에선 몸 멀어도 외로운 충절 빛나고
南紀名高擧世師。남쪽⑵에선 이름 높아 온 세상의 스승이었네
正議纔聞龍御日。바른 논의 겨우 들린 것은 임금 즉위하는 날이요⑶
恩銜旋下鳳藏時。은혜로운 직함 내려온 것은 세상 떠날 무렵이었네⑷
斯文已喪嗟何說。사문을 잃은 슬픔을 무슨 말로 표현하리
更爲邦家却一噫。다시금 나라 걱정에 탄식만 나온다네
출처 : 목재집
⑴ 북쪽 : 홍여하가 안동출신이므로 북쪽인 서울에서 벼슬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⑵ 남쪽 : 홍여하가 안동출신이므로 안동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인다.
⑶ 바른․․․․․․날이요 : 숙종이 8월에 즉위하여 홍여하를 兵曹正郞, 司諫에 제수한 것으로 보인다.
⑷ 세상․․․․․․무렵이었네 : 숙종이 8월에 즉위하여 홍여하를 兵曹正郞, 司諫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해 12월에 죽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5) 홍여하[ 洪汝河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사간(司諫)을 지냈으며 주자학에 밝았다.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호 목재(木齋), 산택재(山澤齋)
본관은 부계(缶溪)이며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 또는 산택재(山澤齋)라고도 한다. 대사간을 지낸 호(鎬)의 아들이다.
1654년(효종5)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에서 진사(進士) 2등(二等) 18위로 급제하였다.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었으며 대교(待敎), 봉교(奉敎) 등을 거쳐 사간원 정언에 올랐다. 정언으로 있을 때 효종에게 시사(時事)를 논하는 소를 올려 왕의 가납은 받았으나 반대파의 배척으로 좌천되어 사퇴하였다.
1658년 다시 경성판관에 임명되었으나 왕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이후원(李厚源)을 논박한 구절로 인해 황간(黃澗)에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74년(숙종원년) 제2차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자 다시 병조좌랑에 복직되었으며 후에 사간(司諫)을 지냈다. 주자학에 밝아 당시 사림(士林)들이 존경하였다.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689년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목재집 (木齋集)》을 남겼으며 편서로 《주역구결(周易口訣)》, 《의례고증 (儀禮考證)》, 《사서발범구결 (四書發凡口訣)》 등이 전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홍여하 [洪汝河] (두산백과)
(6)전오륜[ 全五倫 ]
정의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효자.
개설
본관은 용궁(龍宮). 호는 어주(漁洲). 할아버지는 이성(以性)이며, 아버지는 상구(尙耉)이다.
내용
1660년(현종 1)에 진사가 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를 봉양함에 힘을 다하고 뜻을 순하게 하여 어머니의 나이가 100세에 이르고 자신의 나이 70여 세이나 조석에 맛있는 음식을 손수 간검하였으며, 어머니가 죽자 추우나 더우나 매일 성묘를 하여 80여 세가 넘어서도 한결같았다.
이러한 사실이 경상도 어사 이병상(李秉常)에 의하여 조정에 알려지자 나이 84세에 특별히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또, 효행을 아름답게 여긴 현감 이지석(李志奭)은 주나라의 효자 노래자(老萊子)의 이름을 따서 내무당(萊舞堂)이라는 세 글자를 현판에 써서 그의 집에 붙이고 시와 서기(序記)를 지었다. 뒤에 효행으로 대사헌에 증직되었다.
저술로는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내외교수편(內外交修篇)』·『사무사설(思無邪說)』·『사단칠정(四端七情)』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오륜 [全五倫]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