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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橋) 상징의 심리학적 의미]
확충은 끝도 없이 이어질 수 있고, 상징은 결코 그 의미를 다 드러낼 수 없으면, 상징을 통해 알게 된 가슴을 치는 한 두 개의 의미는 상징의 의미인가? 아닌가? 확충이나 연상으로 드러난 그 수 많은 다른 의미들은 그 상징의 참된 의미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흔히 아는 ‘맹인 코끼리 만지기’처럼 아는 것이 언제나 부분이면, 과연 안다는 것은 무엇을 아는 것일까? 맹인들은 코끼리의 실체를 모르고 각기 경험한 만큼만 안다. 맹인이 제각각 경험한 코끼리를, 벽이니, 기둥이니, 뱀이니....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 다음을 확대한 이야기가 있다. 서로 싸우는 맹인들을 가엾게 여긴 신이, 그들 모두의 눈을 뜨게 해 준 것이다. 결과는, 모두 한결같이, “거 봐 내 말이 맞지”였다. 눈을 뜨고도 여전히, 아니 더 확고히, 자기가 경험한 몸통만, 다리만, 코만...보고는 같은 주장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눈이 있으나 없으나, 어차피 보이는 것만, 혹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전부를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상징적 또는 확충적 접근방식은 처음에는 원시적 언어로 되돌아가 번역된 것처럼 보인다.”는 융의 말처럼 가장 단순한 언어로 드러나는 다리의 심리학적 의미를 몇 가지 갈래로 드러내 본다.
1) 떨어져 혼자 서기
다리는 먼저 땅을 딛고 위로 올라선다. 물의 다리도, 물 속에서부터 땅을 기반으로 물 밖으로 솟아 올라, 물과 떨어져 공중에 우뚝 선다. 물이나 땅에서 분리되어 자신을 밖으로 드러내는 존재다. 심리학적으로는 물이라는 무의식에서 분화되어 성장한 의식의 발현이다. 따라서 초기 인류가 빠른 물살과 거대한 탁류에 공포심에서, 그리고 발을 잡아끌고 다리를 무너뜨리는 힘에서 악마를 보는 마음은 정당하다. 다른 한편 조상 대대로 농지를 적시며 도도히 흐르는 강물에 외경심을 가지고 다리를 놓는 것이 불손하다고 느끼는 마음 또한 자연스럽다.
다리에 귀신이 살고 도깨비가 나온다는 것도, 무의식에 침범당한 의식의 변화상이라 할 수 있다. 비슷한 예로, 융은 강을 건너려다 물 속 게에 발을 물려 건너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 깨나는 환자의 꿈을 소개하며, 개인적 무의식이 분석되며 집단적 무의식의 내용이 출현하는 경계에 도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미분화된 의식은 술에 취해 도깨비에 홀리듯 명징하지 않다가, 하루 만에 다리를 만드는 도깨비를 만나듯, 고태적 집단적 무의식에서 이전에 없던 새로운 의식이 솟아난다. 의식이 발달함에 따라 다리를 만드는 주체가 모호한 도깨비 상에서 보다 의식에 가까운 인격상, 장사, 장군으로 바뀐다. 의식 분화 발달에 발맞춰 현실 세계의 다리도 점점 길어지고 거대해진 모습으로 발현된다.
한편 농다리 민담에서 보듯, 다리를 만드는 사람이 오누이 중에 누이라는 것이 눈에 띈다. 물의 무의식적이고 여성적인 측면이 다리를 만드는 사람으로 여성을 배열하고, 활을 소거나 서울에 다녀오는 외향적이고 남성적인 일에 남성상을 배열한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물에서 떨어져 세워진 다리는, 무의식에서 분화되어 표면화된 의식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2) 건너고 둘을 잇기
다리는 강이나 계곡으로 끊어진 두 곳을 잇는다. 이것는 지리적인 공간, 마을을 잇기도 하면서, 심리적으로는 두 마음을 연결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기도 하고, 나아가 산 영과 죽은 혼도 연결한다. 따라서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도 연결하므로, 무엇보다 신과의 만남도 말하자면 무지개 다리를 통해 일어난다.
이것의 심리학적 의미는, 둘이 하나되는 것으로, 둘로 대립된 대극 쌍의 통합을 말한다. 이웃 마을이나 나라는 흔히 낯설고 적대적이다. 의식에서 배제된 그림자 영역이다. 또한 내 안의 열등한 요소를 알아 성장시키면, 즉 미성숙한 도깨비와 친해지면 보물을 얻는다. 연애다리에서 오작교에서 남녀가 헤어지고 만나는 것은, 사람들 자신 안에 있는 영혼, 마음의 짝을 인식하고 투사를 거두는 것이다. 아니마-아니무스의 합일이다. 또한 죽음이라는 삶과 분리된 죽은 조상이 사는 곳을 광목천 굿다리를 따라 건넌다. 조상들의 정신이 축적된 집단무의식과의 만남이다. 무의식의 깊은 미지의 영역에 대한 두려움과 선망은 지옥과 천국으로 표명되어, 심판의 다리를 건너 만나게 된다. 미래의 불안은 현재의 삶의 태도를 좌우하는 심리적 기제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건너서 양 쪽을 이어주는 다리는 심리적으로 모르던 저 편, 무의식, 영혼의 통합으로 인식의 지평이 확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3) 중앙에 홀로 드러나기
다리는 중력을 거슬러 하늘과 땅의 중앙에 서 있다. 무지개다리(홍예교)는 좌우를 대칭으로 쌓아올리다 키스톤을 정확히 중앙에 위치시킨다. 줄로 매달은 현수교는 중력을 거스러 하늘 중앙에 떠 있다. 자연의 섭리와 본능적 충동에 저항하여 무지개를 쫓아 자신을 멀리 밀고나가고, 높이 드러내는 것이, 한편으로 인간 의식, 자아의 발달로 필요한 일이다. 하늘높이 떠 있는 무지개와 현수교에 가슴이 뛰는 것은, 상징이 가진 힘, “무의식적인 참여를 강요하고 생명을 주고 생명을 향상시키는 효과”때문이다. 인간 심층에 깊숙이 자리잡은 진리의 계시에 따르는 것이다. 다른 한편, 무지개와 현수교의 과도한 상승은 이카루스의 추락이라는 비극을 초래한다. 융은 말한다. “무지개는 다리로 사용된다. 인간은 넘으면 죽는다. 오직 신만이 넘을 수 있다.... 절정에 도달하자면 먼저 땅에 내려와야 한다....영적 직관을 가진 사람은 흔히 무지개다리를 타고 지구 위로 올라서는데, 현실을 벗어나면 안된다. 유한한 인간은 땅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 인간은 성찰적인 사고를 가지고 무지개다리 밑을 지난다.” 물과 너무 멀리 떨어진 성장은, 무의식과 교류없는 자아 팽창을 불러 강신가 신성의 노여움을 산다. 자아의 편향을 제사 지내 희생시켜 성숙된 성찰에 이를 때, 의식은 무의식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지상의 삶을 산다.
다리는 언제나 무의식과 너무 멀리 떨어지는 일 없이, 좌우의 연결이면서, 위 아래의 어느 한쪽으로 벗어나지 않는 의식과 무의식의 물리적, 정신적 중용을 촉구한다.
4) 무너지고 세워지며 하나되기
다리는 끊임 없이 무너진다. 물에서 떨어진 다리는 다시 물로 떨어진다. 물에 저항해 우뚝 선 기둥이, 물에 쓸려 떠내려간다. 중력에 저항해 위로 솟구치고는 다시 중력에 굴복해 무너진다. 무너지고 다시 세우는 다리 역사는 인류 문명 발달사와 궤를 같이한다.
다리가 무너지지 않자면, 다리를 이루는 요소 하나하나가 제 자리를 지켜야 한다. 징검다리의 돌은, 아치교의 돌은.... 처음 자신이 놓인 자리를 고수해야 한다. 처음 자리를 벗어나 서 앞의 자리로 이동하면 안 된다. 저 편에 닿는 영광의 자리는 다른 돌의 자리다. 물 속에 자리 잡은 돌은 아무도 몰라줄지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켜야한다. 그곳이 그에게 다리 전체의 바른 자리다. 한 자리를 지키는 것은 힘든 것을, 어둠을 감내하는 희생이다. 희생이 있어 바른 자리가 된다.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그 곳은 그른 자리가 되고 다리 전체가 붕괴한다. 하나는 전체다.
바른 자리의 희생에 따른 죽음(붕괴)은 변환을 일으켜 새로운 다리로 재탄생한다. “상징은 정신적인 에너지 (Libido)를 저급한 상태에서 고급한 형태로 변환시킨다.” 이와 달리 그른 자리에서 일어난 붕괴는 변환 없이 똑같은 스러짐을 반복한다는 것에서 비극이다. 이제 희생을 위해 교각에 아이를 묻고, 기초석에 피를 바를 필요는 없다. 바른 자리의 희생과 변환을 외부에 투사하지 않고, 자신 내면의 심리적 재탄생으로 전체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이 심리학적 자기(Self)에 이르는 자기 실현의 길이다. 무너져도 된다. 끊어져도 된다. 거기에서 고통을 감내한 희생의 변환을 할 수 있으면 전체 자기(Self)에 이른다. 징검다리는 무너지고 스러지며 더 튼튼한 농다리로....현수교로 모습을 바꿔 부활했다.
다리는 무너지고 끊어지며 언제나 새롭게 갱신한다. 다리는 심리적으로 고통의 희생과 변환 속에서 자기를 향한 여정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자기실현을 상징한다.
결론적으로 다리는 자기(Self)의 상징이라 말할 수 있다. 다리는 무의식에서 의식의 분화이면서, 대립되어 갈등을 빚는 그림자, 아니마-아니무스의 통합이며, 새로운 의식화의 삶으로 우뚝섰다가, 다시 더 큰 무의식, 집단적 무의식과의 접촉으로 하강한 죽음에서 다시 살아있는 상징의 숨겨진 의미를 체현하여 ‘자기(Self)’와 순간적으로 접촉하는 개개 사건을 상징한다. 에너지를 받은 정신은 삶에서 현수교로 무엇으로 모습을 실현한다. 이렇게 다리 상징은 무의식의 내용을 전하는 상징의 원래 역할을 자기 실현의 과제 별로, 영역별로 보다 쉽게 탐색하게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 다리는 ‘왕중왕’의 표현처럼, ‘상징 중의 상징’이라 말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제, “크고 둥근 다리”는 현수교나 무지개다리처럼 하늘 높이 오르면서도 끝이 하늘로만 향하지 않는다. 아치교처럼 뿌리를 땅에 두고도 정중앙의 키스톤은 중력을 정확히 중앙에서 안정시킨다. “만약 황금을 가지고 있는 것을 깨달으면, 중력의 중심은 내 안에 있다.” 상징의 의미를 체현한다는 것은, 내면의 황금을, 중력의 중심인 자기(Self)를 물리적 세계에 실현시키는 것을 포함할 것이다. 융이 상징을 “외적인 진실은 아니지만, 심리적으로 진실한, 인류의 가장 위대한 업적을 향한 다리”라 말할 때 이 다리는 물리적 현실에 우뚝 선 다리를 비유했을 것이다. 즉 다리 상징은 내면의 다리만이 아닌 물리적 다리 또한 명백히 포함한다. 다리가 무너지고 만들며 우뚝 선 다리, 전체 자기를 향한 끊임없는 변환은 내면의 일이면서, 외부 현실의 일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상징의 사회적 잠재력은 가능한 가장 높은 형태로 표현될 효력이 있”는 것이다.
이제 다리를 안팎으로 살아내는 상징적 삶에서, 또 다시 꿈이나 민담이나 신화나 적극적 명상에서 “다리”가 보이는 경우, 이렇게 물을 가치가 있다.
내 삶과 정신에서 무엇이 확장되었는가?
자기 실현의 여정에서 어떤 영역이 드러났는가?
그림자, 열등 기능, 아니마-아니무스의 어떤 투사들이 있는가?
변환에 따른 고통, 희생에서 배운 새로운 지혜, 태도는 무엇인가?
자기(Self)와 접촉된 누미노제는, 중력의 중심을 확립하여 무엇으로 살아냈는가?
그것은 내 삶의 복된 향유와 인류의 진화에 바른 연관을 가지는가?
다리 상징은 그것이 무슨 다리로 표현되든지 언제나 자기(Self)의 부분적 모습을 담고 있으면서, 그것이 곧 전체 자기(Self)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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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다리 상징의 분석심리학적 조명"의 일부분이며, 따옴표로 인용한 부분은 모두 융의 말이며, 출처는 원문에 밝혀져 있습니다.
첫댓글 잘 읽고 제것으로 갖고 갑니다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