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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말 하다가 여기 까지 나갔어? 어떤 분.. 그렇게 좋았다니까. 심지어 누가 선악 질을 해도, 넘어 갔다니까. 내가 넘어가리라! 내가 좋겠어? 안 좋겠어? 이게 목사의 사명이고 소망이고 즐거움이지, 이것 때문에, 이 맛보려고 목회 했지. 그런데 딱 일주 전에, 오전 예배 끝날 때 까지도 전혀 이상이 없었어. 오전 예배 끝나고 한 순간 딱 보이면서 뭐가 갔어. 이미 그때도 이미 하나님이 자기도 모르는데 자기가 말하고 있더래. “하나님 나 지금 드러내주시는 거죠?” 자기가 하면서도 자기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 속에, 내 모습 이대로, 나가면 얼마나 좋겠어? 하나님이 정신을 못 차리니까. 자기도 헛소리하면서 “하나님 나 드러내시는 것 맞죠?” 그러면서 자기는 지옥으로 들어가더라니까. 야~ 어떻게 아냐. 누구도 있지 왜 없겠습니까? 있지만 조금씩, 나는 할 수 없어, 할 수 없는 나를 그것도 내려 놓게 하시면서 맞아도 소용없다니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럴수록 정말로 은혜만 필요한 자로, 그 과정이 정말로 시달리는 거예요. 무너짐이에요. 고통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벌써 성령이 나를 이끌어 가세요. 자기 입으로 “나 드러내시는 거죠?” 그런데 자신은 어디로 들어가? 그러더니 월화수목금, 속힘의 과정을 만드는 만큼은, 금요일, 토요일, 벌써 툭툭 만들어 내는 거죠. 어디에서? 선악 속에서, 그럼 뭐 만 밝아져요? 선악의 눈만 밝아지는 거예요. 그 선악의 밝아짐 속에 선악질 하는 모습도 어쩔 수 없어. 하나님은 살아 계세요? 뭘 살아 있어. 그때 만큼은 돌아 가셨어. “하나님이 하세요!” 뭘 해! 우리는 무시해요. 주일 날 딱 한 주 만에 전화를 받는데 그냥 말도 못하면서 울면서 난리 났어! 그게 뭐냐? 그거지 뭐, “나는 그런 일, 내가 먼저 사람들에게 한적 없는데 왜 나한테”, 내가 뭐라고 했게? 너무 안 들어 주고 첫 번부터 확 죽이면 안 되잖아. 들어 줄건 다 들어 줘야지. 죽겠다는데 어떻게 안들어 주면 되겠어? 다 들어줄 것 들어주다가, 계속 들어주면 자기 편 인줄 알고 착각 할 것 아니야. 여러분, 저를 여러분 편 만들지 마세요. 여러분의 의를 인정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왜 목사를 그런 사람 만들려고, 아니요. 목사도 그런데 하물며 성도와 성도가, 여러분이 시험 들면 누구한테 전화해요? 제일 가까운 사람, 제일 가까운 사람, 나하고 잘 통할 수 있는 사람, 왜 전화해요? 그럼 막 얘기 하면서 자기 의를 알아 달라고, 내 상처 속에 반대 기준, 내 의 맞다고 인정받고 싶은 거야. 내 편 만들고 싶은 거야. 그런짓 하지마! 우리 그 짓해서 교회를 개판 만들어 놨잖아. 교회만큼 선악질 심한곳 없어요. 판단과 정죄가 심한데가 없어요. 사람들이 무서워요. 그 말하니까 생각 나네.
내가 그 분에게 그랬어요. “아니, 어떻게 그렇게 자신 할 수 있습니까? 저는 다 보고 있지 않습니까. 또 성도 분들이 똑같이 나한테 얘기 한것 처럼 듣지 않습니까. 다만 목사니까 비밀을 보장해 주는것 뿐이지, 그것도 맞고 틀림 속에 너 왜 그 사람에게 그래. 이렇게 안하는것 뿐이지”,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자신의 문제를 누구만 모른다? 알기는 잘 알지. 그런데 실제 속에서는 나만 잘 알아. 그런 만큼 나만 잘났어. 그런 만큼 자기가 맞다고하는게 당연한 것이고, 전부 다 저 놈의 새끼야, 저게 왜 나한테? 그럴 수밖에 없는 것도 알죠. 하나님이 안하세요? 하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뭘 해. 하나님을 개무시하는데, 저 혼자 잘났어. 상처, 그런 만큼 반대 기준 속에 뭔가 인정받고 싶어. 그래서 교회 안에 당이 만들어진 거예요. 끼리 끼리, 개판 만들었다니까. 교회 공동체. 우리도 그 동안 조금씩 구원의 은혜를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지는 믿음과 삶은 떨어진게 아니라 살아져가는 것이다. 우리도 없는게 아니라. 있는데 갈수록, 나는 여러분 한 분씩 보면서 많은 대화 안하거든요. 그런데 나타나 보여져요. 아이고 목사님한테 다 들키겠네. 그런거 아니에요. 들키면 어떻고 안 들키면 어떻습니까. 또 내가 본다고 다 맞는 겁니까? 그래서 나는 절대화 시키지 않아요. 착각 할 수도 있고, 야! 너무 한 분 한 분 들이 갈수록 너무나 귀한 거야. 우상 세계가 아니잖아요. 당 짓는 세계가 아니잖아요. 있지만 있는 만큼 과정 속에 드러남은 있어요. 어쨌든 그것 속에서 구원을 이루어주시는 만큼, 지금까지 우리가 그것 때문에 은혜 받아온 것 아닙니까. 내가 그 분 한테, “다 자신의 문제를 자신만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말씀 하신 그 모습이 뭡니까? 그래요. 그 사람이 선악질 할 수 있고, 그 사람 입장에서 얘기 들어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일도 있을수 있어요.” 중요한 것은 내가 모든 것들 속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구원하려고 해요? 나를 구원하려고해요. 알기는 잘안다. 그건 은혜를 받았을 때 실제 적용되어지지 그 은혜가 나타나기 전에는 저만 잘 났어. 그런 만큼 하나님을 개 무시하면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일 만 상관없이 선악 질을 그 사람에게 대해서, 오해든 아니든, 왜 그 놈이! 그러니 목사가 이런 비밀 없으면, 나도 간에 붙었다 쓸개 붙었다 하지. 간에 붙고 쓸개 붙었다 나도 나중에 거기에 휘말려서 개판 되어 버려요. 할 수 있으면 목사들이 성도와의 관계에 담을 치는 거예요. 성도와 세계에 담을 치는 것이 유익하구나. 저는 너무 허점을 잘 드러내 주시죠. 내 모습 이대로. 맞아요. 그래서 내가 개 무시도 당했고,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목사의 권위를 이렇게 세우지 않을 것을. 오히려 더 귀하게 여겨야 하는데 막대하는 일들을 경험했거든요. 아니, 저도 그런 과정 속에서 이게 뭔지 모르고 끌려가니까. 솔직히 나도 육신 세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그렇게 살수 밖에 없어, 완전 복음이면 얼마나 자유 하겠냐고, 얼마나 쉽고 가볍겠냐고 그런데 이렇게 안 돼. 한쪽에 이 답답함이 있어. 진짜 한계, 이걸 가지고 가려니 이렇게 살수도 없고 죽겠더라고, 여러분도 그랬죠? 그런데 지나면서 보니까 몰라도 하나님이 하신 만큼 구원이었다는 사실이 구원이었다는 사실이, 조금씩 그렇게 깨달아온것 아닌가요? 지금은 그래요. 그것도 그 사람에게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그것이 나와 관계 된 것들 속에 이건 기본도 안 된. 기본이라도 그렇게 하지 않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본도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도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사. 안 믿어지고 싶은데 믿어지니까, 그러니까 뿌리치지 못하는 거야. 육신이 전부면 다 토해 버리고 끝장내고 싶은데 이것도 있어 있는데도 할 수 없어. 왜? 믿음대로 살아지는 것도 있으니까. 나는 이 사이에 끼어 있어. 진짜 끌려왔어요. 지금은 감사하죠. 아~ 복음은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그럼에도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길 가고 싶은 거죠. 아 그래서 우리의 길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 안에 구원의 길은 다른 것이구나. 그래서 그 분이 찾아오셔서 그 문을 열어두시고 또 그 길로 우리를 계속 원수의 된 우리의 길속에서, 너무 발달되어있잖아. 조금씩 구원을 이루어주시는,
제가 지난주일 성탄절 주일에 범태 목사님에게 전화를 했어요. 생각이 좀 나서, 참 우리 예문 교회 성도님들 여기 계시지만, 범태 목사님 만난게 참 불행이에요? 둘 다 다 있어요. 그런데 참 물론 지금까지 저도 누구도 다 자기 수준 속에서 은혜 받아가잖아요. 그런 만큼 삶의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나눠야 하는 게 아니라. 나눠져가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만큼, 그런데 참 보니까. 내가 전화를 마음속에 생각나게 하신 것이 성령께서 하신 거구나. 나누는 중에 스피커로 해서 은미 사모랑 같이 얘기하고 있는데 목사님 우리 범태 목사님이 눈물 펑펑 쏟고 있어요. 그 전 주인지, 아침에 들어가 보니까 아침에 울고 있더래. 왜 울어? 한심한 자신의 모습이 보이니까. 여러 가지 것들이 다 있겠죠. 그런 만큼 육신 속에서 예문 교회 성도들이 나를 만나서 불행하구나. 나 때문에 제대로 은혜 못 받고 그런 눌림이 있을 거야. 그래서 은미 사모한테, 다 내려놓고 싶은 마음, 사람이 괜히 잘 났다하면 까주고 싶은데 정말로 바닥과 같은 한계 속에 실제를 경험하면 측은한 마음과 긍휼한 마음이 들잖아. 나는 그런 모습을 가만히 보면서 우리 범태 목사님 잘 알잖아요. 이걸 너무 잘 하잖아. 재미도 있고, 사람들이 좋아 하잖아. 그리스도 안에서 저렇게 믿음으로 살아지는 삶의 그런 것들로 됐으면 되는데 우리는 나로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것들을 만들어 오면서 선악 속에 내 개인의 카리스마거든요. 범태 목사님에게 내게 없는 것이 있어요. 총회와 노회에서 벌써 다 친구 만들었어. 나는 존재감도 없어요. 얼마나 좋은 거냐고, 좋은 건데, 사실은 나로 살아가는 세계에 이미 만들어온 만큼 무기가 묶임이에요. 그런 만큼 이걸 못 내려놔요. 그래서 여러분 자꾸만 내려놓으려고 하지 말고 내려 놓을 수 없는 이미 선악에 눈이 밝아 너희가 하나님처럼 살아온 만큼의 묶고 묶여 있는 나타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왜 내려 놓을 수 없는지 여러분의 깊은 죄성이 보여지길 축복합니다. 아니 목사님 그게 내 자존감인데, 자존심이고, 그게 내 실력인데 그거 없이 어떻게 살라고요. 내가 그러죠. 그걸 무시하는 게 아니라고, 내가 없애라고 했어요? 무너트리라고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무너트리세요. 몰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조금씩 실상인 믿음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해 가다 보면 신기해, 있는데 이전과 다른 거예요. 그래서 나타나고 보여진 것, 이걸 가지고 놀지 마시고, 이걸 보면서 이 배경입니다. 세계관이죠.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좋은 것은 이게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지는 모습으로 바껴지면 되는데 그냥 바껴지냐고, 이미 우상 세계 속에 나와 전부 다 연결되어있는데, 그러니까 능하고 뛰어난것 갖고 되는것 같은데 살아지지만 알아, 되는것 같은데 또 무너져. 이걸 무너트리시면서 이게 바로 우리 인생 속에 몰라도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어주시는, 내가 바꾸는 게 아니에요. 그리스도 안에서 조금씩 그리스도 죽음과 부활에 그 분이 내 인생 속에 구원을 행하심만큼, 이걸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서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점점 그리스도 안에 살아지는 나를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함을 배워가는 거예요.
신년집회 2강중.